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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Aug 23. 2016

그린란드의 서낭당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그린란드 13


이누쑥과 서낭당



1.


내가 던진 물수제비 / 권혁웅


물결이 물결을 불러 그대에게 먼저 가 닿았습니다

입술과 입술이 만나듯 물결과 물결이 만나

한 세상 열어 보일 듯 했습니다

연한 세월을 흩어 날리는 파랑의 길을 따라

그대에게 건너갈 때 그대는 흔들렸던가요

그 물결 무늬를 가슴에 새겨 두었던가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강물은 잠시 멈추어 제 몸을 열어 보였습니다

그대 역시 그처럼 열리리라 생각한 걸까요

공연히 들떠서 그대 마음 쪽으로 철벅거렸지만

어째서 수심은 몸으로만 겪는 걸까요

내가 던진 물수제비가 그대에게 건너갈 때

이 삶의 대안이 그대라 생각했던 마음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없는 돌다리를

두들기며 건너던 나의 물수제비,

그대에게 닿지 못하고 쉽게 가라앉았지요

그 위로 세월이 흘렀구요

물결과 물결이 만나듯 우리는 흔들렸을 뿐입니다


“이 이누쑥은 그린란드 이누이트들로 구성된 이누쑥건립위원회가 1985년 7월 21일에 세움”



권혁웅 시인은 작은 돌맹이 하나를 던져 사랑을 전하려 했지만 미쳐 그녀에게 닿지 못하고 가라앉아버린 물수제비를 원망한다. 더구나 다시 제 몸을 열어 보일 생각일랑 못하고 물수제비 지나간 자리에 세월만 흘렀다고, 잠시 우리는 그렇게 흔들렸을 뿐이라고 넋두리를 하고 있다.


아마 그동안 시인은 보이지 않는 물수제비를 수도 없이 그녀에게 날려 보냈을지도 모를 일, 그녀에게 날아가다가 가라앉은 물수제비는 이제는 제법 높이 쌓인 서낭당처럼 되었을 게다. 물속에 높이 쌓인 물수제비 탑, 매일같이 날아오는 사랑과 그리움에 대한 편린들, 물속에서 그것을 바라보는 인어아가씨 세드나는 무슨 생각을 할까?


캐나다 관광상품인 이눅숙들, 그리고 캐나다 밴프의 마을 어귀에 있는 이눅숙


2.


2010년 밴쿠버 올림픽 로고는 ‘이눅숙’(Inuksuk)이었다. 캐나다 이누이트들의 이눅숙을 모델로 동계올림픽 로고를 만들었는데 마치 두 팔을 벌리고 두 다리로 서있는 듯한 돌무지를 마스코트 겸 로고로 형상화 했다. 이눅숙, 또는 이누쑥(Inussuk)은 북극지방에서 쉽게 볼수 있다.  


‘이누쑥’(Inussuk)은, 흔히 영어로 'inukshuk'이라 쓰지만, 캐나다 이누이트들은 'inuksuk', 그린란드 이누이트들은 'inussuk'이라고 쓴다. 여기서는 그린란드 이누이트 말을 사용한다.(그린란드어는 2009년도에 그린란드 서부지역에서 사용하는 말을 표준어로 정했다.)


이누쑥(Inussuk)은 이누이트인들에게 정신적, 종교적 의미가 있는 이정표로서의 길라잡이 역할을 한다. 흔히 이누쑥은 길을 알려주거거나 식량저장소(잡은 물개나 바다표범 등을 잡아서 감추어 놓은 장소)를 알리기 위해 세워놓은 일종의 이정표 구실을 했다. 그래서 이누쑥은 사람 형상뿐 아니라 돌을 쌓아 놓는 형식에 따라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캥걸루수와크 돌무지, 캐나다 이눅숙과 형상이 같다. 사진: Kristin Gisladottir


척박한 지역에서 생존을 위한 방편으로 이누쑥을 사용하다 보니 돌로 쌓아놓은 형상은 어느새 인간처럼 영혼을 지닌 조형물로 간주되기도 한다. 그래서 이누쑥은 ‘인간을 닮은 조형물’로 자주 형상화 되는데, 가공하지 않은 돌을 쌓아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생존을 위한 도구로 만들었다. 전통적인 이누쑥은, 누군가 왔다 가거나 가고 있는 길의 방향을 알려주는 길잡이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그 자체가 주술적인 상징으로도 사용된다. 마치 우리네 돌무지, 서낭당과 같은 의미로 말이다.


이누쑥은 그렇기에 혼자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함께 누군가와 그 의미를 공유하고 있는 협동의 산물이다. 이누쑥은 누군가의 개인재산으로, 또는 특별히 욕심을 내 혼자만 차지할 수 있는 그런 조형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그래서 이누쑥은 은연중에 우리에게,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흔히 하는 말로, 각각의 돌은 돌맹이로 분해될 수 있지만 하나로 쌓아놓으면 단순한 돌의 이미지가 아닌 특별한 의미를 지닌 다른 조형물로 의미를 자니게 되는 것이다. 이누쑥이 우리에게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인 셈이다.


그래서인지 아무리 보아도 북극지방의 이누쑥은 우리네 서낭당, 즉 돌무지를 닮았다. 우리에게 돌무지와 느티나무는 서낭당 역할을 한다. 서낭당은 흔히 성황당이라고도 부르는데 돌무지가 같이 있다. 그래서 돌무지는 바로 서낭당이기도 하다.


일루리사트 돌무지


서낭당, 또는 돌무지는 마을을 수호하고 온갖 액운을 퇴치해 주기를 바라는 우리네 선조들이 안녕을 기리는 기원 대상이다. 그래서 형식을 따질 필요 없이 마음속으로 안녕을 빌며 길가의 돌 하나를 돌무지 위에 정성스레 올려놓으면 된다. 종교에 상관없이 길가의 돌무지를 만나면 우리네 선조들은 그렇게 안녕을 빈다. 돌무지는 그래서 우리네 삶의 한 방식으로서의 종교의식이기도 하다.


서낭의 낭(娘)은 아가씨란 뜻 외에 ‘어머니’의 뜻도 갖고 있다. 서낭당은 그래서 어머니를 중심으로 하는 혈통이나 상속이 이루어지는 사회, 즉 모계사회(母系社會)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서낭당의 ‘어머니’는 서녘에서 오신 어머니, 즉 ‘마고’이며 ‘삼신할미’로 불리어 왔다. 마고, 즉 삼신할미는 우리네 사회에서는 마을을 지켜주고 새 생명의 탄생을 좌우하는 탄생 신이다. 따라서 삼신할미는 인간사에서 가장 근원적인 여신이다.


                                                        제주도 서낭당과 서울 청계산 돌무지


3. 


지금도 서낭당, 즉 돌무지는 우리네 고개 들머리나 고개 마루, 또는 마을 어귀에서 흔히 볼수 있다. 산에 있는 돌무지는 산을 넘는 사람들이 산신령께 감사를 올리고 재를 넘는다는 징표로서 돌덩이 하나를 돌무더기 위에 올려놓아 만들어진다. 고개를 넘나드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수록 돌무지는 그만큼 커진다. 그래서 간혹 큰 돌무지는 금줄을 쳐 더욱 신성하게 꾸미기도 한다. 지금도 제주도나 해안가 등에서 금줄이나 오색줄을 두른 돌무지나 느티나무를 볼수 있다. 마을 사람들은 해마다 이런 곳에 모여 공동으로 제를 올리고 마을의 안녕과 개인들의 염원을 비는 성역으로서 보존을 한다.


그런데 일제강점기에 마을 앞에 있던 돌무지들은 수난을 당했다. 일제가 우리 민족정신을 소멸시키려 전통적 생활문화를 철저히 말살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을 어귀에 있던 대부분의 돌무지들은 사라져 버렸다. 일제가 미신이라고 한 돌무지, 즉 서낭당은 광복 이후 미국서 들어온 기독교가 퍼지기 시작하면서 이번에는 일제와 똑같이 우리에게 돌무지를 미신이라 가르치며 그나마 남아있던 돌무지 마저 없애버리는 짓거리를 해댄다.


오콰아트수트 돌무지


세계에서 귀신이 제일 많은 나라 일본, 그들이 귀신을 믿으면 귀신이 아니고 우리가 귀신을 믿으면 미신이 된다. 참 어이없는 발상이다. 귀신을 믿는 것은 미신이 아니다. 귀신이란 바로 천지를 말한다. 귀는 ‘땅’을 말하고 신은 ‘하늘’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귀신을 믿고 섬긴다 함은 천지를 믿고 섬긴다는 뜻이니 종교적 신앙 이전의 문제이다. 


우리네 천지 사상은 그렇게 단순하면서 오묘하다. 천지를 믿고 인간을 따르는 게 미신이 아님은 자명하다. 우리네 천지 사상의 일면이 드러난 게 바로 서낭당이자 돌무지이다. 우리와 유사한 과정을 거쳐 이누이트들 역시 개신교가 전파되면서 수많은 이누쑥을 파괴했다. 미신의 문제가 아니라 독립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두려워한 덴마크 정부의 의도가 이누이트들의 고유문화를 파괴해 버린 것이다. 그러나 얼마 전 그린란드 자치 정권이 들어서면서부터 이누이트들이 거주하는 지역에 또다시 돌무지가 세워지기 시작했다. 


오콰아트수트 돌무지에 지는 석양



4. 


우리네 서낭당의 수호신 마고, 즉 삼신할미와 북극의 이누쑥의 수호신 세드나는 여신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어쩌면 먼 옛날 두 여신은 서로 형제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그리 여신들의 역할이 똑같을 수가 있을까?


오콰아트수트 마을 뒤켠에 있는 언덕에 올라 그곳에 설치해 놓은 이누쑥을 마주하면서 이누이트들의 마음을 엿듣는다. 역시 우리와 다르지 않음을 느낀다. 이누쑥을 세워 놓으면서 이누이트들이 돌 하나에 사랑을, 돌 하나에 희망을, 아니 돌 하나에 독립을, 어쩌면 그렇게 빌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궁금하기만 하다.


돌무지에는 눈이 내리고 있지만 멀리 수평선에 구름사이로 노을이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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