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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Feb 17. 2018

"나는 고발한다"

'똘레랑스의 민낯'


○ 똘레랑스의 민낯


1895년 1월 간첩 혐의로 중죄인이 된 드레퓌스, 그는 대서양의 외딴섬 ‘악마의 섬’으로 유배된다. 무죄를 입증할 어떤 증거도 채택되지 않고 재판은 번번이 드레퓌스를 죄인으로 몰아간다. 프랑스 사회에서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절감하게 된다.


재심청구가 받아들여지긴 했지만 군부는 자신들의 잘못을 감추기 위해 번번이 드레퓌스에게 유죄판결을 내린다. 이때 '에밀 졸라'가 반기를 든다. 그는 1898년 1월 13일 ‘라로르’(여명)라는 신문에 "나는 고발한다"라는 제목으로 대통령에게 보내는 편지를 게재한다. 

"나는 고발한다" 기사 전문

“대통령 각하, 오늘 저는 진실을 말하겠습니다. 만일 정식으로 재판을 담당한 사법부가 만천하에 진실을 밝히지 않는다면 제가 진실을 밝히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입니다. 제 의무는 말을 하는 겁니다. 저는 역사의 공범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만일 제가 공범자가 된다면, 앞으로 제가 보낼 밤들은 유령이 가득한 밤이 될 것입니다. 가장 잔혹한 고문으로 저지르지도 않은 죄를 속죄하고 있는 저 무고한 사람의 유령이 가득한 밤 말이지요. 대통령 각하, 정직하게 살아온 시민으로서 솟구치는 분노와 더불어 온몸으로 제가 이 진실을 외치는 것은 바로 당신을 향해서입니다.”


에밀 졸라가 1898년 1월 13일 ‘라로르’ 신문에 발표한 ‘나는 고발한다’의 일부이다. 에밀 졸라는 이 글을 통해 독일의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투옥된 드레퓌스 대위가 무죄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 사이 훗날 드레퓌스 사건의 진짜 간첩으로 밝혀지는 에스테라지 소령이 어처구니없게 무죄 석방된다. 그뿐 아니라 프랑스 군부는 드레퓌스의 무죄 입증 물증까지 제시한 피카르 중령까지 투옥한다. 프랑스 군부는 드레퓌스를 무죄라고 인정하는 것은 자신들의 실수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판단해 비굴하게도 이런 조치를 취한 것이다.


파리 근교(몽마르뜨 공동묘지)에 있는 에밀졸라 가족묘. *

* 에밀 졸라가 죽자 처음에는 이곳에 안장을 한다. 그러나 얼마 후 드레퓌스가 무죄로 복권되자 에밀 졸라의 관을 파리 시내 팡테온 신전으로 옮겨 안치한다. ‘프랑스의 양심’이란 이름으로...



“나는 고발한다”를 실은 ‘라로르’ 지는 몇 시간 만에 30만 부가 팔려나간다. 이후 아나톨 프랑스, 에밀 뒤르깽, 마르셀 프루스트, 클로드 모네 등 예술가 과학자 교수들이 드레퓌스 사건 재심 청원서에 서명한다. 드레퓌스 재심 운동은 다시 활화산처럼 타오르기 시작한다.


그는 드레퓌스 사건 관련 글들을 처음에는 당대 최고 신문이었던 ‘르 피가로’를 통해 발표했다. 그러나 이 신문의 보수적인 독자들은 구독 해지 운동을 펼치며 오히려 신문사에 압력을 가한다. 결국 신문사 측은 에밀 졸라의 글을 실을 수 없다고 거부하자 졸라는 더 이상 신문에 글을 싣지 않고 팸플렛을 제작하여 판매를 시작한다. “청년들에게 보내는 편지”, “프랑스에 보내는 편지” 등이 그가 직접 제작해서 판매한 팸플렛용 글들이다. 


에밀 졸라는 당대 최고 인기 작가이자 대문호로 칭송받았지만 “나는 고발한다”를 발표한 뒤 엄청난 역경에 처하게 된다. 이 글은 유대인에 대한 반감이 상당히 퍼져있던 프랑스 사회를 충격 속으로 몰아넣는다. 이런 대중들의 심리를 반영한 듯 프랑스 의회는 역설적으로 서둘러 에밀 졸라를 기소하기로 결정한다. 


에밀 졸라는 그가 글을 기고한 후의 일을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나는 군대를 모함하는 자요, 적에게 매수당한 자요, 조국을 버린 자였다. 문단의 내 친구들조차 대경실색한 채 멀어져 갔고, 내 범죄를 두려워하며 나를 버렸다. 나에 대한 비난의 글들, 후일 그 작성자들의 양심을 무겁게 짓누를 비난의 글들이 줄을 이었다.”


에밀 졸라, 그는 친구들에게도 조국에게도 버림을 받았다. 실천하는 지식인으로서의 양심도 중요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외로움을 견디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럴 경우 언제나 할 수 있는 일은 단지 평소 자신이 아끼던 사람들로부터의 무관심을 어떻게든 감내해야 하는 일뿐이다.


엑상프로방스 미라보거리와 이끼분수, 이곳에 모두 101개의 분수가 있다고 한다.
피카소도 자주 들러 세잔느, 에밀 졸라와 담소를 나누고 비둘기 그림 등을 그려 이곳에 남겼다.
1792년에 문을 연 까페 드 꺄르송, 2층 입구에 있는 폴 세잔느와 에밀졸라 초상화, 이 카페에 알란드롱과 에디드 삐아프, 장 콕토, 싸르트르 등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들렸다.
이 자리가 에밀 졸라와 세잔느가 매일 저녁 출근하다시피 나와 담소를 나누던 고정석(그림은 피카소 작품)



뒤레프스에 대한 에밀 졸라의 마음은 단순히 감상적 작가 이상의 태도를 보여준다. “고백하자면, 애초에 저는 이 일을 단순히 인간 유대와 연민과 사랑의 마음으로 시작했습니다. 죄 없는 사람이 잔혹한 형벌로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제 눈에는 오직 이것만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통에서 그를 구하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들었습니다. 그의 무죄를 확신하자마자 제 마음속에는 오직 한 가지 생각, 그 불행한 사람이 겪은 모든 고통, 혼자서는 도저히 그 수수께끼를 풀 수 없는 잔인한 운명의 희생양이 되어 캄캄한 감옥에서 그가 겪는 고통에 대한 생각밖에 없었습니다. 


새벽이 올 때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얼마나 큰 혼란이 일었을 것이며, 그의 마음속에는 얼마나 간절한 기다림이 솟구쳤을까요! 그러자 저는 더 이상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 대한 연민에서 저는 용기를 낼 수 있었고, 오직 그 수형자를 고통에서 해방시키는 것, 그를 짓누르는 무거운 돌을 들어 올려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상처를 보살펴줄 가족에게로 돌려보내는 것만을 생각했습니다.”


결국 끈질긴 투쟁 끝에 드레퓌스 사건은 재심에 부쳐지게 되지만 정부는 또다시 드레퓌스를 '무죄'가 아닌 '사면' 형식으로 석방한다. 그러나 이번에는 1898년 7월 베르사유 중죄 재판소가 에밀 졸라에게 징역 1년에 벌금 3천 프랑을 선고한다. 그리고 선고 당일 에밀 졸라는 영국 런던으로 망명을 떠난다. 선고 며칠 후 프랑스 정부는 그에게 내린 ‘레지옹 도뇌르 훈장’까지 박탈한다. 


이후 1899년 6월 에밀 졸라는 영국에서 돌아왔으나, 불과 3년 뒤인 1902년 9월 30일 의문의 가스 중독 사고로 사망한다. 그가 드레퓌스 사건을 소재로 한 소설 ‘진실’을 쓰기 시작했는데 끝을 보지도 못한 채였다. 반면, 드레퓌스는 에밀 졸라가 사망한 지 4년이 더 지난 1906년 7월 13일 드디어 무죄로 복권된다. 




에드워드 마네가 그린 에밀졸라의 초상화

* 마네가 에밀 졸라의 초상화를 그렸을 때 에밀 졸라는 서른 살이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에밀 졸라는 마네보다 8살이나 어렸지만 파리 화단에서 배척당하고 있던 마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을 앞장서서 지지해 준다. 


심적으로 많은 도움을 준 에밀 졸라를 위해 마네는 에밀 졸라에게 초상화를 선물하는데, 에밀 졸라는 이 그림을 죽을 때까지 그의 서재에 걸어놓았다고 한다.


에밀 졸라의 초상화는 그가 세상을 떠나자 고인의 뜻에 따라 루브르 박물관에 기중 되었다가 지금은 인상파의 요람인 오르세 미술관으로 옮겼다. 나이는 어리지만 언제나 자신의 편에서 자신의 예술을 이해해 주고 사람들의 비난에도 공개적인 변론을 해준 둘도 없는 친구들. 서로에 대한 존경과 애정이 느껴지는 그림이다.  


에밀 졸라, 그는 남프랑스 엑상프로방스 출신이다. 이탈리아 출신의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자 가난한 직공의 딸인 어머니의 배려로 중학교에 들어가 역시 엑상프로방스 출신 폴 세잔느와 만난다. 그러나 극심한 가난으로 1858년 어머니와 함께 파리로 옮겨와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결국 중퇴하고 만다.


그 후 에밀 졸라는 1862년 서점에 취직하여 당시 과학적이고 실증주의적 문학사조에 눈을 뜨고 콩트나 평론을 쓰기 시작한다. 1866년 서점을 그만둘 때쯤 그는 이미 비평가로서의 입지를 굳히고 마네, 모네, 피사로, 세잔느 등 불우한 인상파 화가들을 지지하는 글을 발표한다. 이후 여러 작품을 썼는데, ‘목로주점’의 성공으로 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진실과 정의를 사랑한 모럴리스트이자 이상주의자 에밀 졸라, 말년에 그가 보여준 드레퓌스 사건에 대한 태도는 프랑스의 양심으로 불리면서도 비극적 종말을 맞는다. 이것이 프랑스 똘레랑스의 본질이다. 


엑상프로방스에 있는 세잔느 아뜰리에 입구, 거리에 입간판이 있어 찾기가 쉽다.
집은 꽤 큰 정원을 가지고 있어 산책하기에 좋다. 산책로 가로등을 액자처럼 만들어 놓았는데 액자에 비친 경치들이 마치 세잔느가 그린 그림같이 느껴진다.
집은 2층인데, 1층은 전시실과 기념품가게이고 2층은 세잔느 작업실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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