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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Dec 20. 2017

신들의 도시 감라 웁살라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스웨덴  7


1. 아스가르드로 가는 길


인간과 다를 바 없는 그런 신들이 살던 곳, 아니 인간이 바로 그런 신화 속 발할라의 신처럼 살던 곳, 그곳이 감라 웁살라가 아니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건 감라 웁살라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라서였다. 북유럽 사람들이 선사시대부터 매년 계절이 바뀔 무렵인 동지와 하지가 되면 제물로 희생양을 바치는 의식을 치르는데, 스톡홀름 북쪽에 위치한 감라 웁살라가 그 의식을 치르는 장소였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곳은 북유럽 신화 속 아스가르드가 있다고 전해지는 곳이기도 했다.


아스가르드를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가지고 감라 웁살라로 향했다. 웁살라 역에서 버스를 타고 감라 웁살라로 간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요금을 내려고 동전을 내밀었더니 카드만 받는다고 한다. 2.5유로라서 현금을 낸 건데 안 받는단다. 카드결제를 할 수 없으면 내리라는 투다. 재빨리 카드를 꺼내 버스비 결재를 하고 좌석에 앉는다.


고대의 도시 감라 웁살라를 가는데 가장 최신식 전자결재 시스템을 사용해야 갈 수 있다니 문득 제5원소라는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하늘을 나는 택시, 바로 그 택시를 타고 가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스친다.

버스가 10여분을 달려와 감라 웁살라 버스정류장에 선다. 그런데 버스기사가 감라 웁살라 가는 길을 설명해 준다. 요리조리, 어쩌고라면서 한참 너스레를 떨더니 떠난다. 참 친절한 기사라는 생각에 고마운 마음이 든다. 그런데 내려서 보니 감라 웁살라 박물관이 있는 곳까지 채 1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다. 바로 눈앞에 보이는 곳에 있지 않은가. 순간 피식 웃음이 나온다.


감라 웁살라에 도착한 순간 마치 경주 왕릉 고분에 온 기분이었다. 거대한 왕의 봉분들이 늘어서 있는 게 우리네 고분들과 다르지 않다. 유럽에서 이런 고분들을 보게 되다니 조금은 낯섦과 함께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다른 곳에서는 이런 고분들을 볼 수 없기에 더욱 그런 기분이 들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스웨덴 시조왕들의 무덤이 있는 곳에서, 어쩌면 오딘의 신화 속 주인공 무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은 떨리는 마음으로 다가간다. 경주의 고분들처럼 주욱 늘어선 봉분들은 마치 신들이 만들어 놓은 놀이터 같다는 생각도 든다. 아이들 몇 이서 고분 위에서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시간의 주인들이 아주 어린아이들로 환생해 자기 무덤 위에서 놀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무덤 앞으로 다가간다.


* 감라 웁살라로 가는 길은 그리 멀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급했을 뿐이다.

* 감라 웁살라의 고분들을 만나는 순간 마치 경주에 온 듯했다.




2, 감라 웁살라의 고분들


감라 웁살라(Gamla Uppsala)는 스웨덴 웁살라 교외에 있는 작은 마을이다. "감라 웁살라"란 "옛 웁살라"라는 뜻이다. 감라 웁살라는 3-4세기부터 정치, 경제, 종교의 중심지였다. 의회의 일종인 스비아 팅그(Thing)가 소재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뿐 아니라 감라 웁살라에서는 ‘디스팅 축제’(‘Disir’라는 발키리를 기리는 축제)와 ‘디사블로트’(Dísablót)라는 인신공양 의식이 행해지기도 했다. 중세 시대에 이르러서도 감라 웁살라는 스웨덴 남부 우플란드 지방에서 가장 큰 마을이었고, 서기 1164년에는 스웨덴의 대주교좌가 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감라 웁살라는 예전에 웁살라 신전(Uppsala tempel)이 있었다고 하는 고대 북유럽 종교의 중심지였다.


11세기에 브레멘의 아담이 쓴 《함부르크 주교들의 사적》과 13세기에 스노리 스툴루손이 쓴 《헤임스크링글라》에 웁살라 신전에 대한 것이 언급되어 있다. 이 신전의 모습에 대한 여러 학설이 제기되고 고고학적 추적이 분분한 가운데 최근 많은 양의 목조 구조물들이 발굴되었다고 한다. 이는 감라 웁살라가 인신공양을 비롯한 종교적 활동의 장소였다는 것을 뒷받침하는 중요한 증거가 된다.


《함부르크 주교들의 사적》은 서기 1073년에서 76년 사이에 브레멘의 아담(Adam of Bremen)이 쓴 사료집이다. 중세 북유럽의 역사를 가늠하는 데 가장 중요한 사료 중 하나로 손꼽힌다. 또한 북유럽 사람들이 북아메리카를 발견한 사실을 언급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기도 하다. 이 사료집은 서기 788년 웁살라에 주교좌를 설치했을 때부터 작가 아담이 살던 시대(1043년~1072년)까지를 다루고 있다. 이 시기는 바이킹 시대 전체와 그 기간이 거의 일치한다.

오른쪽 사람은 샘물에 제물로 던져진 사람이다.


《함부르크 주교들의 사적》에 있는 웁살라 신전 삽화가 눈길을 끈다. 삽화 맨 오른쪽에 사람 하나가 샘에 던져져 제물로 바쳐진 것이 묘사되어 있다. 이 그림의 제목은 ‘웁살라의 영목’이다. 영목(靈木)은 11세기 하반기에 스웨덴 웁살라 신전 앞에 서 있던 나무를 가리킨다.(* 이 나무가 자작나무인지 주목나무인지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다.)


《함부르크 주교들의 사적》에서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볼 수 있다. “신전 옆에 매우 커다란 나무가 가지를 넓게 뻗치고 있는데 겨울이나 여름이나 가리지 않고 늘 푸르다. 무슨 종류의 나무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또한 거기에 샘이 하나 있어서 이교도(Pagan)들이 사람을 산채로 집어던져 인신공양을 벌였다. 제물로 바친 시체가 발견되지 않으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빌었던 소원이 이루어진 것이라고 믿었다.”


* 헤임달이 지키고 있는 아스가르드 입구, 바이킹 전사의 죽음과 길 떠난 자식의 죽음을 기리는 루네스톤들

* 감라 웁살라 박물관에 전시된 감라 웁살라 관련 연대기 자료들

* 로마 교황이 이 작은 마을까지 와서 미사를 집전한 일이 눈에 뜨인다.



우물(또는 샘) 옆에 우뚝 선 상록수라는 설명은 마치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9개의 세계를 지탱하는 나무 위그드라실을 연상시킨다. 어쩌면 기독교 개종 이전의 스웨덴 사람들은 자신들이 섬기는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세계를 그대로 모방하고 따랐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구나 인신공양까지 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섬기는 신에게 절대복종과 충성을 표시하는 것이기에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인신공양 설화는 인신공양을 통하여 신과 대화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이에 관한 설화는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어 각종 구비전승과 신화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의 성서에 있는 메소포타미아 히브리 신화에서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는 여호와(야훼)의 명에 따르는 대목이 대표적이다.


신에게 드리는 제물로 신의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언약 관계의 증표로 인간의 희생을 담보로 한 것이다. 인신공양에 관한 한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심청전이나 에밀레종 설화 등을 참고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것을 바칠수록 보상은 더욱 확실할 것이라는 믿음에서 자식을 바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3. 무덤의 주인공은 누구인가?


12세기 덴마크 연대기(Saxo Grammaticus)에는 오딘이 이곳에 살았다고 추정을 했다. 하지만 이 마을에는 스웨덴 초기 왕으로 알려진 잉그비 프레이(Ingvi Frey)와 더 관련이 있다. 잉그비 프레이에 대해 역사학자들은 간혹 그를 터키 왕이나 오딘(Odin)의 아들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그는 스웨덴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신적인 존재로 스웨덴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아이슬란드의 에다(Eddas)의 저자 스노리 스툴루손(Snorri Sturlusson)은 잉그비 프레이(Ingvi Frey)가 감라 웁살라에 살았다고 썼다. 그는 스웨덴 건국과정에서 성스런 왕권과 신성한 피에 대해 서술하면서 바로 그가 스웨덴 초창기 잉글링가(Ynglinga) 왕조를 세웠다고 했다.


* 박물관에 전시 중인 감라 웁살라에서 발굴된 바이킹 전사들이 사용하던 자료들

* 북유럽 신화의 주인공들(높이 3cm 이하의 작은 동상들이다. 좌로부터, 토르, 오딘, 프레이야)

* 이 동상들은 이곳이 아니라 아이슬란드와 덴마크 등지에서 발굴된 것들이다.



11 세기 독일의 연대기에는, 브레멘의 아담이 이교도(Pagan)들에게 웁살라의 중요성을 알렸다고 했다. 그는 웁살라에 있는 성전이 금으로 덮여 있었고 오딘과 토르의 동상과 함께 잉그비 프레이의 동상이 나란히 있다고 했다. 아담은 사람들이 이들에게 동물과 제물을 바쳤다면서 신성시했고 조상처럼 숭배했다고 했다. 또한 감라 웁살라에서 봄철 춘분 때마다 장엄한 의식이 열렸으며 이교도(Pagan)가 아닌 사람들도 참석을 했다고 했다. 이 제의식에서 사제들은 9명의 사람들과 다양한 종의 9마리 수컷 동물들을 제물로 바쳤다고 했다.


잉글링가(Ynglinga) 무용담은 잉그비 프레이(Ingvi Frey)라는 신적인 존재가 죽은 후 감라 웁살라의 무덤에 묻힌 후에도 계속 많은 곡물을 수학을 할 수 있도록 해 주었다고 전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잉그비 프레이의 영혼이 스웨덴에 머물러 있는 한 계속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잉그비 프레이가 마치 오딘과 마찬가지로 신적인 존재인 것처럼 여기며 그에게 제물과 희생양을 바치고 섬겼다는 것이다.


19세기에 들어서 스웨덴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여 패한 대가로 핀란드를 넘겨주고  엄청난 허탈감에 빠진다. 그래서 스웨덴은 지난 바이킹 시대의 선조들이 이루었던 업적들을 되돌아보기 시작한다. 지난 영광을 오늘에 되돌릴 수만 있다면 좋을 것이란 생각에서 시작한 스웨덴의 자구책은 바이킹 신화에서 해답을 찾은 듯했다.


지난 바이킹 시기에 스칸디나비아 국가들, 즉 덴마크와 노르웨이, 그리고 스웨덴은 하나의 연합국가로 공존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래서 또다시 스칸디나비아가 하나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꿈을 가지게 된다. 스웨덴은 과거로 회귀하는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또한 감라 웁살라가 지닌 지난 과거의 영광을 재현시켜야 하는 이유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래서 1856년 스웨덴 주도하에 감라 웁살라에서 스칸디나비아 3개국 학자들이 모여 학술회의를 개최한다. 바이킹 시대의 의미에서부터 오늘날 바이킹의 영향에 이르기까지 여러 분야를 다루기 시작했다. 한편, 스웨덴 정부는 본격적으로 감라 웁살라 고분들을 발굴하기 시작한다. 그 후 1874년이 되자 고분들 대부분 발굴을 마치게 된다.


아주 큰 무덤속 한가운데 아래쪽이 관이 놓인 자리이다.

* 감라 웁살라의 무덤들 조형도



이 고분들을 탐사한 결과 감라 웁살라에 있는 고분들은 스웨덴의 전설적인 시조왕인 아운(Aun)과 에길(Egil), 그리고 아딜(Adils)의 무덤인 것으로 보고된다. 그런데 실제 아운(Aun)은 에길(Egil)의 아버지이고, 에길(Egil)의 아들은 오타르(Ottar)인데 이곳에 묻히지 않았다. 그의 무덤은 이곳에서 조금 더 북쪽으로 올라간 곳에 위치한 벤델(Vendel)이라는 곳에 있다. 그러나 오타르(Ottar)의 아들인 아딜(Adils)은 반대로 이곳 감라 웁살라에 다른 선조들 곁에 나란히 묻혀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영어로 된 서사시인 베오울프(1010년에 영어로 쓴 서사시)에 그 이름들이 등장해 알 수 있다. 뿐만 아니라 노르웨이 연대기인 잉글링가탈(Ynglingatal)과 스노리 스툴루손이 쓴 잉글링가사가(Ynglingasaga)에 그 이름들이 등장한다.


스노리 스툴루손은 실제로 1219년 이 곳 감라 웁살라를 방문했다고 한다. 당시 스노리 스툴루손이 감라 웁살라를 찾아와 에스킬(Eskil)이라는 사람을 만나 신화와 사실에 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수집해 돌아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볼 때 감라 웁살라에 있는 무덤의 주인공들이 잉그비 프레이의 후손들이라는 사실이 전혀 과장된 것은 아닌 듯싶다.(* 단순히 바이킹 수장들의 무덤일 것이라는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


하지만 우리가 오늘날 이런 사실들을 확인할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 사실들은 그 선대왕들이 죽은 후 수세기가 지날 때까지 전혀 기록되지 않다가 후대에 가서야 기록된 것들이기 때문에 사실을 확인하는 노력은 별 의미가 없다는 말이다.


아무튼, 고분에서 출토된 물건들을 살펴보면 꽤나 지체 높은 왕의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서쪽 고분은 남자의 무덤으로 판명이 났지만 동쪽 고분은 여자의 것으로 보인다는 사실이다. 무덤에서 나온 뼛조각들 역시 서쪽 남자의 경우 20대에서 40대 사이의 연령층이며, 동쪽 여자 무덤의 경우에는 20대에서 30대 사이로 보인다.


과학이 발전하면 할수록 지난 역사적 사실들 또한 더욱 구체화 되어간다. 그렇기에 사실성을 확인하는 작업을 하면 할수록 어쩌면 더욱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것도 또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추상적이고 불확실한 지난 역사를 신화처럼 포장한 채 두는 것이 역사성을 높이는 일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라는 단순한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 감라 웁살라 교회, 이 곳이 스웨덴에서 첫 번째 추기경이 봉직하던 교회이다. 이 교회는 12세기에 현재 규모보다 조금 더 컸다고 한다. 그리고 원래 성당은 십자가 형태 건물로 추측된다. 그후 대주교 대성당은 화재로 타버리고 대주교를 위한 대성당은 지금의 웁살라로 알려진 외스트라 아로스(동부아로스)에 세워진다. 그리고 남아있던 성당은 감라웁살라 교회로 알려지게 된다.(* 참고 사이트: www.raa.se/gamlauppsala) 

* 성당(지금은 교회) 내부

* 교회의 종탑과, 셀시우스 가족이 안장된 교회 바닥 석판(셀시우스는 섭씨온도를 제창한 스웨덴 물리학자)

* 교회에 남아있는 루네스톤들(가운데 사진은 루네스톤을 아예 교회 벽면에 넣고 공사를 마감했다.)

진눈깨비 내리는 어느 겨울날 감라 웁살라 고분들 곁을 산책하며 1500년전 역사속으로, 아니 신화속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은 '황홀'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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