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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Apr 10. 2018

oderint dum metuant

라틴어 한마디 / "나를 증오하더래도 나를 두려워할 것이야"


1.


“그들이 두려워하는 한, 증오하게 놔두어라! 그들이 나를 미워해도 좋아. 그러나 그들은 내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나를 두려워할 것이다.”


“Oderint dum metuant”는 로마 황제 칼리굴라(Caligula)가 자신의 좌우명으로 사용한 라틴어 문구이다. 이 말은 로마의 시인이자 희곡작가인 악시오(Accio, BC 170-BC 84)의 단편 희극 아트리우스(Atreus)에 나오는 대사인데, "그들이 두려워하는 한"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oderint’가 동사 ‘hate’, ‘odisse’의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문자 그대로 풀이를 하면, “그들이 혐오를 잉태했다는 것", 즉 "증오를 하는 한”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황제가 된 칼리굴라 흉상

2.


칼리굴라(Caligula)는 로마 제국의 제3대 황제(서기 12년 8월 31일-41년 1월 24일, 재위 37년 3월 16일-41년 1월 24일)이다. 본명은 가이우스이며, 칼리굴라는 원래 이름이 아니라 자기 아버지가 지휘하고 있었던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그가 어렸을 적 귀엽다고 '꼬마 장화'라는 뜻을 지닌 별명을 지어준 것이다.(* 칼리굴라가 어렸을 적 로마 군인들이 신는 샌들 칼리가(Caliga)를 신고 있었기에 작은 군화라는 뜻의 '칼리굴라(Caligula)'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칼리굴라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는 티베리우스 황제의 조카이자 양아들인 게르마니쿠스 카이사르와 아우구스투스의 손녀인 대(大) 아그리피나의 아들이다. 또한 네로 어머니 소(小) 아그리피나는 그의 여동생이다. 아버지 게르마니쿠스는 게르마니아 군의 사령관직을 맡고 있어 칼리굴라는 어린 시절 로마 제국의 라인강 방위선에서 보낸다. 이때 칼리굴라는 아버지 휘하의 군인들로부터 귀여움을 받아 '꼬마 장화'를 의미하는 칼리굴라로 불려 군단의 마스코트가 된다.


한편, 티베리우스의 후계자 후보들이 차례차례 티베리우스보다 먼저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죽기 직전 남긴 유서에 따라 칼리굴라는 사촌동생 티베리우스 게메루스와 함께 제위 후계자로 지명된다. 늙은 황제 티베리우스(사망 당시 77살)의 젊은 후계자(즉위 당시 24살)로서 칼리굴라의 제위 계승은 로마 시민들의 압도적인 지지로 이루어진다. 티베리우스는 치세 만년에 공포 정치를 펴서 인기가 크게 떨어졌다. 이 때문에 티베리우스가 유서에서 티베리우스 게메루스를 공동상속인으로서 지명했음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은 유서를 무시하고 칼리굴라를 단독 상속인으로서 황제 취임을 할 수 있게 한다.


이처럼 원로원까지 나서서 젊은 칼리굴라가 황제로 취임을 할 수 있도록 하자 황제가 된 칼리굴라는 시민들의 후원에 보답하는 정책을 편다. 제일 먼저 티베리우스가 마련한 재정 낭비 방지 정책을 중지시키고 로마 시민에게 식량을 나누어주고 검투사 시합을 부활시키는 등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책을 시행한다.


그러나 즉위한 지 7개월 만인 서기 37년 10월 칼리굴라는 고열로 쓰러지고 만다. 심하게 열병을 앓고 난 후 그 후유증으로 인해 칼리굴라 뇌에 이상이 생겨 더 이상 정상적인 생각과 판단을 하지 못하고 광기를 부리기 시작한다.


서기 38년, 칼리굴라는 병상에서 일어나자마자 양자이자 공동 지위 계승자인 티베리우스 게멜루스를 죽인다. 그리고 소문에 의하면 여동생들과 근친 관계를 맺기도 했다고 한다. 특히 칼리굴라는 3명의 여동생 중 평소 끔찍하게 사랑했던 누이동생 드루실라가 병으로 죽자 드루실라를 신격화하고 '디바 드루실라'라고 부르게 한다. 또한 이전과 달리 검투사 경기를 잔인한 정도로 과격하게 바꾸어 버린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그리 멀지 않은 빌라-라-빌(Villers-la-Ville)에서 해마다 여름축제의 하나로 연극제가 열린다.



칼리쿨라는 매일 화려한 만찬을 즐기고, 자신을 태워다 준 인부에게 한화 약 2000만 원에 해당하는 금전을 주는가 하면 각종 여러 희귀 동물 들을 매우 비싼 값에 구하는 등 너무 많은 엄청난 일들을 벌이느라 티베리우스가 긴축정책을 펼치며 쌓아둔 국고를 1년 만에 바닥이 드러나게 하고 만다,


이런 성황에 이르자 칼리굴라는 카이사르 집안의 잡다한 물건들과 노예들을 경매로 내놓고, 매춘부들에게도 세금을 거두는가 하면, 부자들에게도 막대한 세금을 물게 하여 귀족들과 부유한 사람들까지 칼리굴라를 미워하기 시작한다.


칼리쿨라가 이처럼 검투사 시합을 과격하고 참혹하게 바꾸고 화려한 만찬을 즐기고 도박을 일삼으며, 마차를 끌고 온 인부에게 상상을 초월한 거액을 주는 등 국고를 탕진하자 민심은 급속히 이탈을 하게 된다. 더구나 칼리굴라의 첫 번째 아내였던 유니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자 그녀와 누이 드루실라를 신격화하는 등 비정상적인 행위를 한다.


특히 누이들과 근친상간을 맺고 스스로를 신격화하여 신처럼 복장을 차려입는 등 기행을 일삼는다. 그럴 때마다 칼리굴라는 그의 비정상적인 행위를 만류하는 측근들에게 버릇처럼 “oderint dum metuant”, 즉 저들이 나를 증오하더래도 두려워하고 있을 테니 내버려두라 “는 식으로 말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결국 칼리굴라는 서기 41년 1월, 팔라티누스 경기 도중 근위대장 카시우스 카이레아(Cassius Chaerea) 일당이 그를 포함해 아내와 딸 가족 모두를 참살함으로써 막을 내리게 된다. 그의 통치기간은 불과 3년 10개월밖에 되지를 않는다.


칼리굴라의 기행과 참살되는 장면이 머릿속에 혼탁하게 그려지면서 문득 지난 역대 대통령들의 기행과 몰락이 그대로 연상이 된다. 대통령이라는 직함을 절대 가져서는 안 되는 이들 전직 대통령들의 공통점은 무고한 국민을 죽음에 이르게 했고, 자신만을 위한 부를 축적하기 위해 대통령이라는 직위를 남용하고, 온 국민을 불신에 빠지게 하고 비민주적 행위를 일상화했다. 마치 칼리굴라가 자신의 아내와 누이를 신격화하고 자신마저 스스로 신인양 거들먹 거리며 주변 사람들을 권력이라는 방패막이를 두르고 “oderint dum metuant”를 외쳐대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의 이러한 기행은 여러 번 영화나 연극으로 상영되기도 했다. 이미 한국에서도 희대의 사기꾼과 날강도 같은 전직 대통령들을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와 영화가 본격적으로 제작되어 조만간 만천하에 보여줄 것을 고대해 본다. 하루빨리 그들의 정신병 같은 통치행위와 협잡이 만천하에 밝혀져 권력이 더 이상 비정상을 정상인 것처럼 꾸미는 도구가 아님을 알게 해야 할 것이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한시간 정도 거리에 '빌라 르 빌' 수도원이 있다. 지금은 폐허로 변했지만 그 규모가 엄청나다. 해마다 이곳에서 여름축제가 열린다.



3.


2018년 여름, 벨기에 수도 브뤼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어느 수도원에서 ‘칼리굴라’를 무대에 올린다. 젊은 황제 칼리굴라, 그가 겪었을 청년기의 좌절과 방황은 그가 지독히 사랑한 여인이자 친누이인 드루실라(Drusilla)의 죽음과 맞닿아 있다. 


누구나 죽지만 아직 죽음을 받아들이기에 너무 이른 나이의 이별은 받아들이기 쉽지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이로 인한 심리적 갈등과 비이성적 행위 역시 특이한 인간 유형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는 것 또한 당연할지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타인의 비이성적 행위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의 비이성적 행위만을 이해해 주기를 바랄 뿐이다. 마치 칼리굴라처럼 말이다.(* 그래서 나온 말이 바로 칼리굴라 효과(Caligula effect)이다. 금지된 것은 더욱 하고 싶어 진다는 의미에서...) 그것이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이 보여주는 행위 양식이기도 하다.


칼리굴라 연극의 원작은 알베르 까뮈의 작품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그는 황제이기 이전에 한 젊은이가 겪고 있는 비이성적 행동으로 인한 냉소주의와 비관적 행위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보여주려 한다. 한 젊은이로서 칼리굴라가 겪었을 절망과 좌절은 과연 비이성적인 행위로만 치부될 것인지, 그가 속한 사회의 부조리가 부추긴 것은 아닌지를 날카롭게 파헤치려 한다. 


이제는 다소 낯설고 비이성적 행동으로 비칠지 모를 칼리굴라가 우리 무대에도 오를 때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비록 선정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가 보여줄 부정적 효과도 나타날지 모르지만 젊은이들의 문제를 단지 청년실업 문제로만 매도해 버리는 한국사회의 비이성적 정책과 결정이야말로 오히려 젊은이들의 문제의 본질을 왜곡함으로써 더욱 젊은이들이 숨쉬기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젊은이들이 제대로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기 위해 우리 사회가 진정 필요한 노력이 무엇인지 꼼꼼히 제대로 생각해 볼 때가 된듯하다. 그것이 칼리굴라가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이기도 할 것이다. 과연 언제쯤 칼리굴라가 우리나라에서 상연이 될지 그것이 궁금하다.




빌라-라-빌(Villers-la-Ville) 수도원은 1987년 이래 지금까지 여름축제 연극무대로 이용되어 왔다. 한편 빌라 라 빌은 1146년 12명의 승려와 수도원장, 그리고 5명의 평신도가 클레어보 (Clairvaux)에서 이곳 빌러스(Villers)로 파견되어 새로운 수도원을 열었다. 이 수도원은 산속 계곡에 위치해 사회와 완전 격리되어 자급자족을 모토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지난 제2차 세계대전은 이곳을 황폐화, 아니 초토화함으로써 신에게 다가가기 위한 기도할 수 있는 숨은 공간 기능을 상실하고 대신 인간사회의 쉼터로 재탄생하는 계기를 마련하게 된다.


* 참고:  연극제 참가신청 사이트 http://www.deldiffusion.be/conta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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