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수 Dec 14. 2017

달라르나의 말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스웨덴  4


1. 구스타브 바사와 달라르나


1397년, 드디어 덴마크 마르그레테 1세의 야심이 덴마크와 스웨덴, 그리고 노르웨이 3개국을 칼마르 동맹으로 묶는다. 이로써 덴마크를 주 측으로 하는 북유럽 3국의 국가연합이 생겨나고 이 연합은 1523년까지 지속된다. 1523년이 되자 구스타프 바사가 스웨덴 왕으로 추대되면서 136년간 지속된 칼마르 동맹은 깨지고 만다.


구스타브 1세 바사(Gustav I Vasa, 1496-1560, 재위 1523~1560), 그는 구스타브 1세 에릭손 바사(Gustav I Eriksson Vasa)라고도 불렀는데 스웨덴 바사 왕조의 시조이다. 구스타브 바사의 아버지 에릭 요한슨은 원로원 의원이었다. 바사가 어렸을 때 칼마르 동맹으로 스웨덴은 덴마크의 섭정을 받아야 했기에 독립을 위해 아버지가 노력하는 모습을 보며 자란다.


1512년 구스타브 바사는 독립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한다. 그 후 1517년이 되자 거의 일 년 동안 전개된 스텐 스투레가 이끄는 부대에서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 2세에 대항해 전투에 나선다. 1518년에는 스텐 스투레가 덴마크군에게 패하자 휴전협정 조건으로 크리스티안 2세에게 6명의 인질을 보내는데 바사는 그중 한 명이었다. 


크리스티안 2세는 이들 인질들이 덴마크에 협력하도록 회유를 하는데 바사는 끝내 굴복하지 않고 기회를 틈타 뤼벡으로 탈출을 한다. 결국 스웨덴 중부지방 달라르나(Dalarna)로 숨어든다. 스웨덴으로 돌아온 바사는 그 후 적극적으로 저항운동에 나선다. 그런데 구스타브 바사가 망명생활을 하는 동안 스텐 스투레가 1520년 덴마크와의 전투에서 전사를 하고 만다. 이제 스톡홀름을 제외한 전 지역이 덴마크 지배하에 들어가 버린다. 


* 15세기 칼마르 동맹 당시의 지도,  16세기 스웨덴이 칼마르 동맹을 벗어난 상태의 지도

* 구스타브 바사를 주제로 한 그림과 스웨덴 화폐들 



그러자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는 1520년 11월 4일 스톡홀름 대성당에서 스웨덴 왕으로 즉위하는 대관식을 치른다. 그리고 축제를 열어 사람들을 모아놓고 성문을 잠그고 스텐 스투레를 지지했던 사람들을 이교도라는 죄목으로 모두 옥에 가둔다. 며칠 후 크리스티안 2세는 구스타브 바사의 아버지를 포함해 자신에게 위협이 될만한 인물들을 모두 처형하는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을 벌인다. 


이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구스타브는 1521년 달라르나 지방에서 농민들을 규합해 반란을 일으킨다. 달라르나의 농민들이 서서히 바사에게 협력을 하면서 덴마크군을 물리치기 시작한다. 드디어 1521년 봄 달라르나의 농민군은 크리스티안 2세의 군대를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다.


바사가 일으킨 농민 반란이 성공하자 스웨덴 의회는 그를 1523년 6월 6일 구스타브 1세 에릭손 바사 스웨덴 왕으로 임명하고, 동시에 독립을 선언한다. 마침내 칼마르 동맹이 해체되기에 이른다. 칼마르 동맹이 와해된 이후 줄곳 스웨덴은 덴마크와 바이킹 종주국 자리를 놓고 겨룬다. 그러나 노르웨이는 여전히 덴마크의 지배하에서 300년이란 긴 시간을 지내야 했다. 


전권을 장악한 구스타브 바사는 제일 먼저 개신교로 종교개혁을 단행한다. 이것은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스웨덴 가톨릭 교회는 전국 토지에서 징수하는 각종 수입의 1/5을 가질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고 면세 특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면 부족한 국가재정을 충당할 수 있었다. 1527년 스웨덴 의회는 바사 왕에게 교회의 재산처분을 맡긴다. 드디어 바사 왕은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몰수한다.


구스타브 바사는 개혁을 완수하고 스웨덴이 발트 해의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다진다. 그러나 구스타브 바사 왕은 1560년 9월 29일 숨을 거두고 웁살라 대성당에 안치된다. 스웨덴의 국경일인 6월 6일은 바로 구스타브 바사 왕이 1523년 의회로부터 왕으로 선출된 날이다.


* 박물관에 전시된 '달라말'(Dala Horses)

* 달라르나 지방 남쪽에 있는 팔룬(falun) 마을의 달라르나 박물관과 마을 전경

* 스웨덴 중부지방인 달라르나(Dalarna)는 구스타브 바사가 농민군을 규합해 덴마크군과 전투를 벌여 승리를 하게 된 곳이다. 그 후 17세기부터 달라르나의 마을에서 소나무를 깎아 만든 말에 칠을 해 '달라말'(Dala Horse)을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지금은 달라 말이 스웨덴을 대표하는 상징이 되었다. 




2. 구스타브 바사와 세명의 부인들


한편 구스타브 바사는 3명의 부인을 맞이했다. 바사가 왕으로 등극하자 첫 번째 부인으로 작센 라우엔부르크 출신의 카타리나 공주를 맞이한다. 1531년 35살의 구스타브 바사는 18살의 처녀와 결혼을 하지만 4년 만에 카타리나는 아이를 유산하고 숨을 거둔다. 


두 번째 부인은 스웨덴 귀족 출신이었는데 1536년 구스타브 바사가 40살이 되던 해에 20살의 마르가레타 레이온후드를 부인으로 맞이한다. 그러나 그녀 역시 15년 후 생을 마감한다. 15년 동안 10명의 아이를 낳고 병으로 숨을 거둔 것이다. 이제 50대 후반이 된 구스타브 바사는 이미 9명의 자식들이 있었다. 그런데도 바사 왕은 또다시 세 번째 부인을 맞아 결혼을 한다.


이번에는 뜻밖에 인물이라 주위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다름 아닌 두 번째 부인의 조카였기 때문이었다. 그것도 열여섯 살 밖에 안된 앳된 아가씨였다. 50대 후반의 왕이 16살의 어린 아가씨 카타리나 스텐보그를 선택해 1552년 8월 결국 혼례를 치른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구스타브 바사의 결혼 생활은 그다지 행복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더구나 자식들 간의 반목과 불화는 바사 왕을 힘들게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웁살라 대성당에 안치된 구스타브 바사 왕의 양옆에는 두 명의 부인들이 함께 누워 있다. 한 명의 부인은 좀 섭섭해하지 않을까? 기왕이면 셋이 함께하는 묘지를 만들었다면 어땠을까?



○ 참고 자료

Wikipedia / Gustav Vasa

그림 출처: Wikimedia Commons


* 바사 왕 부인들(왼쪽부터; 첫째 부인 카타리나, 둘째 마르가레타 레이온후드, 셋째 부인 카타리나 스텐보그)

* 웁살라 대성당에 매장된 구스타브 바사 왕과 두 명의 부인(바사 왕 좌우에 부인이 한 명씩 있다.) 

* 웁살라 대성당 바사왕 묘지 뒤편에 있는 대형 그림, 달라르나 농민군 덕분에 덴마크군에게 승리를 거두고 왕이 된후 시민들과 함께 국정을 논의하는 장면


매거진의 이전글 스톡홀름에서 만나는 바이킹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