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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Jan 16. 2018

콜라반도의 사미인들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부록


* 스칸디나비아의 원주민은 사미인들이다. 그러나 현재 이들이 거주하는 지역은 스칸디나비아와 북쪽 라플란드는 물론 러시아 서쪽 콜라반도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넓게 퍼져 있다. 콜라반도의 사미인들도 스칸디나비아의 사미인들과 같은 종족, 형제이기 때문에 일단 콜라반도의 사미인들까지 취재를 했고, 다음번 사미족 연구에 밑 자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소개를 한다. 어찌보면 이 글은 러시아편으로 소개를 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스칸디나비아와 연결된 글이라 그냥 스칸디나비아 부록으로 올린다. 부디 이 글을 포함해 그간의 '스칸디나비아의 비밀' 글들이 스칸디나비아에 관심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1. 무르만스크로 가는 길


첫 번째 이야기

무르만스크로 가는 여정은 생각보다 까다롭고 힘들었다. 시르케네스에서 러시아 국경까지 10여 Km 정도밖에 안 되는 듯했지만 국경을 통과하는 데는 제법 시간이 걸렸다. 더구나 한국인이 처음인지 한참을 전화로 통과 여부를 묻는 듯했다. 여권은 물론 자동차(렌터카)에 대한 검사를 하는데 "자동차등록증"(Document)을 내놓으란다. 이런 렌터카를 빌릴 때 작성한 서류는 있지만 자동차등록증을 받은 기억이 없으니 어쩔 건가? 아무리 사정을 말해도 안된단다. 국경수비대 대장까지 나서서 안된다고, 못 간다고 한다. 한참을 그렇게 실랑이를 하다가 다행히 통과 도장을 찍어준다.(* 한국은 비자 필요 없이 3개월 체류 가능하다.)


이번에는 다른 검사원들이 자동차와 소지품을 검사한다. 혹여 마약이라도 있을까 그야말로 샅샅이 뒤진다. 그런데 자동차 조수석 사물함에서 자동차등록증을 비롯한 서류들을 찾아낸다. 검사원들이 보물이라도 발견한 듯 사무실로 달려가 통과 서류를 다시 작성해 온다. 그렇게 검사를 마치고 출발을 하는데 거의 한 시간 이상 시간이 걸린 듯했다.


검사를 마치고 뻥 뚫린 도로를 따라 신나게 달린다. 한 시간 이상 지체를 했으니 이제부터는 그 한 시간만큼 빨리 가야 한다. 전체 일정 중에서 하루를 억지로 빼서 무르만스크를 가는 것이니 그야말로 일분일초가 귀하고 아까웠다. 속도계는 거의 100Km가 넘는 듯했다. 그런데 30분 정도를 달렸을까 멀리 차단막을 내리고 있는 곳이 나온다. 이런 이미 근처까지 다 왔으니 속도를 줄인다 해도 차단막 앞에 서기에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속도는 전혀 줄이지 않고 있었다. 순간 자동차는 차단막과 부딪치기 일보 작전까지 달리고 있었다. 그 순간 차단막이 올라가고 내차는 그 밑으로 아슬아슬하게 지나간다.(* 경비초소 안에서 달려오는 차를 보고 급히 차단막을 올린 듯했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마 정신을 놓고 그냥 운전만 했던 것 같다.


두 번째 이야기

다음날 돌아올 때 드디어 그곳에서 보초병에게 걸리고 말았다. 아무 말은 안 했지만 어딘가 신원확인을 하는지 이번에도 전화질로 시간을 보낸다. 비가 오는데 거의 30여분쯤 지났을까 가도 된다고 여권을 내준다. 추측컨대 각 지역을 통과할 때마다 보안검사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니 검사도 안 하고 이 지역을 벗어나 무르만스크로 가 버렸으니 지역 감시병이 어이가 없었을 것 같았다.


아무튼 다시 시르케네스로 돌아가는데 또다시 국경검문소를 통과해야 한다. 어제와 같은 순서로 통과 절차를 밟는데 이번에는 노르웨이 쪽 여자 검사원이 소지품 검사를 한다. 다른 건 다 이상이 없는데 음식 종류들에 대해 유난히 까탈스럽게 군다. 유제품은 무조건 안된다고 한다. 그냥 뺏어서 쓰레기통에다 집어던진다. 그런데 가만 보니 시르케네스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노르웨이 특산품 노란 치즈와 훈제연어는 그냥 못 본척하고 건드리지 않는다.(* 멋쟁이 아가씨가 분명해) 사실 버린 것들도 모두 시르케네스 슈퍼마켓에서 구입한 네덜란드산 치즈와 요구르트 같은 것들이었는데...   


* 시르케네스를 지나고 이 다리를 건너면 러시아 국경이 나온다. 진눈깨비가 내렸지만 무르만스크는 맑았다.




2. 알로샤가 지키는 도시 무르만스크


도시는 모두 자연발생적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보다. 무르만스크가 그렇다. 1916년 제정 러시아 당시 러시아 최서북단에 도시를 하나 만든다. 하지만 러시아에서도 가장 오지나 다름없는 시골에 도시를 만든다고 사람들이 몰려들리 만무, 줄곳 작은 도시로 머물러 있는 듯했다.


하지만 오늘날 무르만스크는 어느새 북극권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가 되었다. 인구는 50만 명이 넘을 정도로 규모가 크다. 제1차 세계대전 직후에 태어난 도시가 어느새 100년이 지났다. 이 도시의 역할은 무르만스크를 통해 바렌츠 해로 진출하려는 의지를 적극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1916년 10월 4일 무르만스크에 정교회 건물이 세워지고 로마노프 궁이 공식 개관하면서 도시는 그 역할을 본격적으로 수행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다음 해 1917년 4월 무르만스크는 지금의 이름으로 개칭을 한다. 도시는 빠르게 성장한다. 1920년 2,5000명이 1932년에는 그 열 배가 넘는 420,000 명이 거주하게 된다.


무르만스크(러시아어: Му́рманск, 핀란드어: Muurmanni 무르만니)는 북으로 바렌츠 해에 접해 있고 콜라 반도 안에 있는 도시이다. 노르웨이나 핀란드 국경과도 가깝다. 이곳은 따뜻한 북대서양 해류의 영향으로 일 년 내내 얼지 않는다. 한 겨울 평균기온이 영하 10℃ ~ -13℃(1월)이니 꽤나 높은 편이다.


그래서 무르만스크는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연합국 측 보급 물자를 운송하는 항구로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러나 소련 국경과 가까운 노르웨이 시르케네스에 주둔한 독일군과 격렬한 전투를 하는 바람에 1941년 무르만스크는 적지 않은 피해를 입는다. 하지만 결국 소련군은 독일군을 격퇴시킨다.  


* 알로샤(Alosha) 동상이 있는 곳에서 무르만스크 시내와 콜라 만을 오가는 선박들까지 다 보인다.



무르만스크는 2차 대전을 겪으면서 독일 폭격기 공습으로 1.400채의 아파트가 파괴되고 불에 타 버린다. 다행히 시민들의 자발적 협조로 도시는 다시 일어서게 되고 항구는 제모습을 찾게 된다. 당시 무르만스크의 활약상을 기리기 위해 후일 소비에트 연방 정부는 무르만스크에 "영웅 도시(Мурманск-Город Герой)"라는 칭호를 내린다. 이와 함께 소련 정부는 1974년 무르만스크 주민들의 영웅적 모습에 보답하는 의미에서 무르만스크 항구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북극 수호자를 위한 장엄한 기념비‘를 설치한다.


높이 34m의 동상, 총을 들고 있는 병사의 모습은 그 크기가 워낙 크기 때문인지 무르만스크 전 지역에서 볼 수 있을 정도이다. 사람들은 기념비를 "Alosha"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알로샤는 무르만스크에 도착한 배들을 가장 먼저 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서있는 곳에서 무르만스크와 콜라 만을 오가는 선박들 모두를 볼 수 있다. 도시의 파수꾼으로 알로샤는 아주 멋진 기념물이자 수호신이 된 것이다.


* 무르만스크 시내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가는 중

* 시내 한복판에 있는 공원과 사내 중심가 거리

* 무르만스크 역과 인근 거리

* 무르만스크에는 오래된 건물과 새로 짓는 아파트들이 한데 섞여 역동적인 도시 느낌을 준다




2. 로보제로(Lovozero/ Ловозеро)의 사미인들


러시아 라플란드로 부르는 로보제로(Lovozero/ Ловозеро)는 콜라반도에 있는 사미족 보호구역이다. 이 마을은 이미 16세기에 세워졌는데 콜라 반도의 라피족(Lappish: 사미인들) 대다수가 여전히 로보제로 근처에 살고 있다.


로보제로 주민들은 대부분 사미인들이다. 이들은 다른 사미인들처럼 순록 목장을 운영하고 있다. 이들은 주로 고기를 잡는 어부나 사냥꾼일도 하면서 순록을 키우고 툰드라 지역을 누비고 살아간다. 하지만 이곳에 사는 사미인들은 그들만의 고유한 민속 풍속을 즐기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여전히 전통의상 라피 옷을 즐겨 입는다.


로보제로 마을은 노르웨이 카라스요크(Karasjok)와 형제마을이다. 카라스요크는 노르웨이 라플란드의 수도이자 행정 중심지이다. 로보제로가 각별히 라플란드 풍속을 버리지 않고 그대로 간직할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카라스요크의 집요한 형제애 덕분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콜라반도의 사미인들은 그 숫자가 3900명 정도 된다고 한다. 사미인(Saamis)들이 콜라반도에 거주하기 시작한 것은 피노-우구릭(Finno-Ugric) 종족이 3천 년 전부터 오카강(Oka)과 볼가강(Wolga)사이에 있는 우랄산맥 지역에서 이곳으로 이주를 하면서부터이다. 이들이 바로 현대 사미족(Saami)의 조상인 '프로토 랍스'(Proto-Lapps)라고 불렸는데 이들은 기원전 1000년 전부터 시작된 남쪽 스칸디나비아 인들이 이곳에 출현하면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기원전 3천 년 전부터 시작된 사미인들의 콜라반도 생활은 러시아와 핀란드 사람들이 콜라반도에 들어오기 시작하고 노르웨이 인들까지 바렌츠 해 연안에 자리를 잡기 시작하자 이들과의 마찰은 피할 수 없는 현실로 다가오게 된다.


스칸디나비아 출신의 노르웨이와 스웨덴 출신의 사람들이 우월적 힘을 과시하면서 유목생활을 하던 사미인들과 공존은 사실상 일방적 지배로 귀결되고 만다. 사미인들은 그들이 살던 곳에서 오히려 남쪽에서 올라온 북유럽인들에게 서서히 지배를 당하기 시작한다.


북유럽인들은 사미인들을 원주민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도 사실상 이들을 열등한 민족으로 대했다. 그리고 이들이 유목생활을 하는 지역을 누더기를 걸친 사람들이 사는 땅이라는 의미로 라포니아(Laponia)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 후 이 명칭은 그대로 영어식으로 전환되어 여전히 사용된다. 즉 사미인들이 살아가는 지역을 대부분 라플란드(Lapland)라고 부르며 이곳에 사는 사람들을 라피(Lappi)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사미족은 드넓은 라플란드 지역을 오가며 유목생활을 했지만 결국 남쪽의 지배자와 새로운 세기의 출현과 더불어 더 이상 자유로윤 유목생활은 힘들게 된다. 강한 국가로 우월적 힘을 과시한 남쪽의 지배자들은 라플란드에 국경선을 긋고 만다. 이제 사미인들의 자유로운 유목 생활은 국경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힐 수밖에 없게 된다. 그로 인해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는 사미인들은 문화적 풍습도 일부분 지역별로 달라지기도 했다.


* 로보제로 마을은 예상대로 작았다. 문화회관 건물과 주택가...



지난 수세기 동안 하나의 지역에 퍼져 살면서 자유로운 유목생활을 하던 사미인들을 보호구역이란 구실로 한 국가 내 특정 지역에 사미인들을 강제로 여러 그룹으로 나누어 격리를 시키는 바람에 러시아 내에 사미인들은 물론 다른 지역의 사미인들도 그들만의 고유한 민속풍속이 어느 정도 변화가 생기게 된 듯하다. 그러나 4개국 영토에 살고 있는 사미인들(Saamis)의 가장 기본적인 특징은 지금도 남아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모두가 "순록을 키우는 민족"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사미인들이 지니고 있는 또 다른 특징은 고유한 의상에 대한 관심과 생활양식 등이 여전히 동질성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장 기본적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요소이기 때문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사미인들이 사용하는 고유 언어 사미어는 각 지역별로 사투리가 발생해 많은 차이를 나타내고 있다.


한편, 대부분의 사미인들은 그들의 조상들이 수세기 동안 해왔던 것처럼 문명화된 삶의 방식을 좇기보다 지금까지 그들이 해왔듯이 자연과 상호 관계에서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북쪽의 자연 라플란드는 그들이 필요로 하는 모든 축복을 내려주고 있다. 대자연과 함께 그들은 삶을 꾸려가고 사슴을 키우고 그렇게 사미인들은 자연 속에서 만족을 얻고 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그들의 삶의 지혜가 어쩌면 과학발전을 모토로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가장 부러운 모습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만든다.


사미인들은 지난날 이교도 시대에 동물과 새, 심지어 나무나 토지에 대해서까지 하늘의 기운이 스며있다고 믿었다. 사미인들의 자연에 대한 태도는 결코 단순한 미신적인 태도라고만 말하기 힘들다. 더구나 대자연속에서 그들의 삶을 지탱할 수 있도록 가장 많은 힘을 부여한 것은 바로 ‘순록이라는 사슴이었기 때문이다.


사미인족에게는 그런 연유 때문인지 사슴에 관한 전설이 하나 전해 온다. 어느 날 한 남자가 마을에 나타났는데 마을에는 어여쁜 여인이 살고 있었다.  이 남자는 그 여인에게 청혼을 하고 그녀와 혼례를 올린다. 이 남자는 사실 미안다쉬(Myandash)라는 수컷 순록이었다. 그는 하늘에 빌고 또 빌었다. 사람이 되게 해달라고 말이다. 그의 정성 어린 기도를 들은 하늘의 신은 그를 인간 남자로 만들어 준다. 그리고 그 남자는 곧장 마을에 사는 여인에게 달려갔던 것이다.


순록 미안다쉬(Myandash)는 평소에 자신을 아끼고 보살펴주던 여인 마트르요나(Matryona)에게 고마운 마음과 연모의 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되자마자 마을로 달려가 청혼을 한 것이다. 드디어 그녀가 그의 청혼을 받아들이고 둘은 행복한 혼례식을 올린다. 그 후 둘은 자식들을 낳게 되는데 그 아이들은 모두 순록이었다. 아이들이 성장하자 남자 순록인 미안다쉬는 아이들 순록을 모두 데리고 툰드라 지역인 콜라반도로 떠났다고 한다.


* 로보제로 마을의 상징은 역시나 사슴이다.

* 이들에게 사슴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 인근의 야산에도 가을이 깊어간다.



이처럼 사미족의 전설은 남자로 변하는 수컷 순록과 아름다운 인간 여인과 혼인을 통해 사슴을 낳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운명처럼 사미인들의 삶은 이미 순록과 함께 시작해야 함을 은연중 암시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신화나 전설은 그런 것이다. 황당하지만 기본적으로 특정한 지역의 종족이 그들 삶과 직결된 내용을 신화, 또는 전설로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야 종족의 정체성 확립이 가능해지고 그를 발판으로 자신들의 거취를 결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신화의 힘이자 기능이기 때문이다.


여하튼 사미인들이 사는 콜라반도에도 새로운 소비에트 권력의 폭풍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10월 혁명 이후 새로운 정권이 들어선 후 1927-1928년 사이에 콜라반도에 거주하는 사미인들을 행정적으로 정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무르만스크 마을 평의회는 1930년대 중반 "콜라반도 내 원주민과 북부 교외의 부족 관리에 관한 임시 규정"에 근거하여 ‘사미(Saami) 위원회를 설치한다. 이 위원회의 회의 결과 사미인들의 거주지로 로보제로(Lovozero) 지역을 지정한다. 현재 콜라반도 사미인들은 대부분 로보제로 지역에 살고 있다.(* 1964년 로보제로를 사미인 보호지역으로 지정한다.)


사미인들은 그들만의 독특한 문화를 가졌다. 이들이 즐겨 입는 전통의복이나 전통문양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 선조들이 사용하던 오방색을 떠올리게 되고 그들이 만들어 사용하는 가공품들, 예를 들면 작은 돗자리나 밀집 등으로 만든 수공예품들도 우리 선조들이 지금 까지 만들어 사용하는 것과 거의 모양이나 솜씨가 흡사함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이들과 우리 선조들과 DNA가 같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자꾸만 드는 건 왜 일까? 저렇듯 자연을 즐기며 사는 사람들이라면 분명 ‘우리 동네 사람들’이 맞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 참고 자료

- http://cn.kolatravel.com/murmansk.htm

- http://cn.kolatravel.com/russian_lapland.htm

- http://lovozerie.ru/saami.html

- 콜라 사미(Kola Sami) 역사박물관: https://agentika.com/ru/encyclopedia/d8bac295-8d31-4096-9101-8906a3e4e8d8/places/root/ff1b68b1-e9ac-4b1c-8dab-afc802527188?version=CdC-0




* 아래는 사미인들이 사용하던 우편엽서들이다. 사진과 그림들에서 사미인들의 풍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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