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은 우리가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한다"
파리의 상징 같은 곳 몽마르뜨 언덕, 그곳에는 오래전부터 참 많은 이야기들이 전해온다. 그 이야기들을 좇다 보면 몽마르뜨 언덕으로 오르는 길이 여러 갈래가 있음을 알게 된다. 그 길마다 가슴 저린 이야기들이 배어있다. 그중에서도 인상파 화가들의 산실이 자리한 곳으로 가보자.
지하철을 타고 물랭루주 역에서 내리면 곧바로 물랭루주 앞으로 나오게 된다. 이제 이곳 물랭루주에서 시작해 천천히 길을 따라가다 보면 인상파 화가들과 관련된 흔적들을 만나게 된다.
물랭루주로 들어가는 입구 양옆에 그려진 그림들을 그냥 지나치지 말고 보아야 한다. 바로 로트렉이 그린 춤추는 물랭루주 무희들 모습이다. 로트렉은 물랭루주에 출근하다시피 하면서 이곳에서 술한잔 얻어먹고 춤추는 사람들을 스케취한다.
'파리의 미국인', 조지 거쉬인의 음악과 툴루즈 로트렉의 그림이 만나 뮤지컬 영화(1951)로 태어난다.(* 로트렉 작품들을 만나는 최고로 멋진 방법이다.) 파리에서 화가로 성공을 꿈꾸는 가난한 미국인 청년 제리는 레스토랑에서 우연히 만난 리사라는 여자를 사랑한다. 하지만 그녀는 프랑스의 유명한 가수 앙리의 약혼녀였는데, 결국 리사를 떠나보내고 슬픔에 빠진 제리는 환상의 궁전에서 리사와 함께 춤추는 상상을 한다.
1928년 조지 거쉬인은 'An American in Paris'라는 곡을 발표한다. 바로 이 곡에 맞춰 18분 동안 펼쳐지는 제리와 리사의 춤은 이 영화의 압권이다. 특히 로트렉의 그림들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장면들은 그림과 현실 무대를 혼동하게 만들어 버린다. 영화 속 주인공도 영화 속 주요 장면을 그린 로트렉도 모두 뒷골목 인생 같은 사람들이다.
뒷골목이라는 단어가 주는 느낌은 언제나 주인공이라기보다 주변적 의미가 강하다. 다소 어눌하고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보다 어둠 속 그림자에 묻혀있기 일쑤이다. 그러나 그들의 진면목은 영화에서 여지없이 발휘된다. 주인공으로서 말이다. 로트렉의 그림 속 사람들이 밖으로 뛰쳐나와 그들의 억눌린 자아를 마음껏 드러내고 신나는 춤을 추어댄다. 대로가 아닌 뒷골목에서 축제가 벌어진다. 마치 로트렉이 자신의 귀족 신분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자아를 찾으려는 몸부림처럼 그렇게 사람들은 춤을 추어댄다.
잠시 물랭루주 무희들 춤사위에 빠져있던 상상의 나래를 추스르고 이제 물랭루주를 나와 오른쪽으로 난 길을 따라 골목길을 따라간다. 조금만 오르면 이번에는 왼편에 ‘아멜리’(Amelie)라는 로맨틱 영화를 찍은 카페가 나타난다. 이곳 커피도 제법 맛이 좋기로 정평이 나있어 파리 문인들이 자주 찾아오는 곳이기도 하다. 잠시 차 한잔을 마시고 영화 속 아멜리를 만나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장 피에르 주네 감독이 만든 20여 년 전 작품 ‘아멜리’, 오드리 토투를 일약 스타덤에 올려놓은 이 영화가 개봉된 후 몽마르트르 언덕 주변 부동산값이 뛰었다고 한다. 아마 그녀가 우리에게 전해주는 '해피바이러스' 덕분이 아닐까?
영화는 정자가 빠른 속도로 달려가 난자를 만나 아이가 태어나는 장면으로 전개되면서 시작한다. 노트르담 성당에서 뛰어내린 관광객에 깔려 엄마가 하늘나라로 가버리자, 유일한 친구 금붕어 마저 자살을 기도한다. 그 후 그녀는 외톨이가 된다. 하지만 어느 날 빛바랜 사진과 플라스틱 군인, 구슬이 가득 담긴 낡은 상자를 우연히 발견하면서 그녀에게 마법 같은 일들이 시작된다.
주변 사람들에게 행복을 찾아주는 기쁨을 통해 삶의 행복을 발견했다고 굳게 믿던 그 순간 그녀의 심장이 또다시 두근거리기 시작한다. 눈 앞에 나타난 달콤한 미소를 띤 정체불명의 남자, 분명 세상에 하나뿐인 운명의 남자라고 확신하는 아멜리, 그녀의 행복 찾기 놀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제 영화 두 편을 보았으니 다시 찻집을 나서 길을 오른다. 골목길을 따라 조금만 오르면 T자형 길을 만나게 된다. 그곳에서 고개를 들면 풍차를 보게 된다. 그리고 오른쪽으로 난 길을 조금만 더 걸으면 또 다른 풍차가 있는 카페를 만나게 된다. 이 두 개의 풍차가 바로 고흐가 파리에서 그린 풍차 그림의 배경이 된 곳이다.
당시 풍차가 있던 시절 몽마르뜨 언덕은 달동네로 개발이 시작되면서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곳이었다. 그리고 풍차는 당시 방앗간 구실을 하던 곳이었다. 그런데 예전 로마군이 이곳을 점령하고 이곳에서 잡아온 이교도들을 참수했다고 한다.(* 당시는 아직 기독교가 인정되지 않던 시기였기에 주로 기독교 신자들이 참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언덕을 가리키는 몽(Mont)이라는 단어와 순교자를 뜻하는 마르뜨르(Martre)라는 라틴어를 조합해 몽마르뜨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우리말로 ‘순교자의 언덕’이라 불러야 제맛일 텐데 그냥 몽마르뜨라고 하니 좀 거시기하다.
아무튼 서기 250년경 드니(Denis) 신부는 로마군이 머리를 자르는 참형을 하는데 이때 드니 신부는 자신의 잘린 머리를 들고 파리 북부지방까지 거의 4Km를 걸어가서야 쓰러졌다고 한다.(믿거나 말거나)
후세에 드니 신부는 성인으로 추대되었고 이 곳은 생드니(Saint Denis)라는 지명으로 불리게 된다. 그러나 파리의 초대 주교였던 드니(Saint Denis) 신부의 순교 이후 몽마르뜨(Mont Martre: 순교자의 언덕)에서 여전히 많은 기독교 신자들 참형이 진행되자 사람들은 몽마르뜨르를 고유명사처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1845년 파리의 도시성곽을 철거하고 이 지역은 파리에 편입된다. 그러나 가난한 예술가들이 파리 시내로 들어가지 못하고 이곳으로 모여들면서 문화의 중심지로 자리하게 된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빈주머니 탓에 몽마르뜨 언덕 주변으로 몰려들어 그야말로 가난한 예술가들의 집성촌 같은 곳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곳 몽마르트르 산등성이에 세탁선이 하나 들어선다. 원래 세탁선 (Le Bateau-Lavoir)이란 이름 그대로 빨래를 할 수 있게 만든 배를 말한다. 그러나 몽마르뜨에 있는 세탁선, 즉 바또-라브와르는 20세기 초 많은 화가들이 살던 건물이다. 19세기 말 르노와르, 에밀 버나드, 수잔 발라동, 우터, 우트릴로, 두피, 뽈보트 등이 살았는데 그 외에도 상주하지는 않았지만 뒤피나 마티스, 레제, 드랑, 브란꾸지, 루쏘 등이 이 곳을 자주 들렀다고 한다.
애초에 피아노 공장이었던 이 건물은 1889년부터 화가들의 작업실로 변모되기 시작하였으며 1904년에 막스 쟈콥이 바또-라브와르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바또-라브와르는 그래서 20세기 초반 명실공히 현대 예술의 중심지 역할을 하던 곳이다. 이곳은 무엇보다 입체주의(cubisme)의 탄생지라고 할만하다. 바로 여기서 1906-7년에 피카소가 아비뇽의 아가씨들(Les Demoiselles d'Avignon)을 그렸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처음 건물은 1970년 불타 없어지고 지금 건물은 그후 개축한 것이다.
수많은 예술가들이 찾는 몽마르뜨 언덕, 그곳을 오르다 보면 만나게 되는 찻집 ‘라 메종 로즈’. 이 곳에는 마리아를 닮은 여인네가 살았다. 그녀도 가난했기에 당연히 파리로 입성은 했지만 자연 몽마르뜨 언덕을 찾아와 둥지를 틀었을 것이다.
그녀는 세탁일을 하는 어머니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빠를 만나 사생아로 태어난다. 그 후 그녀는 서커스단원이 된다. 수잔 발라동(1867~1938)이 바로 그녀이다. 하지만 그녀는 서커스를 하던 중 부상을 입고 서커스단을 떠나 파리로 들어와 몽마르뜨에 정착한다. 라 메종 로즈(La Maison Rose)는 바로 그녀가 파리로 들어와 인상파 화가들과 동거를 시작한 곳이다, 인상파 화가들의 산실인 셈이기도 한데 그녀는 라메종 로즈의 마담이자 그들의 공동 연인이었다.
그녀가 몽마르뜨로 온 첫날 르노와르(1841~1919)를 만난다. 그날부터 발라동은 그의 연인이자 모델 노릇을 한다. 아직 20살도 채 안된 그녀는 르노와르보다 26살이나 아래였다.
그녀는 그 후 또 다른 인상파 화가 툴루즈 로트렉(1864~1901)을 만난다. 로트렉은 남프랑스 아르비에서 백작 가문의 장남으로 태어났는데 어려서부터 뼈가 약한 데다가 13살에 성장이 멈추는 바람에 150cm의 단신에 얼굴마저 일그러진 모습이 다소 괴기스럽다. 로트렉의 그림 실력을 알아챈 그녀는 몽마르뜨 뒷골목에서 술과 섹스에 탐닉하던 로트렉과 동거를 시작하며 그의 모델이 되어 준다. 그러나 로트렉은 37세의 나이에 성병과 알코올 중독으로 찌들어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 만다.
그 후 그녀는 아비가 누군지도 모르는 아들 위트릴로를 낳고 드가(1834-1917), 사반느(1824~1898) 등과 계속 동거를 하며 그들의 모델 노릇을 한다. 그러나 화가가 원하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만 모델모릇을 했던 수잔 발라동. 그녀는 모델 노릇에 그치지 않고 점차 그들의 어깨너머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드가의 추천으로 화단에 데뷔를 한다. 당시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는데 여성 최초로 프랑스 국립예술원 회원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가난하고 고독한 음악가 에릭 사티(1866~1925)를 만나 그와 동거를 한다. 사티는 빈곤한 생계를 꾸려가기 위해 술집에서 피아노를 쳤다. 그러던 중 로트렉과 춤을 추던 발라동에 반해 6개월간 동거를 한 것이다. 그때 발라동은 사티를 모델 삼아 그의 초상화를 그린다. 평생 수잔 발라동만을 사랑한 음악가 사티, 그러나 그 역시 결국에는 59세 나이에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후 부치지 않은 한 묶음의 편지가 발견되는데 그 편지의 수신인은 모두 수잔 발라동이었다고 한다.
발라동은 그 후 아들 위트릴로의 친구이자 20년이나 연하인 우티를 만나 그를 모델로 ‘아담과 이브’를 그린다. 그러다가 그녀는 아예 아들 같은 우티와 결혼을 해 파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러다 어느 날 문득 수잔 발라동은 “예술은 우리가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한다”는 말을 남기고 아무도 찾지 않는 쓸쓸한 방에서 혼자 생을 마감한다.
몽마르뜨 예술가들의 자유 분망함, 어쩌면 그런 분위기 덕분에 서양미술사에서 한 획을 긋게 되는 인상파라는 꽃을 피울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표현하려 했던 인상파 화가들의 눈은 과연 수잔 발라동으로부터 자유로울지 궁금하다. 얼마나 순수하게 자연을 바라보았고 얼마나 진실된 눈으로 수잔 발라동을 바라보았을지 궁금하단 말이다. 인상파 화가들의 연인 수잔 발라동, 가난한 화가들의 여인으로서 창조적 에너지원인 사랑을 원 없이 나누어 주었기에 오늘 그들의 명성이 있게 된 게 아닐까?
인상파 화가들, 그들이 먹고 마시고 춤추고 뒹굴며 몸부림치던 곳 몽마르뜨의 라메종 로즈, 예술가들의 방황과 열정, 그리고 고독이 슬픈 죽음으로 이어지던 곳 몽마르뜨. 지금도 그곳은 관광객들의 발자국이 이어지고 있다. 그들의 슬픔과 고독을 찾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