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수 Nov 09. 2016

광고모델이 된 칼 마르크스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독일  2


1.


독일에서 제일 오래된 도시 트리어(Trier), 독일 중부 서쪽 국경 지역에 위치해 룩셈부르크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트리어에는 원래 유럽에서 손꼽을 정도로 오래된 대학이 있었는데 나폴레옹이 진격해 트리어를 점령하면서 대학문을 닫아버렸다. 제국주의자가 언제나 제일 먼저 취하는 행동은 그 나라의 문화와 의식을 가르치는 교육시스템을 지배하는 일이니 그럴 만도 했겠다. 트리어 대학은 1970년이 되어서야 문을 다시 열었다. 


트리어에는 그만큼 문화적 가치가 잠재해 있어 누구라도 트리어에 발을 들이게 되면 자연스럽게 유럽의 중심도시임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이 도시에 들어서면 누군가 대단한 사상가가 분명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더욱이 오랫동안 제2의 로마로 불릴 정도였으니 그 기대는 일면 당연한 듯 보이기까지 한다.


트리어가 멋진 도시임을 보여주는 단초들은 수없이 많다. 그중에서도 모젤 강변에서 자란 포도로 담근 백포도주는 유럽에서도 한 손에 꼽힐 정도로 유명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신의 물방울’이라는 찬사까지 붙이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 보다는 사실 트리어의 진짜 명물(?)은 따로 있다. 바로 칼 마르크스이다. 트리어는 맛있는 모젤 와인도 좋지만 어쩌면 칼 마르크스라는 인물이 그 주인공이라는 생각이 든다.


2005년, BBC방송은 전문가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영향력 있는 사상가를 뽑았다. 단연 1위는 칼 마르크스였다. 그만큼 마르크스주의가 비록 현실에서 다 완성되지는 못했지만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대안을 세울 수 있게 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칼 마르크스, 그는 1818년 당시 프로이센에 속해있던 트리어에서 태어난다. 그가 태어난 집은 현재 마르크스 박물관으로 사용 중이다. 이 박물관은 냉전시대의 영향으로 오랫동안 문을 열지 못하고 있다가 1968년 프리드리히 에버트 재단(Friedrich Ebert Stiftung)이 마르크스 집을 인수해 정식으로 박물관으로 꾸미고 문을 열었다. 이곳에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그리고 다른 사회주의자들의 자필 원고와 편지, 그리고 저술 작품 등 상당한 양의 문서들과 사진들을 전시하고 있다.


<사진 설명> 어느새 마르크스의 흉상은 친숙한 느낌이 들 정도로 흔하게 만날 수 있다. 도자기 속 마르크스(1960 제작베를린 역사박물관 전시)도 보인다.  



2.


칼 마르크스는 1818년 5월 5일 유서 깊은 로마 가톨릭 도시 트리어에서 태어난다. 그의 아버지는 여러 대에 걸쳐 유대교 랍비를 지낸 집안의 후예였다. 그러나 아버지 하인리히(Heinrich)는 당시 유대인이 관직을 갖는 것을 금하는 차별 법령을 피하기 위해 1817년 개신교로 개종해 개신교 신자가 된다.


칼 마르크스는 트리어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뒤 1835년 10월 본 대학교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한다. 아들이 자신처럼 변호사가 되기를 바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마르크스는 문학과 철학에 심취했고, 점점 법학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 듯싶었다. 그는 이때 시를 쓰기도 하고 산문을 쓰기도 하는 로맨틱 가이의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러한 아들의 변화를 보면서 아버지는 아들이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여 그에 맞는 ‘사회적 지위’를 갖지 못하게 될 것을 걱정해 마르크스를 본 대학교에서 베를린 훔볼트 대학교로 전학시킨다. 그러나 베를린에서도 그는 역사와 철학에 몰두한다. 더구나 이게 오히려 마르크스를 헤겔 철학에 빠지게 만드는 계기가 되어 1841년에 마르크스는 철학박사학위를 받게 된다. 


결국 아버지의 바람과 달리 청년 마르크스는 예나 대학교에서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의 자연철학의 차이점”이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받는다. 그뿐 아니라 베를린에 머무는 동안 자신의 사상적 동반자 엥겔스를 만나게 되어 그의 사상적 깊이는 더욱 깊어가게 된다. 박사학위 과정을 마친 후 고향으로 돌아온 마르크스는 ‘라인신문’을 창간하고 편집장을 맡아 언론활동에 투신한다. 마르크스는 언론이야 말로 대중들을 교육하고 성장시키는 원동력임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 정부는 결국 1년도 안되어 1843년 라인신문을 발행 정지시키고 만다. 그 후 1848년 '신라인신문'을 또다시 창간하는데 프로이센 정부의 통제로 또다시 1년도 안되어 '신라인신문'은 발행 정지되고 만다.


이 시기에 칼 마르크스의 사고에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특히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던 철학에 변화가 나타난다. 당시 독일 철학은 대단히 관념적이며 추상적이었는데, 철학적 이슈에서 사회경제적이고 정치경제적인 이슈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칼 마르크스가 라인신문에 실을 기사 취재를 위해 라인 지방 과수원에서 일하던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을 보면서 경제와 관련된 주제의 중요성을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사진 설명> 마르크스는 1848년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다. 이 선언문에서 그는 “노동자여 단결하라”라고 외친다. 이때부터 공산당 선언은 노동운동의 발판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주장을 대중들에게 더욱 확산시키고 의식 교육을 위해 신문을 발행한다. 1848년 창간된 <신 라인 신문>(왼쪽 사진)과 1년이 지난 1849년 폐간된 '신라인신문'(오른쪽 사진). 



이때부터 칼 마르크스는 한 사회의 물질적 삶의 조건이 인간의 생각과 의식을 결정한다고 보고, 물질적 삶의 조건 변화가 역사에 결정적인 작용을 한다는 것을 증명하려 한다. 한 사회의 정신적 상황이 물질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물질적 상황이 정신적 상황을 결정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칼 마르크스는 특히 한 사회의 경제적 힘이 다른 모든 분야에 변화를 일으켜 역사를 발전시킨다고 강조한다.


그러나 1843년 아쉽게도 그의 생각들을 펼치기 위해 발행하던 ‘라인신문’이 폐간된다. 당시 마르크스는 언론의 자유를 침해하는 프로이센 정부에 대해 “프로이센 정부의 탄압 때문에 편집장직을 사임합니다.”라는 문구를 마지막으로 신문 전면에 게재하고 독수리(프로이센)가 프로메테우스(마르크스)를 괴롭히는 삽화를 함께 게재했다.


그 후 그는 급진좌파 활동을 금지한 독일을 피해 프랑스로 간다. 드디어 본격적으로 프랑스 사회주의자들과 접촉하는데, 이들은 칼 마르크스의 정치사상과 철학에 많은 영향을 끼친다. 특히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가 주도하는 의인동맹(義人同盟, Bund der Gerechten)이라는 비밀결사단체에 가입함으로써 본격적으로 혁명가로서의 길을 추구히게 된다.


이 단체는 행동주의적, 급진적, 혁명적 성격을 강하게 지닌 비밀결사체이다. 마르크스는 이 단체를 공산주의자 연맹으로 전환시키기 위해 ‘공산당 선언’(Manifest der Kommunistischen Partei)을 쓴다. 칼 마르크스 사상의 특징이 바로 이 선언에 그대로 표출된다. 이제 칼 마르크스는 공산당 선언을 깃점으로 독일 관념 철학에서 벗어나 역사 유물론으로 나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 역시 칼 마르크스를 급진적 사상을 소유한 인물이라 판단하고 그를 비롯한 진보적 젊은 사상가들을 프랑스에서 추방한다. 이후 그는 영국으로 건너가 죽을 때까지 영국에서 지내게 된다.


마르크스가 지적한 인간소외, 물신숭배, 생산과 소비의 문제, 공황의 문제 등은 여전히 지금도 계속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이다. 이를 올바로 인식하고 해결하기 위해서는 좋든 싫든 ‘칼 마르크스’를 탐구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없는 게 현실이다. 그래서 그의 삶은 그 자체가 혁명이다.


<사진 설명> 사상적 동지인 마르크스와 엥겔스, 마르크스는 자본론 1편을 완성하고 나머지 자본론 2, 3편은 엥겔스가 완성한다.  



3.


"마르크스를 만든 결정적인 동반자, 정치적 박해 속에서도 빛난 카를 마르크스의 절반, 예니 마르크스(Jenny Marx: 1814.2.12 ~ 1881.12.2.)“


이 문구는, 칼 마르크스의 사상적 동지이자 칼 마르크스의 부인인 예니 마르크스의 묘비에 적혀있는 것들이다. 칼 마르크스를 만든 결정적인 동반자이자 칼 마르크스의 ‘절반’ 예니 마르크스라는 문구가 가슴을 뜨겁게 한다.


칼 마르크스의 아버지와 예니의 아버지는 서로 친구처럼 지내던 사이였다. 비록 예니가 4살 연상이기는 했지만 두 사람 역시 자연스레 친구처럼 지냈다. 예니는 트리어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라는 소문이 돌 정도로 미모가 빼어났다.


예니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르크스와 예니는 1843년 결혼을 한다. 그러나 결혼 후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계속되는 가난과 질병, 그리고 여러 해에 걸친 유랑생활뿐이었다. 이들이 겪어야만 하는 상황들이 고통스럽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예니가 낳은 아이들이 출산 후 계속해서 죽어야 했던 기억들은 칼 마르크스의 사상적 투쟁에 가장 큰 적이 되었을 것이다. 


두 사람이 처음 파리로 갔을 때만 해도 그들은 행복하게 지냈다. 그러나 첫째 딸 예니를 낳고 행복한 시간을 즐기는 것도 잠시 그들은 이때부터 줄곧 생활고에 시달려야 했다. 칼 마르크스에게 세계경제를 뒤바꿀 ‘자본론’은 있어도 가정경제를 책임질 '돈벌이'는 없었기에 부인인 예니가 집안을 대신 책임져야 했다. 


<사진 설명> 칼 마르크스의 동반자이자 절반’ 예니 폰 베스트팔렌(예니 마르크스) 이 주고받은  독일어 편지들을 모아 Reinhard Lettau와 Lawrence Ferlinghetti가 영어로 번역하고 편집해서 1977년에 City Lights Books에서 <Love poems of Karl Marx>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그런데 그나마 부인이라도 경제관념이 있었다면 이렇게 상황이 최악은 아니었을 텐데 예니 폰 베스트팔렌은 밥은 굶어도 '폰 베스트팔렌 남작부인'(아버지가 베스트팔렌 남작임)이라는 문구를 금박으로 박은 비싼 편지봉투만 애용했다고 한다. 어쨌거나 이런 상황에서도 두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된 세상을 변혁하려는 이상을 놓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칼 마르크스와 예니가 낳은 7명의 아이들 모두 불운한 삶을 살다 생을 마감했기에 마르크스와 예니가 지녔을 고통은 더욱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첫째 딸 예니 캐롤라인은 아버지 피를 이은 듯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신문을 발행하며 사회주의 활동가로 활약하다 심장병으로 38살에 숨을 거둔다. 둘째 딸 로라 역시 남편과 함께 아버지 작품들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일을 하면서 사회주의 활동가로 활약하다 남편과 같이 66세에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셋째 아들 에드가는 나이 8살에 병으로 숨지고 넷째와 다섯째 역시 태어나 일 년이 채 안되어 숨을 거두었다. 여섯째 딸 율리아 엘레나 역시 사회주의 활동을 하다 43살에 자살하고, 일곱째가 1857년 런던에서 태어나지만 금방 숨을 거두고 만다. 특히 넷째 딸 프란치스카가 죽었을 때는 관을 마련할 돈조차 없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일곱 자녀 중 네 명의 자녀를 굶주림과 질병으로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르크스는 집에 하녀를 고용해 생활을 한다. 더욱이 그 하녀와 관계를 가져 아이까지 낳는다. 그러나 그 아이는 칼 마르크스가 끝내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 아이는 다행히 마르크스의 동반자 엥겔스가 도와준 덕분에 평범한 가정으로 입양을 간다. 그 후 그 아이는 외과의사가 되었다고 한다.


1883년 3월14일 칼 마르크스는 숨을 거둔다.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온 두 사람, 특히 귀족 가문의 영애였던 예니도 결국 끊임없이 닥치는 고난 때문인지 간암에 걸려 숨을 거두고 만다. 39년이라는 짧지 않은 결혼생활을 하면서 두 사람이 감내한 수많은 고통과 고난도 결국 죽음과 동시에 끝을 맺는다. 1882년 예니가 먼저 죽고 마르크스는 15개월 후 예니를 따라 숨을 거둔다.


어렵게 지내면서도 마르크스는 개를 좋아해 3마리나 키운다. 특별한 품종은 아니었지만 믹스견인 3마리 모두 붙임성이 좋아 사람을 잘 따랐다고 한다. 한 마리는 토드라고 불렀고, 다른 한 마리는 위스키,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다.


마르크스는 가끔씩 시간을 내 가족들과 함께 개들을 데리고 산책을 즐기기도 했는데, 특히 그의 어린 딸들과 개들이 마르크스 곁을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마르크스에게는 어쩌면 자녀들과 개들이 함께 했던 시간들이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진 설명> 칼 마르크스와 위스키 마르크스, 그러고 보니 성이 같은 마르크스로군.

 


여하튼 혁명가들은 개를 좋아하는가 보다. 트로츠키도 체 게바라도, 그리고 찰리 채플린과 심지어 아인슈타인과 헬렌 켈러까지도 모두 개를 좋아했으니 말이다. 문득, 개를 좋아하는 사람들치고 개만도 못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진정한 휴머니스트란 개를 좋아하는가 보다.(필자도 두 마리의 개와 함께 지낸다.) 


오늘 나는 개를 좋아하는 또 다른 휴머니스트가 그립다. 그래서 트리어 거리를 걸으며 여기저기 쇼윈도에 전시된 칼 마르크스의 웃음 진 얼굴을 만난다. 쇼윈도에 진열된 여늬 광고모델처럼 그 역시 환환 웃음과 넉넉한 풍채로 쇼윈도를 가득 채우고 있다. 그 누구도 넘볼 수 없을 만큼 인자한 모습이다. 역시 휴머니스트 다운 모습이 여유롭다. 


트리어에 가면 꼭 칼 마르크스 상표를 부착한 와인을 마시자. 와인은 한 편의 시와 같다고 했는데, 문득 칼 마르크스가 만약에 시인이 되었더라면 어떤 시를 썼을 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마 ‘레드 와인을 닮은 붉은 시가 아니라 리스링 와인을 닮은 맑은 시’가 아니었을까? 트리어를 걸으며 오랜만에 순수한 눈동자를 만나는 그런 꿈을 그려본다.


<사진 설명> 왼쪽: 1984년도 애플컴퓨터가 마르크스를 이용해 만든 비아냥 조의 광고 문구, “자본가가 세계를 바꾸는 시간이 도래하다!” 모택동, 엥겔스, 레닌, 칼 마르크스, 그리고 애플컴퓨터. 오른쪽: 칼 마르크스 포스터(2007), 요나탄 메세칼 마르크스 하우스, 트리어    


<사진 설명> 오른쪽: 요하네스 그뤼츠케 작시그문트 프로이트, 칼 마르크스허버트 마르쿠제그리고 율리우스 그뤼츠케(1969), 베를린 역사박물관  소장, 왼쪽: 클레어 폰테인, 무제(Thank You, 2004), 파리, (마르크스에 대한 경의를 표하는 포스터)      



매거진의 이전글 갈리아제국의 수도 트리어(Trier)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