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수 Nov 07. 2016

비안덴(Vianden)에서 만나는 빅토르 위고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룩셈부르크  3


1.


룩셈부르크 시에서 기차를 타고 북동쪽으로 한 시간 정도 가면 독일 국경과 맞닿은 곳에 아담한 동화 같은 마을 비안덴이 나타난다. 이 마을에 들어서면 곧바로 빅토르 위고가 머물던 숙소와 그의 흉상, 그리고 빅토르 위고를 기리는 작은 박물관을 만나게 된다. 마치 비안덴이 빅토르 위고를 기리는 도시 인양 마을에 들어서는 사람들은 빅토를 위고를 제일 먼저 만나게 된다. 


룩셈부르크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그가 머물렀던 비안덴까지 한 시간 이상을 달려와 그를 만나는 일은 참 반갑고 고맙다는 느낌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그야말로 내가 지금 여행을 하고 있다는, 그래서 살아있다는 그런 느낌을 갖게 해주니 기분 좋은 일이 아닌가.


그는 망명시절 이곳에 머물면서 ‘레 미제라블’을 완성한다. 그뿐 아니라 그의 다른 주요 작품들 역시 이곳에서 적지 않게 완성된다. 빅토르 위고에게 비안덴은 그의 작품 배경이자 산실 노릇을 톡톡히 했다. 그러니 빅토르 위고에게 비안덴은 특별한 동네일 수밖에 없었을 터, 마치 동화 속에만 존재할듯한 마을이 어느새 그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는다. 비안덴은 어쩌면 그만큼 빅토르 위고에게는 혼자만 느끼고 즐기고 싶은 그런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쳐간다. 


<사진 설명> 비안덴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멀리 비안덴 성이 보인다. 시내에 가까워지면 그가 머물던 여관을 만나게 되고 그의 흉상과 기념관 등이 나타난다. 아래 맨 우측 사진에 보이는 오른쪽 건물이 그가 머물던 숙소를 기념관으로 꾸민 곳이다. 



이처럼 비안덴에서 빅토르 위고의 가장 멋진 작품들이 완성되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비안덴을 찾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가 거닐었을 곳을 탐색할 요량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은 비안덴 곳곳을 두리번거리며 걷는다. 비안덴을 걷는 사람들 모두가 마치 자신이 빅토르 위고가 된 것처럼 표정들이 그를 닮은 느낌이다.


비안덴 시는 마을 한가운데로 우르(Ur) 강이 흐르고 오렌지_낫소 공작의 영지인 오래된 숲을 끼고 마을이 조성되어 있다. 마을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흐르는 우르 강 언저리에는 3층짜리 건물이 하나 있는데 바로 그 집에서 빅토르 위고가 살았다. 다리께에 위치한 빅토르 위고가 묵었던 집은 1935년도부터 그를 기념하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박물관에는 그가 사용하던 집기와 문방구 같은 것들이 진열되어 있다. 또한 그가 머물던 시기에 그가 그린 비안덴 풍경들이 몇 점 남아있다.


한편, 비안덴 마을에 들어서면 다리 초입에 빅토르 위고의 흉상을 만나게 된다. 이 작품은 로댕이 제작했는데 프랑스 의회가 2002년도에 비안덴 시에 기증한 것이다. 그런데 이 작품은 원래 파리에 있는 빅토르 위고 흉상 원본을 복사해 만든 것이라고 한다.


<사진 설명> 로댕이 제작한 빅토르 위고 흉상



2.


천성이 낙천적이고 투쟁적인 애국청년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2.26. - 1885.5.22), 그는 1848년 2월 시민혁명에 자극받아 더욱 인도주의 색채를 띄게 된다. 그러다 정치에 관심을 가지면서 나폴레옹 3세에 반기를 들게 되고 결국 국외로 추방을 당한다.


1851년 드디어 빅토르 위고는 19년간의 기나긴 망명생활을 시작한다. 작가로서는 오히려 작품세계에 몰두할 수 있는 천혜의 기회를 만나게 된 셈이다. 처음에 영국으로 갔던 그는 얼마 후 벨기에를 거쳐 또다시 룩셈부르크의 비안덴으로 들어와 숨어 살다 시피하면서 작품을 구상하고 집필에 몰두한다. 망명생활을 하던 때에 그를 대표하는 대부분의 작품이 쏟아져 나온다. 최고의 걸작들이 대부분 이때 만들어진다.
 

빅토르 위고는 숙소에서 머무는 동안 창문을 통해 보이는 비안덴 성의 모습, 특히 저녁에 노을 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자연의 웅대함을 인상 깊게 관찰하기 시작한다. 그는 비안덴 사람들에 대해 놀라운 자연경관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사람들이라는 평을 하기도 한다. 한편 빅토르 위고는 비안덴에서 지내는 동안 60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18살 먹은 젊고 아리따운 아가씨 마리 머시(Marie Mercier)와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내 나이가 어때서~, 그는 후에 80이 넘어 죽기 직전에도 사랑을 한다. 음, 대가가 되려면 이런 건 꼭 배워야 하는 거야!) 


<사진 설명> 빅토르 위고 기념관 앞에 놓인 다리에서 바라본 비안덴 성, 우르 강변 우측에 비안덴 성으로 가는 관광열차를 탈 수 있다. 


1870년, 드디어 프랑스가 보불 전쟁에 참패하자 나폴레옹 3세는 몰락하고 만다. 결국 빅토르 위고는 공화주의 옹호자로서 민중의 열렬한 환호 속에 파리로 돌아온다. 다음 해 그는 국회의원으로 복귀한다. 정치가로서의 빅토르 위고는 그가 작품에서 보여주는 인간주의적 관점이 그대로 묻어난다. 지금의 유럽이 가고 있는 길을 그는 그때 이미 생각하고 있었다. ‘유럽 통합’과 ‘단일통화’ 유럽 통합정책의 핵심적 내용들이 바로 그가 당시에 제시한 개념들이다. 


그의 주장은 가장 기본적인 것에서 출발한다. “유럽은 한 민족이며, 한 국가이다.” 그것이 국가이든 지역사회이든 우리가 지켜내야 할 것은 바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라는 개념인 것이다. 바로 그가 생각하는 이런 사고의 틀이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용한 이유이다. 그의 정치철학은 곧바로 그의 문학작품에서도 만나게 된다.

빅토르 위고의 <노트르담의 꼽추>와 <레 미제라블>이라는 작품은 그의 대표작이다.


1831년 그가 30세에 완성한 ‘노트르담 드 파리’는 1905년에 ‘라 에스메랄다’라는 제목으로 뮤지컬로 제작되면서부터 지금까지 68편에 이르는 영화와 TV 시리즈로 제작되었다. 특히 1956년에는 당대의 미남배우 앤서니 퀸이 주연한 <노트르담의 꼽추>라는 제목으로 영화가 만들어져 인기를 끌기도 했다. 그 후 1987년부터 <노트르담의 꼽추>는 뮤지컬로 제작되어 지금까지 뉴욕 브로드웨이에서 30여 년에 이르는 공연 기록을 세우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그동안 정치적 불안한 상황을 반영하는 듯 <레 미제라블>이 여러 형태의 작품으로 만들어지고 공연되면서 엄청난 인기몰이를 했다. 시대가 바뀌어도 식지 않는 그의 인기는 어쩌면 당연한 게 아닐까 싶다. 그가 노래하는 위대한 인류애에 대한 사랑과 희망, 그건 영원한 주제이기 때문이라는 생각이다.(* 다음 링크한 곳에서 레미제라블 25주년 뮤지컬 콘서트(2010)를 무료로 볼 수 있다. 공연 끝난 후 앙코르 부분도 있으니 노치지 마시기를...! http://tvpot.daum.net/v/vf2dfE4m4e7ere47mcXe0i4 )


<사진 설명> 관광열차를 타면 힘들이지 않고 성 까지 갈 수 있다. 가면서 성과 계곡에 있는 마을 전경을 모두 감상할 수 있어 좋다. 



빅토르 위고는 그의 대표작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개인적 욕망에 눈이 어두워 살인까지 저지르는 프롤로 주교를 그린 바 있다.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가톨릭 교회는 그의 <파리의 노트르담>과 <레 미제라블> 등의 걸작들을 금서로 지정해 신도들이 읽지 못하게 하는 어처구니가 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이런 일이 있자 빅토르 위고는 결국 죽음 직전까지도 ‘영혼 없는’ 가톨릭 교회와 화해를 거부한다. 빅토르 위고는 1881년 8월 31일 다음과 같은 유언장을 쓴다.


“신과 영혼, 책임감. 이 세 가지 사상만 있으면 충분하다. 적어도 내겐 충분했다. 그것이 진정한 종교이다. 나는 그 속에서 살아왔고 그 속에서 죽을 것이다. 진리와 광명, 정의, 양심, 그것이 바로 신이다. 가난한 사람들 앞으로 4만 프랑의 돈을 남긴다. 극빈자들의 관 만드는 재료를 사는 데 쓰이길 바란다... 내 육신의 눈은 감길 것이나 영혼의 눈은 언제까지나 열려 있을 것이다. 교회의 기도를 거부한다. 바라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나오는 단 한 사람의 기도이다.” 


“영혼 없는 교회의 기도는 필요 없다”는 단호한 그의 입장이 느껴진다. 그는 1885년 5월 22일 눈을 감고, 그의 유해는 팡테옹에 안장된다.


<사진 설명> 성에서 바라본 마을 전경, 계곡 사이에 마을이 세워져서인지 강을 따라 마을이 길게 늘어서 있는 게 보인다. 



3.


빅토르 위고의 인간에 대한 사랑은 흔히 ‘민중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그는 "예술은 민중을 위해 만들어지고 모든 것은 신으로부터 와서 민중에게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신은 원칙이고 민중은 "예술이 도달해야 하는 종착점"이며, "예술과 연극은 민중적이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그래서인지 그의 작품에는 가난한 노동자들에 대한 한없는 사랑이 묻어 있다. <레 미제라블>에서 보았듯이 노동자들에 대한 그의 시선은 따스하기만 하다. 또한 그가 1869년에 쓴 <황량한 세월(Les Années Funestes)>에서도 프랑스의 광산 노동자들 입장에서 그들의 현실을 그리고 있다.


"그 사람, 내 아버지, 내 어머니, 나, 우리는 모두 광부였다. 작업은 가혹했고 주인은 악랄했다. 사람들은 빵이 모자라서 석탄을 깨물고 있었다. 우리는 그에 대해 불쾌한 생각을 하기보다 차라리 임금을 조금 적게 주더라도 일을 조금 줄여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총탄이다."


비록 빅토르 위고를 감상적 낭만주의자라고 비판을 할지언정 그가 우리에게 여전히 의미 있는 작가임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것은 그가 일관되게 인류에 대한 한없는 애정과 관심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인간에 대한 낙관적 신뢰와 이상주의적 사회 건설을 향한 불 같은 열정은 그야말로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하지 않은가.


파리를 떠나 룩셈부르크를 안식처 삼아 작품 활동을 하면서 그가 그린 인간에 대한 사랑과 희망, 모두가 그의 인간에 대한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작가의 책임을 작품으로 완성한 빅토르 위고가 은신처 삼아 산책하며 작품을 구상했을 그 길과 개울물, 그리고 길가의 잡초들까지도 그를 기억하는 듯하다. 


비안덴은 그가 살던 시기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조용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마치 또 다른 빅토르 위고가 찾아와 자신만의 작품을 구상하고 완성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신념을 제공하려는 듯이 말이다. 그래서 비안덴이라는 마을이 더 예쁘게 보이는지 모르겠다.


<사진 설명> 빅토르 위고가 그린 비안덴 성



4. 

비안덴에는 룩셈부르크에서 가장 큰 성이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룩셈부르크를 세운 지크프리트 백작이 룩셈부르크에서 트리어를 대신할 영지를 물색할 때 이곳 비안덴을 또 다른 주요 영지로 생각하고 성을 쌓을 계획을 가졌었다는 사실이 그 중요성을 말해준다. 그래서인지 서기 1000년에 비안덴 성이 세워지면서 룩셈부르크 역사를 상징하는 건축물로 자리하게 된다.


비안덴 성은 로마제국 시대의 영향력을 과시하듯 당시 유럽에 유행하던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을 사용해 11세기부터 14세기 사이에 세워진 가장 크고 아름다운 봉건 영주의 거주지 중 하나이다. 이 성은 15세기 초까지 프랑스와 독일 제국 황실 모두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비안덴 백작의 지배하에 있었다. 당시 비안덴의 영주 헨리 1세(1220-1250)는 비안덴의 영주로 있던 시기에 <태양의 백작>이란 이름으로 불렸다. 그가 집권하던 시기가 비안덴이 가장 번성하던 절정기였다. 그의 선조는 수백 년 동안 룩셈부르크와 벨기에 남부지역을 통치하던 가문이다.


그의 아내, 코트니 마가렛(Margarete of Courtenay) 역시 프랑스 왕실 가문 출신인데, 로마 콘스탄티노플 황제의 딸이자 헝가리 왕의 시누인 동시에 또한 스페인 필립 왕의 사촌이기도 한 인물이다. 또한 마가렛의 선조들 역시 벨기에 서쪽 해안가의 플랑드르 지역과 프랑스와 인접한 벨기에 남서부 지방의 헤이놀트(Hainault)를 지배하던 가문이었을 뿐 아니라 그녀의 아들 프레더릭(Frederic)은 후에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고 제5차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인물이기도 하다.


<사진 설명> 비안덴 성 안에 마련된 각종 기자재들과 음악당. 음악당은 여름철에 국제적인 음악 콘서트가 열리는 장소로 이용된다. 



이처럼 막강한 권력을 지닌 헨리 가문이 지배하던 비안덴 성은 1417년에 낫소 가문에게 그 소유권을 계승하는데, 1530년에는 윌리암 오렌지 공에게 소유권을 계승한다. 이때부터 이 성은 더 이상 헨리 백작 가문의 거주지로서의 기능을 상실한다. 


1820년도에 이르면, 막강하던 룩셈부르크 대공 집안의 대가 끊어지고 네덜란드의 왕 윌리엄 1세가 룩셈부르크 대공을 겸해서 룩셈부르크를 통치하게 된다. 그런데 윌리암 대공이 통치하는 시기에 비안덴 성은 초라한 모습으로 변해 버리고 만다. 


네덜란드 왕이자 룩셈부르크 대공인 윌리엄 1세가 시의회 의원인 벤첼 코스터(Wenzel Coster)에게 3,200 플로린스를 받고 이 성을 넘겨준 것이다. 코스터는 이 성을 인수하자마자 성을 해체하기 시작하는데, 지붕에서 떠어낸 타일들과 나무 덮개들, 심지어 궁전에 붙어 있는 문짝과 창문까지 조각조각 분해해 팔아먹기 시작한 것이다. 이제 성은 더 이상 성이 아니라 단순히 도굴범에 의해 도굴된 음침한 묘지같이 변한다.


다행히 1827년 룩셈부르크 대공이자 네덜란드 왕인 윌리암 1세는 코스터의 이런 무자비한 행위에 분노를 느끼고 파멸에 빠진 성을 복구하기 위해 1,100 플로린스를 주고 성을 다시 매입한다. 그러나 아쉽게도 1830년에 벨기에가 네덜란드에 독립을 선포하고 혁명을 일으키게 되자 재건축사업을 진척시킬 수 없게 된다. 다행히 네덜란드의 헨리 왕자가 1851년 자신의 사비를 들여 비안덴 성안에 있는 예배당을 복원하기에 이른다.


그 후 비안덴 성은 1890년 나소(Nassau) 가의 맏형인 아돌프 대공(Grand Duke Adolphe)의 소유가 되는데, 이때 그는 독일 출신의 보보 에버하르트(Bobo Ebhardt)를 고용해 이 성을 복구하려 시도를 한다. 그러나 이번에도 세계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이 계획은 무산되고 만다.


1854년도에 제작된 비안덴 성 도해

<사진 설명> 왼편 2장의 사진은 1900년대 보수공사 당시 사진이며, 맨 오른쪽은 1978년부터 1987년 사이에 진행된 보수공사 모습의 사진.



한편, 또다시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고 1944년 11월 19일 비안덴에서 전투가 벌어진다. 이때 이 성은 나치에 저항하는 룩셈부르크의 레지스탕스가 히틀러 친위대의 침공을 막아내는데 훌륭한 역할을 수행한다. 그뿐 아니라 현대 전쟁의 상황에서도 이 성은 군사적 가치가 충분히 입증되어 비안덴 성의 위상을 재고하게 만든다.

그러나 1962년까지는 비안덴 성을 단순히 군사적 가치에 비중을 두고 재건축을 부분적으로 시도할 뿐이었다. 


더욱이 이 성의 소유권 문제로 성을 재건축하는 일이 생각보다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후 1977년에 쟝(Jean) 대공이 비안덴 성을 국가에 헌납하는 형식으로 소유권을 포기하자 비안덴 성의 복원작업은 급 물결을 타게 된다. 1979년에는 제일 먼저 교회의 지붕을 덮고, 1667년에 불타버린 궁들을 하나씩 복구하고 수리하면서 새로운 모습으로 변모해 간다. 그뿐 아니라 비안덴 성의 상징처럼 자리했던 원뿔형의 백색 탑도 그 모습을 되찾으면서 비안덴 성은 비로소 예전 모습을 어느 정도 획복하게 된다.


그 후 1980년대에 이르러 비안덴 성은 거의 10여 년 동안 복구작업을 서둘러 1990년도에는 거의 예전의 모습을 되찾게 된다. 과거의 영광을 복원하기 시작하면서 비안덴 성은 또다시 지역의 유물로서뿐 아니라 유럽의 주요 기념물로서 대접을 받게 된 것이다. 그 결과 2013년에는 드디어 비안덴 성이 유네스코가 지정하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기에 이른다.



○ 참고 사항


- 비안덴 가는 방법 : 룩셈부르크 시에서 에텔부르크까지 기차로 약 25분 가서, 에텔부르크 역 바로 옆에서 570번 버스로 갈아타고 30분 정도 달리면 비안덴에 도착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룩셈부르크에 전해오는 멜루지나 이야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