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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Dec 18. 2017

광기 가득한 도시 웁살라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스웨덴  6


1. 웁살라 가는 길


북구의 한 겨울은 언제 해가 뜨려는지 아침 8시가 넘어 도착한 스톡홀름은 여전히 어둑어둑했다. 스톡홀름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또 웁살라로 향했다. 웁살라는 스웨덴 사람들이 북유럽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전당 아스가르드가 있는 곳이라 여기는 곳이다. 그래서 스스로 북유럽 신화의 종주국임을 주장하려는 바로 그 도시, 웁살라 말이다.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에서 북서쪽으로 약 65km 떨어진 곳. 스톡홀름 중앙역에서 교외선 기차를 타면 불과 40여분 만에 도착할 수 있는 웁살라는 사실 스웨덴에서 스톡홀름 보다 오래된 ‘광기’ 서린 도시이다. 웁살라는 16세기 이전 스웨덴의 수도였으며 바이킹의 역사가 고스란히 숨 쉬고 있는 곳이다. 더구나 덴마크와의 오랜 칼마르 동맹에서 벗어나기 위해 독립투쟁을 하던 본거지 이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스웨덴의 전설적인 고대왕국 윙 링 왕조의 본거지이기도 하다. 웁살라가 스톡홀름의 역사보다 더 오래되었으니 당연히 그 광기가 사라질 리 없겠다는 생각이다.


웁살라는 또 ‘닐스의 모험’의 종착지가 아닌가. 스웨덴 작가 셀마 라게를뢰프가 1906년에 집필한 아동문학 소설이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원제는 ‘닐스 홀게르손의 신기한 스웨덴 여행’이다. 거위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여행을 하는 닐스 이야기를 쓴 셀마 라게를뢰프는 그 덕분에 여성 최초로 1909년 노벨문학상을 받는다.


허구한 날 부모 속을 썩이고, 농장의 동물들을 괴롭히던 닐스는 어느 날 우연히 발견한 톰테(북유럽 신화 속 난쟁이)를 괴롭히다 저주에 걸려 그만 자기도 난쟁이가 되고 만다. 그러다 집에서 키우던 거위 모르텐과 기러기떼를 따라 스웨덴을 일주하는 모험을 한다. 다행히 집으로 돌아오게 된 닐스는 착한 소년이 되었다고 한다.


닐스와 북유럽 신화 속 주인공들이 사는 웁살라로 가는 길은 아스가르드가 가까워 오는지 점점 차창 밖이 환해지면서 눈이 부셔오고 있었다.


* 웁살라 역(가운데 사진) 주변에는 웁살라 대학생들이 세워둔 자전거들로 대학도시임을 느끼게 한다.

* 역을 나서면 대학생들은 퓌리스 강을 건너 웁살라 성을 보면서 언덕 너머 대학으로 간다.

* '닐스의 모험'의 작가 셀마 라게를뢰프가 그려진 스웨덴 화폐, 뒷면에 거위를 타고 날아가는 닐스의 모습이 보인다. 우리나라 화폐에도 '아기공룡 둘리'나 뽀로로를 넣으면 안 될까?  




2. 광기 서린 도시의  신화


웁살라에는 북유럽에서 가장 규모가 큰 성당이 있다. 바로 웁살라 대성당이다. 13세기 후반 1260년부터 성당을 짓기 시작해 1435년 웁살라 대주교였던 야코프 울프손이 완성한 웁살라 대성당은 무려 175년이나 걸려 지은 북유럽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건축물이다. 높이 118.7미터, 스칸디나비아 반도에서 가장 높은 성당이다.


그러나 16세기 중반 구스타브 1세가 루터교를 국교로 정하면서 웁살라 성당은 개신교 교회로 변모한다. 그런데 이 성당은 1702년 화재가 발생한다. 그 후 200년이 지나서야 재건축을 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성당 내부에는 여러 무덤이 있다. 그중에서 기억할만한 무덤이 2개가 있다. 하나는, 1523년 당시 스웨덴을 덴마크 세력으로부터 몰아내고 강력한 왕국을 건설한 구스타프 1세 바사 왕 부부의 무덤이다. 바사 왕은 스웨덴 건국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사랑을 받는 인물이다. 그런데 바사 왕은 스톡홀름에 묻히고 싶어 했는데 새로운 왕도인 스톡홀름이 그가 죽을 때까지 완공되지 않아서 당시의 수도인 웁살라 대성당에 묻히게 된 것이다.(* 스톡홀름은 1634년 스웨덴 수도가 된다.)


또 다른 무덤은, ‘식물 분류법’을 만든 세계적인 식물학자 카를 린네의 무덤이다. 성당에 들어서면 왼쪽 맨 뒤편 바닥에 그의 무덤 표식이 있고, 그 왼쪽 공간에 별도의 린네를 기리는 공간을 마련해 놓았다.


아무튼 린네는 웁살라에 체계적인 식물원을 만든다. 이 식물원은 원래 1655년에 조성을 했던 곳인데 1743년부터 1778년까지 린네가 재건해 이곳에서 식물 연구를 했다고 한다. 그가 만든 식물 분류법을 토대로 만든 식물원에는 현재 1300여 종의 식물이 전시되어 있다고 한다.  이 식물원은 단지 학술적인 연구뿐 아니라 스웨덴 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휴식공간으로 사랑을 받고 있다.


* 웁살라 대성당과 성당 내부

* 웁살라 대성당 내부에 있는 구스타브 바사의 석관과, 석관 주변에 있는 대형 그림 중 하나

* 웁살라 대성당 안 바닥에 안장된 린네 표지석, 기념비가 설치된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웁살라에는 또 다른 상징이 있다. 높이 솟은 웁살라 성(Uppsala Slottet)이 바로 그것이다. 이 성은 1550년경에 구스타브 1세가 덴마크의 칩입으로부터 웁살라를 지키기 위해 지은 요새 스티르비스콥 이라는 성이다. 이 요새는 지금도 웁살라 시내를 내려다보며 도시의 안전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이 성 인근에는 도시를 지키기 위한 '왕의 대포'(구스타브 바사 1세가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몰수해 국가재정을 충당했기에 주교들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한 대포라고 한다.)가 놓여있고, 바로 곁에는 도시의 주민들에게 안전에 대한 경고를 해주기 위한 거닐라 종도 서 있다. 그런데 이 종탑은 해마다 4월 30일 밤 9시에 요란하게 울린다. 봄의 축제를 알리는 ‘발보리’가 시작될 때 이 종은 학생들이 의식에 따라 힘차게 울려댄다.


북위 60도 이북에 위치한 스웨덴이 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날이 바로 4월 30일이다. 그래서 웁살라 대학의 학생들은 거닐라 종(Gunilla Bell)을 치면서 봄 축제인 '발보리'를 알리고 축하한다. 시내는 본격적으로 광란의 축제가 전개된다. 역시나 광기 어린 축제에서 젊음을 발산하는 일은 당연한 일이다.


웁살라는 학문의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웁살라 대학은 대성당을 완성한 야코프 울프손 대주교가 설립자이다. 그는 1477년 당시 덴마크가 스웨덴과 노르웨이를 칼마르 동맹을 기반으로 지배하고 있던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독립의지를 구현하기 위한 일환으로 대학을 세웠다. 정치적으로는 비록 덴마크의 지배를 받고 있지만 문화적으로는 덴마크로부터 독립을 취하고 있다는 묵시적인 자존심의 발로였다.


그 후 1523년 바사 왕의 노력으로 독립을 이루고 나자 웁살라 대학은 재정난을 겪으며 잠시 폐교 위기에 놓이게 된다. 그러나 구스타브 2세 아돌프 왕이 자신이 가지고 있던 토지를 비롯한 재물들을 헌납함으로써 대학은 살아나게 된다. 구스타브 왕의 선택은 스웨덴이 필요로 하는 인재양성이라는 원대한 목적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 구스타브 2세의 바람 때문인지 그 후 스웨덴은 지금까지 무려 11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다. 바로 이 웁살라 대학에서 말이다.


* 구스타브 바사가 설치한 '왕의 대포들'과 구스타브 바사 왕의 석상, 그리고 거닐라 종탑(거닐라 종은 1588년 요한 3세 왕(King Johan III)의 부인 거닐라 여왕(Queen Gunilla)이 웁살라 교회에 기증한 것이다. 그러나 화재가 난 후 종은 지금의 장소로 옮겼고 지금은 웁살라의 봄을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다.

* 웁살라를 수호하기 위해 건축한 웁살라 성  

* 린네 공원과 린네 박물관 건물, 유럽에서도 가장 잘 정돈된 공원이고 표본수도 가장 많다고 한다.



그런데 웁살라 대학에는 유명한 일화가 하나 있다. 다름 아닌 미셀 푸코와 관련된 ‘광기의 기억’이다. 웁살라 대학에는 카롤리나 레디비바(Carolina Rediviva)라는 이름을 가진 중앙도서관이 있다. 바로 이 곳에서 1950년대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정신병리학자인 미셀 푸코가 그의 가장 위대한 저서로 알려진 ‘광기의 역사’를 썼다.


그 후 푸코는 스웨덴 국립 웁살라대학에 박사학위를 신청한다. 논문을 심사한 교수들은 "논문이라기보다는 현란한 문학에 가깝다"는 이유로 학위 수여를 거부한다. 푸코는 "정신분석은 상상력의 맥락을 알아야 한다"라고 강변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좌절한 푸코는 다시 프랑스 소르본 대학에 논문을 제출했고 우여곡절 끝에 통과된다. 이 논문이 바로 `광기의 역사`이다.


푸코는 정상과 비정상의 관계, 더 나아가 주류사회가 `광인`이라고 규정한 세계에 가한 폭력을 분석한다. 그리고 이성 중심 사회가 만들어낸 `차별과 배제의 논리`를 설명한다. 왜 이성은 비이성을 질병으로 치부했는지, 비이성으로 분류된 것들을 어떻게 감금하고 억압했는지를 파헤친 것이다.


"아름다움은 추함을, 부는 빈곤을, 영광은 치욕을, 앎은 무지를 은폐 한다. “ 바로 이 말은 푸코가 말하고 싶은 모든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문구일 것 같다. 아무튼 상대를 제압하는 모든 상태는 그대로 권력처럼 자리하고, 권력은 자신들과 다른 것들을 비정상으로 치부하고 억압한다. 언제나 그렇듯 모든 권력은 그 자체가 이미 폭압이다. 가슴이 뜨거워짐을 느낀다. 어쩌면 그건 한국 사회가 이미 지나치다 싶게 폭력적인 사회가 되어 있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푸코는 어느 인터뷰에서 “웁살라의 카롤리나가 없었다면 내가 ‘광기의 역사’를 쓸 수 없었을 것”이라고 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건 아마 이 곳에 보관 중인 방대한 양의 고대에서 중세까지의 인문학과 정신병리학에 대한 자료를 지칭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웁살라대학에서 느끼는 단순하지만 중요한 진리는 바로, 지적인 산물은 지적인 자료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광기를 용납할 수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라는 사실이다. 오늘도 단순한 진리를 다시금 느끼며 웁살라 대학을 나선다.


* 웁살라 대학교 건물과 대학 안내도(안내도 한복판에 대학설립 연도 '1477년'을 기리는 건물이 있다.)

* 오른쪽 건물이 푸코가 이용하던 도서관 건물인 '카롤리나 레디비바'

* 아래는 카롤리나 레디비바에서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무소음 어플 사용해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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