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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Jan 19. 2018

오래된 미래를 위해!

밀즈의 ‘들어라 양키들아’를 읽고...


오래된 미래를 위해!


이 글은 오래전에 썼던 글인데 다시 읽어보니 어쩜 오늘 우리 한국이 겪고 있는 상황과 그리도 똑같은지 놀라게 한다. 더구나 최근에 많은 사람들이 쿠바 여행을 다녀와 우리에게 '쿠바'를 전하고 있다. 과연 그들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꼈던 것일까? 그동안 시간이 흐르기는 한 건지 모를 정도로 쿠바는 그대로인 듯하다. 아무튼 우리 사회가 '현실성 보다 가능성을 찾는 작업'을 할 수 있기를 바라며 글을 소개한다.



전제주의 시대의 국가는 절대권력 집단으로 존재했다. 중세부터 절대권력을 바탕으로 한 국가는 부의 독점과 인민에 대한 지배를 강요해 왔다. 그 후 부르주아 혁명 과정을 거쳐 시민사회의 기본 틀을 마련한다. 이것이 소위 부르주아적 자유주의, 즉 자본주의의 근간이다.


더구나 이 시기 서구 열강은 식민지 개척을 바탕으로 전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민다. 반면, 식민지는 자주독립의 기치를 내걸고 독립 쟁취를 모토로 투쟁에 나선다. 제국주의와 반제국주의, 이것은 결국 무력 지배와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적인) 간의 투쟁으로 전개된다.


지배세력과 자국의 이해를 되찾으려는 피지배 세력 간의 결전은 점차 혁명세력과의 연계를 통해 새로운 사회 건설로 발전해 나가게 된다. 기존 지배질서와 결연한 혁명세력은 신사회운동으로 새로운 사회질서를 구축하게 된다. 진정한 혁명이 필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1960년대 체 게바라(왼쪽)와 카스트로(오른쪽)가 만났을 때

결국 전 세계는 점차 식민지배의 패권주의에서 독립국가로의 권력 이동이 이루어지면서 재편된다. 국가사회주의를 부르짖던 히틀러의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대영제국의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캐치프레이즈도 막을 내리게 되고, 경찰국가로서 미국의 역할이 새로이 부상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간의 국가주의가 몰락하면서 새로운 개인주의적 자유의 확산을 통한 신자유주의 패권이 확립되어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70년대를 전후한 시기, 젊은이들의 분노는 더 이상 국가체제의 획일적 사고를 용납하지 않고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가능성의 세계를 요구한다. 그것이 바로 일차원적 사고에 대한 마루쿠제의 대안이었다.


이제 전 지구적 현상은 식민지배에서 국가주의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몰리게 되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국가의 권력을 통한 개인의 이윤창출과 극대화를 보장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서서히 국가주의는 뒷전으로 물러나고 개인주의로의 변화를 목격하게 된다. 그러나 개인의 자유와 국가의 이익, 그리고 사회의 이해가 상호 갈등을 야기하면서 새로운 혼란에 직면하게 된다. 바로 네오임페리알리즘, 즉 신식민주의로의 이행이 진척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국가주의와 개인주의적 자유 간의 끝없는 순환, 그 서막의 하나였던 쿠바에 대한 미국의 이해가 어떻게 갈등을 겪으며 변화되어 가는가를 보게 되면 혁명의 의미와 필요성, 가치 등을 절실히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라이트 밀즈(C. Right Mills, Listen Yankee: The Revolution in Cuba, 신일철 옮김, ‘들어라 양키들아: 큐바의 소리’, 정향사, 1961. 이 책은 1988년도에 아침 출판사에서 다시 번역, 출판했다.)가 반세기 전에 쓴 책은 그 시간의 유구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오늘날 고전으로서의 진가를 재확인할 수 있어 좋다.


피델 카스트로는 90세로 숨을 거둔다. 89세 때의 모습

이 책은 밀즈가 1960년도를 전후한 시기에 직접  쿠바로 건너가 쿠바의 지식인들과 면담을 통해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한 것이다. 그러나 밀즈가 이 책에서 말하려는 것이 단지 쿠바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 가난과 국가와의 관계, 그리고 미국이라는 나라와 전 세계 국가들과의 관계에서 빚어지고 있는 여러 문제들에 대한 암시를 제공하려는 데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밀즈는 그렇기 때문에 ‘미국인들’이 반드시 경청해야 하는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책 제목을 ‘들어라 양키들아(Listen Yankee)’라고 정한 것이 아닐까?


지난 1950년대와 60년대의 쿠바는 우리에게 단지 적성국가로만 알려져 있었다. 또한 언제나 우리에게는 군복 입은 모습으로만 소개된 쿠바의 지도자 ‘카스트로’는 자상하고 인자한 지도자가 아니라 감히 가까이해서는 안 되는 엄청난(?) 빨갱이 중의 빨갱이로 인식될 뿐이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이미지가 많이 변하기는 했지만, 사실 최근까지도 쿠바는 분명 우리에게 적성국가였고, 군복을 벗고 다른 옷을 입은 카스트로의 모습은 여전히 볼 수 없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오래전에 이미 저자가 그런 쿠바의 소리가 무엇을 말하려 하는지, 왜 혁명을 하고 있는지, 그리고 어떻게 혁명을 완수하려고 하는지 등에 대해 우리에게 강조한 것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대단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밀즈를 따라 쿠바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지도를 보면 미국과 쿠바는 바로 코앞에 마주하고 있는 나라이다. 60년대를 전후해 쿠바는 사회주의 혁명을 수행하고 있었다. 미국은 그런 쿠바를 조정하고 간섭함으로써 지배하려는 야욕을 감추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쿠바가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이해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서방국가들은 카스트로를 비롯한 혁명세력을 부호들의 재산을 갈취하고, 민주적인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고 공산혁명을 획책하려는 불순세력이라고 했다.


당시, 쿠바는 생존의 문제와 직결되어 있기에 혁명을 할 수밖에 없었는데도 미국은 그런 쿠바를 와해시키기 위해 쉼 없이 공작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쿠바의 혁명세력은 외쳐댔다. “우리가 어떠한 사람들인지, 우리가 어디로 가려고 하는지, 우리가 가는 길이 어떤 길인지, 우리가 지금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우리가 가는 길에 놓여 있는 장애물이 무엇인지, 그 어떤 것도 미국인들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언제나 그렇듯, 우리가 상대를 알기 위해 근본적인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바로 상대가 누구인가를 정확히 알아야만 이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국인이 쿠바를 알게 된 것은 부분적으로 관광을 하면서 매춘을 하거나 마약을 통해 아는 정도가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쿠바는 언제나 처럼 분주한 모습으로 관광객을 맞는다.



또 다른 쿠바에 대한 이해는 그 잘난 미국의 매스미디어를 통해 아는 정도일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매스미디어가 얼마나 쿠바를 왜곡하고 있는지 긴 말이 필요 없을 것이다. 도무지 미국은 쿠바에 대해 얼마나 제대로, 아니 조금이라도 알려고 노력을 하기는 했던 건지 의문이다.


1933년 쿠바의 바티스타 군부는 쿠바를 장악하고 미국과 결탁하여 쿠바의 전 재산을 독점해 나갔다. 더구나 미국은 당시 바티스타 군부가 쫓겨나기 전인 1956년까지 바티스타 정권과 결탁해 수만 명의 쿠바인들을 학살하기도 했다. 이런 행위들이 과연 미국이 말하는 ‘진정한 자유’를 위한 행위였을까?


쿠바는 그저 문맹과 무지, 가난과 착취만이 존재하는 나라였다. 아무도 그런 쿠바를 도우려 하지 않았다. 쿠바의 문맹률은 거의 제로상태에 가까운 정도였다. 문자를 모른다는 것은 곧 역사가 없는 인민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반밖에 인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인간처럼 생긴 동물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쿠바는 인간적이지 못했단 말이다.


이제 쿠바는 말한다. 더 이상 미국의 위성국가로만 보지 말라고, 그렇다고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의 위성국가로도 보지 않기를 바란다고. 쿠바는 단지 쿠바일 뿐이라고. 그래서 쿠바인은 외친다. “어떤 길이든 우리가 정하고, 우리가 간다.”


1956년 드디어 피델 카스트로가 멕시코에서 쿠바로  들어와 혁명을 시작했을 때부터 미국은 쿠바를 알려고 하지 않았고 단지 미국의 시선에서 안주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그래서 쿠바 혁명이 진행되는 순간 미국 정부와 미국의 매스컴들은 온통 쿠바에 대한 재정적 단수조치를 통해 압박을 가했고 쿠바의 혁명정부를 박해하려고만 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하지만 ‘Cuba, si(쿠바는 옳고)!’, Yankee, no(양키는 틀렸다)!라는 것이다.


쿠바 혁명이 우선적으로 이루려 한 것은 다름 아닌 ‘경제적 자립’이다. “미국인들이 주장하듯 큐바의 혁명이 단지 공산 이데올로기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 스스로 경제적 자립을 하려 했다는 말이다.” 쿠바는 경제적 주권국가, 즉 경제적 자립만이 경제적으로 건강한 국가건설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동안 진행된 미국의 감시와 규제는 쿠바의 경제를 미국 식민지로 전락시켰다. 그런 제국주의는 더 이상 큐바에서 허용될 수 없다. 또한 그동안의 바티스타 군부독재 하의 ‘정치적 자본주의’도 더 이상 묵과될 수 없다.


쿠바에 번지고 있는 가장 고귀한 가치는 바로 낡은 악에 대한 청산과, 자주적 경제주권에 대한 기대이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당한 꿈에 대한 권리를 미국인들은 왜 쿠바인에게서 앗아가려고 하는가? “우리의 혁명이 그런 꿈을 실현시킬 것이라는 것을 왜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가?”라는 외침이 들려온다.


사회주의가 발달한 나라일 수록 가톨릭 세력도 만만치 않다.



카스트로가 쿠바인들에게 심어준 가치는 바로, ‘더 멀리 보고, 더 크게 보라’는 것이다. 그건 일면 공상적인 것이라고 할지 모르나 꿈을 안고 꿈을 실현시킬 수 있다는 신념을 갖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쿠바의 혁명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바로, “혁명은 현실을 규정하는 방식이고, 현실 개조의 방법이라는 것이다. 동시에 현실의 정의를 개조하는 방법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쿠바의 혁명은 진실의 위대한 모멘트인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쿠바에서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경제적 진실의 모멘트’이다. 그것은 우선적으로 올바른 생산과 분배가 필요하다는 말이다. 혁명을 통해 쿠바인들은 스스로 합리적인 경제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했고, 제대로 된 분배체제를 확립해 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이름이 자본주의적이든 사회주의적이든 또 다른 어떤 것인가에 대한 논란은 불필요할 수밖에 없다. 단지 ‘혁명’이란 글자만이 중요하다.


두 번째, 쿠바 혁명의 진실한 모멘트로서 정치 역시 경제적 건설이 가능하도록 해야만 한다. 빈곤상태에서 공정한 부의 생산과 분배는 말할 필요 없이 제일 중요한 요소이다. 그래서 그동안의 낡은 정치체제를 버리고, 공정한 부의 생산과 분배가 가능하도록 하는 새로운 체제가 필요하다. 이것이 진정한 혁명의 기본과정인 것이다. 그런데도 미국은 우리에게 혁명이 잘못된 것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다. 오히려 미국식 자유주의(자본주의)를 부르짖고 있다.


자유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 자유에 이르는 길은 꼭 하나가 아니며 여러 가지일 수밖에 없다. 우리 쿠바인들은 우리식 자유를 추구하고 우리식 노선을 찾아내야만 한다. 그것을 어디서 찾을 수 있는가? 미국에게서? 아니다. 진정한 자유는 우리 스스로 우리의 지난 역사에서 찾을 때 가능하다.


쿠바의 지난 역사가 비록 미국의 자본가들을 위한 식민지로서, 또는 노예시장으로서 존재했을지 모르나 이제는 그 역사를 발판으로 새로운 교훈을 찾아야 한다. 그 역사가 의미하는 바를, 이제는 우리 스스로 새로운 미래를 위해 되돌려 놓아야 한다.


미국인들이 믿고 있는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와 미국식 교육제도 등 모든 미국식 방식이 쿠바에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쿠바에 필요한 것은 쿠바식 경제체제와 쿠바식 교육제도 등 순전히 자주적이고 자립적인 체제뿐이다. 혹자는 쿠바의 혁명이 과연 얼마나 성공할 수 있을까라고 비아냥 거릴지 모른다. 그러나 이미 쿠바 혁명은 성공을 거두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과연 쿠바 혁명은 쿠바인들에게 무엇을 남겨준 것일까?



혁명을 통해 우리가 알게 된 것은 다름 아닌 ‘확실성’이 아니라 ‘가능성’이 더 중요하다는 것이다. 우리가 고려해야 하는 것은, 어떤 혁명이든지 간에 그 ‘혁명의 확실성’을 따지기보다는 ‘변화의 가능성’을 따져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역사를 만드는 작업 역시 확실성을 전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능성을 전제로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쿠바 혁명을 통해 우리가 배워야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한국사회의 혁명은 어느 정도의 가능성을 실험했는가 이다. 너무나도 ‘확실성’에 안주해 ‘가능성’을 무시하지 않았는가? 100%의 확실성보다 1%의 가능성을 추구해 본 적이 있는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한다는 것 역시, 상대방의 확실한 그 어떤 것을 보려 하기보다 그의 행위가 얼마나 변화 가능성이 있을지를 이해해 주려는 노력이 따라야 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태도는 특히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들, 특히 남북 대치 상황에서 북측과 대화를 필요로 할 때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세라고 하겠다.


미국인들이 예나 지금이나 자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지만, 미국과 관계하고 있는 그 어떤 나라들도 강력히, 그리고 철저히 자국의 이익을 위해 노력하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의 이익만이 절대적인 것처럼 우선시되는 상황에서 진정한 자유의 가치는 훼손될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이것이 밀즈가 궁극적으로 말하려는 것일지 모른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우리에게 과연 혁명이 무엇인지, 진실과 사실의 차이가 무엇인지, 그리고 확실성과 가능성의 관계가 무엇인지 등을 스스로 따져 묻게 된다. 아무튼, 정치체제로서 국가가 지녀야 할 덕목이 있다면 다름 아닌 ‘국가는 인민을 가능성의 세계로 인도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야 우리 앞에 제시하는 미래사회를 두려움 없이 좇을 수 있을 것이고 ‘오래된 미래’를 만나는 첩경이 될 것이라 믿는다. 그것이 ‘양키’들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 까지 호소력 짙은 목소리로 외쳐댄 쿠바인들의 속삭임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말한다. 쿠바는 참 멋진 나라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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