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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Nov 08. 2016

갈리아제국의 수도 트리어(Trier)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독일  1


1.


AD 963년 아르덴 백작 지크프리트는 룩셈부르크의 고성을 거점으로 삼아 이 지역 지배를 시작한다. 그 후 트리어에서 멀지 않은 곳 룩셈부르크에서 1060년경 지크프리트의 증손자 콘라트는 ‘콘라드 반 룩셈부르크’라는 이름으로 룩셈부르크 백작을 칭한다. 그 후 룩셈부르크는 멜루지나 전설을 통해 신화적 도시로 치장하면서 국가로 자리를 잡아가게 된다.


바로 이 시기 룩셈부르크에서 기차로 불과 30여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도시 트리어에서는 십자군 전쟁을 준비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더구나 트리어는 단순히 오래된 도시 이전에 당시 서로마제국의 수도로 자리하고 있었기에 분명 트리어의 위상이 룩셈부르크의 정체성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베네룩스 국가 중 벨기에와 더불어 룩셈부르크가 가톨릭 국가를 벗어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바로 근처 트리어의 영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룩셈부르크와 트리어, 너무 가까운 곳에 있어 그냥 지나치기에는 아쉬운 곳이다. 룩셈부르크까지 와서 트리어를 둘러보지 않고 간다면 룩셈부르크를 다 보지 못한 것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베네룩스 국가는 아니지만 잠시 룩셈부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근처 트리어(독일)를 다녀오기로 한다.


트리어 기차역

<사진 설명> 역에서 나와 조금만 시내방향으로 가다 보면 만나는 발두인('Balduin: 1285-1354) 동상,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나 파리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22살부터 트리어 대주교와 선제후를 역임(1307-1354)했다. 



2.


룩셈부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트리어로 향하면서 차창밖을 보면 강을 따라 달리는 걸 알 수 있다. 바로 룩셈부르크의 멜루지나 인어아가씨가 노닐던 알제트 강을 건너가고 있다. 30분이 채 안되어 강을 건너자마자 바로 트리어에 닿는다. 아담하고 조용한 트리어 역을 벗어나면 넓은 도로가 시원하게 뻗어있다. 역을 등지고 곧장 도로를 따라 직선으로 뻗은 길을 잠시 걷다 보면 어느새 구시가지가 나온다.


구시가지 초입에는 검게 그을린 듯한 육중한 성문이 버티고 서 있다. 라틴어로 '검은 문'을 의미하는 포르타 니그라(Porta Nigra)이다. 로마인들이 게르만족의 침공을 막기 위해 이 성문을 2세기 후반에 세웠는데 성벽의 길이가 6.5Km에 달한다. 포르타 니그라는 AD 186년과 200년 사이에 화색 빛 사암으로 지은 것인데 수세기가 지나면서 돌 색깔이 검게 그을린 것처럼 변했다. 


포르타 니그라 성문은 트리어를 감싸고 있는 성곽에 설치된 4개의 성문중 하나이다. 그러나 현재 성문이 남아있는 것은 포르타 니그라가 유일하다. 이 성문은 독일 내 현존하는 로마시대 건축물 중 가장 보존이 잘되어 있어 관광객들에게 공개를 하고 있다.


이제 포트타 니그라를 지나 구시가지로 들어간다. 인구 10만의 도시, 옛 갈리아 제국의 수도였던 트리어, 많은 도시가 그렇듯 트리어도 모젤강을 끼고 자리를 잡았다. 모젤 강변에는 일본 작가 아기 타다시가 <신의 물방울>이라는 이름으로 소개한 ‘모젤 리스링 화이트 와인’이 생산되고 있다.*




(* 2004년부터 코단샤의 만화잡지 모닝은 ‘와인 만화’를 연재하기 시작한다. 원제는 <神の雫>. ‘소년탐정’을 쓴 김전일 작가가 다른 필명인 아기 타다시란 이름으로 연재를 한 것이다. 그림은 오키모토 슈가 담당했는데, 이 잡지는 2014년 6월까지 10년 넘게 연재되었다. 이 잡지가 비록 ‘신의 말장난’이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했지만 그동안 잘 알려지지 않은 포도주에 관한 사실들을 발굴하고 알려줌으로써 포도주 붐을 일으키는 지대한 공은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이 만화에 소개가 된 포도주는 언제나 품절 소동을 일으키며 인기리에 판매가 되기에 업자들로서는 웬만한 광고보다 좋아했을 것이리라. 그 덕분에 한국까지 덩달아 포도주 1등 소비국가에 끼이게 되었다는 소문이 무성하다. 아무튼 빈티지별, 와이너리별, 품종별로 그 맛과 향 등을 각 나라별 포도주들을 통해 구별해 내고 소개를 함으로써 포도주에 대해 관심이 없던 일반인들까지 관심을 갖게 한 만화임에 틀림이 없을 것이다.)


"와인은 병에 들어 있는 시" 



제2의 로마라고 불렸던 도시 트리어, 현재도 로마시대의 유적이 잘 보존되어 있다. 도시의 외곽에는 3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지어진 바바라 목욕탕 지역과 4세기경에 지은 황제의 온천이라는 뜻의 카이저테르멘(Kaiserthermen)이라는 공중목욕탕, 그리고 원형경기장 등을 비롯한 고대 로마제국의 유적들이 제법 많이 남아 있다. 


구시가 중심지역에는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성당 중 하나인 트리어 돔(Trierer Dom)이 있다. 이 건물은 4세기 경에 당시 트리어에 머물던 콘스탄티누스 로마 황제의 궁전이었는데, 그의 어머니 헬레나를 위해 성당으로 개축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돔은 5세기 프랑크인들이 트리어를 점령하면서 불을 질러버리는 바람에 모두 타버리고 성당의 외곽 벽만 앙상하게 남고 현재 돔의 모습은 11세기와 12세기에, 그리고 그 후 여러 차례 확장과 복구작업을 반복하면서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고 한다.


지금도 대성당을 정면에서 바라보면 입구 주변에 돌의 재질이나 색상, 문양이 좀 다른 부분을 볼 수 있는데, 바로 이 부분이 원래 로마제국 당시 성의 흔적이고 이것을 기초로 하여 대성당을 그 위에 지었다고 한다. 신성로마제국에서도 기독교의 중심지 역할을 했던 트리어이기에 지금도 트리어 대성당의 위용은 상당하다. 원래는 지금보다 훨씬 규모가 더 컸다고 한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또 한 번 파괴되는데, 1974년 복구가 완료된 뒤 1986년에 다른 로마 유적과 바로 옆에 붙어 있는 ‘성모 교회’(Liebfrauenkirche)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을 한다.


트리어 대성당



그런데 사실 트리어는 알프스 북부의 기독교 중심지로서 트리어 대성당이 유명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따로 있다. 이곳에는 바로 예수님 성의가 보존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성의는 성당 내 제단을 축성하던 때인 1196년 성당 제단에 모신 것이었는데 한참 동안 보이지 않다가 1312년 중앙제단을 보수할 때 제단에 있는 탁자 안에서 발견되었다. 약 1천3백여 년 동안 제단 탁자 안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이다. 1512년 막시밀리안 황제는 성의를 일반인에게 공개한다. 이때 성지순례를 통해 일반인들이 성의를 보러 몰려오면서 소문이 나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 성의는,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가 트리어에 머물던 당시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로마에서 트리어로 오면서 귀중한 성유물과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에 박힌 못 등을 가져왔다고 하는데, 이때 헬레나는 꿰맨 흔적이 없는 예수의 성의도 가져와 트리어 돔 주교 아그리티우스에게 건넸다고 한다. 성의는 예수 수난을 의미하며, 동시에 예수의 죽음과 부활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의미를 갖고 있어 기독교에서는 매우 중요한 성유물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설명> 성의 공개 당시의 사진과 독일 우정성이 1959년도에 발행한 성의 공개 기념우표



따라서 성의를 지니고 있는 성당 트리어 돔의 권위 또한 엄청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의에 대한 교회의 관심도 지대해 1512년 교황 막시밀리안은 성의를 직접 본 후 정식으로 예수님 성의임을 공표한다. 그 후 성의는 전쟁을 치르면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 19세기에 들어서 트리어 돔에 최종 안치된다. 이때 성의는 일반에게 또다시 공개되는데 수백만명의 성의 순례 행렬이 이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성의가 공개된 후 수많은 순례자의 방문으로 인해 트리어 돔이 부분적으로 파괴가 계속 진행되자 성의 공개를 중단한다. 마지막으로 성의가 공개된 것은 1996년 4월 19일부터 5월 16일까지였으며 70만에 가까운 성의 순례자들이 트리어 돔에 와서 성의를 관람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이렇게 성의가 공개되자 성의의 진위 문제도 공개적으로 제기되기에 이른다. 과연 트리어 돔의 성의는 진짜일까?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가 트리어로 가져왔다고 하는 것도 뚜렷한 증거가 없다. 고고학적으로나 역사학적으로 의문에 쌓여있는 성의다. 그러나 성의를 예수의 성의로 믿는 사람들에게 성의는 적지 않은 기적을 보여주었다. 그러니 진위여부를 떠나 신비한 성의라고 밖에 할 수 없지 않은가?


<사진 설명> 트리어에 남아있는 예전 갈리아 제국 당시 유적지들



3.


트레베리(Treveri)의 12세기 고문서에 기록한 전설에 의하면, 바빌론의 여왕 세미라미스(Semiramis)의 양자였던 트레베타(Trebeta)가 모젤 계곡에 정착해 도시를 세우고 트레베리스(Treberis)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트리어’라는 도시명은 바로 이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한다. 


트레베타의 부모들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전설적인 니누스(Ninus)였는데, 그는 아시리아의 전설적인 왕이었다. 한데 트레베타의 친어머니인 니누스의 부인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니누스의 첫 번째 부인이자 트레베타의 친어머니가 죽자 세미라미스(Semiramis)가 니누스의 두 번째 부인이 된다. 그런데 니누스가 세미라미스를 부인으로 맞이한 지 얼마 안 되어 죽는다. 그 후 세미라미스는 전권을 장악하고 통치를 시작한다. 이때 세미라미스는 니누스의 아들인 트레 베타를 추방한다. 세미라미스에게 쫓겨난 트레베타는 결국 유배를 떠나게 되는데 그는 유럽을 떠돌다 트리어에 정착한다. 그 후 그는 이곳을 개발하고 트리어의 시조로 알려지게 된다.


로마제국이 가톨릭을 국교로 받아들이기 전 발레리아누스가 황제가 되자 기독교 박해 정책을 더욱 강화해 카르타고 주교 치프리아누스와 로마 주교 식스토 2세를 처형한다. 한편 그는 아들 갈리에누스를 공동 황제로 임명해 로마 제국의 서쪽을 맡기고, 자신은 페르시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던 동쪽을 맡는다. 그러나 AD 259년, 군세를 몰아 페르시아로 쳐들어 갔던 발레리아누스는 그만 에데사(지금의 샨리우르파)에서 페르시아의 샤푸르 1세에게 패해 포로가 되고 만다.


<사진 설명> 트리어 구시가지로 들어가는 입구에 정문처럼 서있는 '포르타 니그라'


 

포로가 된 발레리아누스는 비샤푸르로 압송되어 죽을 때까지 노예 취급을 받으며 지낸다. 로마제국의 황제가 적국의 포로가 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전대미문의 사건이었다.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이 사건은 아브리투스 전투와 함께 로마 제국의 국력 저하를 상징하는 사건으로 평가받으며, 이후 로마제국은 스스로 황제(임페라토르)를 참칭하는 자들의 난립과 영토 분열 등으로 혼란에 빠져들게 된다.


발레리아누스가 포로가 되자, 그의 아들 갈리에누스는 아버지를 대신해 황제에 취임한다. 그러나 아버지 발레리아누스의 패배로 인해 로마제국은 혼돈에 휘말리게 되는데, 이 틈을 타 판노니아 총독 레갈리아누스가 반란을 일으킨다. 갈리에누스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당시 게르마니아 총독으로 있던 포스투무스에게 라인 강 지역의 통치를 위임한다.


그런데 이때, 갈리에누스는 아들이자 공동 황제인 코르넬리우스를 콜로니아 아그리피나(현재의 쾰른)에 남겨둔다. 아무래도 포스투무스가 미심쩍어 그를 견제하기 위한 포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포스투무스가 반역을 일으키자 코르넬리우스가 진압에 나서지만 패배하고, 콜로니아 아그리피나는 함락되고 코르넬리우스는 처형되고 만다.


포스투무스는 260년에 독립을 하고 갈리아제국을 선포한다. 그리고 그는 로마 황제를 자칭한다. 이로써 갈리아 제국이 세워지게 된 것이다. 포스투무스는 콜로니아 아그리피나를 수도로 정하고, 로마처럼 원로원을 구성하고 집정관을 선출하도록 했으며, 프라이토리아니까지 뽑아서 '로마 제국'을 모방한 독립 국가 체계를 갖춘다. 


<사진 설명> 구시가지 중심에 있는 광장



포스투무스는 갈리아를 지키는 것이 황제의 역할이라고 선언하면서 주변의 다른 지역까지 자신의 지배하에 끌어들인다. 이리하여 포스투무스의 지배영역은 갈리아뿐 아니라 히스파니아(스페인), 게르마니아(독일), 브리타니아(영국)까지 달하게 된다. 지금의 서유럽 전체라고 해도 될 만큼 광대한 지역인데, 당시 로마제국과 견줄만 했다.


그러나 반란은 또 다른 반란을 불러일으키는 게 숙명인가 보다. 결국 268년 포스투무스에 대한 반역이 일어나자 포스투무스가 이를 제압하는데, 병사들이 약탈을 허용하지 않는 포스투무스에 대해 불만이 쌓이게 되어 결국 그는 살해되고 만다.


포스투무스가 죽음에 이르게 되자 대장장이 출신으로 알려진 마루쿠스 아우렐리우스 마리우스(Marcus Aurelius Marius)가 일시적으로 갈리아 제국의 황제가 된다. 그런데 그는 즉위 한 지 3개월도 안되어 자신이 만든 칼로 살해되었다고 한다. 짧게 통치하고 존재감도 없었던 마르쿠스 마리우스 황제가 죽자 막대한 부자인, 포스투무스 시절 갈리아 제국에서 포스투무스와 공동 집정관을 맡기도 했던 마르쿠스 피아보니우스 빅토리우스(Marcus Piavonius Victorinus)가 268년에 추대를 받아 황제가 된다.


그러나 빅토리우스는 갈리아와 게르마니아에서만 인정을 받았고, 히스파니아의 군단은 빅토리우스를 인정하지 않아 제국에서 이탈한다. 연달아 빅토리우스는 로마 황제 클라우디우스 고티쿠스의 공격을 받고 빅토리우스는 일단 방어에는 성공하나 갈리아 제국은 히스파니아와 갈리아 남부, 아퀴타니아(현재의 프랑스 서남부)를 로마 제국에 도로 빼앗기고 만다. 빅토리우스의 권위는 갈리아 북부와 브리타니아에만 미치고 있었다.


AD 270년 빅토리우스는 결국 살해된다. 그를 죽인 자는 빅토리우스의 부하였던 티티아누스였는데 빅토리우스가 티티아누스의 아내를 빼앗았기 때문에 죽였다고 한다. 빅토리우스의 아들 역시 빅토리우스가 살해된 직후 군대가 살해해 버린다.


<사진 설명> 시내 광장의 풍경들



한편, 빅토리우스의 어머니 빅토리아는 아들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인심을 잃지 않은 덕분에 죽음을 면하고 살아남는다. 그녀는 가이우스 피우스 에수비우스 테트리쿠스(Gaius Pius Esuvius Tetricus)를 황제로 옹립한다. 테트리쿠스는 명망이 높았던 빅토리우스의 어머니 빅토리아에게 추천을 받는 한편, 군대에서도 지지를 얻었기 때문에 차기 황제가 될 수 있었다. 테트리쿠스는 나름대로 황제 노릇을 잘 했는데 게르만 민족을 물리치는 한편, 갈리아 남부와 아퀴타니아를 재탈환한다. 


테트리쿠스는 아우그사트 트리벨리움(Augusta Treverorum, 현재의 트리어)로 수도를 이전하고, 273년에는 아들을 공동 황제 테트리쿠스 2세로 삼는다. 그러나 테트리쿠스가 나름대로 유능한 역량을 보이기는 했지만 로마 제국을 통일할 만한 능력은 없었다. 이때 로마 제국에는 이 혼란기를 종식할 군사적 천재 아우렐리아누스 황제가 나타난다.


AD 273년, 로마에 반기를 들었던 제노비아 여왕의 팔미라를 정복한 아우렐리아누스 황제는 274년에 로마 제국을 완전히 통일하기 위해 갈리아 제국을 침공한다. 결국 테토리쿠스는 아우렐리아누스에게 패배하고, 갈리아 제국은 완전히 로마에 재병합 된다.


14년간 로마 황제에 대한 모반은 끝나고 결국 갈리아제국과 로마제국으로 분할되었던 제국은 다시 하나의 로마제국으로 통합된다. 일장춘몽이라고나 할까, 지배자의 나약함이 한 나라의 운명을 뒤바꾸어놓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로마제국에 반기를 들고 설립된 갈리아제국, 그 허황된 나라의 수도가 바로 트리어라는 곳이었다. 


<사진 설명> 트리어 대성당 내부의 모습들, 예수님 성의는 성당 제단(맨 우측 사진) 아래 공간(가운데 사진)에 보관하고 있다.


 

4.


트리어가 기록된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카이사르(Caesar)가 갈리아인들과의 전쟁에 대해 보고하면서 이 지역에 말을 잘 타는 트레버러인(Treverer)들이 산다고 쓰면서부터다. 이들은 켈트족에 속하는 이곳 원주민이었는데, 트리어(Trier)라는 이름은 바로 이들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당시 게르만족과 대립하고 있던 로마인들에게 이 지역은 군사적 요충지로, 그리고 남과 북을 잇는 교통의 중심지로서 중요했다. 그 결과 기원전 16년 경에는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Augustus)가 아우구스타 트레베로룸(Augusta Treverorum)이라는 이름을 붙인다. 이 이름은 얼마 뒤 트레베리스(Treveris)로 바뀌고, 293년에 서로마제국의 수도가 된다.


한편, 258년과 268년 사이에 포스투무스가 국경에서 프랑크족과 알라마니족이 위협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이곳에 주둔하는데, 이때 트리어가 최초로 수도가 된다. 293년 로마가 제국을 동부와 서부로 나누어 지배하기 시작한 이래, 브르타뉴(Brittany)와 골(Gaul)의 통치자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가 이곳으로 이동해 오고, 트리어는 수도로서 위치를 더욱 굳힌다. 


콘스탄티누스는 아버지 콘스탄티우스가 죽은 후 서로마제국의 황제가 된다. 트리어에 10년간 머물며 트리어를 재건하는데 로마에 비견할만한 도시로 재건을 한다. 원형 극장은 물론 공중목욕탕과 원형 경기장,‬ 그리고 몇몇 집단 주택을 철거하고 건설한 거대한 궁전까지 건설한다.


트리어 지방은 이미 3세기 후반부터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존재했다고 알려졌는데 312년에 콘스탄티누스는 로마제국의 지위를 둘러싸고 대항하던 막센티우스와 로마의 북쪽 미루비우스에서 전투를 벌인다. 이때 하늘에 빛나는 십자가가 보이고, “이곳에서 승리하리라”라는 문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이를 본 황제가 회심의 미소를 지우며 예수의 가호를 받아 승리하게 되었다는데, 이 전투의 승리는 결국 기독교를 로마 제국의 공식 종교로 인정하는 단초가 된다. 결국 이듬해인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밀라노에서 칙령을 내려 그리스도교를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표한다.




이 시기를 전후해 트리어는 경제적 문화적으로 최고의 황금기를 누리는데, 4세기경에는 인구가 이미 6만에서 8만에 달하였다고 한다. 트리어의 현재 주민수가 10만 명인 것을 감안하면 당시 트리어가 얼마나 큰 도시였는가를 가늠할 수 있겠다


결국 트리어는 로마 제국의 수도이자 골 지방의 주도가 된다. 그러나 고트족의 침략은 트리어의 쇠퇴를 불러온다. 그 뒤 로마 제국의 수도는 골 지방 아를의 수도인 밀라노로 옮겨지고 트리어는 변화를 겪는 운명에 놓이게 된다. 이후 트리어의 역사는 전쟁으로 인한 파괴와 복구의 역사로 이어진다. 5세기에 민족이동에 기인한 프랑크 족의 침공으로 도시는 심하게 파괴되고, 그에 따라 인구도 2-3천 명으로 급격히 줄어들게 된다. 9세기경에 칼 대제(Karl der Grosse)에 의한 대주교령(Erzbistum)으로 도시의 승격이 예고되었지만 이 또한 882년 바이킹 침공으로 인해 멈추게 된다. 


그러나 그 후 다행히 인구가 조금씩 다시 늘어나고, 1248년에는 도시 성벽을 완성하게 된다. 14세기경에는 트리어가 당시 황제 선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선제후(Kurfuerst) 도시로 승격된다. 그러나 여전히 트리어는 종교개혁의 실패와 30년 전쟁(1618-1648), 그리고 그에 이어진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끊이지 않고 파괴를 경험하게 된다. 




특히 1794년 프랑스 혁명군은 트리어를 점령하고, 1802년에는 선제후의 직위와 대주교의 직위도 없애버린다. 결국 1804년 트리어는 프랑스령으로 추락하고 만다. 한편, 1798년 나폴레옹은 1473년에 세운 트리어 대학을 폐쇄해 버린다. 트리어 대학은 1974년이 되어서야 다시 문을 여는데, 트리어 대학은 공식적으로 1984년도에 2000번째 생일을 자축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이 전쟁에 패하게 되자 1815년 비인 회의에서 평화조약을 맺게 되는데 이를 바탕으로 프로이센이 트리어를 넘겨받는다. 그러나 트리어가 이번에는 세계대전이 일어나는 바람에 또다시 파괴되고 만다.

트리어는 1차 세계대전 때에는 50여 회에 걸친 폭격을 당한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자 이번에는 1930년까지 프랑스가 점령해 버린다. 그 후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 되자 또다시 트리어는 거의 반이상 파괴되고 만다. 트리어는 그야말로 비운의 도시였다. 문득 지그프리드백작이 트리어를 벗어나 룩셈부르크로 가버린 이유를 알 것만 같은 생각이 스쳐 지나간다. 


참조: 위키백과(트리어), 나무 위키(트리어), 리그베다 위키(갈리아 제국), 로마제국 쇠망사(에드워드 기먼 지음, 구글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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