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수 Dec 15. 2017

위대한 제국의 시대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스웨덴  5


1. 구스타브 2세와 크리스티나 여왕


17세기에 들어와 ‘북구의 사자’로 불린 구스타브 2세(Adolf Gustav II, 1594~1632)가 등극하자 스웨덴은 전성기를 맞는다. 그는 러시아와 폴란드를 차례로 격파하고 심지어 독일 30년 전쟁에 참전해 승승장구한다. 이 전쟁의 결과로 스웨덴은 독일 북부에서 많은 땅을 획득한다.


스웨덴을 북유럽 최강국으로 발전시키는 업적을 세운 구스타프 2세는 독일 브란덴부르크의 마리아 공주와 결혼을 한다. 그런데 구스타브와 마리아는 잦은 유산과 자녀들이 일찍 죽는 바람에 대를 잇는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던 중 크리스티나(1626-1689) 공주가 태어난다. 구스타브 2세는 더 이상 아들을 기다리지 않고 크리스티나에게 왕위를 계승할 것을 공표한다.


얼마 후 구스타브 2세가 30년 전쟁 중인 1632년 뤼첸에서 전사를 한다. 이때 크리스티나의 나이는 고작 6살, 어린 크리스티나는 1644년 나이 18살이 되던 해에 섭정에서 벗어나 왕위에 오른다. 당시 스웨덴은 계속되는 전쟁에서 계속 승리를 거두었으나 크리스티나는 오랜 전쟁으로 스웨덴 국민들이 감내해야 할 재정적 부담을 염려해 30년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1648년 드디어 베스트팔렌 조약을 통해 독일로부터 넓은 땅과 거액의 배상금을 얻어내고 전쟁을 종식시킨다.


한편, 크리스티나는 스웨덴 궁정을 멋진 문화와 예술의 산실로 만들기 위해 데카르트를 불러 배움을 청한다. 그러나 추운 날씨와 무리한 일정 탓으로 데카르트는 몇 년 못가 건강을 잃고 만다. 그 후 크리스티나는 1654년 고종 사촌 구스타브 10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물러난다. 그녀는 이때 국교인 루터교에서 구교인 가톨릭으로 개종을 하고 스웨덴을 떠난다. 그 후 그녀는 유럽 여러 나라를 떠돌다 로마에 체류 중이던 1689년 63세를 일기로 세상을 등진다. 그녀의 시신은 로마 성 베드로 성당에 안치된다.


1) 국립오페라극장 앞에 있는 구스타브 2세 동상, 2) 독일 뤼첸 전투 시작 전 기도하는 구스타브 2세(국립박물관 소장), 3) 구스타브 2세 초상화(국립박물관 소장)

1) 구스타브 2세 초상화(국립박물관 소장), 2) 뤼첸전투에서 죽음을 맞는 구스타브 2세(국립박물관 소장), 3) 스톡홀름 시내에 있는 라다르홀맨 교회에 안치된 구스타브 2세 무덤(가운데)



한편, 크리스티나가 왕위에서 물러난 후 덴마크와 스웨덴은 치열한 패권다툼을 벌인다. 그런데 덴마크 해군에게 스웨덴 해군이 참패를 당하자 스웨덴군은 코펜하겐이 있는 질란드(Zealand) 섬으로 반격을 시도한다. 이때 혹독한 추위가 밀려와 덴마크 해협이 꽁꽁 얼어붙자 스웨덴군은 바다 위로 진격할 수 있게 된다. 덴마크는 스웨덴의 기습공격으로 대패를 당한다.


덴마크는 전쟁에서 패한 대가로 엄청난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그때까지 덴마크가 지배하던 스웨덴 땅과 노르웨이 남쪽 영토까지 내주고 만다. 강추위로 인한 기습공격이 결국 오늘날과 같은 작은 덴마크를 만들어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폴란드와 러시아가 동맹을 체결하고 1700년 스웨덴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수십 년간 계속된 전쟁은 결국 스웨덴의 패배로 막을 내린다. 1721년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 뉘 스타드 조약을 체결하고 스웨덴은 17세기에 획득한 해안 지방의 대부분을 러시아에게 양도한다. 그 후 스웨덴은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기 위해 러시아와 전쟁을 하지만 러시아가 최종 승리함으로써 스웨덴은 1809년 핀란드를 러시아에게 넘겨주게 된다. 이때부터 핀란드는 러시아의 속국이 된다.


한편, 1814년 덴마크는 스웨덴과 킬(Kiel) 조약을 맺고 노르웨이를 스웨덴에 넘겨준다. 그 후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모스 조약을 체결하고 노르웨이는 스웨덴 지배하에 들어간다. 그러나 노르웨이와 스웨덴 두 나라의 연합은 1905년 노르웨이가 독립을 선언하면서 끝이 난다.


1) 크리스티나 여왕과 데카르트가 토론하는 모습, 2) 크리스티나 여왕 초상화, 3) 크리스티나 여왕 그림 

* 크리스티나 여왕이 자란 드로트닝홀름 궁과 궁전에 걸린 크리스티나 공주시절 초상화


2. 바사 박물관(Vasa Museum)


1961년에 17세기 유물이 가득한 바사호가 옛 모습 그대로 인양된다. 바사호는 원형의 95% 이상이 보존되어 있고, 수백 개의 조각상으로 장식해 역사적 가치가 높다. 바사호가 발견될 당시 14,000개 이상의 나무 조각품이 발견된다. 그중에는 700개의 조각상이 포함되어 있다. 17세기의 군함은 전쟁 도구였을 뿐만 아니라 바다에 떠있는 궁전이기도 했기 때문에 왕의 권위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배를 화려하게 꾸미려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 배에는 145명의 선원(해군)과 300명의 군인(육군)이 타고 있었다.


바사(Vasa)호는 1626년 당시 스웨덴 국왕인 구스타브 아돌프 2세의 명령으로 건조된다. 2년이나 걸려 진수한 바사호는 꼭대기에서 바닥 용골까지 높이가 52m에 달하고, 뱃머리에서 선미까지 길이가 69m, 무게는 1200톤, 10개의 돛이 달린 3개의 돛대를 가지고 있다.


1628년 8월 10일 드디어 바사호가 스톡홀름 항구를 출항한다. 왕조의 이름을 따 배의 이름도 바사(Vasa)라고 했다. 당시 구스타브 2세 왕은 모두 4척의 배를 건조하는데 바사호는 그중 한 척으로 가장 규모가 큰 군함이었다. 배가 항구를 빠져나가는 순간 갑자기 돌풍이 일기 시작했고 바사호는 옆으로 넘어가고 만다. 그 후 바사호는 333년이 지나서야 빛을 보게 된다.


바사호는 모두 64개의 포를 장착하고 있었다. 당시 스웨덴이 보유한 20척의 군함들은 바사호만큼 육중한 포를 장착하지 않았다. 배가 쉽게 기울어버린 것은 2층으로 된 함포 선실이 상층부에 위치해 있어 무게중심이 위쪽에 쏠리는 바람에 쉽게 넘어가버린 꼴이 된 것이다.


바사호는 오랫동안 스웨덴의 숙적이었던 폴란드를 향해 출항할 예정이었다. 당시 폴란드 국왕은 스웨덴 국왕의 사촌인 지그문트 왕이었는데 두 왕 모두 같은 조부의 자손이었다. 더구나 지그문트는 한때 스웨덴을 지배하는 왕의 자리에 있기도 했는데 가톨릭 신자라는 이유로 왕위에서 내려와야 했다.


그 후 지그문트는 스웨덴이 지배하던 폴란드의 왕이 되어 스웨덴과 겨루는 사이가 된다. 그래서 구스타브 2세는 지그문트 왕이 있는 폴란드와 숙적처럼 지내게 된 것이다. 여하튼 구스타브 2세의 지그문트 왕을 혼내주려던 계획은 바사호의 침몰로 멈출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 참고 자료 및 그림 출처:

wikimedia commons/ Christina of Sweden

wikimedia commons/ Gustav II Adolf of Sweden

Wikipedia / Gustav II Adolf



* 바사 박물관에 전시된 바사호의 모습

* 1628년 수병 145명과 300명의 군인을 태우고 출항하는데 얼마 못가고 전복되고 만다. 바사호는 당시 전유럽을 통틀어 가장 규모가 큰 배였다고 하며, 선체는 4층 구조로 되어 있다.

* 배의 각 부분은 섬세하게 조각한 장식들을 설치해 놓았다. 마치 바사호가 하나의 조각 작품 같은 느낌이다.

* 위대한 제국의 군주로서 구스타브 2세는 자신을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와 동일시했다. 그래서 구스타브 2세의 초상화를 지키는 병사들은 로마군사들로 배치를 했다. 초상화 아래 글의 내용은, "Wise Ruller, Brave Conqueror, Happy Victor"

매거진의 이전글 달라르나의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