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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Sep 12. 2016

길에서 길을 잃다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아이슬란드  6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오늘은 아이슬란드 동쪽 끝 해안가 숙소를 출발해 북쪽 해안도시 후사빅(Husavik)까지 가야 한다. 어제 지나온 94번 도로와 92번 도로를 거꾸로 지나 1번 도로를 타고 뮈바튼 호수로 간다. 그리고 계속해서 호수를 끼고돌아 다시 1번 도로를 벗어나 지름길인 87번 도로를 지나  후사빅으로 가야 한다.


숙소 안주인이 직접 후사빅에 있는 동료와 전화통화를 하더니 다행히 길이 뚫렸으니 갈수 있다고 조심해 가라고 한다. 겨울 동안 뮈바튼에서 후사빅으로 가는 지름길이 눈으로 막히는 경우가 많아 도로 상태가 안심할수 없다고 한다. 만일 도로가 막혔다면 이곳에서 하루를 더 묵으려 했지만 다행히 도로는 열렸다고 하니 출발이다.


여행은 언제나 기대와 달리 예측불허다. 오늘은 어제와 분명 또 다른 상태로 바뀌게 되니 긴장을 늦출수가 없다. 특히 아이슬란드 날씨가 그렇다. 완전 예측불허란 말이다. 아마 섬나라이기 때문이리라. 아무튼 날씨가 좋으면 후사빅까지 가는 중간중간 이름난 경치 좋은 곳을 지나게 되어 드라이브코스로는 최고일 텐데 여전히 날씨가 받쳐주지를 않으니 아쉽기만 하다.


<사진 설명> 그야말로 한 치 앞도 안 보인다. 점점 헛것이 보이는지 모든 게 두 개로 보이기 시작하는데, 간신히 엉거주춤 운행으로 뮈바튼 호수까지 도착...


뮈바튼 호수 부근에 있는 유황가스 분출 지역


아이슬란드 동쪽 끝, 네스카우프스타듀르를 출발해 북쪽으로 가는 길은 예상보다 더 안 좋다. 한 치 앞이 보이 지를 않는다. 어제 이곳으로 오면서도 안개와 얼어붙은 도로 때문에 무척 힘이 들었는데 오늘은 더 심하다. 눈발이 너무 날린다. 짙은 안개까지 끼여 있으니 슬슬 백색공포증이 생긴다. 드디어 헛것이 보이기 시작한다. 1번 도로를 접어들기까지 중간중간 최악의 도로 사정은 무서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다행히 뵐바 여사제의 기도 덕분인지 무사히 1번 도로에 들어선다. 아쉽게도 너무 험악한 날씨 때문에 뮈바튼 호수에 도착하기 전 멋진 폭포와 명승지들은 그냥 지나쳐야만 했다.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뮈바튼 호수 부근 유황가스 분출 지역에서 잠시 쉬면서 정신을 차린다. 이곳은 유황 가스가 분출되어 냄새가 진동을 한다. 뮈바튼 호수 인근 일대가 지금도 활화산처럼 꿈틀대고 있으니 사실 불안한 지역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여름에는 이 일대가 초록의 벌판으로 변하면서 멋진 폭포와 계곡을 드러내 보여주니 기회가 되면 여름에 찾아와도 좋을 것 같다.


여하튼 이제 계속해서 숙소가 있는 후사빅으로 가야 한다. 가는 길에 잠시 슈퍼에 들러 장을 보면서 모처럼 독주도 한 병 산다. 오늘 같은 날 한잔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 같다. 잠시 장을 보고 나왔는데 그 사이 자동차 지붕에 10여 센티는 족히 될 만큼 눈이 내렸다. 엄청난 폭설이다. 도로에도 눈이 쌓이기는 마찬가지, 하지만 다행히 지금은 1번 도로에 있으니 도로 사정은 운전하는데 그리 힘들지 않을 거라 기대를 한다.


<사진 설명> 뮈바튼 호수 일대는 모두 화산 폭발로 인해 분화구와 호수, 그리고 노천온천이 발달해 있다.



뮈바튼 호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유명한 폭포들이 있지만 날이 받쳐주지를 않으니 내일 찾아가 보기로 하고 일단 숙소로 직행하기로 한다. 잠시 후 1번 국도를 벗어나 87번 도로로 들어선다. 87번 도로를 들어섰지만 후사빅까지 가는 사이에 오가는 차량은 한 대도 없다. 이 도로는 나 혼자 달리고 있다. 도로 상태는 구릉지대인지라 언덕을 오르내리며 달린다. 그리 속도를 낼 수가 없다. 길이 미끄러워 천천히 조심조심 달린다.


후사빅이 그리 멀지 않은 것 같다고 생각하며 언덕을 오르는 순간 심한 바람으로 눈이 제법 쌓인 곳을 지나면서 결국 차는 눈밭에 갇히고 말았다. 꼬마차 붕붕이의 앞 범퍼가 낮아 쌓인 눈을 넘어서지 못해 눈 속에 갇히고 만 것이다. 어찌해야 할지 눈앞이 캄캄하다. 자동차 앞에 쌓인 눈과 바퀴 주변의 눈을 모두 치우고 액셀 페달을 밟아보지만 헛바퀴만 돌뿐 눈 속에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고 말았다. 점점 몰아치는 눈보라 때문에 차바퀴 부분에는 점점 더 눈이 쌓여간다. 현재로서는 구제불능이다. 이대로 끝나는 걸까? 차를 버리고 걸어갈까? 별 생각을 다해 보지만 속수무책이다.


길에서 길을 잃었다. 갑자기 배가 고파온다. 무서움과 두려움보다 허기진 배를 채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너무 긴장을 한 탓일까? 마치 허기진 사람처럼 배가 고파온다. 문득 멸치국물에 잘 말은 국수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등산을 하고 온 날이면 집사람이 해주던 그 국수가 먹고 싶단 말이다. 후후 불며 손도 녹이고 입천장이 데일 것 같이 뜨거운 국물이 마시고 싶다. 멸치를 한 움큼 넣고 진하게 우려낸 국물에 국수를 말아 한 그릇 들이키고 나면 아무래도 좋을 듯싶었다.


백색 얼음으로  뒤덮여 있는 87번 도로 고갯마루에서...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국수가 먹고 싶다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정말이지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극한의 상황에 도달해서인지 평소에는 기억에도 없던 사람들 얼굴까지 떠오른다. 아이슬란드에 도착해 여기까지 온 일이 주마등같이 떠오르며 지나간다. 하지만 방법은 여전히 떠오르지를 않는다.


겨울철에 동쪽 해안가 방향으로 차량으로 여행을 할 경우 일반 소형차량은 가능한 이용하지 않는 게 좋겠다. 이 지역은 일 년 내내 안개와 눈보라 때문에 도로 사정이 아주 안 좋다. 특히 대관령같이 굽이친 고갯마루 길을 넘나들어야 하는데 경사가 급한 고갯길이 많아 고갯마루 구간에서 가끔 위험한 미끄럼 사고도 자주 발생한다.


이런 기후조건 때문에 10세기 이전에 아이슬란드 정복에 나선 덴마크 왕국이 동쪽으로 침입하려다 번번이 실패를 했다고 한다. 그 때문에 아이슬란드 사람들은 동쪽 지역에 자신들을 지켜주는 수호신, ‘드래곤’이 있다고 말한다. 그 유명한 아이슬란드 수호신 ‘드래곤’을 바로 이 길에서 만나게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


87번 도로 고갯마루의 눈밭에서 벗어난후...



1번 국도 이외의 지방도로들은 일 년 내내 관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눈비가 올 경우 도로 사정은 절대적으로 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 도로 사정이 나쁘기 때문에 가능하면 이용을 자제하라고 안내문을 여기저기 붙여 놓았다. 아이슬란드에서 궂은 날이 계속되는 겨울철에 운전을 해야 한다면 꼬마차 붕붕이 같은 작은 차(아반떼급 차량)로는 쉽지 않은 모험(?)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가능한 오프로드 차량을 이용하는 게 바람직하겠다.


아무튼 겨울철 1번 도로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도로 색깔이 흰색이다. 눈을 치우지 않기 때문에 검은 아스팔트가 눈에 덮여 흰색이란 말이다. 고갯마루에서 눈밭에 빠진 자동차를 달래고 빌며 한참을 그렇게 사투를 벌인다. 뵐바 여사제에게 빌고 또 빈다. 제발 이 눈밭을 빠져나가게 해 달라고.


숙소가 있는 후사빅 인근에 당도해서야 검은 색 도로를 만날수 있었다.


두 시간 넘게 눈밭에서 미친 듯 쌓인 눈을 헤치며 사투를 벌인다. 자동차 바퀴를 덮고 있는 눈을 치우고 마찰력을 높이기 위해 그 자리에 가방 속에 있는 모든 의류품 종류를 꺼내 차바퀴 아래 받침으로 쑤셔 넣는다. 심지어 손수건은 물론 입고 있던 점퍼와 스웨터 장갑 등 받칠수 있는 건 모두 다 벗어서 끼워 넣는다. 힘껏 액셀을 밟으며 뵐바 여사제에게 외친다 “국수를 먹게 해 달라고!” 순간 살았구나라는 안도감이 느껴진다. 눈밭을 벗어났다. 문득 감정이 복받쳐 오르며 눈물이 난다. 살았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뵐바 여사제가 나를 살려준다는 무언의 암시가 가슴 깊이 느껴지며, 이건 어쩌면 내가 앞으로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또다른 암시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새 저녁 때가 다 되었서인지 날이 많이 어두워졌다. 이제는 그야말로 기진맥진 상태에서 조심조심 경사진 비탈길을 기어내려간다. 얼른 하얀 도로를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안간힘을 써보지만 길은 여전히 흰색이라 무섭다. 드디어 멀리 바다가 보이는 곳에서 검은색 도로를 만난다. 그제사 살았다는 안도감이 생기며 긴장이 풀어진다.


검은색은 죽음이 아니라 삶의 색으로 나를 감싸고 있었다. 검은색은 이제 죽음의 색이 아니라 생명의 색으로 찬란히 빛이 나고 있었다.


숙소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 어둠속으로 눈은 여전히 내리고 있다.


<사진 설명> 숙소에 있는 의자에 앉아 독주를 마시며 오늘 지나 온 순간들을 하나씩 반추해 본다. 역시 여행은 길을 잃어야 제맛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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