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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Nov 23. 2016

안티군과 브라보의 대결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벨기에  5


1.


벨기에 수도 브뤼셀 북쪽으로 41km 지점에 스헬데강이 도심을 가로질러 흐르는 도시 안트베르펜이 자리하고 있다. 인구 50만 명이 거주하는 이 도시는 지금 다이아몬드 도시로, 루벤스의 도시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더욱이 안트베르펜은 세계적 여행출판사 론리플래닛이 2009년도에 이미 최고의 여행 도시 1위로 선정할 정도로 유명세를 지니고 있다.


루벤스(Pieter Paul Rubens)의 고향이기도 한 안트베르펜은 16세기 초만 해도 서유럽 경제의 중심지였다. 16세기 이래 암스테르담과 경쟁관계에 있는 안트베르펜은 다이아몬드 세공과 레이스 편물 공업이 발달해 있고, 고딕 건축과 르네상스 미술을 자랑하는 역사적인 도시이다.


한편, 16세기는 로마를 중심으로 르네상스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던 시기이기에 북부 유럽의 중심도시인 안트베르펜에도 점차 중세 유럽의 유명 화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한다. 특히 안트베르펜을 중심으로 한 플랑드르 지역의 화가들의 활동은 피테르 브뤼헬과 한스 멤링, 그리고 루카스 판 발켄보르크, 루벤스 같은 화가들에 의해 다른 어느 도시보다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또한 네덜란드풍 르네상스 양식의 걸작인 시청사와 길드하우스 건물들이 즐비하게 들어서면서 고풍스러운 도시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가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 안트베르펜은 중심도시로서의 위용을 갖추기 위한 신화까지 지니고 있었다. 안트베르펜이 세계적인 도시로 발돋움하는 데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16세기 시청사 도형



안트베르펜에는 시내 한복판에 ‘루벤스 마르크트’ 광장이 있다. 그곳에 동상이 하나 있다. 그 동상은 한 남자가 잘린 손목을 들고 금방이라도 집어던질 기세로 서있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바로 안트베르펜의 영웅 브라보(Brabo)의 동상이다. 브라보는 전설적 거인 안티군(Antigoon)이 스헬더 강가에서 주민들에게서 통행세를 받으며 노략질을 일삼자 그를 처단하고 손목을 잘라 강에 던져버린 영웅이다.


플랑드르어로 ‘Antwerpen’은 영어로 ‘Throw the hand’인데 네덜란드어로 ‘Handwerpen’(손을 던지다)이 변해서 안트베르펜(Antwerpen)이 된 것이다. ‘안트베르펜’이라는 도시의 신화는 이렇게 시작한다.


카이사르 시저는 갈리아를 정복(기원전 58~52년)하고 로마 제국의 영토를 북해까지 넓힌 인물이다. 그는 로마제국의 무소불위 권력자로 등극하는데 후에 공화정을 복권하려는 블루투스에게 무참히 살해되고 만다. 그런데 보이지 않게 시저를 호위하면서 그와 함께 영욕을 나눈 인물이 있었다. 바로 장군 브라보였다.


브라보동상 분수



로마의 장군 실비우스 브라보, 그는 시저의 친구이자 심복으로서 북유럽 로마 원정대 선봉장이었다. 이들은 벨기에 북부지역 네르비(Nervii)와 에브론스(Eburones)에서 연합군을 물리치고 클리프(Kleef)라는 마을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그 사이 브라보는 사냥을 나간다. 그런데 숲에서 잠시 길을 잃고 헤매는데 백조가 나타나 그가 탄 배를 어느 요새로 끌고 가는 게 아닌가. 이 요새에는 벨기에 동쪽 지역 통게렌(Tongeren) 왕의 미망인이 수감되어 있었다.


브라보는 그녀를 구해주고 풀어주게 된다. 브라보는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결국 이 백조 요정과 혼인을 게 된다. 시저는 브라보에게 결혼 선물로 브뤼셀과 안트베르펜 지역이 포함된 네르비(Nervii) 지역의 땅을 하사한다. 또한 시저는 브라보를 이 지역 공작으로 임명한다. 브라보는 이때부터 지역 이름을 따서 ‘브라반트 공작’이라 칭한다. 그러고 보면 벨기에의 귀족 브라반트 가문은 로마의 후예인 셈이다. 이 지역은 후에 켈트족이 중심이 되어 브라반트 공국을 건설하고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 대결을 펼치게 된다.


한편 벨기에 사람들은 안트베르펜을 끼고 흐르는 스헬더 강변에서 평화롭게 살았는데, 거인 안티군(Druon Antigoon)이 이 곳에 나타나자 서서히 공포에 떨기 시작한다. 거인 안티군은 강가에 성을 짓고 이 성을 지날 때마다 통행세를 받는다. 처음에는 주민들이 통행세를 냈지만 점차 통행세를 조금씩 올리자 돈을 낼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게 된다. 안티군은 세금을 내지 않는 사람들의 손목을 무참히 잘라버린다.


Het Steen(안트베르펜 성) 앞에 거인 안티군이 사람들을 위협하는 장면의 동상이 있다.



브라보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한다. 이때 7명의 용감한 시민들이 나타나 브라보 장군과 안티군을 물리칠 계략을 세운다. 이들은 모두 결혼을 앞두고 있던 사람들이었는데 통행세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터라 브라보는 이들을 돕기로 작정한다.


드디어 7명의 상인들이 이곳을 지나려 하자 안티군은 언제나처럼 이들에게 통행세를 요구한다. 그러자 이들은 안티군에게 화살을 쏘면서 싸움을 벌인다. 안티군과 7명의 상인 간에 생사를 건 혈투가 진행이 되는데 이때 상인들이 거인 안티군에게 결정적인 상처를 입히자 그는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이때 브라보가 달려들어 맹렬하게 저항하는 안티군을 칼로 찔러 제압하고 그의 손목을 잘라 스헬더 강으로 던져 버린다.


이때부터 이곳은 지금의 도시 이름 ‘안트베르펜’이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다. 여하튼 이 일이 있은 후 7명의 상인들은 안트베르펜에서 주요한 직책을 수행하는 유지가 되어 활약하게 되고, 이들은 7인의 무사로서 추앙을 받게 된다. 이 일이 있은 후 브라보 장군은 잠시 로마로 돌아간다. 그러나 로마로 돌아간 브라보는 BC 44년 공화제를 복권하려는 블루투스에게 시저와 함께 살해되고 만다.


안트베르펜의 영웅 브라보가 죽임을 당한 것처럼 안트베르펜 역시 그리 순탄한 역사만 지니고 있지는 않았다. 오랫동안 안트베르펜을 포함한 베네룩스 전 지역을 지배한 합스부르크 왕가 와의 갈등이 중세의 암흑기처럼 그대로 안트베르펜의 지난한 역사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었다.


<사진 설명> 시청사 앞에 브라보 동상(왼쪽 사진), 시청사 왼편에 부두 노동자를 기리는 동상(오른쪽 사진): 영어로 “Labour Freedom”이란 뜻의 팻말을 달고 있는 동상, 1950년 콘스탄틴 모이니어(Constantin Meunier)가 제작, 동상의 주인공은 부두 노동자를 상징하며 1944년부터 1945년 사이에 발생한 부두 노동자들의 저항운동을 기리기 위해 제작하였다.



2.


1517년 독일의 성직자 마틴 루터가 95개의 반박문을 내면서 시작된 종교개혁운동이 순식간에 전 유럽으로 퍼져나간다. 개신교 운동이 유럽 여러 나라에서 환영을 받지만 구교와 신교 간의 분쟁은 급기야 종교전쟁으로 번질 기미를 보이기 시작한다.


특히 헨리 8세 치하의 영국은 로마 가톨릭, 즉 구교에 등을 돌리면서 영국 내 로마 가톨릭 수도원 재산을 빼앗고 영국 교회의 수장은 더 이상 로마가 아님을 천명한다. 이처럼 헨리 8세가 가톨릭 세력에 등을 돌리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로마가 자신의 이혼을 승인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 영국과 가톨릭의 수호자 스페인의 펠리페 2세와의 전쟁 조짐이 보이기 시작한다.


1560년대 초, 종교전쟁이 프랑스에서 막 시작했을 때 네덜란드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즉, 모든 전쟁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합스부르크 왕조의 수장인 펠리페 2세가 그들의 속국인 네덜란드에 지우려 한다. 펠리페 2세의 네덜란드에 대한 정책은 결국 네덜란드 귀족들로 하여금 스페인 국왕에게 반기를 들 빌미를 주게 된다.


1566년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은 영국의 도움으로 반란을 꾀한다. 또한 개신교도들은 우상 파괴 운동의 일환으로 안트베르펜을 비롯한 인근 대성당들을 점령하고 무자비하게 파괴를 일삼는다. 합스부르크 왕가의 스페인 국왕 펠리페 2세는 가톨릭 수호자를 자청하고 있었기에 개신교도들의 폭력적 행위를 진압할 명목으로 군대를 파견한다.


안트베르펜 시내 중심가에 설치되어 있는 안티군의 손, 아마 브라보가 던진게 이리로 온걸지도...



종교분쟁은 1572년 8월 24일 프랑스에서 극에 달한다. 구교도들이 위그노들(신교도들)을 마르게리타 공주 결혼식에서 무참히 학살한 것이다. 그리고 당시 스페인 국왕이던 펠리페 2세는 스페인 영토였던 네덜란드에 군대를 파견하여 신교도들의 움직임을 사전에 막으려 한다. 그러나 결국 종교 분쟁은 네덜란드 독립운동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 결과 1572년 빌럼 오라네(윌리엄 오렌지) 공은 북부 네덜란드를 장악하고 그때까지 가톨릭 세력이 지배적 임에도 불구하고 에스파냐의 통치에 대한 국내의 불만과 군사 전술적 요인들을 활용하며 스페인 군대에 맞서 강력한 저항을 하기 시작한다. 그리하여 스페인 군대는 북부 지방을 되찾으려고 거듭 시도하지만 건널 수 없는 강과 넘실거리는 둑으로 인해 더 이상 진격을 할 수 없게 된다.


그런데 이때 윌리엄 오렌지 공은 1584년 가톨릭교도에 의해 암살을 당하고 만다. 그 후 아버지의 대를 이은 아들은 스페인 왕이 1609년 휴전에 동의함으로써 북부 네덜란드 공화국의 독립을 암묵적으로 승인하도록 한다. 그런데 스페인의 네덜란드에 대한 전쟁의 공포와 종교적 박해는 북부 전체를 칼뱅주의로 개종시키는 결과를 낳고 만다. 그러나 남부지방, 즉 지금의 벨기에 지역은 스페인 지배하에서 가톨릭으로 통합된다.


그 후 10년 동안 안트베르펜을 비롯한 벨기에 지역을 스페인 주둔군이 지배를 한다. 그러나 당시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해 봉급을 받지 못하게 된 스페인 주둔군은 폭동을 일으키고 도시 전체를 약탈하면서 애꿎은 안트베르펜 시민 8000여 명을 학살한다.


벨기에 시내 거리 풍경(위), 벨기에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인 노트르담 성당, 이곳에 루벤스의 명화들이 있다.(아래)



안트베르펜은 스페인 합스부르크 왕가와 펠리페 2세의 지배 아래 연방 체제를 이룬, 플랑드르어와 프랑스어를 사용하고 가톨릭을 믿는 17개 주 중 하나였다. 합스부르크 왕가가 부과한 세금에 분노한 귀족과 프로테스탄트, 상인들은 불만을 참지 못하고 결국 반란을 일으킨다.


스페인 군대가 자행한 잔혹 행위와 파괴는 많은 사람들이 스페인 합스부르크 군주로부터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된다. 그 후 네덜란드 남부의 열 개 주는 스페인 통치를 그대로 유지하고. 북부의 일곱 개 주는 독립을 위해 전투를 벌인다. 이후 북부지역 7개 주는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네덜란드 공화국으로 독립을 하게 되고 남부 10개 주는 여전히 스페인령 네덜란드로 남아있다가 우여곡절 끝에 또다시 네덜란드에 합병된다. 그러나 1830년 안트베르펜을 비롯한 남부 10개 주는 네덜란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벨기에로 독립을 한다.


한편, 1571년부터 1582년 사이에 치러진 칼레 전투에서 영국은 스페인을 꺾고 승리하면서 세계 제패의 신화를 쓰기 시작한다. 즉 지금까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유명세를 떨치던 스페인이 급기야 영국에게 그 패권을 넘겨주게 된 것이다. 네덜란드 독립과 함께 영국의 스페인에 대한 승리는 세계 역사를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된 것이다.


벨기에 중심가로 들어가는 길목, 입구에 루벤스(사진 위 왼쪽)의 동상이 있다. 중심가 한 가운데에 얀 반 다이크의 동상(사진 위 오른쪽)도 있다.



이처럼 근대에 이르러 스페인은 무적함대의 명성에 걸맞지 않게 계속 전쟁에서 패한다. 그런데 스페인 패배의 가장 큰 요인은 바로 혁신에 대한 인식 부재였다. 인간의 집착은 모든 개혁을 거부한다. 결국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가지고 있던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기존 질서체계의 핵심으로 여기며 다른 변화, 즉 개신교에 대한 의의를 인식,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혁신에 대한 분위기를 인정은커녕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변화에 대한 기대와 발전에 대한 속도는 반비례하는가 보다. 그러니 변화에 대한 기대를 충족하지 못한 스페인의 무적함대가 그 권위와 지위를 영국에게 물려주면서 안트베르펜 역시 스페인의 영향에서 벗어나 자주적인 발전을 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마치 안티군의 손목을 브라보 장군이 잘라 내던져 버렸듯이 안트베르펜이 지닌 고지식과 권위는 자유로운 사상의 유입과 예술가들의 인본주의적 활동으로 인해 자연스레 ‘안트베르펜’(손목을 집어던지다)이라는 도시의 이름처럼 변화의 바람을 맞으며 발전하게 된다.




※ 참고자료


네이버 지식백과, 안트베르펜 대학살

죽기 전에 꼭 알아야 할 세계 역사 1001 Days, 마로니에북스, 2009.

Wikipedia / 스페인 네덜란드 전쟁


안트베르펜 마르크트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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