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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Nov 13. 2016

신호등 없는 도시 루뱅(Louvain)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벨기에  2


1.


루뱅은 대학도시로 알려져 있다. 유럽의 여러 도시가 그렇듯 루뱅 역시 대학 도시로 발전을 해 왔다. 하이델베르그가 그랬고 트리어가 그랬고 잘츠부르크가 그랬다. 루뱅을 찾은 건 대학이 지닌 학문적 낭만을 즐기는 것뿐 아니라 학문적 분위기가 어떻게 도시를 꾸며 왔는지를 오랜만에 다시금 직접 보고 느끼고 싶다는 단순한 생각에서였다.


루뱅은 브뤼셀에서 기차로 30분이면 간다. 드디어 루뱅 역에 도착했다. 한데, 루뱅 기차역에서 나와 시내로 들어가려는 순간 뭔가 느낌이 이상하다. 신호등이 없다. 건널목을 건너가야 하는데 차가 지나고 있는데 잠시 주저하게 된다. 건너야 하나 말아야 하나. 신호등이 없으니 순간 혼란스럽다. 하지만 루뱅에서는 안심해도 좋다. 신호등 없는 도시 루뱅에서는 “건너가고 싶으면 언제건 건너가라”. 그게 루뱅의 법이다.


신호등은 약속이다. 붉은색과 초록색으로 만들어진 신호체계인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빨강은 멈춤을, 초록은 직진을 의미한다. 누구나, 그게 운전자이든 보행자이든 상관없이 길거리에서 이 색깔을 보게 된다면 바로 그 색이 주는 의미대로 따라야 한다. 서거나 직진을 해야 한다는 말이다.


<사진 설명> 신호등 없는 건널목



그런데 루뱅에는 그 신호체계가 없다. 어디에서도 볼 수가 없다. 신기하다. 도로에 사람이 건너면 자동차는 무조건, 그야말로 무조건 서야 하고 자동적으로 멈춘다. 그게 루뱅의 법이고 약속이다. 약속은 대개 한 사회의 법과 문화로 나타난다. 따라서 특정지역의 신호체계에 따라 인간의 행위 유형이 다를 수 있는데 루뱅에서의 행위 체계는 전혀 눈에 보이지 않으니 순간 당혹스럽기도 하다. 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행위하면 된다는 뜻일까? 가만가만 생각해 보아도 그 의미를 알기가 쉽지 않다. 그건 어쩌면 지난 역사가 지난했기에 더욱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지 않을까라고 조심스럽게 생각을 해본다.


벨기에는 지금의 네덜란드와 국경을 맞대고 갈등을 겪기도 했고, 1차 대전 당시 독일군에게 루뱅의 주민들이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대량 학살을 당해야 했던 기억들이 집단적 사고, 가치체계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음에 틀림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지금도 루뱅 시내 어디에서도 독일 국기를 내거는 게 금지되어 있다.(그런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독일 국기와 벨기에 국기가 가로와 세로 방향만 다르고 똑같은 색깔의 3가지 색으로 구성되어 있어 벨기에 국기를 내걸고 고개를 옆으로 기울이고 보면 그대로 독일 국기가 아닌가? 이런 걸 운명적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의미에서 루뱅에서 길가의 신호등을 없애고 자율적으로 행위하도록 만들어 놓은 신호체계는 갈등 상황을 극복하기 위한 멋진 전략적 사고였다는 생각이 든다. 결국 인간의 의지는 강요나 통제가 아니라 자율과 자유로운 행위에서 더욱 멋진 결정을 이루어 낼 수 있다는 아주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문득 예전 대학 신입생이 되던 날 처음 오리엔테이션에서 들었던 말이 생각이 난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자유로운 상황에서 진리를 탐구하는 게 아니라 진리를 탐구하다 보면 자유로워진다는 말이 더 멋지지 않은가? 신호등 하나에서도 진리를 느낄 수 있다면 그건 바로 대학만이 해낼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은 또다시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사진 설멸> 유스투스 립시우스(Justus Lipsius: 1547-1606) 동상, 브뤼셀 인근 오버라이제에서 태어난 벨기에 철학자로서 라이덴과 루뱅대학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브뤼셀에 있는 유럽연합(EU) 빌딩의 이름도 그의 이름을 따라 ‘유스투스 립시우스 빌딩’이라고 부른다.



그를 반증하듯 루뱅대학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온다. 독일의 철학자 후설, 그는 현상학의 창시자인데 유대인이었다. 1938년 그는 약 4만 5천 장의 속기 원고와 1만 장의 타이프 원고를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러나 2차 대전의 발발로 그의 방대한 문서들은 사라질 위험에 처하게 된다. 다행히 당시 루뱅 대학의 철학도였던 반 브레다 신부가 유족들과 루뱅 대학 당국을 설득해 나치의 눈길을 피해 후설의 유고 전부와 그의 서재 전체를 대학으로 옮기는 데 성공한다. 그렇게 해서 루뱅에 ‘후설 문서보관소’가 들어서게 되고 현대철학의 산실처럼 자리하게 된다.


신화가 한 민족의 마음의 거울이라면, 이 이야기는 유럽인의 모든 것, 즉 전쟁과 평화, 그리고 학문에 대한 고매한 취향 전부를 한꺼번에 비추어주는 신화라고 하겠다. 그리고 그 신화의 중심에 유럽 정신을 간직한 오래된 대학이 자리하고 있지 않은가.


이를 두고 누군가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인간의 역사에는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에 남아있던 세계 유일의 아이스킬로스 희곡 전집을 불사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죽은 유대인의 문서를 보관하기 위해 도서관을 세우는 이들도 있다. 그런 모습으로 루뱅은 순수 학문의 빛나는 성좌로 오르는 하늘의 사다리처럼 한 젊은 연구자의 마음 안에 들어섰다.”(출처: 민음사 반비의 블로그/ http://banbi.tistory.com/12)


<사진 설명> 루뱅대학 건물들, 시내에 있는 건물들은 대부분 대학건물이라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루뱅에서 신호등 없는 자율적 행위가 가능하고 그렇게 정하게 된 건 어쩌면 대학이 지닌 순수 아카데미즘의 실험 정신이 있기에 가능했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의 대학 다움이란 건 바로 실험정신에 있으니 그런 자세야 말로 대학 다움의 출발이란 말이다. 우리의 대학이 대학으로 살아남지 못하고 심지어 정치에까지 휘말리고 있음은 아카데미즘이 부재하기 때문이 아닌가 말이다.


여행하며 느끼게 되는 대학 다움에 대한 나름대로의 편린들은 가끔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예전 대학시절부터 지금까지, 그야말로 한 번도 대학 다움에 제대로 젖어볼 수 없었다는 건 너무 큰 슬픔이자 서러움이다. 우리가 가장 부러워해야 하는 건 어쩌면 외국문화 중에서도 바로 대학의 아카데미즘이 아닐까? 그건 바로 대학의 실험정신을 바탕으로 한 아카데미즘이 인간의 본성을 규정짓고 창의적으로 작동하게 만드는 원동력이기에 더욱 그렇다는 생각이다.


그러니 여행하며 우리가 만나는 대학들, 잠시라도 그 대학의 도서관에서 신문이라도 펼쳐 보면서 잠시 쉬었다라도 들렀다가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기왕이면 해외여행을 하다가 대학이 있는 도시를 지나칠 경우 꼭 한 번씩 대학을 들러볼 일이다.(대학 구내식당은 길거리 햄버거 가격으로도 누구나 이용할 수 있다.)


<사진 설명> 루뱅의 명물인 시청사 건물, 대부분 유명인사들을 조각해 건물 벽면에 부착해 놓았다. 우측 사진속의 작품은 에라스무스의 동상이다.



2.


벨기에 플라망어(네덜란드어) 사용지역에 있으면서도 뢰번(네덜란드어: Leuven)이라기보다 흔히 루뱅(프랑스어: Louvain)이라고 부르는 도시, 이 곳에 1425년 교황 마르티노 5세의 인가를 받아 네덜란드 최초의 가톨릭 대학을 설립하고 학술, 문화 중심지로 자리를 잡는다.


루뱅 가톨릭 대학교는 수백 년간 프랑스어를 공식 언어로 사용하다가 1900년대를 전후한 시기에 네덜란드어를 함께 사용하기 시작한다. 두 언어의 사용은 결국 갈등을 야기하고 1968년 대학을 분리하기에 이른다. 네덜란드어를 사용하는 그룹은 그대로 남아 ‘뢰번 가톨릭 대학교’(Katholieke Universiteit Leuven)가 되고,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그룹은 인접한 남쪽 신도시로 이전하여 루뱅 가톨릭 대학교(Université catholique de Louvain)를 만든다. 따라서 루뱅 시내에서 만나는 대학 건물들은 모두 ‘뢰번 가톨릭 대학교’인 셈이다.


아무튼 당시 알프스 이북에 설립된 대학 중 파리대학 다음으로 규모가 큰 대학이 바로 루뱅대학교였다. 이곳에서 D.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 1466~1536), G. 메르카토르(Gerard Mercator, 1512~1594), J. 립시위스(Justus Lipsius, 1547~1606) 등과 같은 저명한 철학자들이 교수를 역임했고, 가톨릭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세계사적으로도 중요한 곳이 되었다.


시내 구 시장터(주변에 대학 건물들이 둘러싸고 있다) 한켠에 라이언스클럽이 기증한 에라스무스의 동상이 서있다.



그뿐 아니라 루뱅대학교가 지니고 있는 더 큰 사회적 의미와 중요성은 일렬로 나열하면 거의 수백 미터에 달할 정도로 방대한 ‘루뱅대학교의 기록물’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 기록물들은 근대 초기 대학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통찰할 수 있도록 그동안의 대학 관련 내용들을 모두 담고 있다.


특히 이 기록물은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루뱅대학교가 어떻게 학생들과 관련된 장학제도를 운영하고 대학 내 부속기관이 각기 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성직자들만의 영역이었던 대학교가 국가 기관으로 새롭게 변신을 꾀하고 종교개혁 과정에 대학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등을 자세하게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가 진행되던 시기에 중세 전통적 가치와 새로운 인본주의 사상이 갈등하게 되었을 때 대학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를 규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를 제공한다. 그래서 이 기록물은 후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다.


한편, 루뱅대학교는 유럽 내 어느 대학보다 많은 단과대학을 설립하고 학생들을 모집했는데, 16세기 초 이미 루뱅대학교의 학생 수는 파리대학교를 제외한 알프스 북쪽에 있는 다른 대학들을 추월하기 시작한다. 그만큼 루뱅 대학교의 발전은 비약적이었다. 또한 루뱅대학교는 1519년 쾰른대학교와 함께 마틴 루터(M. Luther)의 사상을 비판한 최초의 기관이기도 하다. 이와 함께 루뱅대학교의 신학자들이 가톨릭 종교개혁을 위해 ‘색인과 가톨릭 신앙 고백, 그리고 성경 공인 번역’ 등을 수행함으로써 훗날 가톨릭 교회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는 공을 세운다.


The Archives of the University of Leuven(1425-1797)



루뱅대학교가 가지고 있는 옛 기록물들은 다행히 비교적 원형 그대로 보전되어 있는데, 하마터면 소실될뻔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1914년 8월 25일, 독일군이 파리를 침공하기 위한 전초작업으로 루뱅으로 진격해 온다. 독일군은 루뱅에 도착하자마자 루뱅대학교 도서관에 불을 지른다. 이 사건으로 30만 권의 장서가 수천 편의 귀중한 필사 원고들과 함께 화염 속에서 타들어 간다. 이 가운데 1000 여권은 16세기 이전의 필사본이었다. 이 자료들은 일개 대학의 자산으로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 유럽, 나아가 인류 지성사의 큰 손실이었다.


그러나 대학교 기록물은 다행히 설립 칙서와 몇 권의 등록부만 소실되었을 뿐 거의 모든 기록물은 다른 장소에 보관되었기 때문에 화를 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기록유산은 현재 루뱅에 있는 벨기에 국립기록보관소(State Archives in Belgium)인 뢰번 가톨릭 대학교 기록관에 소장되어 있다.


한편, 파괴된 도서관은 다행히 국제사회가 연대하여 루뱅의 기차역에서 가까운 라데우츠 광장에 네오 플레미시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로 재탄생한다. 새로운 도서관은 미국인 건축가 휘트니 워런(Whitney Warren)이 설계를 맡았는데 미국인이 설계를 한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사람들 사이에 미국식 마천루가 들어서는 게 아니냐는 농담조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했단다.


<사진 설명> 재건된 루뱅대학 도서관과 그 앞에 세워놓은 벌레탑, 인류역사가 시작되기전 부터 벌레(곤충)는 이미 인간보다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상징적 의미라고 한다.(벌레만도 못한 인간임을 기억하라!)                                                                                                                                                                                                                                                                                                      




그러나 워런은 16세기 말 네덜란드와 덴마크 지역에 유행하던 플레미시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응용하여 높은 첨탑과 정교한 조각으로 장식된 건물을 완성한다. 이 건물은 단순한 아름다움을 넘어 1차 세계대전과 연합국의 승리, 벨기에인과 미국인의 우정, 국제연대, 나아가 평화에 대한 희망의 상징이라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그런데,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 도서관은 또다시 파괴되고 만다. 당시 약 90만 권의 장서 가운데 겨우 1만 5천 권 정도만 남고 철저히 파괴되고 만다. 전쟁 후 도서관 건물은 워런의 설계 방식에 따라 재건할 수 있었지만 폭격으로 인한 화재는 또다시 엄청난 고서들의 손실을 불러오고 만 것이다. 루뱅의 가톨릭 대학은 어쩌면 분열된 유럽을 상징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아니었을까?


지난 600년간 루뱅 가톨릭 대학은 유럽의 지도층을 배출하면서 유럽 명문 대학이라는 명성을 쌓았다. 더구나 2009년도에는 볼로냐 프로세스 장관회담 개최 –루뱅 가톨릭대학에서 개최된 회담으로 유럽 통합과 발전이라는 주제를 다룸- 를 계기로 유럽 통합을 상징하는 대학으로까지 발돋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유럽의회 퇄퇴를 기점으로 불기 시작한 자국 이기주의의 여파가 유럽을 변화시키고 있는 상황에서 과연 루뱅 가톨릭대학이 지금까지의 명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유럽 통합의 주역으로 남게 될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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