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종수 Nov 16. 2016

파랑새의 고향 헨트(Gent)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벨기에  3


1.


벨기에 시인이자 극작가 모리스 마테를링크 백작(1862~1949), 그는 틸틸과 미틸 남매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크리스마스 전야에 행복의 상징인 파랑새를 찾아 나선다. 이들 남매가 요정과 함께 꿈속을 헤매며 추억의 나라와 밤의 궁전, 그리고 행복의 왕국과 미래의 나라까지 돌아다니며 파랑새를 찾아다닌다. 하지만 결국 못 찾고 잠에서 깨어나고 만다. 그런데 문득 자기가 기르던 새장 속 비둘기가 바로 그 파랑새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의 작품을 읽다 보면 “행복은 멀리 있는 게 아니라 언제나 곁에 있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에 일본어판을 번역해 ‘틸틸’(Tyltyl)과 ‘미틸’(Mytyl)이라는 이름이 일본식으로 ‘치르치르’와 ‘미치르’라고 잘못 알려졌다.)


마테를링크는 헨트(Gent)의 유명한 백작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변호사가 되기를 원했다. 메테를링크는 아버지의 원에 따라 열심히 법률 공부를 했지만 글쓰기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해 대학을 다니면서 꾸준히 시와 수필 쓰기 등을 멈추지 않는다. 대학 졸업 후 파리로 간 그는 과감히 변호사직을 포기하고 작가로 변신을 꾀한다.


그라벤스틴(Gravensteen) 성, 12세기 플란더시 백작이 지은 성인데 한때는 감옥으로 사용되었으나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1886년 그는 파리에서 만난 젊은 시인들과 잡지를 창간하고 그가 쓴 첫 번째 산문 작품을 발표한다. 그리고 계속해서 파리에 체류하며 쓴 시들을 모아 작품집을 펴낸다. 1908년에는 ‘파랑새’를 발표하고 급기야 1911년에는 노벨문학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는다.


마테를링크의 고향 헨트, 이곳에서 혹시라도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까 기대를 하며 시내를 헤매 보지만 아쉽게도 별다른 흔적을 찾지 못했다. 헨트는 인구 25만이 사는 도시치고는 생각보다 큰 도시이다. 한걸음 옮길 때마다 만나는 중세시대의 성당들과 건축물들은 도무지 현대라는 시간이 어울리지 않는 듯싶다.


그렇게 헨트 시내를 돌아다니고 있는데 문득 ‘파랑새’가 보이는 듯했다. 새 한 마리가 내 환영을 일깨우려 머리 위를 지나가면서 아는 체를 하는 듯했다. ‘파랑새’를 찾아 하루 종일 도시를 헤매고 있었으니 어쩌면 난 지금 헨트라는 도시 그 자체를 까먹고 보이지도 않는 환영을 좇아 다니고 있었나 보다. 어쩌면 난 지금 ‘파랑새 증후군’에 걸려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순간 뇌리를 스치고 지나간다.(* 파랑새 증후군; ‘파랑새’의 주인공처럼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상적인 꿈만 좇는 경우를 말한다.)


<사진 설명> 아침이 밝아오기전 헨트의 거리풍경, 운하 주변의 경치가 특히 아름답다. 잘 보존된 옛건축물들이 즐비하다. 아랫쪽 가운데 사진은 1313년부터 짓기 시작해 1380년에 완공된 90m 높이의 도시방어 감시탑인 벨포르트(Belfort). 



2.

     

헨트는 9세기에 형성된 도시로 13세기부터 직물공업으로 번창했다. 13세기에는 헨트가 파리 다음으로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는데 그 규모는 런던과 쾰른, 모스크바 보다도 더 컸을 정도였다고 한다. 그처럼 예전에는 유럽 북부지방에서 가장 인구가 많고 부유한 도시였지만 지금은 전혀 그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아무튼 그런 헨트에 진짜 보물이 숨어있는 것을 잠시 잊고 있었다. 헨트에는 얀 반 에이크가 그린 제단화가 있지 않은가. 이 작품은 헨트에 있는 성 바프대성당(Sint Baafskathedraal)에 소장되어 있다. 이 제단화는 폴랑드르 회화의 명작이자 15세기 유럽 미술을 대표하는 걸작이다. 바프대성당이 공사 중이라 무심코 지나쳐 왔더니 그곳이 바로 바프대성당이었을 줄이야.


15세기 초, 네덜란드에서도 르네상스 바람이 일기 시작하는데 북유럽 르네상스 미술의 정수가 바로 현재 벨기에 헨트에 있는 성 바프대성당에 걸려 있는 얀 반 에이크가 그린 ‘헨트 제단화’이다. 성경에서 모티브를 얻은 헨트 제단화는 ‘인간 구원의 역사’를 표현한 작품으로, 100여 명의 인물과 50여 가지의 식물이 묘사돼 있다.


여닫을 수 있는 형태로 제작된 이 제단화는 펼쳤을 때 상단에는 아담, 천사, 마리아, 그리스도, 세례 요한, 임신한 이브를, 하단에는 재판관, 기사, 어린양


에 대한 경배, 그리고 순례자를 표현했다. 닫혔을 때 상단에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그리스도 잉태를 알리는 모습을, 하단에는 이 제단화의 주인이었던 부부를 빨간 의상으로 묘사했다. 개성 있게 인물들을 표현하고 배경 역시 금색이 아닌, 생과 사가 오가는 실제 자연색으로 표현한 이 르네상스 작품은 지금도 성경의 감동을 그대로 전하고 있다.


제단화 : 1432, Gent Altarpiece, Oil on Panel, 375ⅹ520 cm



이 제단화는 1425년 얀 반 에이크의 형인 휘베르트 반 에이크가 먼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중앙 패널의 밑그림을 시작한 바로 다음 해에 사망한다. 이후 제단화는 1432년이 되어서야 동생 얀이 완성한다. 제단화는 12폭의 패널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중 8개는 양면에 그림이 그려져 있다. 후면 패널 왼쪽 성인은 세례 요한인데 그의 상징물인 양을 들고 있고 오른쪽은 요한계시록의 저자 사도 요한이다. 이 다폭 재단화의 중심 패널은 요한 계시록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제단화는 그동안 적지 않은 수난을 당했다. 1432년 처음 작품이 완성된 후 100년이 지난 즈음 묵은 때를 벗긴다고 어설픈 작업으로 제단 받침 부분을 훼손하더니, 16세기 중반에는 개신교가 성상 파괴 운동을 벌이자 패널을 분해해 종탑에 숨겨놓아 비를 맞히기도 한다. 그러다 칼뱅 주의자들에 의해 시청으로 보내졌는데, 시청에서 20여 년을 잠자다 다시 바프 성당으로 옮겨온 후 프랑스혁명이 발발하자 이번에는 파리로 끌려간다. 그 후 1816년 다시 헨트로 돌아온다.


<사진 설명> 왼편 그림; 제단화의 좌우측에 있는 아담과 이브, 오른쪽 그림; 제단화를 접었을 때의 모습



그런데 제단화를 펼치면 나타나는 그림의 하단부 맨 왼쪽 ‘정의의 기사’ 그림은 1934년 누군가 떼어갔는데 아직도 찾지 못하고 있어 현재 복제본을 붙여둔 상태이다. 또한 상단부의 아담과 이브는 브뤼셀로 팔려갔다가 베르사유조약 체결로 다행히 돌아와 원래의 제단화에 붙여져 지금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그 후 2차 대전이 발발하자 이번에는 전 세계 예술품 수집에 혈안이 된 히틀러가 이 제단화를 가져간다. 히틀러는 당시 유럽 문화재 5백만 점을 약탈했는데, 이 중에는 미켈란젤로, 렘브란트, 얀 반 에이크, 얀 베르메르 등 대가들 작품 10만 점도 포함되었다. 그 후 1943년 문화재를 보존하기 위해 ‘모뉴먼츠 맨’(Monuments Men)이라는 유럽 연합군 특수부대가 창설되어 도난당한 예술품을 찾아 나선다.(* 이들의 활약상을 그린 영화 ‘Monuments Men’이 2014년 조지 쿨루니 감독 주도하에 만들어졌다.)


그 결과 히틀러가 은닉한 회화 6,577점, 소묘, 수채화 230점, 판화 954점, 조각 137점, 무기와 갑옷 129점 등 트럭 80대 분량의 예술품을 찾아낸다. 이중에는 미켈란젤로의 성모상과 얀 반 에이크의 제단화, 그리고 얀 베르메르의 천문학자 등 세기의 걸작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어린 양에 대한 경배 1425-29, Oil on Wood, 137.7ⅹ242.3 cm, 제단화 일부(가운데 아랫부분)

<사진 설명> 제목이 보여주는 것처럼 어린양에 대한 경배는 제단화 가운데 아래편에 위치해 있다. 어린양에 대한 주제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신비한 어린양의 희생으로 이 어린양은 은총의 샘과 성령의 비둘기 사이 중앙에 자리 잡은 제단에 놓여 있다.



얀 반 에이크는 제단화를 비롯해 모두 2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 유명세에 비해 작품수는 그리 많지가 않지만 작품들 모두가 하나같이 명작이다. 그런데 아쉽게도 헨트와 브뤼헤, 그리고 델프트(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도시들)에 남아있는 작품 몇 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전 세계에 퍼져있어 쉽게 만날 수가 없다. 네덜란드에 있는 작품 몇 점을 더 소개하도록 한다.


얀 반 에이크의 유명한 작품 ‘아르놀피니 부부 초상화’, 이 그림은 현재 런던 박물관에서 원본을 소장하고 있는데 복사본을 네덜란드 델프트 프리젠호프박물관(Museum Prinsenhof Delft)에서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어 소장하고 있다. 이 그림은 무역상인 아르놀피니가 부인에게 사랑을 맹세하는 장면을 그린 것인데, 여러가지 면에서 독특하고 재미난 그림이다.


<사진 설명> 왼쪽 그림이 런던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원본 그림, 우측 사진은 델프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스테인드글라스 형태의 복사본(이 복사본은 네덜란드의 빌렘 오라네 공의 두 번째 부인을 위해 만들었다는 설이 있는데, 이 그림이 부부의 행복을 기원한다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란다.)



간단히 중요한 특징 몇 가지만 찾아보도록 하자. 첫째, 두 사람 바로 가운데 보이는 거울 안에 그림을 그린 얀 반 에이크가 들어있다. 중세시대 혼인하는 사람들 증인으로서 뿐 아니라 그림을 그린 화가를 증명하는 사인처럼 거울 속에 자신을 위치시키고 있다. 서명이 필요 없을 정도로 재미있는 표현을 했다. 이런 식으로 얀 반 에이크는 그의 다른 작품에서도 이와 유사한 형태로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


또한 그림 속에 촛대가 여러 개 보이는데 초는 한 곳에만 꼽혀있다. 이렇게 하나의 초만 켜져 있는 건 ‘혼례의 촛대’라고 부르는데 결혼을 상징하는 의미라고 한다. 따라서 결혼을 한 신부는 조만간 아이를 가지게 될 것이라는 축복의 의미도 함께 표현한 것이라고 한다.


얀 반 에이크는 그가 그린 다른 그림, ‘성모와 재상 롤랑’(1435)에도 그의 장난기(?)를 교묘히 숨기고 있다. 이 그림은 부르고뉴의 재상 니콜라이 롤랑이 주문한 그림인데 오텀에 있는 ‘노트르담 뒤 샤스텔’ 성당에 기증을 한 것이다. 그런데 그림 속에는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바라보는 롤랑이 함께 그려져 있다.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기부자가 한 그림 속에 들어있다는 것은 대단한 영광이고 드문 일이다. 아마 그의 위상과 성당에 많은 기부금을 헌납한 것을 기리기 위한 답례로서 그런 그림이 가능했으리라는 생각이 든다.


‘성모와 재상 롤랑’(1435)



아무튼 에이크의 섬세한 붓놀림은 이 그림에서도 예외가 아닌데, 거물(?)들 사이에 스머프처럼 꼬마 인형 같은 두 사람이 그림의 증인 인양 숨어있다. 이 숨어있는 사람들은 작가의 사인처럼 그려넣은 것인데 엄숙한 분위기를 유머러스하게 만드는 양념 구실로도 충분하다고 하겠다. 그런데 두 꼬마 사람 중에서 우측의 붉은 모자를 쓴 사람이 얀 반 에이크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에이크는 터반 같이 생긴 빨강 모자를 좋아했으니까!


또한 다음 해(1436)에도 반 데르 파멜레와 함께 있는 ‘성모’라는 작품(브뤼헤 라이닝겐 수녀원 소장품인데 지난해 특별전시회를 통해 브뤼헤 시내 전시관에서 일반에 공개했다.)을 그렸는데 이 작품 속에서도 얀 반 에이크는 자신의 사인처럼 그림 속에 흔적을 남긴다.


얀 반 에이크(Jan van Eyck, 1390년경 ~ 1441년)는 플랑드르(저지대)의 브레다(지금의 벨기에와 네덜란드 국경지역에 있는 도시로 반 고흐 고향과 가깝다.)라는 도시 출신으로 근대 초상화의 아버지로 불릴 만큼 유명하다. 더구나 얀 반 에이크가 기름을 섞은 물감을 개발해 지금의 유화물감 방식을 정착시킨다 이제 플랑드르에는 얀 반 에이크 덕분에 그의 뒤를 잇는 유명 화가들을 계속 만날 수 있게 된다. 다음에는 브뤼헤를 무대로 그림을 그린 화가를 만나게 될 것이다.


반 데르 파멜레와 함께 있는 ‘성모’(1436)



3.


문득 어디선가 메테르링크가 내게 말을 걸어오는 듯했다. “행복이 가까운 곳에 있듯이 해가 높이 떠도 눈을 감고 있으면 어두운 밤과 같다. 청명한 날에도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기분은 비 오는 날같이 침침하다. 사람은 마음의 눈을 뜨지 않고 마음의 옷을 갈아입지 않으면 언제나 불행하다.”(모리스 마텔르링크 ‘파랑새’ 중에서)


헨트를 걸으며, 바프성당에서 얀 반 에이크의 제단화를 바라보며 내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마음’이라는 단어였다. 모든 것은 역시 마음에 달려 있다. 우리의 행복이나 불행도, 투쟁과 사랑도 모두 마음이 지배를 하고 있다. 그러니 ‘마음’은 신이자 권력이라는 말이다. 그게 파랑새의 고향, 헨트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 설명> 위쪽 맨왼쪽 사진은 성 미쉘교회(Sint Michielskerk), 가운데는 성 니클라스 교회(Sint Niklaaskerk), 우측은 오페라극장인 '헨트 네델란드 극장'(Nederlands Theater Gent), 아래 왼쪽은 1737년에 고딕양식으로 지은 건물인데 예전에는 우체국으로 사용했으나 2001년 화재 발생후 포스트플라자(Post Plaza)라는 쇼핑몰로 변했다. 가운데는 코렌마륵트(Korenmarkt: 시장)가 있는 광장, 헨트의 중심가, 오른쪽은 헨트의 가장 아름다운 거리인 그라슬레이(Graslei), 이곳에는 잘 보존된 옛건축물들이 즐비하다. 아래는성 니클라스 교회의 첨탑에서 바라본  헨트의 도시전경



매거진의 이전글 신호등 없는 도시 루뱅(Louvain)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