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마루촌의 이발사
임진각에서 파주시 방향으로 한참을 달리다 보면 경기도 연천군과 철원으로 가는 37번 국도를 만난다.
이 길은 임진강을 따라가다 한탄강으로 이어진다.
바로 그곳에 화석정이란 정자가 서있다.
그 옛날 율곡선생이 제자들과 이 정자에 앉아 담소하며 임진강 물길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며 흠씬 취해 있던 곳이기도 하다.
임진강 노을이 그만큼 짙은 색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리라.
바로 그 화석정에서 바라보면 강 건너 평야지대가 동파리 마을인데 남방한계선이 지나가는 곳이다.
그래서인지 임진강 줄기를 따라 철책선이 쳐져있고 그 철책선 곁으로 37번 국도가 놓여 있다.
화석정을 지나 조금만 더 가면 멀지 않은 곳에 금파리, 장파리가 있다.
‘동파리’, ‘금파리’, ‘장파리’라는 지명은 일제 때 구획정리 명분으로 임진강변에 배를 대던 포구 ‘동마루’, 금마루‘, ’장마루‘를 한자어 언덕 '파‘자를 사용해 고쳐 부르면서 그런 이름이 된 것이다.(* 마루는 넓다, 높다란 뜻을 지닌 우리말이다.)
장파리는 1957년 박서림의 방송문예 소설 '장마루촌의 이발사'의 배경이 된 곳이다.
‘장마루촌의 이발사’는 그 후 60년대 초 영화로도 제작되어 당시 엄청난 반응을 일으키는데, '장마루촌의 이발사'의 무대가 바로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장파리인 것이다.
1957년 박서림 씨의 방송문예 소설 '장마루촌의 이발사'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장마루촌의 청년 동순과 같은 마을 처녀 순영은 사랑하는 사이이다.
그런데 6·25 전쟁이 일어나 동순은 국군에 입대한다.
오랫동안 소식을 알길 없는 동순을 마을 사람들은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동순은 전투 끝에 부상을 당하고 성불구가 되어 장마루촌으로 돌아와 이발사가 된다.
순영은 성불구가 된 동순을 이해하고 결국 그에게 돌아가 마을을 재건하는 반려자가 된다.
장파리는 임진강변에 자리한 마을이다.
장파리는 영화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TV 드라마 형제의 강(1996), 봄날은 간다(1997) 등에서 보았던 50~60년대 도회지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거리가 그대로 남아있는 곳이다.
이 마을에서 드라마들을 모두 촬영했다.
이 마을이 세트장처럼 드라마 촬영지가 된 사연은 예전 이곳이 미 2사단 주둔지였기 때문에 마을을 세트장으로 꾸밀 필요 없이 많은 흔적들을 남기고 있기 때문이었다.
미 2사단은 1971년 이곳에서 철수를 하고 다른 곳으로 이전을 했다.
예전 미군이 주둔하던 시절 이 마을에는 아가씨들이 거의 천여 명에 이를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을은 제법 사람들로 북적이고 미군들 덕분(?)에 주민들도 먹고살만했다고 한다.
한데 지금은 마을이 거의 반이상 텅 빈 상태이고 허름한 마을이 그대로 남아있다.
특별난 일거리가 없는 마을은 사람들이 그냥 떠나가 버리고 마을은 긴 정적이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오랜만에 찾은 장마루촌은 그 자리에 없었다.
그곳에는 미쳐 생각하지 못한 모습의 장파리가 들어앉아 있었다.
하지만 어디선가 그 여인네랑 사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두리번거리게 만든다.
드라마 속 주인공은 아니지만 장마루촌에 남아있는 이발소를 지키고 있는 늙수그레한 사내가 면도날을 세우고 있었다.
올해 일흔을 넘겼다고 했고 내일이면 아들이 돌아와 함께 밭을 맬 거라고 밝은 표정을 지으며 어서 내일이 오기를 기다리는 듯했다.
그동안 장마루촌의 이발사라는 드라마 때문인지 이발소를 찾은 사람들이 아름아름 여럿 되나 보다.
벽에 걸린 시계도 KBS '그곳에 가고 싶다 ‘팀이 인터뷰하러 왔다가 주고 간 거라며 자랑을 해 댄다.
또 어느 인터넷 웹진에서도 인터뷰를 해 갔다고 자랑이 한창이다.
그래서인지 시키지도, 묻지도 않았는데도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자랑삼아 늘어놓더니 제법 사진 찍기 좋은 모습으로 사진기를 바라봐 주기도 한다.
가만가만 살펴보니 어디서 저런 가구며 도구들을 가지고 왔을까 싶은 것들 뿐이다.
낡았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이제는 어디 가도 쉽게 구하지 못하는 것들 뿐이라는 생각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어디서고 좀체 사용하지 않는 그런 물건들을 용케 잘도 쓰고 있는 듯했다.
어쩌면 옛날 배경 TV 드라마에서나 필요한 세트들 같다는 생각만 든다.
그런데도 연신 그 사내는 자랑삼아 면도기를 가죽 밴드에 문질러대며 날을 세우는 장면을 보여준다.
그리고는 숫돌에다 날을 세우는 시범도 보여주기도 한다.
헌데 문득 의자 앞을 보니 신문지를 가지런히 찢어 놓은 게 보인다.
예전에 면도를 할 때 화장지 대용으로 쓰던 생각이 얼핏 떠오른다.
문득 고개를 드니 오리지널 ‘이발소 그림’들도 보인다.
어쩌면 제법 연배가 있는 분들은 이발소에 있는 저런 의자에 앉아 머리를 깎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를 법도 하겠다.
심지어 어렸을 적 의자 위 팔걸이에 나무판자를 놓고 그 위에 앉아 머리손질을 하던 기억도 있을 것 같다.
비누거품과 비누를 바르던 솔..
면도칼을 가죽에 스윽스윽 문지르던 모습.
추운 겨울날에는 비누거품을 난로 연통에 문질러 데운 후 뒷목에 바르던 기억들...
차가운 듯 훈훈했던 그 느낌들,
참 오래된 기억인데도 또렷한 이유는,
그 모습들이 신기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지금도 어느 산골마을에 작은 이발소 하나가 저런 이발소처럼 아직도 영업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이곳에서는 모든 게 예전 방식 그대로, 과거로 거슬러 오르는 여행을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아마 이곳을 찾으며 사람들은 ‘그곳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