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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Mar 23. 2024

노트르담 성당의 보물들

“누군가의 마음을 훔친 것이라면 그건 누군가의 보물일 수 있겠다.

그러나 우리 모두의 마음을 훔친 것이라면 그건 진짜 보물임에 틀림없다. “



1. 파리의 자존심, 파리의 숙명     


파리 노트르담 성당(Cathédrale Notre-Dame de Paris), 파리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그런데 2019년 4월 15일 노트르담 성당은 불이 난다. 현지시각으로 저녁 7시경 본당 다락에서부터 불이 붙기 시작해 다음날 아침 오전 4시경 화재가 진압된다. 단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무사히 화재진압이 완료되었다고 한다.     


9시간 정도 진행된 불로 노트르담 성당 중심 부분은 거의 무너져 내렸고 노트르담 성당 중앙의 첨탑과 목조 지붕이 붕괴되는 등 큰 피해를 입는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으로 진화 작업 끝에 성당을 떠받치고 있는 가장 기본적인 골조와 정면 탑은 붕괴되지 않았다.        


이 사진들은 화재 발생부터 진압까지 전과정을 담은 다큐멘타리 영화 “불타는 노트르담 성당”을 캡쳐한 것이다
이 사진들은 화재 발생부터 진압까지 전과정을 담은 다큐멘타리 영화 “불타는 노트르담 성당”을 캡쳐한 것이다


그러나 내부의 구조가 생각보다 매우 취약해졌고 더욱이 코로나바이러스로 인해 화재가 난 노트르담 성당에 대한 관심이 현저히 떨어져 보수공사가 어떻게 진행하게 될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그러나 노트르담 성당 재건축위원회는 첨탑을 원형 그대로 복원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복원작업에 착수한다.      


노트르담 대성당은 파리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프랑스 마크롱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돈이 얼마가 들든, 몇십 년이 걸리든 반드시 노트르담을 재건시키겠다. 이건 프랑스의 숙명이다."라고 성명을 발표한다. 이후 루이뷔통 재단이 2억 유로, 구찌가 1억 유로를 노트르담 재건 성금으로 기부하는 등 프랑스 각지에서 모금이 시작된다. 기부 행렬이 이어지고 한화로 대략 1조 원 이상이 모금된다.      


이러한 노력들을 보면서 프랑스가 무단으로 가져간 다른 나라들의 문화재의 원소유국들이 자국의 문화재를 돌려달라는 요구가 빗발친다. 프랑스의 자존심을 말하면서 다른 나라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는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말이다. 예를 들어 한국의 ‘직지심체요절’ 같은 경우 프랑스가 공개하지 않으면 볼 수 조차 없으니 말이다.          


'직지'는 구텐베르그 활자보다 65년이나 앞선 현존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본이다.



2. 노트르담 성당의 보물     


노트르담 성당에는 루이 9세가 착용했던 제례복과 십자가 등 보물과 성물들이 여럿 있다. 그중 예수가 처형될 당시 머리에 썼던 가시면류관과 예수를 매단 십자가를 제작할 당시 사용한 나무못 등이 중요한 성물들이다. 이 성물들을 비롯해 성당이 보관하고 있던 1,300점에 이르는 보물들은 화재가 한창일 때 이미 성당을 빠져나간다. 성당에 불이 나자마자 가장 먼저 성당의 보물들을 챙겼다.     

     

또한 성모의 탄생을 그린 르 냉(Le Nain)의 그림들과 루뱅 보갱(Lubin Baugin)의 피에타, 그리고 나폴레옹 대관식에서 사용한 장식 등도 무사히 구출된다. 이와 함께 첨탑에 있던 12 사도상을 비롯한 석상, 동상 등 16개의 동상 문화재는 보수공사를 이유로 화재 전 이미 다른 곳으로 옮겨놓아 다행히 화를 면한다. 이중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상은 노트르담 성당을 나와 현재 파리 생제르망 옥세루아(Saint-Germain-l’Auxerrois) 교회로 옮겨져 여전히 노트르담이 살아있음을 일깨워주고 있다.    

 

17세기에 노트르담 성당을 그린 작품들(루브루 박물관)


그리고 노트르담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던 이동식 보물들은 다행히 화재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던 미사 관련 물건들이 대부분이었기에 화재가 발생하자마자 가장 먼저 불타는 성당을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그동안 미사나 기타 관련 직무에 사용한 그릇과 장신구, 전례서 등 역시 중요 보물들로 대접을 받고 있는데, 현재 미사를 집행하면서 사용하고 있거나 기타 직무 및 성찬 집행에 사용되는 물품 상당수가 무사히 구출되었다고 한다.   

   

1) 미사용 십자가들(루브르 박물관) 

2) 왕관모양의 가시면류관 보관함, 콘스탄티누스 1세(310-337)가 보관하다가 콘스탄티노플의 볼드윈 2세(1228-1261)를 거쳐, 1239년 루이 9세(1226-1270)가 파리로 가져온다.(루브르 박물관)

3)  금박과 에나멜을 입힌 청동 지팡이, 행진용 십자가(루브르 박물관)


이외에도 노트르담 성당 보물들이 많은데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으로, 성당의 오르간과 장미창, 스테인드글라스, 그림 등 수장고에 보관되어 있는 것들 역시 대부분 구출되었다. 노트르담 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대부분의 보물들은 보물로 보존되어 오는 동안 나름의 분류에 따라 보관되어 왔기 때문에 다행히 화재가 발생한 상태에서 구출작업을 통해 어렵지 않게 대피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보물을 대피시키는 작업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이루어졌다. 화재로 잃어버리게 되면 그동안의 문화적 가치를 모두 잃어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기 때문에 당연한 노력이라고 하겠다. 

    

1) 나폴레옹 1세의 봉헌을 위한 준비로서 1710년부터 10년간 제단 세팅에 사용할 촛대와 같은 것들을 구매한다. 또한 각종 귀금속 등도 마련하는데 이 것들은 그 후 나폴레옹 대관식이 끝난 후 노트르담 성당에 보관된다. 오른쪽 조세핀 왕비의 왕관이다.(루브르 박물관)

2) 금박과 에나멜을 입힌 구리, 은, 금박, 붉은 모로코를 사용한 복음서들, 성당의 수호성인을 부조로 입힌 성 바오로 복음서와 미사를 위한 동정녀 마리아 복음서이다.(1867-1868)(루브르 박물관)

3) 금실로 직조한 루이 필립(1830-1848) 왕의 제례복(루브르 박물관)


노트르담 성당의 보물들은 1,343년에 처음 목록으로 작성해 보관, 정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후 종교개혁과 시민혁명 등의 과정을 거치면서 보물들은 파괴되기도 하고 보관상 실수로 없어지거나 팔려나가기도 한다. 특히 프랑스 시민혁명 이전까지 보물들은 전염병과 기근, 그리고 전쟁 등과 같은 위기 상황에 대비할 수 있는 준비금 마련을 위한 것으로 간주되어 판매대상이 되기도 했다.


더구나 노트르담 성당 보물들은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이 일어나게 되자 프랑스에서 가장 귀중한 문화유산으로서 대접을 받던 보물들이 잔인하게 모두 그 기억을 지우게 되고 노트르담 보물들은 그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게 된다.      


1804년이 되면 노트르담 성당 보물들은 또다시 관심을 받게 된다. 노트르담 성당 가까운 곳에 있는 생트 샤펠(Sainte Chapelle) 성당에 보관되었던 여러 성물들이 노트르담 성당으로 옮겨 오자 또다시 성당 보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게 된다.      


이에 덧붙여 참사회의 주문품과 기부가 이어지면서 성당 보물들은 점점 풍부해져 간다. 이와 함께 건축가 외젠 비올레 르 듀이가 성당을 복원하고 제의실을 다시 지으면서 성당 보물들은 비약적으로 늘어나게 되어 현재에 이르게 된다.      


찰스 포어슨(1609-1667), 성모의 삶을 담은 2개의 테피스트리를 위한 스케치, 캔버스에 유화(ca, 1652)(루브루 박물관)


이처럼 귀중한 노트르담 성당의 보물들은 성당 화재로 인해 노트르담 성당을 벗어나 현재 여러 협력 기관에 뿔뿔이 흩어져 보관된다. 수장고에 있던 보물들은 루브르 박물관으로 갔고, 태피스트리는 ‘Mobilier National’(고블린의 태피스트리 제조소 등을 관장하고 가구 문화재를 관리, 보존하는 프랑스의 국가기관)로 보내졌다. 

루브르박물관에서 진행 중인 노트르담 성당 유물전 포스터

화재가 난 뒤 2주 동안 1,300점의 유물들이 성당을 떠났다. 이들은 대부분 성당 수장고에서 나온 것들로서 마이스(Mays)의 그림(3 mx4 m) 20점, 무게만 1톤이 넘는 샤를 10세의 태피스트리를 포함한 3개의 대형 태피스트리가 포함되어 있다.      


샤를 10세의 대형 태피스트리는 바퀴가 달린 카트 위에 놓인 나무 관 안에 보관되어 있었는데 화재 당시 소방관이 화재를 진압할 때 뿌린 물에 다소 습기가 스며들어 수리를 해야 할지도 모른다. 다행히 샤를 10세의 태피스트리는 ‘Mobilier National’로 운송되어 조사를 받고, 아틀리에에서 복원될 날을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현재 수장고에 있던 보물들은 루브르 박물관측이 보관할 장소를 제공하고 있기 때문에 이 보물들을 일반인들이 관람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하는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가 썼던 가시 왕관과 십자가의 나무못, 루이 9세가 사용한 제례복 등은 현재 보관 중인 생제르맹-르루아 교회가 외부로 대여를 하지 않기 때문에 전시회에 포함되지 않아 볼 수가 없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화재로 폐허가 된 지 5년이 지난 지금, 루브르 박물관이 전시하고 있는 노트르담 성당의 보물전은 전시가 마무리되면 노트르담 성당이 다시 문을 열게 되는 날 그때 제자리로 돌아갈 것이라고 한다.          

눈물 흘리는 마리아 동상,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머리에 썼던 가시면류관, 황금으로 만든 나뭇가지에 갈댓잎을 원형으로 덧대어 엮었다. 왼쪽은 전시용 모조품.(영화 화면 캡쳐)

  

          

3. 보물의 재건     


파리에 교구가 설립된 것은 3세기경에 생드니가 도맡았다. 현재의 노트르담 성당은 1180년 직후 착공된다. 노트르담 성당 건축에 대한 정확한 역사는 불확실하지만 “노트르담, 즉 성모 마리아”에 대한 헌정은 9세기에 이루어진다.     


이후 13세기에 이르면 이미 보물, 특히 그리스도와 관련된 성물을 관리하고 보존하기 위한 공적인 기구를 처음 설립한다. 보물들을 관리, 보존하기 위한 건물도 따로 마련한다. 그 후 1343년, 1416년, 그리고 1438년에 이미 그 공공 기구의 역할 수행 덕분에 적지 않은 보물들이 관리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1548년 개신교도들이 폭동을 일으키면서 노트르담 성당의 성상들은 우상숭배라고 여겨 성당의 유물들을 비롯해 노트르담 성당의 외관까지 파괴한다. 이후 루이 14세 때와 루이 15세 때에 이르러 전 유럽에 걸쳐 파괴된 성당들을 보수하고 현대화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노트르담 성당과 함께 개축을 한다. 성당 안에 있는 무덤과 스테인드 글라스는 정리되었지만 다행히도 북쪽과 남쪽의 장미창은 파괴되지 않았다.

     

필립 드 새샴페인의 워크숍(1602-1674), ‘성모의 삶’에 관한 시리즈를 테피스트리로 제작하기 위한 준비작업물: ‘성모의 탄생’(1638)


이런 성당 유물 파괴는 그 후에도 계속된다. 1793년 프랑스혁명 당시 노트르담 성당 역시 수난을 당한다. 이 시기 동안 성당의 많은 보물들이 파괴되거나 강탈을 당한다. 구약 성서에 나오는 유다 왕들의 조각상들이 (봉건질서를 상징하는 프랑스의 왕들로 오인되어) 머리가 잘려나가기도 한다. 잘려나간 많은 머리들이 1977년 성당 인근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고, 지금은 클뤼니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또한 당시 제대에 설치되어 있던 성모 마리아상은 자유의 여신상으로 교체되었다.      


또한 성당의 종은 간신히 용광로행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당시 성당 내부는 한때 말먹이나 음식을 보관하기 위한 창고로 사용되기도 한다. 성당의 수난의 역사와 보물의 생명력은 상관관계에 있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그 후 1804년 생트 샤펠(Sainte Chapelle) 성당에 보존되어 있던 수난의 성물 몇 점이 노트르담 성당으로 전달되면서 보물 복원이 또다시 시작된다. 간혹 저명한 인물이나 성직자의 기부 역시 보물창고를 채워나간다.     

그러나 1830년 7월 시작된 절대왕정에 대한 민중봉기가 발발하면서 소요사태가 또다시 나타나기 시작한다. 1831년 2월에는 파리에서 교회와 대주교의 사택이 약탈을 당하기까지 한다. 이 소요사태는 그해 연말까지 이어지는데 1831년 12월 방직공장 직원들 1000여 명이 죽임을 당하게 되고 시민들의 자유주의 운동은 결국 실패하게 된다.      


중세시대의 책, 주로 미사 관련 내용을 담았다. 책 표지는 간혹 귀금속으로 장식한 것들도 있다.
중세시대의 책, 주로 미사 관련 내용을 담았다. 책 표지는 간혹 귀금속으로 장식한 것들도 있다.


더구나 1832년 초반에 엄청난 콜레라가 번지면서 파리에서만 2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기까지 한다. 그 후 시민운동은 1832년 6월 파리 봉기로 이어지면서 또다시 폭동(빅토르위고의 레미제라블은 이 봉기를 배경으로 묘사하고 있다.)이 발발하게 된다. 이처럼 1830년대 시민혁명과 대주교 약탈 등으로 이어진 사회적 분위기는 노트르담 성당에도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그동안 조금씩 쌓여가던 보물들은 또다시 파괴되고 사라지고 만다.     


그 후 1849년 건축가 Eugène Emmanuel Viollet-le-Duc가 대성당을 복원하는 작업을 한다. 노트르담 성당이 부분적으로 재건축되거나 새로운 건축물을 증축하게 되면서 노트르담 성당은 차츰 네오고딕 양식을 채택해 일관된 외관을 갖춰나간다.  이와 함께 성당 창문의 스테인드글라스와 성당내부에 여러 동상과 부조물 등 역시 점차 설치되기 시작하면서 노트르담 성당의 보물들이 새로이 쌓여나간다.     


드디어 노트르담 성당이 세워진 이래 2013년 노트르담 성당은 설립 850주년을 맞았다. 노트르담 성당은 본격적으로 보물들을 재정비하고 19세기에 사라지고 파괴된 노트르담 성당의 보물 발굴과 보완 등의 작업을 진행한다. 노트르담 성당은 이제 단순한 보물창고를 벗어나 새로운 박물관처럼 위세를 갖추게 된다.      


그러나 노트르담 성당은 또다시 대주교와 대부호들이 숭배하는 보물들을 보관하는 금고로 자리를 잡아간다. 이러한 분위기는 노트르담 성당뿐 아니라 프랑스의 250개 이상의 교회가 각기 고유한 보물들을 간직하려고 하면서 나타난다.      


보물을 보물로 분류하는 기준은 보존을 관리하는 의도가 진화했음에도 불구하고 수세기에 걸쳐 거의 변하지 않은 듯하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미사의 의미와 가장 신성시하는 절대자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정의하고 이해하는 가에 따라 달라져야 보물이라는 존재가 보물로서의 신성한 특성을 지니게 되지 않을까? 모든 사람이 인정하는 보물과 교회만이 생각하는 보물은 분명 차이가 있을 테니 말이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전시 중인 노트르담 성당 보물전 입구에 붙은 포스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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