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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Nov 10. 2016

벨기에의 3가지 보물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벨기에  1


1.

벨기에는 본래 네덜란드의 남부 지역이었는데 지금의 네덜란드가 있는 북부지역과 지금의 벨기에 지역 간에 신구 종교 갈등을 겪으면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한다. 이로 인해 결국 벨기에는 네덜란드로부터 1830년 8월 25일 분리, 독립을 한다.


우리나라 경상도만 한 지역에 천만명이 모여사는 나라 벨기에, 인구 3/4이 가톨릭 신자이다. 이런 나라에 세 가지 보물이 있다. 첫 번째는 인구 110만 명이 모여사는 벨기에 수도 브뤼셀이다. 유럽에 인구 백만이 넘는 도시가 별로 없다. 그런데 브뤼셀 인구는 백십만이나 된다. 이 많은 사람들이 작은 도시에 바글거리며 사는 그 자체가 신기하고 놀랍다. 1,200만이 바글거리는 한국의 수도 서울과는 또 다른 이유로 놀랍다는 말이다.


이 작은 도시가 가지고 있는 역사와 문화는 유럽의 다른 도시들과는 확연히 다르다. 벨기에, 특히 브뤼셀이라는 도시만의 특징을 몇 가지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1695년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브뤼셀로 진격해 당시 네덜란드와 영국 연합국에 대한 앙갚음으로 브뤼셀 그랑플라스 광장을 비롯해 도시 거의 대부분을 파괴한다. 이로 인해 4000여 채의 주택과 시내 중심지가 거의 쑥대밭이 된다. 그랑플라스도 큰 피해를 입는데 다행히 5년 만에 재건을 한다. 그리고 1998년도에는 브뤼셀 그랑플라스 지역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한다.


그랑플라스 광장은 브뤼셀의 자랑이다. 프랑스의 대문호 빅토르 위고는 망명시절 자주 브뤼셀에 들렀다. 브뤼셀의 그랑플라스가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광장이라고 극찬을 하면서 말이다. 그런데 이런 아름다운 광장을 가꾸고 지켜낸 이는 따로 있다.


불스 시장을 기리는 동판이 그랑플라스 한 귀퉁이에 붙어 있다.



브뤼셀 역에서 내려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 그랑플라스 광장 바로 직전에 작은 분수 하나가 있다. 몇 번 가보아도 물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없는데 제목은 작은 분수라고 되어 있다. 그곳에는 물 대신 언제나 많은 사람들이 바글거리며 주변에 둘러앉아 담소를 나누는 곳이다. 바로 그랑플라스를 지켜낸 브뤼셀의 시장이었던 카렐 불스(Karel Buls)의 동상이다.


그는 자본가들이 그랑플라스를 팔라고 해도 팔지를 않고 건물을 세우려 해도 허락을 하지 않고 옛 모습 그대로 지켜낸 인물이다. 그 기개가 고마울 따름이다. 그런데 가만 보면 다른 동상들과는 조금 다른 모습이다. 강아지가, 아니 커다란 개가 시장에게 달려들 듯한 모습으로 기대어 있는 모습이 정겹다. 우뚝 서있는 모습의 동상보다 자연스러운 이런 모습이 더욱 정감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아무튼 광장은 누구에게나 열려있고 그곳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은 자유로워야 한다는 무언의 약속이 있다. 바로 그 무언의 약속이 지켜지는 곳이 그랑플라스 광장이다. 그래서 더욱 모든 이에게 환영을 받는 게 아닐까? 브뤼셀은 그런 광장을 가지고 있으니 부러운 보물임에 틀림없는 듯하다.


그래서 광장을 가꾸기 위해 2년에 한 번씩 열리는 ‘꽃 카펫’ 페스티벌은 가히 환상적이다. 아니 어찌 보면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도 광장이란 공간을 온통 꽃으로 장식하는 걸 보면 역시 광장의 의미를 보존하고 지키기 위한 그들만의 노력의 징표라는 생각이 든다. 언젠가는 우리의 광장도 촛불만이 아니라 그랑플라스처럼 온통 꽃향기에 취할 수 있는 그런 광장으로 장식되는 날을 그리며 그랑플라스 광장을 걷는다.


2년에 한번씩 그랑팔레스 광장에서 신년맞이 불꽃놀이 축제를 벌인다.



그랑플라스 광장 주변에서는 바로크, 고딕 등 모든 건축양식을 한꺼번에 다 볼 수 있다. 누구의 의도였는지는 모르겠지만 광장을 화려하게 만든 장본인은 바로 광장을 채우고 있는 건물들인 듯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랑플라스 광장에 들어서면 가장 높이 솟은 첨탑이 있는 시청사 건물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그를 중심으로 왼쪽 건물과 오른쪽 건물들이 1440년대를 전후해 지어졌다.


그랑플라스 광장에서 가장 정교한 건물은 시립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는 왕의 집(시청사 맞은편의 집)은 13세기에 지어졌는데, 이 건물은 원래 브라반트 공작이 사무실로 쓰면서 ‘공작의 집’으로 불렸는데, 공작이 스페인 왕이 되어 떠나게 되자 ‘왕의 집’이라는 명칭을 더 갖게 됐다고 한다.


시청사와 왕의 집 사이에 늘어선 뾰족하거나 둥근 건물로 이어져 있는 길드하우스도 그랑플라스 광장의 자랑거리인데, 길드하우스(상인조합)는 상공업이 발달해 있던 중세시대에 지어진 건축물이다. 예전에는 제과 업자의 집, 사냥꾼의 집, 재단사의 집, 정육점 주인집 등으로 불렸는데 현재는 레스토랑과 호텔, 초콜릿 가게 등으로 변해 관광객들을 맞고 있다.


<사진 설명> 그랑플라스 주변에 있는 건물들, 위 가은데 사진이 '시청사', 위 오른쪽 사진이 왕의집, 아래 왼쪽 사진이 중세 상인조합인 길드하우스



두 번째 보물은 광장에서 불과 5분 거리에 있는 오줌싸개 소년(Manneken Pis)의 동상이다. 이 소년의 키는 60센티미터. 아주 작은 엄지왕자라고나 할까. 그래서 기대를 하고 온 수많은 관광객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는 동상이기도 하다.


하지만, 브뤼셀에서는 가장 나이 많은 사람으로 인기가 많다. 조각가 제롬 뒤케누아(Jerome Duquesnoy)가 1619년에 제작했다고 하는데, 나이가 396살이나 된다. 이 꼬마 할아버지 의상은 600벌이나 되는데 세계 각국 정상들이 벨기에를 방문할 때마다 선물한 것으로 한복도 가지고 있다고 한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현재 설치되어 있는 동상은 복제본이고, 원래 동상은 1960년대에 누군가 훔쳐갔다고 한다.


여행을 하다 보면 황당한 장면에 가끔 뭔가 억울한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오줌싸개 동상이 그중 하나이다. 저리 작고 별 볼 일 없는 꼬마가 오줌을 싸고 있는 게 무에 그리 대수라고 저걸 보러 온단 말인지,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작은 것이 아름답다고 우기며 여행기들을 써대는 걸 보면 그리 큰 실망감을 주지는 않는 모양이다.


하지만 꼬마를 보는 순간 문득 기대했던 것에 대한 실망감을 맛볼 수 있다는 그 자체가 오줌싸개가 전해주는 메시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사는 일이 그렇듯 모든 건 정해진대로만 사는 게 아니란 말씀, 그러니 여행을 하다 보면 가끔은 실망을 하는 수도 있는데 그 자체가 이미 여행이라는 말로 덮일 수 있으니 그 아니 즐거운가 말이다. 그러니 너무 기대하지 마시라, 여행은 여행 그 자체를 즐기면 된다는 오줌싸개님이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오줌싸개 소녀 동상, Delirium Cafe에 가면 만날 수 있다.(주소: Impasse de la Fidélité 10-12, 1000 Bruxelles)



세 번째는 벨기에라는 나라가 지니고 있는 특유의 먹거리가 보물이다. 특히 초콜릿과 맥주, 와플, 감자튀김 등 여러 가지 먹거리는 분명 특별나다. 사실 이건 우리나라에도 대부분 비슷한 게 있는데도 꼭 이런 걸 보물이라면서 이곳에 와서 먹으려 하는 건 무슨 이유일까? 더구나 와플 기계는 에디슨이 부인을 위해 발명을 했다고 하는데 어찌 미국이 아니라 벨기에 와플이 그리 유명하단 말인가?


그건 먹어보면 안다고 밖에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벨기에 와플과 벨기에 초콜릿. 분명 와플과 초콜릿은 벨기에를 대표하는 음식임에 틀림없다. 벨기에 와플은 만들어진 지역과 그 방법에 따라 브뤼셀(서쪽)식 와플과 리에주(동쪽)식 와플로 나뉜다. 우리가 카페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아이스크림과 과일, 생크림 등으로 장식된 와플은 보통 브뤼셀식으로 촉촉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특징이다.


여기에 더해 벨기에를 대표하는 유명 브랜드의 초콜릿은 그야말로 입안에서 살살 녹는다. 사실 유명 브랜드의 상품보다 벨기에를 방문한다면 당연히 수제 초콜릿을 맛보기를 권한다. 유명상표 제품이야 언제든 어디서나 먹을 수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유명 브랜드는 아니지만 초콜릿 나라답게 수제 초콜릿을 한번 맛보면 아마 그 맛 오래도록 잊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벨기에가 자랑하는 맥주도 꼭 맛을 보라고 권하고 싶다. 벨기에 맥주는 여러 지역에 있는 수도원 등지에서 특색 있는 맥주를 빚어내기 때문에 맥주 종류만 해도 모두 3000가지가 넘는다. 벨기에는 맥주 나라로 알려진 독일보다 국민 1인당 맥주 생산율이 더 높은 나라이니 이제 맥주에 관한 한 독일 맥주라는 선입견은 버려야 한다.


맥주 시음장이 시내 곳곳에 마련되어 있는데 진열된 수백 가지 맥주 중 마시고 싶은 맥주를 골라마실 수 있을 뿐 아니라 맥주마다 마시는 전용잔이 따로 있어 마시는 분위기를 돋워 준다.(전용잔이 따로 없는 것은 맥주가 아니란다.) 그리고 맥주와 함께 먹는 안주, 감자튀김. 우리가 ‘치맥’을 사랑하듯 벨기 사람들은 ‘감맥’을 즐긴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보는 감자튀김이 아니라 그 보다 훨씬 두툼하게 썬 감자를 튀긴 ‘벨지안 프리트(frites, 감자튀김)는 감자튀김의 원조라고 자랑을 한다.


수제 초콜릿 가게  

<사진 설명> 맥주집 입구에 진열되어 있는 맥주 아카이브, 맥주와 맥주잔이 한 세트로 진열되어 있다.



2.


벨기에는 1878년 레오폴드 2세 지배 당시 아프리카 콩고(지금의 자이레)를 식민지로 만들고,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르완다와 부룬디를 차지하여 벨기에령으로 만든다. 이 당시 레오폴드 2세는 천만명에 이르는 콩고인들을 무참히 학살하는 참사극을 벌인다. 이 집단 살해사건을 고무 테러라고 하는데 이 학살로 콩고 인구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학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벨기에 정부의 잔학함은 가톨릭이라는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는데 더욱 경악을 금치 못한다. 콩고인들의 죽음은 대부분 기근과 질병으로 죽어갔는데, 수많은 콩고 주민들이 상아와 고무 때문에 정한 할당량을 채우지 못해 학살을 당해야 했던 것이다.


당시 레오폴드 2세는 한 번도 식민지 콩고를 방문한 적이 없지만 콩고로부터 착취한 자원은 벨기에 수도 브뤼셀의 그랑플라스 주변의 건물들은 물론 왕궁과 기념관, 박물관 등을 짓고 그의 딸들에게 호사스러운 궁전을 지어줄 수 있게 했다고 역사가들은 지적한다.


그런데 이번에는 1916년 1차 세계대전이 독일 패망으로 끝나자 벨기에는 독일을 대신해 르완다와 부룬디를 지배하게 되면서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한다. 벨기에 정부는 이들 지역을 지배할 당시 투치족과 후투족에 대한 차별정책을 실시함으로써 벨기에가 물러간 후 르완다 내전의 불씨를 제공한 것이다.


결국 1959년부터 1996년까지 전개된 아프리카 르완다와 부룬디에서 벌어진 후투족과 투치족간의 종족 내전으로 수십 년간 끔찍한 학살과 질병, 기아 등으로 수백만 명이 죽어야만 했다. 벨기에의 잘못된 정책이 결국 무고한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이러니칼 하게도 벨기에가, 콩고가 당했던 것처럼, 그리고 르완다와 부룬디가 당했던 것처럼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 나치에 의해 똑같이 그런 희생을 당한다.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독일은 벨기에를 거쳐 파리로 진격하기 위해 루뱅 시를 점령하고 무고한 시민들을 무차별 학살한다. 그 결과 지금까지 루뱅 시에서는 독일 깃발을 걸지 못하게 한다. 우리말에 “때는 때 대로 간다”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순간이다.


<사진 설명> 수제 초콜릿 상점, 브뤼셀 시내에는 한집 건너 초콜릿 가게라고 해도 될듯 싶다.



벨기에가 보물 중의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초콜릿은 연간 17만 톤이나 생산하는데 가히 검은 황금이라고 부를만하다. 얼핏 생각하기에 스위스 초콜릿이 가장 맛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텐데 벨기에 초콜릿이 세계 삼대 초콜릿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하지만 그렇게 된 데에는 바로 벨기에가 저지른 콩고 학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지 궁금하다. 그런데도 벨기에 초콜릿을 먹어야 하나?


1885년 당시 레오폴트 2세는 아프리카 콩고(지금의 자이레)를 정복하고 노예 거래를 일삼는다. 뿐만 아니라 당시 벨기에 식민지였던 콩고에서 카카오 원료를 거의 공짜로 가져다 지금의 검은 황금 초콜릿을 만들었으니 벨기에의 보물은 바로 아프리카 사람들의 피눈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 초콜릿으로 유명한 고디바 공식 사이트는, 1926년 11세기 영국 귀족부인이었던 레이디 고디바의 숭고한 뜻을 기려 상표로 정했다고 소개를 하고 있다. 초콜릿과 고디바 부인의 말 탄 모습이 얼핏 멋있다는 느낌이 들지 몰라도 이건 완전 사기라는 생각이다. 순전히 개인적인 생각일지 몰라도 한 여인의 고귀한 인격과 품위를 기업이익을 위한 상표로 도용한 것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더구나 고디바 부인의 벌거벗고 말 탄 모습은 아주 섹시하고 관음증을 유발하는 좋은 먹잇감이 아닌가 말이다. 벨기에 고디바사가 지난 과거는 묻어두고 장사에 올인하는 장사꾼 특유의 모습이 떠올라 여전히 씁쓸한 생각만 들뿐이다.


원래 고디바 부인은 잉글랜드 코벤트리 지역의 레오프릭 백작의 부인인데, 영주가 지나친 세금 징수를 하자 그의 부인 고디바가 세금을 감면해 줄 것을 간청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영주가 장난 삼아 부인에게 "벗은 몸으로 마을을 한 바퀴 돌면 생각해 보겠다"라고 했는데, 순진한 고디바 부인은 그의 말대로 벌거벗고 말을 타고 마을을 돌았다고 하고, 후에 영주는 세금을 내렸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마을 사람들은 부인이 마을을 돌 때 아무도 내다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니 고디바의 벌거벗고 말 탄 모습은 단순히 누드 이상의 아름다움과 고결함이 배어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이 글의 표지로 사용한 벌거벗고 말 탄 부인의 그림은 John Maler Collier가 1898년에 그린 'Lady Godiva'란 제목의 그림이다.)


<사진 설명> 벨기에의 대표적인 아이콘 중 하나인 1932년도 작 '틴틴의 모험'의 주인공 '틴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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