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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Jun 30. 2018

사자의 언덕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벨기에  12

1. 워털루에 내린 비     


나폴레옹 보나 파르트(Napoleon Bonaparte ), 그는 지중해 코르시카 섬에서 1769년에 태어났다. 프랑스 군대 사병생활을 시작으로 급속도로 성장하더니 나이 30세가 되는 1799년 쿠데타로 프랑스를 장악한다. 그 후 프랑스 정치무대를 휘어잡으며 프랑스를 통치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드디어 나폴레옹은 나이 35세가 되는 1804년 프랑스 황제가 된다.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유럽을 지배하려는 원대한 계획을 세운다. 이때부터 나폴레옹은 영국을 비롯해 주변국들과 빈번한 전쟁을 일으킨다. 그러나 나폴레옹 군대는 1813년 라이프치히 전투에서 오스트리아, 프러시아, 러시아, 스웨덴 연합군에게 패한다. 결국 나폴레옹은 1814년 왕좌에서 물러나게 되고 퐁텐블로 조약으로 이탈리아 연안의 지중해에 있는 엘바(Elba) 섬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그러나 1년이 채 안된 1815년 2월 26일, 나폴레옹은 엘바섬을 탈출하여 1,000명 이상의 지지자들 호위를 받으며 프랑스 본토로 향한다. 3월 20일 나폴레옹은 군중들의 환호를 받으며 파리로 귀환한다. 나폴레옹이 파리로 돌아온 것을 알게 된 유럽 국가들은 전율하게 되고 또다시 나폴레옹을 실각시키기 위한 공동전선을 펴게 된다.      

드디어 벨기에 워털루에서 유럽연합군은 나폴레옹과 최후의 일전을 벌일 준비를 한다. 벨기에 워털루 지역(당시에는 네덜란드 영토였다.)으로 영국군과 프러시아 군대가 따로 떨어져 진격을 해 온다. 6월 18일 나폴레옹은 워털루 마을 근처에서 72,000명의 병력으로 브뤼셀 남부 지역에 주둔한 68,000명의 영국군과 맞닥 뜨린다.     


워털루 안내 포스터와 서적들



워털루 전투를 하루 앞둔 전날 밤하늘에는 짙은 먹구름이 몰려와 밤새 비를 뿌린다. 워털루에서 영국군 웰링턴 장군과 진지를 마주하고 있던 나폴레옹은 날이 밝자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전황을 보고받고 명령을 내린다. 오전 9시 공격을 하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정오로 공격 시각을 변경한다는 내용이었다. 비로 인해 땅이 너무 질펀해 대포와 병사들이 움직이기에 무리라는 생각에 계획을 변경한 것이다.     


나폴레옹의 명령으로 공격이 늦춰진 가운데 프러시아의 블레처 장군 휘하의 증원군은 그사이 영국군 진지에 도착한다. 그러나 나폴레옹은 이를 감지하지 못하고 영국군과 프러시아 군이 서로 분리되어 있을 테니 각개전투를 벌이면 쉽게 영국군과 프러시아 군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오판을 한다. 그러나 프러시아 군의 3만 명 이상의 병력이 그사이 워털루에 도착해 영국군과 함께 나폴레옹과 일전을 벌일 수 있는 준비를 마친다.     


그 후 벌어진 전투에서 노련한 백전노장 나폴레옹의 군대는 지휘관들끼리의 잘못된 정보교류와 판세 실수로 정예부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연합군과의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그 후 나폴레옹은 세인트 헬레나 섬으로 유배되고 1821년 5월 5일 51세의 나이로 “위대한 사자”(나폴레옹의 별자리가 사자좌라고 붙인 별명)는 유명을 달리하고 만다. 그러나 1840년 그의 유골은 프랑스로 돌아와 다른 프랑스 군 지도자들이 묻힌 파리의 앵발리드(Les Invalides) 지하 묘지에 안장된다.     


나폴레옹 군의 워털루 전투 패인의 결정적인 실수는 전날 밤 내린 비 때문에 전투 공격 개시 시각을 변경한 것이다. 물론 이것이 패인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작은 실수 한 가지가 엄청난 결과를 초래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다.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은 단순히 비 때문에 공격 개시 시각을 늦추었지만 그 때문에 나폴레옹의 상대는 회생의 기회를 확보하게 되었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모든 것은 자연적인 순리에 따라야 하겠지만 그 순리라는 것도 원칙이라는 차원에서는 반드시 지켜야만 하는 것이 순리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후 1820년 당시 네덜란드 왕이었던 윌리엄 1세는 그의 아들이 전투에 참가해 부상을 당한 곳으로 알려진 장소에 기념물을 세우도록 명령을 내린다. ‘사자의 언덕’으로 알려진 이곳을 건설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흙과 인원이 동원되고, 그 위에는 당시에 사용된 무기를 녹여 사자상을 만들어 올려놓았다. 그래서 워털루 전쟁터였던 이곳을 불어로 “Butte de Lion”(사자의 언덕)이라고 부른다.(* ‘사자의 언덕’은 나폴레옹의 별자리가 사자좌이기에 붙인 이름이다.)      


그런데 그 후 1853년 벨기에가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하자 이곳은 벨기에의 소유가 되고 만다. 네덜란드 왕의 아들을 위한 기념물이 졸지에 벨기에 소유로 넘어가버리니 네덜란드로서는 아쉽기 그지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자의 언덕(워털루 전투 기념물)과 행사안내 포스터




2. 정보는 돈이다     


1815년 6월 18일, 벨기에 브뤼셀 근교에서 전개된 워털루 전투는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과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벌인 한판 승부이다. 그런데 전쟁의 이면에는 언제나처럼 수많은 투자자가 거액을 놓고 벌이는 도박의 대상이기도 하다. 이 도박에서 이기면 천문학적인 돈을 움켜쥐지만, 지는 날에는 하루아침에 빈털터리가 될 수 있다.      


당연히 사람들 시선은 모두 이 전쟁에 쏠려 있었다. 런던 증권거래소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고, 워털루 전투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영국이 패할 경우 영국의 국채(consols) 가격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승리한다면 대박이 날 것은 말할 필요가 없었다.      


드디어 1815년 6월 19일 로스차일드가 심어 놓은 정보원이 워털루에서 영국군이 승리할 것이라는 상황을 보고하기 위해 런던으로 달려가 부두에 직접 마중 나온 네이션 로스차일드(로스차일드 집안의 셋째 아들)에게 승전보를 전달한다. 로스차일드는 증권거래소로 달려가 자기 휘하의 직원들로 하여금 국채를 매도하도록 은밀히 지시한다.


로스차일드가 채권을 매도하자 이를 곁에서 지켜본 투자자들은 영국이 패했음을 눈치채고 자기들도 소유하고 있던 영국 국채를 모두 매도해 버린다. 이때 매도가가 액면가의 5%도 안되었다고 한다. 이미 국채는 휴지조각이나 마찬가지가 된 것이다. 그러자 로스차일드는 투자자들이 매도해버린 채권을 재빨리 전량 매입한다.      


6월 21일 밤 11시, 웰링턴 장군의 특사 헨리 퍼시(Henry Percy)가 런던에 당도한다. 그리고 나폴레옹 대군이 여덟 시간의 고전 끝에 무려 3분의 1의 병력을 잃고 무참히 패배했다는 소식을 알린다. 이 소식이 런던에 도착한 시간은 네이선 로스차일드의 정보보다 무려 하루가 늦은 후였다. 로스차일드 은행은 무려 20배 이상의 시세차익을 챙긴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거의 대부분의 영국 국채를 소유하게 된 로스차일드 은행은 영국 화폐 발행의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된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로스차일드 가문의 시대가 시작된다.          


'사자의 언덕'(1815 기념물) 운행버스와 사자의 언덕 올라가는 입구 건물  




3. 워털루 전투는 오늘도 진행형이다     


1815년 6월 18일 영국군은 네덜란드와 벨기에, 프러시아 병사들로 구성된 연합군과 함께 나폴레옹 군을 맞아 전투를 벌인다. 유럽 전역을 단일 지배권으로 묶으려 한 나폴레옹의 의도를 분쇄하고 유럽 연합군은 자신의 존재를 부각하고 유럽의 패권국으로 자리할 욕망을 은근히 발현시킬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워털루 전투를 승리로 장식한 연합군은 여전히 워털루 전투의 악몽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 여파는 현재진행형이다. 워털루 전투가 미친 가장 큰 영향은 유엔과 나토 등 유럽을 묶는 국제 조직을 탄생시키는 바탕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워털루 전투가 국제조직을 꾸리는 바탕이 되었지만 영국이 노리는 세계 패권국가로서의 위상 확보 욕심은 오히려 영국을 유럽연합에서 탈퇴하게 만든다.     


워털루 전투 이후 그간의 영국 행보를 보면 영국의 국제적인 위상에 대한 속셈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이 전투에서 가장 큰 소득을 올린 국가는 말할 것도 없이 영국이다. 프러시아의 블루처 장군과 협력을 하면서도 유럽연합군의 중심은 언제나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이 중심이었다. 당시 영국은 연합군의 1/3이 조금 넘는 병력을 참전시키고 있었는데 그 영향력과 주도권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전쟁이 종료되자 영국의 국제무대에서의 발언권은 효력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에 따라 먼저 영국은 비엔나에서 체결한 비엔나 조약에 영국의 식민지에 대한 권리를 삽입한다. 이에 대해 다른 국가 누구도 영국군의 식민통치에 대해 반대를 하거나 방해하지 않는다. 영국으로서는 그야말로 해가지지 않는 나라를 결정짓는 탄탄대로를 확보한 셈이다.   

   

나폴레옹이 존재하던 시기 유럽의 초강국으로 존재하던 프랑스를 대신해 본격적으로 영국이 선두주자로 나서게 된 것은 그렇기에 결코 우연이 아니다. 결국 나폴레옹의 패배는 유럽에 또 다른 초강국을 출현케 하고 나폴레옹의 프랑스를 대신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동안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초강대국 자리를 놓고 전쟁을 벌였지만 여전히 영국이 우위를 점하고 있는 셈이다. 그러니 유럽연합을 탈퇴하고 유럽연합과 맞짱을 뜨고 있는 영국의 속셈이 무엇인지 쉽게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는 눈에 쉽게 띄지는 않지만 워털루 전쟁을 발판으로 세계 금융자본을 거의 장악하다시피 한 로스차일드 가문의 음모 아닌 현실 전략이 주효하고 있다. 즉 세계 단일 국가 설립을 모토로 로스차일드 가문이 세계화폐 발행을 주도하면서 전략적 실천을 주도해 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이차대전 이후 심지어 미국 연방준비은행의 화폐 발행권까지 좌지우지하게 된 로스차일드 가문의 행보는 이제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또 한 가지, 함께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워털루 전쟁 후 미국이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되고 국제적인 위상을 확보하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당시 워털루 전쟁의 여파로 유럽 전역은 식량난이 가중되는데 이때 곡물시장의 주인공으로 미국이 등장한다. 영국은 모든 곡물시장에 대한 권리를 미국에 우선적으로 부여하고 미국의 이익을 도와준다. 미국은 그 후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세계 경찰국가로 급성장하게 된다.      


나폴레옹의 워털루 전쟁 참패의 여파는 세계권력판도를 바꾸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셈이다. 그러나 여전히 워털루 전쟁은 끝나지 않고 현재진행형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사자의 언덕에서 바라본 인근 벌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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