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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Sep 10. 2016

바다로 가고싶은 빙하들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아이슬란드  5


오데트 공주와 지그프리드 왕자



1.


어젯밤 그리도 황홀한 색으로 하늘을 온통 물들이더니 오늘은 짙은 무채색으로 하늘을 뒤덮고 있다. 게다가 바람까지 가세를 하고 있어 스산하기 짝이 없다. 날씨가 점점 거시기해진다. 꽤나 을씨년스러운 날이다. 심지어 운전을 하는데 자동차가 흔들리기까지 한다. 공연히 불안한 마음까지 든다. 천천히 달려간다. 빙하조각들이 떠다니는 게 보인다.


아이슬란드에서 가장 큰 빙하지대인 국립공원 바트나요쿨(Vatnajőkull)에서 뻗어 내린 빙하가 바다와 직접 맞닿아 있는 곳이다. 이곳은 빙하가 떨어져 나와 바다로 흘러 들어가기 전 잠시 머물다가는 호수다. 바로 ‘요쿨살롱’이다. 빙하에서 떨어져 나와 호수에서 둥둥 떠다니다 냇물처럼 생긴 통로를 따라 바다로 흘러 들어간다. 보고 있노라니 문득 얼음덩이가 마치 고래처럼 보이기 시작하는데 고래 등에 올라타고 바다로 가고 싶어 진다.




빙하조각들이 하얀 조각만 있는 게 아니다. 검은 조각도 보인다. 검은 건 화산재가 날려 눈 속에 스며들어 검게 된 것이다. 아마 2010년도 화산 폭발 당시 엄청난 화산재가 아이슬란드 동남부를 뒤덮어버려 특히 이 부근 빙하들은 온통 검은색이다. 검은색이 간간히 배어들어 있는 얼음조각들이 마치 작품처럼 보인다. 


어느새 아이슬란드 1번 국도의 동쪽 끝 지점을 벗어나 간선도로인 92번 도로로 접어든다. 1번 국도를 벗어난다는 건 위험이 따른다는 걸 명심해야 한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동쪽 해안가를 끼고 달리는 비포장도로가 시작한다. 1번 국도는 일 년 내내 국가가 관리하지만 나머지 도로들은 계절의 변화를 그대로 견뎌야 한다. 그래서인지 도로 상태가 겨울철에는 눈이 쌓여 있거나 얼음이 얼어 안 좋으니 가능한 이용을 자제하라는 내용의 표지판이 붙어 있다. 


안내는 고맙지만 그래도 오늘 숙소가 동쪽 피요르드 끝부분에 위치한 곳에 있으니 안 갈 수 없지 않은가. 조심조심 바람을 가르며 나간다. 멀리 성 같은 건물 잔해가 보인다. 어쩌면 저 낡은 성이 아이슬란드에 정착했던 초기 바이킹들이 남긴 흔적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숙소를 이리 외진 곳에 잡은 이유는, 그곳 부근이 경치가 꽤나 절경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봄이면 야생화가 지천으로 깔려있고 여름이면 가파른 절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산양들이 구름을 넘나드는 모습을 안내책자에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잠시 착각을 했었던 듯싶다. 그런 장면은 한 여름이나 5월 중하순경이 되어야 했는데 나는 지금 4월 하순에 그리로 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바보 같은 결정을 내내 후회했지만 어쩔 수가 없지 않은가? 그래도 가야 한다면 일단 가보자 하는 심정으로 핸들을 잡는다. 여행을 하는데도 지나친 욕심은 역시 금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


아이슬란드 동쪽 지역은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고대 사가(북유럽 신화)의 무대로 많이 등장한다. 심지어 네스호의 괴물처럼 이곳에도 벌레같이 생긴 괴물이 동쪽 해안가 근처에 있는 라르가르포트(Largarfjot) 호수에 살고 있다고 했고, 엘프(Elve: 요정)와 트롤(Troll: 괴물 같은 거인)에 대한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도 전해 온다.


실제로, 1627년 동쪽 해안가에 알제리 해적이 출몰한 적이 있는데, 아이슬란드 주민 110명을 납치해서 아프리카 노예시장에 팔아버린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이때 아이슬란드 주민들이 그렇게나 믿고 있던 신화 속 주인공 트롤과 엘프는 아무런 도움도 되지 못했는데 이때 뵐바(Vőlva)라는 여사제가 나타나 동쪽 해안가에 있는 에스키피요르드(Eskifjordur)의 홀마할시(Holmahalsi)라는 곳(동쪽 해안가 피요르드 지역인데 급경사로 수직 절벽을 이루고 있다.)에서 짙은 안개와 높은 파도를 일으켜 더 이상 사람들을 잡아가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민들은 더 이상 잡혀가지 않고 살아남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동쪽 해안가 피요르드 지역에서 하얀 안개가 피어나는 것은 아이슬란드의 트롤과 엘프들을 숨기고 적의 침입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믿고 있다. 




그 후 이곳 주민들이 여사제를 기리는 뜻에서 피요르드 꼭대기에 돌무지를 만들어 제단을 마련하고 여사제를 기리는 의식을 행하고 있다고 한다. 동쪽 해안가 92번 도로를 타고 가다 또다시 갈라지는 도로를 만나는데 이 도로가 94번 도로이다. 그 도로 끝에 있는 언덕이 바로 홀마할시(Holmahals)라는 곳이다. 그 언덕 위에 돌탑을 쌓아 여사제를 기리는 돌무지를 세운 것이다. 아쉽게도 눈 녹은 여름철에만 입산이 가능하기 때문에 겨울철 동안에는 볼수가 없다.


실제 이 지역은 사계절 내내 다른 곳 보다 심한 안개가 끼고 풍랑이 심하기 때문에 조심해야만 한다. 겨울에는 특히 심한 눈보라까지 휘몰아치기 때문에 누군가 여사제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제물을 준비하지 않는다면 억울한 피해를 입을지 모르니 이곳을 지날 때는 이에 대한 준비를 소홀히 하지 말라고 한다. 지난밤 묵었던 호텔의 지배인이 그렇게 신신당부를 하길래 그의 말을 듣고 내가 묵은 방 화병에 꼽혀있던 장미 한 송이를 가져왔다. 인근 도로를 지날 때 잠시 차를 세우고 언덕을 향해 눈인사를 보내고 나뭇가지에 잘 보이게 가져온 장미꽃을 걸어놓았다. 부디 탈 없는 여행길이 되도록 도와주십사라고 빌면서...!




3. 


아이슬란드 동부지역은 19세기부터 특히 세인의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 이유는 이 지역에서 많은 청어가 잡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뿐 아니라 노르웨이 출신 어부들이 모이피르듀르(Mjoifjőrdur)에 고래사냥 본부를 설치하고 세계에서 가장 큰 고래잡이 사냥터로 만들어 버렸다고 한다. 그 후 이 지역으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게 되고 도시의 위세도 그에 걸맞게 확장되면서 1895년에는 세이디스피르듀르(Seydisfjőrdur)시가 자치권을 얻어 독립된 공국으로 자리하게 된다. 


한편 1906년에는 세이디스피르듀르 시가 유럽과 처음으로 전신 케이블을 연결함으로써 최초로 유럽과 국제통신 시대를 열게 되는 거점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따라서 이 도시는 아이슬란드의 통신 허브 도시로 자리를 잡으며 아이슬란드 내 최고의 도시로 부상하기도 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후 아스크야(Askja) 화산 폭발로 인해 도시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화산 폭발로 인해 농지는 대부분 검은 화산재로 뒤덮여 버리고 더 이상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다. 그 후 간신히 어업에 의존을 하게 되지만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아이슬란드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리는 일이 열병처럼 번지기 시작하면서 대부분 이 도시를 빠져나가게 된다. 그래서 이번에는 동부지역의 보프나피르듀르(Vopnafjőrdur) 도시가 미국 이민을 가는 센터처럼 변신을 하게 된다. 


동부지역은 점차 네스카우프스타듀르(Neskaupstadur)를 중심으로 어촌이 형성되면서 이제는 제법 어촌도시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와 함께 이 지역은 지형적으로 해안가에 인접한 산악지역이기 때문에 소나 말, 양 같은 가축들 사육이 잘되어 주민들에게 많은 소득원이 되고 있다고 한다. 




동부지역의 매력은 이런 이야기들 이외에도 겨울철에 이곳에서만 볼수 있는 알짜배기 풍경들이 있다는 사실이다. 아이슬란드 중에서도 동쪽 지역은 상대적으로 인적이 드물기 때문에 진귀한 철새들이 많이 찾아온다고 한다. 오늘 이곳을 지나면서 드디어 그 귀하다는 백조 무리들을 만나는 행운을 얻었다. 백조는 평소에 호수에 자리를 잡은 텃새처럼 생각을 했는데 이곳에서 백조가 철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백조는 바그너의 로엔그린에서 지그프리드가 타고 다니던 바로 그 새가 아닌가. 위엄 있는 남성성의 상징 백조, 또한 차이코프스키에게는 지그프리드 왕자가 사랑하는 백조, 오데트 공주가 아닌가! ‘백조의 호수’를 떠올리며, 해안가에서 한참을 그렇게 바다에 쏟아지는 폭우를 맞으며 서있는데 문득 바다 위 수평선에서 백조의 호수 공연이 진행되고 있는듯한 착각에 빠져들기 시작한다.


왕자 지그프리이드가 성년을 축하하는 파티에서 마법사 로트발트의 마법에 걸린 오데트 공주를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말하자 백조로 변신했던 오데트 공주는 드디어 인간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시녀들과 함께 환희에 빛나는 춤을 춘다. 화사한 불빛 아래 무희들의 길고 곧은 다리들이 현란하게 춤을 추고 있다.


폭우가 쏟아지는 바다 위에서는 여전히 백조들이 수평선을 이루고 어디를 향하고 있는 건지 아님 그대로 앉아 폭우에도 아랑곳없이 마냥 쉬고 있는 건지 미동도 하지 않고 있다. 저 수평선이 무얼 의미하는지 궁금하기 이를 데 없지만 그저 바라만 볼뿐 속수무책이다. 자동차 지붕에 내리붓는듯한 빗줄기 소리가 조금씩 자즈러들 즈음 정신을 차리고 또다시 숙소를 향해 출발한다. 내가 떠나 가는데도 백조들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고 수평선을 이루고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다.




4. 


오늘 묵을 숙소로 가려면 92번 도로를 타고 계속 동쪽 해안가 끝으로 가야만 한다. 그곳에 숙소가 있다. 그런데 92번 도로를 타고 해안가로 접근하기 위해서는 대관령 정도 되는 고갯마루와 긴 터널을 하나 지나야 한다. 그런데 가다 보니 도로 중간중간 눈발이 너무 심해 앞이 보이 지를 않는다. 바람까지 불면서 눈보라가 날리니 어찌해야 할지 은근히 겁이 나기 시작한다. 오다 보니 눈길에 미끄러져 비탈길 아래로 차가 한 대 굴러 떨어져 있다. 허리춤은 족히 될 정도로 눈이 와 쌓여있었기에 엄청난 눈이 도로를 덮어버려 운전자가 제대로 도로를 보지 못해 절벽 쪽으로 미끄러진 모양이다.


잔뜩 겁을 먹고 언덕을 넘어 터널을 지나 내리막으로 조심조심 내려간다. 숙소까지의 길은 예상대로 엄청난 눈으로 뒤덮여 있었고 조금만 방심하면 절벽 아래로 굴러 떨어질 정도의 급경사길이었다. 짙은 안개까지 끼어 있으니 답답할 노릇이다. 뵐바 여사제에게 무사안녕을 다시금 빌며 미끄러운 고갯마루 길을 조심조심 내려와 무사히 숙소에 도착했다. 


게스트하우스에는 아무도 없었다. 요즈음 아직 관광 시기가 이르다 보니 여행객이 거의 오지를 않는다고 한다. 그런데 내가 오겠다고 예약을 하고 나니 주인장은 신이 났던 모양이다. 제법 수다까지 떨며 이것저것 내놓는데 귀찮을 정도로 인심이 후하다. 어쩌면 오늘 뵐브 여사제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받친 덕분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밖에는 여전히 바람소리가 들리고 눈보라가 심하게 날리고 있었다. 


산넘고 물건너 찾아온 곳에 집 한 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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