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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Apr 11. 2017

진리는 보이는 것에 있지 않다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네덜란드  19


1. 지금은 시각의 전환이 필요한 때


여행을 하다 보면 문득 “나는 지금 왜 이곳에 와 있는가?”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혹자는 아름다운 자연에 반해서, 어떤 사람은 공적인 일 때문에, 또는 어떤 이는 그저 발길 닿는 대로 가다 보니, 그런데 어떤 사람은 누군가를 만나고 싶다는 생각에 특별한 곳을 찾는 경우가 있다. 모두가 여행을 하는 데는 나름대로의 목적이 있다는 말이다.


그런데 네덜란드라는 나라를 여행하다 보면 각 지역마다 특징적인 사람들이 아름다운 풍광처럼 떡 버티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엄청난 자연적인 경치처럼 때로는 사람이 그 역할을 대신하며 격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면 렘브란트나 빈센트 반 고흐를 만날 때 특히 그런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들의 작품은 물론이고 그들이 지나온 삶의 여정을 들여다보게 되면 저절로 감동과 특별난 감정을 느끼게 되니 네덜란드를 여행할 때는 주변을 잘 살펴볼 일이다.


그런데 그동안 네덜란드를 소개하면서 개인적으로 ‘이 사람’을 다루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를 고민했던 적이 있다. 어쩌면 네덜란드가 숨겨놓은 보물 같은 사람일지도 모르는데, 필자는 너무 학술적인 느낌이 강하지 않을까라는 나름대로의 이유를 붙여 나의 게으름을 정당화하려 했다. 그렇게 해서 네덜란드를 모두 다루었다고 자부하면서 다음 주제를 다루려 이런저런 준비를 하면서 잠시 ‘이 사람’을 잊고 있었다. 그러던 중 다음 주제를 다루기 위해 부족한 자료를 모을 겸해서 지난달 중순 북유럽으로 떠나는 순간 비행기 안에서 우연히 그에 관한 기사가 실린 잡지를 보게 되었다.


에셔의 자화상



기내에는 암스테르담으로 가는 비행기였기에 네덜란드 소식들을 다룬 기사들이 실린 잡지가 놓여 있었다. 잡지의 표지는 필자의 눈길을 단숨에 사로잡았다. 잡지의 제목 아래에는 이 잡지의 주제를 한눈에 보여주는 제목이 큼지막하게 쓰여 있었다. “Change Perspective: The Optical Illusion of M. C. Escher” 제목에 끌려 앉자마자 단숨에 기사를 읽어내려갔고 비행기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에셔에 대한 글을 다시 준비해야 하는 이유는 물론 지금 쓰는 글의 내용들을 어느 정도 정리할 수 있었다. 이 글은 바로 그때 느낀 감정들을 포함해 그에 관한 글을 정리한 것이다.



2. 그래픽 디자이너, 에셔


에셔(M. C Escher: 1898-1972), 그는 그래픽 디자이너이다. 그의 직업은 흔한듯하면서도 지금까지 별로 눈에 띄지 않은 직업이기도 하다. 그래서인지 예전 사람 치고는 참 독특한 예술적 직업을 가진 사람이구나라는 걸 느끼게 한다.


에셔는 1972년도에 세상을 떠난다. 그가 죽은 지 45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가 누구이며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인터넷상에서나 서적을 통해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정작 그 작품이 누구의 작품이며 무엇을 말하려 한 것인지 등은 잘 알려지지 않은 듯하다.

M. C. Escher, 그의 이름은 대부분 이렇게 에셔로만 표기되기 일쑤이다. <Maurits Cornelis Escher> 이것이 그의 원래 이름이다. 그런데 그가 어려서부터 그의 부모는 그를 <Mauk>라고 이름 전체를 부르기보다 이름자 두 개를 합친 별칭으로 이렇게 줄여서 부르곤 했다.


에셔는 1898년에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기계를 다루는 기술자였는데, 19세기가 거의 끝날 무렵 태어난 그는 20세기가 태동하는 벽두에 기술공의 아들답게 기계적인 상상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그가 태어난 곳은 네덜란드 중북부 ‘Friesland’ 지방의 리우바르덴(Leeuwarden)이란 곳이다. 그러나 조만간 그가 5살이 되는 해에 가족들은 좀 더 동쪽에 위치한 도시 아른햄(Arnhem)이란 곳으로 이사를 한다.


Reptiles(1943)



마우크(Mauk)는 어려서부터 상상력이 풍부한 꿈 많은 소년이었다. 그러나 반면에 그는 학업성적이 별로 좋지가 않았는지 초등학교 2학년을 두 번이나 다녀야만 했다. 얼마나 학교 성적이 좋지가 않았으면 같은 학년 수업을 이 년씩이나 들어야 했는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암흑기나 다름없는 시절이었음에 틀립이 없었을 것 같다.(아마 학업에 재미를 붙이지 못한 결과 낙제를 했었던 듯하다.)


그가 어느 정도 컸을 때 그는 아른햄에서 중등학교에 다니게 되는데 드디어 그의 재능이 빛을 발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리기 시작한다. 애셔가 아른햄의 중등학교를 다니면서 드로잉 수업을 듣게 되면서부터 그의 눈빛은 번득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그가 드로잉을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그가 밝혔듯이, “드로잉을 잘한 것은 아니자만 당시 끔찍한 학교생활에서 유일하게 내게 희망을 준 과목이 바로 드로잉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후에 그가 대학을 가게 되었을 때 건축공부를 하기 위해 하를럼에 있는 ‘건축과 장식미술 관련 학과’에 입학을 한다. 그러나 곧장 ‘그래픽 아트’로 전과를 하고 만다. 에셔는 그 후 암스테르담 출신의 유대인 드 메스퀴이타(S. J. de Mesquita)라는 그래픽 장식 예술가를 만나 그의 지도를 받게 된다.


그는 에셔에게 판화 제작에 관한 방법을 가르치고 직접 판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드 마스퀴에타의 작업은 단순했다. 하지만 그의 강의 내용은 언제나 기본적인 과정으로서의 형식에 집중했는데 에셔는 대부분의 시간을 이 작업에 몰두를 한다. 아마도 이런 기본 작업으로 인해 에셔가 순수 예술 가로서 보다는 디자인 분야의 전문가로 비치는 이유가 되는 것인지 모르겠다고 주변 사람들은 말한다. 아무튼 이곳에서는 그래픽 아트와 목판화 작업들은 대부분 순수예술보다는 디자인 작업의 일환으로 취급하는 경향이 강했던 모양이다.


어쨌거나 그가 하를럼에서 교육을 무사히(?) 마치고 드디어 세상 밖으로 나가게 된다. 하지만 그가 졸업과 동시에 택한 일은 취업이나 전문지식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여행을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가 처음 찾은 곳은 바로 스페인이었다. 스페인에는 그가 후에 그의 작품 바탕이 되는 기이한 건축물들이 즐비한 곳이기도 했다.


Convex and Concave(1953)



1922년에 그는 알함브라를 방문한다. 이곳은 그라나다에 있는 14세기 이슬람 건축을 대표하는 건축물이 있는 곳이다. 이곳에서 에셔는 알함브라 궁전의 건축양식과 구조에 매료되는데, 특히 마욜리카 기와와 장식 디자인에 매료되고 만다. 나중에 그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 당시 그가 본 알함브라 궁전의 건축양식 등에 대해 언급을 하는데, 건축물의 장식은 내가 생각한 그 이상으로 엄청났고 건축물의 위엄과 가치는 상상 이상이었다고 술회를 한다.


특히 건축물의 단순미가 그를 흥분하게 만들었다고 표현했다. 그의 이러한 회고는 나중에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 수학적인 특징들의 의미를 알게 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에셔의 작품에 나타나는 반복적인 규칙성과 타일 같은 조각으로 연속적인 반복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 등은 당시 알함브라 궁전의 스케취에서 따온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에셔의 작품은 그 출발부터가 수상하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작품을 만들어나간 것이 아니라 여행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토대로 자신만의 영감을 정리, 해석해 작품으로 완성되어 갔으니 말이다.


한편,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 대해 예술적인 측면보다는 대부분 책방에서 볼 수 있는 학술적인 결과물처럼 생각하는 경향이 많다. 특히 많은 사람들이 기존의 예술작품처럼 특정의 장르로서 그의 작품을 보려 하기보다는 착시현상을 논하는 좋은 자료로서, 또는 시각적인 반전을 꾀하는 자료로서 심리적인 상태를 탐구하는 좋은 자료 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은 대부분 아방가르드 적인 특성을 담고 있는 훌륭한 예술작품으로 취급되어야 한다는 주장들 역시 만만치 않게 대두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의 작품과 주제와 관련한 것들은 대부분 일상생활과 밀착되어 있는 소재들에서부터 대부분 출발을 한다. 따라서 그의 주제가 지니고 있는 일상성이란 점이 그의 작품을 규정짓는 주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작품들은 단순히 기계적인 사고를 통해 제작된 작품이라기보다 일상생활에서 만나게 되는 대부분의 대상들을 긍정적이든 부정적인 측면에서 든 간에 제기되는 의문점 등을 그래픽으로 나타내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점들을 생각하게 해주는 기능을 한다. 따라서 그의 작품들은 단순한 아방가르드뿐 아니라 그 이상의 미적 감각을 새롭게 하는 주요한 시각을 제시한다고 할 수 있다.


Drawing Hands(1948)



3. 수학적 법칙


에셔는 얼마 후 또다시 이탈리아로 여행을 간다. 그런데 1923년 3월에 그가 찾은 이탈리아에는 어느 스위스 가족이 놀러와 묵고 있었다. 이 가족들 중에는 에셔가 나중 그의 아내로 맞이하게 되는 예타 우미커(Jetta Umiker)가 함께 와 있었다. 이때부터 두 사람은 사랑의 행각을 벌이게 되고 함께 이탈리아의 제노아부터 프랑스의 아네시, 그리고 벨기에의 브뤼셀을 여행하고 다시 이탈리아로 돌아와 로마에 숙소를 정하고 이곳에서 생활을 하게 된다. 두 사람은 그렇게 로마에서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되는데 이때 이미 그는 세 아들 중 두 아이를 로마에서 출산을 했을 뿐 아니라, 그의 초기 작품인 동판화와 목판화 등의 주제를 위해 이탈리아 건축물과 자연경관의 이미지들까지도 열심히 스케취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이탈리아의 파시스트가 세를 확장하게 되면서 결국 에셔가족은 이탈리아를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야만 했다. 처음에는 잠시 에셔의 부인 고향인 스위스로 갔다. 그러나 에셔는 그곳을 무척이나 싫어한다. 그곳에서는 그가 원하는 아이디어를 펼칠 수가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래서 에셔는 결국 브뤼셀로 또다시 거처를 옮긴다. 그러나 조만간 세계 2차 대전이 일어나게 되자 그곳에서도 살기가 어렵다는 걸 느끼게 되자 결국 에셔는 보따리를 싸서 1941년 가족들을 데리고 그가 태어난 네덜란드 중북부지방에 있는 바아른(Baarn)으로 거처를 옮겨 고향으로 귀향을 한다.


Ascending and Desending(1960)



이 시기 그가 가족들과 함께 이탈리아를 떠나 바아른으로 거처를 옮길 때까지의 1937년부터 1941년도 사이의 시기는 중요하다. 이 당시 그가 집중했던 주제는 알함브라에서 보았던 바로 그 건축물의 단순함과 장식미의 극치를 떠올리고 이를 활용한 수학적 법칙을 대입하는 것이었다. 이때의 수학적 법칙은 결국 그의 작품을 가장 혁명적인 예술작품으로 승화시키는 결정적 작용을 한다.


“그는 상징적 수학 법칙과 씨름을 한다. 그러나 그는 이미 상당한 수준의 기하학적 지식을 터득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수학적이고 과학적인 생각들, 예를 들면 무한대나 이중성, 반영과 상대성 등의 개념에 심취해 있었다. 그가 심취해 있던 개념들을 직접 방정식에 대입해 볼 수는 없지만 그의 작품들 대부분에서 그의 수학적 사고를 발견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의 작품들을 볼 때 우리는 그가 상상하던 세계가 단지 그냥 무작위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정밀한 수학적 관계 속에서 진행되는 논리적 대상으로 보았던 것이다. 따라서 에셔는 그의 작품에 시각적인 수학의 법칙들을 대입하게 된 것이다. “


도리스 샤트슈나이더(Dorris Schattschneider), 그는 <Visions of Symmetry in M.C.Escher, 1990/ 2004>의 저자인데, 그는 그동안 에셔의 작품에 대해 수학적 원리와 요소들을 분석해 내는 업적을 이룩한 사람이다. 그는 에셔의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수학적 법칙을 찾아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아무튼 에셔는 1970년도까지 바아른에서 거주를 한다. 이때까지 에셔는 이곳에서 수많은 작품들을 제작하는데, Reptiles(1943), Relativity(1953), Drawing Hands(1948), 그리고 Ascending and Desending(1960) 등 그의 대표작이랄 수 있는 작품들 대부분이 이때 만들어진다.




4. 대중문화로서 에셔의 작품성


그의 작업 스타일은 대단히 긴장 속에 이루어진다, 그는 누가 볼까 봐 커튼을 치고 그의 작업실 안이 보이지 않도록 신경을 쓰고는 했다. 그렇다고 그가 자폐증 환자 같은 증상을 보였던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사람들을 만나기를 좋아했고 실제 그는 로터리 클럽의 정식 멤버로서 많은 활동에 직접 참여하기도 한다. 특히 그는 대중들을 위한 그래픽 관련 강의도 직접 하면서 많은 대중들을 만나기도 한다. 그는 이런 일들을 매우 즐거워했으며 가능한 많은 사람들을 만나려 노력을 했다.


그러나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그의 부인이 1967년 애석하게도 그의 곁을 떠난다. 에셔는 그가 작업을 할 때는 언제나 주변이 조용해야만 했다. 그런데 그가 작업을 할 때 아이들이 그가 작업하는 작업실 창밖에서 뛰어놀거나 떠드는 소리가 나게 되면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는 바람에 부인과 언제나 다툼을 했었다. 이런 일로 에셔와 아이들, 그리고 부인과의 관계는 서로 상처를 받게 되고 극복하기 힘든 갈등관계를 가지게 되어 결국 각자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더구나 그가 작업을 하고 작품 발표를 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경비는 대부분 에셔의 부모가 경비를 충당했다. 그러다 보니 부모의 경제력 덕분에 가정을 꾸리는 심리적 압박감 역시 에셔부부의 관계 유지에 적지 않은 갈등요인이 되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에셔에게도 기회가 찾아온다. 그의 나이 70이 되었을 때 네덜란드에서 그의 첫 번째 개인전을 하게 된 것이다. 이차대전이 종료된 후 차츰 그의 작품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던 시기에 그의 작품전은 사람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된다. 특히 이때 <Time>가 그를 “조금밖에 알려지지 않은 네덜란드 그래픽 예술가”란 제목으로 기사를 쓴다. 그다음 달에는 <Life> 잡지가 그에 대한 특집기사를 또다시 쓰게 되자 에셔의 명성은 차츰 세계적으로 알려지게 된다.


1960년대에 이르면서 이미 에셔의 명성은 고조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수학자와 과학자들 사아에서, 그리고 그래픽 작가들 사이에서 많은 호응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에셔는 히피들로부터도 상당한 호응을 받는다. 그 이유는 바로 에셔가 기존의 시각을 뒤집어엎는 작품들을 만들어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시각과 생각의 전환’ 이것이 바로 에셔의 작품이 보여주려 했던 ‘관점의 변화’였다.


○ 헤이그에 있는 게멘테박물관이 에셔의 작품을 가장 많이 소장하고 있는데, 2002년에 에셔 작품을 상설 전시할 수 있도록 헤이그에 ‘에셔 박물관’을 따로 마련하였다.



에셔는 그의 작품에 대해 사람들이 미쳐 생각해 내지 못한 시각들을 보여주는데, 예를 들면 <Trippy> 같은 작품에서 그가 생각한 것은, 왜 바닥은 천정이 될 수가 없는가?라는 ‘사고의 전환’이었다. 그는 사람들이 단일 차원의 평면만을 생각하고 있을 때 이미 이차원의 세계와 삼차원의 세계를 동시에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다. 이점이 그가 보통사람들과 다른 점이자 혁명적 사고의 소유자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뒤늦게 명성을 얻으며 승승장구하던 에셔는 아깝게도 1972년 3월 27일에 숨을 거둔다. 향년 73세였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가 죽자 그의 명성은 뒤늦게 폭발적으로 관심을 증폭시키게 되고 그의 작품들이 엄청나게 팔리는 기현상까지 나타나게 된다. 어느새 전 세계가 그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에셔는 유명해져 있었다.


그의 작품은 448개의 프린트 작품과 2000개 이상의 드로잉과 스케치 작품들이 있다. 이 작품들은 에셔재단이 관리하는데 그의 재단은 해마다 전 세계적으로 전시회와 작품 판매를 통해 기하급수적으로 수익을 창출해 내고 있다. 더구나 최근에는 ‘Minecraft’ 같은 컴퓨터 게임과 그래픽 비디오 작품들이 인기를 얻으면서 에셔에 대한 관심은 점점 더 높아지고 있다.


2017년에는 드디어 한국과 마드리드, 그리고 위스콘신 등지에서도 에셔의 작품들이 전시될 예정이라고 한다. 부디 그의 작품들을 다시 한번 볼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고대해 본다. 그래서 그의 작품들이 지니고 있는 ‘시각’과 ‘아이디어’들이 진정 ‘내 것’으로 만들어 볼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 참고 문헌

- Holland Herald, KLM, 2017/3

- Abenteuer mit unmoeglichen Figuren, Bruno Ernst, Taco, 1989

- Wikipedia/ M. C. Escher

- 에셔 재단 홈페이지: http://www.mcescher.com/


○ 다음 그림들은 불가능한 도형들을 보여준다. 에셔의 작품과 함께, 불가능한 도형으로 제작된 수많은 그래픽 작품들을 볼 수가 있다. 대표적인 작품 몇 가지를 소개한다.


○ 1934년 스웨덴의 Oscar Reutersvȁrds가 제작한 큐브 그림이 ‘불가능한 도형’을 그린 최초의 작품이다. 스웨덴은 1982년도에 그의 작품들을 우표로 재탄생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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