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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Dec 23. 2017

핀란드 독립 100주년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핀란드  1


1. 발트해의 아가씨를 닮은 도시 헬싱키


1918년 핀란드 조각가 빌리 발그렌(Ville Vallgren)은 파리에서 유학시절 만든 동상을 그의 고향으로 옮겨 온다. 발그렌은 그의 조국이 독립으로 새로 태어나고, 특히 바다에서 탄생했음을 상기시키기 위한 의도로 그가 가져온 동상에 ‘인어아가씨’라는 이름을 붙인다. 그러나 스웨덴 신문이 그의 동상에 대해 ‘발트해의 아가씨’라고 별칭을 붙여주자 이 동상은 지금까지 그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동상을 만들 때 동상의 모델이 된 아가씨는 당시 19살인 마르셀 델퀴니(Marcell Delquini)라는 프랑스 여성이었다. 그런데 핀란드 여성단체는 이 동상이 너무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는 이유로 ‘인어아가씨’가 아니라 ‘프랑스 매춘부’라고 비아냥대며 헬싱키 시내에 이 동상을 세우는 것을 반대하기도 했다. 


사정이야 어떻든 간에 지금까지 이 동상은 헬싱키 시내에서 적지 않은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다. 특히 젊은 대학생들에게는 최고의 인기를 받고 있는 듯하다. 특히 헬싱키 대학이 4월 마지막 주에 ‘Vappu’라는 봄맞이 축제를 벌이는데 이때 ‘인어아가씨’가 단단히 한몫을 한다. 


이 축제의 정점은 다름 아닌 ‘인어아가씨’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학생들은 축제의 마지막에 동상에 올라가 인어아가씨에게 입맞춤을 하고 그녀의 머리에 대학생들의 상징인 흰 모자를 씌워준다. 이 축제 행사는 어느 틈엔가 전통처럼 이어져 오고 있는데 이 행사가 1970년대에 이르러 모자뿐 아니라 망토까지 덮어주면서 남학생들의 치기 어린 애정공세가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행사가 진행되면서 간혹 사고가 발생하게 되자 1990년대에 이르러서는 이 행사를 금지시킨다. 그러나 학생들은 금지 조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인어아가씨에 대한 애정공세를 그치지 않고 있다. 매년 4월 말이면 이 행사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만일 이 동상마저 없었다면 음산한 헬싱키는 얼마나 삭막했을까? 역시나 젊은 대학생들의 호기가 삭막한 도시를 젊은 도시로 만들고 있는가 보다. 


* 발트해의 아가씨에게 누군가가 꽃다발이나 목도리 같은 것을 자주 가져다준다. 

* 한 여름에는 물개들이 발트해의 아가씨에게 시원한 물줄기를 선사한다.




2. 이념보다 안정과 발전이 우선


핀란드 영토는 한반도의 1.5배, 그러나 인구는 한국의 1/10 수준인 540만 명 정도. 그런데 핀란드는 러시아와 스웨덴 사이에서 수백 년간 그들의 지배를 받으며 그들과 경쟁하며 살아야 했다. 핀란드는 현재 높은 교육열 덕분인지 소득 수준이 한국의 두배 이상이다. 북유럽 국가들이 자랑하는 복지제도 역시 핀란드도 예외가 아니다. 모든 부분에서 한국보다 월등하다 싶을 정도로 앞서있다. 러시아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 100주년에 핀란드는 과연 어떻게 모든 것을 이루게 되었을까?


바이킹 시대 이후 핀란드에 일어난 중대한 변화는 기독교의 전래와 스웨덴 왕국의 영토로 편입된 것이다. 12세기 중엽 스웨덴 왕 에리크 9세의 십자군이 핀란드에 진입해옴으로써 기독교가 전파되고 본격적인 지배가 시작된다. 그 후 1521년 스웨덴을 비롯한 북유럽 3개국의 칼마르 동맹이 와해되자 스웨덴의 구스타브 1세는 핀란드를 스웨덴 영토로 포함시키고 절대왕정을 강화한다. 핀란드에서는 바사 왕의 지배 아래 스웨덴과 함께 루터교로 개종하는 종교개혁이 진행된다.


그러나 핀란드 영토를 둘러싼 열강들의 이해는 핀란드를 가만두지 않는다. 러시아가 스웨덴과 전쟁에 승리함으로써 1808년 스웨덴은 핀란드를 러시아에게 양도한다. 그로부터 100년간 1917년까지 핀란드는 제정 러시아의 자치 공국으로 지내야 했다.


러시아의 지배하에서 핀란드의 민족주의는 뒤늦게 싹트기 시작한다. 그에 대한 반증으로 핀란드 언어에 대한 장려정책이 마련된다. 스웨덴 지배하에서 스웨덴어가 핀란드의 행정과 교육에서 주요 언어로 쓰였는데 점차 핀란드어 비중이 늘어난다. 이때 엘리아스 뢴로트가 1835년부터 1849년까지 14년간 민족 서사시 칼레발라를 저술하여 민족주의에 불을 붙인다. 1892년에는 핀란드어가 드디어 스웨덴어와 견줄 만큼 공식 지위를 얻게 되고 핀란드어가 공식 언어로 자리하게 된다.


* 핀란드(Suomi) 독립 100주년 기념 풍선

* 핀란드 루터교 본산인 헬싱키 대성당(중앙). 대성당 앞은 의회광장이다. 

*  의회광장 한가운데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더 2세 동상. 동상 주변에는 여러 부류의 사람들 모습이 있다.  

* 핀란드 국립박물관 건물, 오른쪽 지도의 붉은 칠한 부분은 소련과 전쟁으로 빼앗긴 핀란드 영토들



드디어 핀란드는 1917년 말 러시아 혁명을 틈타 독립을 한다. 그러나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의 여파는 여전히 핀란드를 좌우 진영으로 갈라놓고 내전을 치르게 만든다. 백군과 적군 간에 1918년 1월부터 5월까지 4개월간 진행된 무력충돌로 수만 명의 희생자가 발생한다.


내전은 다행히 짧은 기간에 끝나지만 핀란드 현대사에서 가장 아픈 기억으로 남는다. 특히 남부지역과 서북부 지역 간에 뼈에 사무친 지역감정으로 자리 잡으며 불신의 앙금을 남긴다. 다행히 그 후 사민당을 연립정부에 포함시키는 유화정책을 펴고 1939년 또다시 발발한 핀란드와 소련과의 전쟁을 겪으며 내전의 상처는 서서히 치유되고 핀란드는 하나의 국가로 결집되어 간다.


이제 핀란드 내전은 어느 정도 마무리되어가지만 소련과의 관계는 오히려 갈수록 반공 감정이 강하게 일어난다. 그 결과 제2차 세계대전 중임에도 핀란드는 소련과 2차례에 걸쳐 또다시 전쟁을 벌이게 된다. 그러나 1940년 러시아와 벌인 싸움에서 패하고, 전쟁 패배의 대가로 소련에게 핀란드 동쪽 지역을 포함해 많은 영토를 내주고 만다. 그뿐 아니라 1945년부터 전쟁배상금을 물어야 했는데 생각보다 일찍 7년 만에 다 갚아버린다.


핀란드가 러시아에게 갚은 전쟁배상금은 3억 달러에 이르는데 대부분 전쟁배상금 지불방법이 러시아가 지정한 특정 물품으로 지불하는 현물 방식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핀란드 산업 부흥의 계기를 마련해준 셈이었다. 그 대표적 산업이 전자 부분이었는데 잘 알려진 노키아는 당시에 핵심기업으로 참여한다. 


당시 소련과 지속적인 수출관계를 맺음으로써 핀란드는 안정적인 수익을 낼 수 있을 뿐 아니라 경직된 소련 관료주의 체제를 다루는 경험까지 얻을 수 있게 된다. 배상금 지불 이후에도 여전히 핀란드는 1991년까지 소련으로 상당량의 물량을 지속적으로 수출한다. 노키아를 비롯한 핀란드 산업은 이제 단순한 경제적 이익뿐 아니라 당시 서방세계와 소련의 교량 역할까지 도맡게 되어 핀란드에게 엄청난 이익으로 되돌아오고 있었다.


1) 만네르하임 동상: 러시아군 장교였던 그는 내전이 벌어지자 귀국해 이를 평정하고. 러시아와 전쟁이 벌어지자 또다시 국민들을 단합시키고 저항한 인물, 핀란드 국회는 그에게 '원수'라는 칭호를 수여한다.

2) 국회의사당 건물  

3) 크보스티 칼리오(Kvosti Kallio) 동상: 핀란드 4대 대통령(1937-40), 수상직 4번 역임, 국회의장직 6번 수행. 농부 출신인 그는 정치, 경제, 사회적 평등을 주장. 핀란드 언어문화와 교육문제 해결을 위해 노력했다.

* 연말연시의 헬싱키 중심가 거리 모습들 



한편, 1906년 핀란드는 세계에서 두 번째로 여성에게 참정권을 부여한다. 이를 통해 유능한 여성인력을 사회자본으로 활용하게 되어 사회통합과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 핀란드 여성의 사회진출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데 거의 세계 최고 수준이다. 더구나 이미 여성 대통령(타르야 할로넨)을 배출했을 뿐 아니라 헬싱키 여성 시의회 의원 60명 중 절반이 여성의원이라고 한다.


이처럼 악조건 속에서도 좌우 이념 갈등을 극복하고 투명하고 공정한 경쟁력을 바탕으로 양성평등과 사회통합을 이루어냄으로써 핀란드는 선진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더구나 오랜 식민지배에도 불구하고 짧은 기간에 자주독립의 길을 갈 수 있는 성과를 이루어낸다.


핀란드를 통해 우리는 이념의 분단보다 국민 공통의 안정과 발전이라는 명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바라고 있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핀란드 국민 모두가 힘을 합해 통합을 이루어내고 짧은 시간에 위대한 승리를 이루어낸 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귀감일 수밖에 없다. 강한 국가가 되는 길, 독립국가로 가는 길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핀란드가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는 말이다.



◯ 참고자료 


리처드 D. 루이스 지음, 박미준 옮김, 미래는 핀란드에 있다, 살림, 2005.

외교통상부, 핀란드 개황, 2012년 11월

Wikipedia


1) 1971년 핀란드 출신 건축가 알바 알토가 설계한 핀란드 최초의 심포니 전용 홀(1700명 수용)

2)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바브 누르미(Paavo Johannes Nurmi) 동상, 각종 세계 대회에서 무려 9개의 금메달과 은메달 3개를 수상

헬싱키 중앙역 맞은편에 있는 아테네움(Ateneum) 미술관, 핀란드 민족 설화 '칼레발라'를 그린 그림들이 상시 전시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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