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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Nov 18. 2016

브뤼헤(Brugge)의 종소리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벨기에  5


1.


어디선가 종소리가 들린다. 단순한 종소리가 아니다. 종으로 연주하는 카리용 음악소리이다. 멀리 브뤼헤 마르크트 광장에 우뚝 솟은 종탑이 보인다. 종소리 음악은 그곳에서 연주되고 있었다.(* 카리용은 23개 이상의 종을 하나의 악기처럼 연주하는 것을 말한다. 피아노처럼 생긴 건반을 치게 되면 종과 건반에 연결된 줄이 종을 치면서 연주를 하게 된다.)


마르크트 종탑에서는 지금 카리용을 연주할 연주자를 뽑는 중이다. 요리스는 눈앞에 펼쳐진 브뤼헤 시내를 내려다보며 그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음악을 선물하듯 그렇게 카리용을 연주했다. 건축가인 요리스는 브뤼헤 시의 건축물을 복원하는 일을 한다. 브뤼헤의 웬만한 건물들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게 없을 정도이다. 그가 느끼는 도시 브뤼헤는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돌로 지은 시’였다.


브뤼헤라는 도시를 누구보다 사랑하는 요리스, 그는 자주 만나는 지인인 골동품 수집가 바르토로무스의 두 딸과 운명적인 사랑을 한다. 특히 요리스는 '운하의 물빛' 같은 눈동자를 가진 언니 바바라에게 매료된다. 플랑드르 지방을 지배했던 스페인의 흔적처럼 격렬한 갈색 머리와 칠리처럼 붉은 입술, 그리고 까무잡잡한 피부를 가진 바바라가 요리스의 영혼을 사로잡는다.


요리스는 어둡지만 열정적인 바바라와 순결하고 창백한 호데리베 사이에서 갈등한다. 바바라가 가르치는 것은 현실적으로 스페인 문화라는 일차원적인 것뿐만 아니라 벨기에 문화에 스며있는 스페인 문화의 억압적인 면까지 모두를 의미했다. 몇백 년 간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그 왕가와 스페인의 지배를 받아온 네덜란드와 벨기에에 배어있는 억압적인 문화적 감성은 결국 바바라의 음울한 눈빛으로 모아진 느낌이었다.


<사진 설명> 미켈란젤로의 성 모자상(브뤼헤 노트르담 성당 소장)

미켈란젤로 생전에 외국으로 유출된 유일한 작품, 이 작품은 원래 이탈리아 시에나 성당이 주문을 했는데 당시 이탈리아를 여행 중이던 브뤼헤의 상인들이 1506년 구입해 브뤼헤로 가져왔다.



한편, 창백한 듯하면서 순정적인 호데리베의 이미지는 스페인 식민지로 지내던 플랑드르 지방의 지난 역사를 암시하는 듯했다. 그래서 요리스는 바바라의 동생 호데리베를 바라볼 때마다 마치 한스 멤링의 그림 속 마리아처럼 따스한 모성애를 느꼈다. 그런데도 요리스는 바바라의 눈빛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만다.


요리스는 바바라와 약혼을 한 뒤 함께 브뤼헤 시내에 있는 그뢰닝에 미술관으로 간다. 미술관에서 두 사람은 한스 맴링이 그린 3단 제단화를 바라보며 그림 속 다복한 가정처럼 자신들의 미래도 아이를 여럿 낳고 함께 행복하게 사는 그런 꿈을 이야기한다.


한스 멤링,  3폭 제단화, 1484
한스 멤링, 수유하는 성모 1485-1494 추정

<사진 설명> 브뤼헤 소재 그뢰닝에 박물관(Groeninge Museum)에는 15세기부터 20세기에 걸친 네덜란드와 벨기에 회화를 시대별로 보여준다. 특히 얀 반 에이크와 한스 멤링, 다비드 등 초기 플랑드르에서 활동한 작가들의 명작을 볼 수 있다.(* Hans Memling(1430-1494) : 독일 프랑크푸르트 근교에서 태어난 멤링은 브뤼헤로 들어와 벨기에로 귀화한다. 그 후 네덜란드의 저지대, 즉 플랑드르 지방의 유명 화가로 활동하다 브뤼헤에서 생을 마감한다.)

<사진 설명> 왼쪽 사진: 얀 반 에이크, Lucca Madonna, 1432-1441, 오른쪽 사진: 다비드, 수유하는 마돈나

한스 멤링, 3단 제단화, 수유하는 성모, 1483


한스 맴링이 그린 제단화의 맨 오른쪽 패널에는 바바라의 수호성인 성 바바라가 손에 탑을 들고 있다. 이를 본 요리스는 이 그림을 계시처럼 자신과 바바라 사이에 사랑의 알레고리로 여긴다. 그러나 어두운 그림자를 안고 있는 바바라는 점차 요리스의 마음에서 멀어지고 대신 동생 호데리베가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와 요리스의 마음을 차지한다.


그런데도 끝내 요리스는 바바라와 결혼을 한다. 그러나 ‘사랑의 호수’에는 그의 아내가 된 바바라가 아닌 처제 호데리베와 함께 간다. 요리스는 그녀가 플랑드르의 전형적인 여인상이라고 느끼며 여전히 그녀의 매력에 빠져있다. 요리스는 그녀가 마치 그가 사랑하는 종탑에서 낭랑한 소리를 내는 작은 종들을 닮은 듯하다고 여긴다. 요리스는 그녀를 보면서 마음속으로 카리용의 작은 종들을 떠올리며 어느새 카리용을 연주하기 시작한다. 결국 요리스는 사랑의 호수에서 그녀에게 청혼을 하고 만다.


이처럼 벨기에 역사와 문화에 스며있는 갈등 상황은 요리스가 두 여인과 사랑하는 것으로 묘사되는데, 로덴바흐는 두 여인네의 갈등 상황을 마르크트 광장에 있는 종탑에 설치된 종을 통해 전달하려 한다. 요리스가 카리용을 연주하면서 작은 종과 큰 종을 울려대는 것은 바로 바바라와 호데리베 사이에서 갈등하는 요리스의 심리상태를 드러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진 설명> 브뤼헤 외곽에 있는 베긴 수녀회(왼쪽 사진)를 관통하고 있는 운하에 ‘사랑의 호수’(Minnewater)라는 이름을 가지고 있는 백조들의 서식지(오른쪽 사진)가 있다. 이곳에서 요리스는 호데 리베에게 사랑 고백을 한다.



요리스의 청혼을 받은 호데리베, 그녀는 마음의 부담을 느끼며 방황을 한다. 그러다 끝내 요리스의 청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베긴 수녀회로 들어간다. 그녀의 마음은 어느새 남자의 이기적인 마음에서 멀어지고 호데리베는 자신의 자아를 찾아 나선다.


요리스는 그녀가 사라지자 견딜 수가 없어 자신의 첫사랑이나 마찬가지인 ‘브뤼헤’에 몰입한다. 브뤼헤를 연인처럼 사랑하게 된 남자 요리스. 이 남자는 종탑에서 내려와 브뤼헤의 운하에서, 그리고 베긴 수녀회에서 사랑의 흔적을 찾으려 이곳저곳 브뤼헤 시내를 미친 듯이 누비고 다닌다. 하지만 도시 곳곳에 스며있는 그녀의 췌취는 요리스를 견딜 수 없게 한다.


아름다운 두 자매와 한 남자가 등장하고, 잘못된 선택과 결혼을 하면서 다른 여인과 갈등하는 남자, 이때 브뤼헤라는 도시를 사랑하는 사내는 두 여인 모두에게 버림받고 도시 속으로 들어가 숨는다. 이제 요리스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카리용을 힘차게 두드리며 연주를 하는 것 뿐이다. 마치 그가 할수 있는 유일한 것처럼 말이다.


카리용이 요리스를 만나면 환상적인 소리를 들려준다. 때로는 강렬하게 때로는 호소하듯 부드럽게 전율하며 흐르는 종소리는 장엄하기까지 하다. 요리스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가 두 여인에게 미처 다하지 못한 말들을 전하기라도 하려는 듯 미친 듯이 연주를 계속했다. 카리용의 종소리가 브뤼헤에 저녁노을이 사라진 다음에도 계속 울려 퍼지고 있었다.


<사진 설명> 브뤼헤에는 인구(12만 명)에 비해 성당이 상당히 많다. 그중 살바토르 대성당과 노트르담 대성당은 규모가 엄청나다. 이 사진 속 작품들은 모두 살바토르 대성당 소장품이다.

‘신성한 피의 성당’

<사진 설명> 브뤼헤 마르크트 광장 인근에 또 다른 부르크(Brug) 광장이 있다. 이곳에는 1,149년에 지은 ‘신성한 피의 성당’(Heilig-Bloedbasiliek)이 있다. 이 성당에는 1150년 제2차 십자군 전쟁에 참가한 플랑드르의 브랜들리 백작이 예루살렘에서 가져온 예수의 성혈이 보존되어 있다.



2.


로덴바흐(Georges Rodenbach, 1855-1898)는 벨기에 브뤼헤를 배경으로 ‘브뤼헤의 종’(The Bells of Bruges)이라는 소설을 쓴다. 이 소설 초판은 1897년 프랑스어(원제: Le Carillonneur)로 발행한다. 그 후 110년이 지난 2007년도에 영어로 된 책을 마이크 미첼(Mike Mitchell)이 번역, 출간한다. 위의 글은 마이크 미첼의 영어본을 발췌, 정리한 것이다.


‘브뤼헤의 종’은 브뤼헤의 종탑에서 카리용을 연주하는 요리스라는 남자의 우울한 사랑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로덴바흐가 이 소설을 쓴 1890년대의 벨기에는 네덜란드에서 독립(1830년) 한 후 공업화가 진행되던 시기였다. 그는 프랑스인 어머니와 독일인 아버지 사이에서 벨기에에서 태어났다. 헨트에서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 저널리스트로 일하다 말년에는 파리에서 살았다.


<사진 설명> 벨포르트(Belfort) : 마르크트 광장에 있는 1,240년에 건립된 전망대이다. 366계단을 올라 가면 47개의 종이 있는 꼭대기 전망대에 다다른다. 브뤼헤 시내 전경을 볼수 있다. 브뤼헤 올드타운 마르크트 광장 주변. 벨포르트 앞 광장에 있는 동상은 얀 브레델(Jan Breydel)과 피테르 드 코니크(Pieter de Coninck)인데, 두 사람은 모두 브뤼헤 출신으로 프랑스 압제에 저항한 브뤼헤의 영웅들이다. 특히, 얀 브레델은 군인이 아닌 고기 수입업자였다고 한다.  

 


로덴바흐가 그의 작품에서 가장 많은 비중을 둔 말은 아마도 '멜랑콜리'와 '죽음'이라는 단어 같았다. 스페인 지배에서 벗어나고 네덜란드에서 독립을 쟁취한 벨기에는 숨 돌릴 사이도 없이 근대화와 제국주의에 시동을 건다. 이때 벨기에 젊은이들은 미래에 대한 자기성찰의 기회를 상실한 채 제국주의라는 엄청난 살상의 전장으로 투입된다. 로덴바흐의 소설은 요리스의 비윤리적이고 비인간적인 사랑을 통해 당시 벨기에의 사회적 분위기를 묘사하려 한 것처럼 느껴졌다.


자아를 상실한 젊은이, 도시의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 아름다움을 즐기지 못하고 오히려 도시에 스며있는 고독과 쓸쓸함, 그리고 영적인 고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만다. 100여 년 전 소설이지만 오늘날 우리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은 듯하다. 왜곡된 역사의 질곡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정통성 없는 권력집단에 매도당하고, 제도적 권력으로 자리한 ‘꼰대주의’와 ‘어이상실의 정치’가 난무하는 사회에서 간신히 숨 쉬고 있는 사람들, 이 모든 것들이 서울이 아니라 브뤼헤라는 도시 배경만 다르지 않은가 말이다.


이 책에서 로덴바흐는 주인공 요리스를 통해 혼돈 속에서 줄타기를 하는 한 남자의 사랑에 대한 혼란과 강박관념을 파헤치면서 중세의 도시 브뤼헤를 구석구석 보여준다. 그가 인도하는 대로 따라가다 보면 어느 틈엔가 브뤼헤의 비경들을 모두 만나게 된다.


브뤼헤에서 카리용의 종소리를 듣는다면 그건 아마 로덴바흐의 소설 속 주인공 요리스가 여러분을 위해 연주를 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니 잘 들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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