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네덜란드 4
1572년 8월 성 바돌로매 축제 전날 밤 프랑스의 가톨릭 추기경 모후카트린 드 메디시스는 파리에 머물고 있던 프랑스 개신교 지도자들에 대한 기습을 윤허한다. 한밤중에 영문도 모른 채 기습을 당한 사람들은 잠자던 침대에서 모두 살해되고 말았다. 이렇게 표적이 된 개신교도들이 순식간에 제거되었지만 살인극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파리의 가톨릭 부랑아들이 살인 허가를 빌미로 상대가 개신교도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자신들의 적대자들을 닥치는 대로 살육한다. 아침이 되자 세느강은 시체와 교수대에 달린 수십 구의 시신으로 넘쳐 난다. 이 사건은 그 후 성 바돌로매 축일의 대학살(Massaxre of St. Bartholomew's Day)이라고 부른다.
끔찍한 일은 이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1560년경부터 100여 년간 유럽 각지에서는 종교 폭력이 난무하는데, 가톨릭과 개신교 가릴 것 없이 서로가 살인과 학살을 자행한다. 심지어 스칸디나비아 3국과 이들의 식민지였던 아이슬란드에서까지 개신교로 개종할 것을 강요하며 가톨릭 신자들에 대한 잔인한 살육전을 자행한다. 식민지배의 가장 좋은 방법이 종교를 통한 일체감 형성이기에 제국주의 과정에서 종교의 일체화는 제일 먼저 선행되어야 하는 과제였다.
* 17세기 네덜란드의 태도는 영국의 청교도들과 흡사했다. 그들은 당시 유럽을 휩쓴 바로크양식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건축조차 수수하고 절제된 양식을 선호했다. 네덜란드의 황금시기인 17세기 중반 새로운 국가의 위엄과 국부를 과시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에 새로운 시청사(지금은 왕궁으로 사용중)를 지을 때도 네덜란드인의 실용주의가 반영된 단순한 형태의 건축양식이었다.
* 종교개혁이후 진행된 개신교도들의 성상파과행위, 교회와 수녀원 등 내부가 파괴되고 화염에 휩싸였다.(델프트 프리젠박물관 소장)
이처럼 유럽 전역이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종교전쟁 양상이 전개되면서 종교 폭력이 진행되는 동안 유럽은 점차 경제적 공항상태에 빠지게 되고, 계속되는 전쟁으로 유럽 사회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된다. 따라서 역사발전 과정에서 이런 종교 폭력의 역사는 명명백백하게 종교의 모순된 모습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당시 홀란드(중북부 지역)와 플랑드르(지금의 벨기에 지역)로 구성된 당시의 네덜란드(저지대라는 의미)는 거의 1세기 동안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아왔다. 그런데 당시 플랑드르의 중심 도시 안트베르펜이 북유럽의 상업과 금융 중심지로서 주도적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이곳에서 서서히 독립에 대한 요구가 움트고 있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이곳에도 점차 종교 폭풍이 서서히 밀려오고 있었다. 1559년 프랑스와 스페인 간의 전쟁이 끝난 후 프랑스 칼뱅 주의자들이 가는 곳마다 개종자들을 만들면서 네덜란드 국경 안으로 밀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안트베르펜에 주네브보다 더 많은 칼뱅 주의자들이 살게 된다. 칼 5세에게 왕위를 물려받은 펠리페 2세는 열렬한 가톨릭교도인데 그로서는 도저히 개신교도들이 몰려드는 것을 방관할 수가 없었다.
실제로 그는 네덜란드를 침공하기 직전 로마 교회로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낸다. “진정한 종교와 하느님에 대한 봉사는 눈곱만 한 흠집도 있어서는 안 되는 것, 차라리 짐은 수백 번이라도 짐의 국가 전체와 심지어 짐의 생명까지도 바칠 것입니다. 짐은 이교도의 통치자가 아닐뿐더러 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펠리페 2세의 가톨릭에 대한 맹신은 조만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스페인의 위상은 물론 지금까지의 유럽 판도를 뒤바꾸는 계기를 제공하게 된다.
* 스페인 펠리페 2세, 세계패권의 판도를 뒤집어 놓은 꼴보수의 대표자. 네덜란드인들은 펠리페 2세를 마치 타임지의 올해의 인물처럼 묘사한 그림을 제작해 조롱을 한다.(델프트 프리젠박물관 소장)
중세시대 스페인의 칼 5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로서, 그리고 스페인 왕으로서, 또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수장으로서 전 유럽을 지배하며 세계의 패권을 좌지우지한다. 그 후 펠리페 2세가 그의 뒤를 이어 스페인 왕이자 합스부르크 왕가의 맹주가 되면서 유럽의 판도는 서서히 달라지기 시작한다.
펠리페 2세는 선대로부터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가치의 엄격함 속에서 성장하였기에 당시 번성하던 개신교도들의 세력화를 가만두고 볼 수가 없었다. 드디어 필리페 2세는 먼저 칼뱅교도들이 몰려드는 네덜란드를 원래의 가톨릭 국가로 복귀시키기 위해 본때를 보이려 침공을 감행한다.
그러나 당시 스페인의 무적함대라 부르던 아르마다가 네덜란드와의 전투에서 보기 좋게 참패를 당한다. 지금의 벨기에 북부 도시 안트베르펜 전투에서 스페인 무적함대 아르마다의 병사 3000명이 떼죽음을 당한 것이다. 스페인의 참패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칼레에서 스페인은 또 한 번 영국에게 패배를 당한다.
펠리페 2세는 기존 질서의 수호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신교를 증오하였기에 유럽의 개신교 국가들을 가톨릭 국가로 되돌려 놓으려는 명분을 내세워 전투를 벌인다. 그래서 영국의 헨리 8세가 지배하던 영국을 침공했지만 안탑깝게도 펠리페 2세의 전략은 영국의 해적왕으로 불리던 드레이크에게 기습공격을 당하면서 박살 나고 만다.
*스페인의 알바 공작 초상화와 안트베르펜에서 알바 공작이 지휘하는 장면을 그린 작품(델프트 프리젠박물관 소장)
* 작자 미상의 작품인데, 네덜란드와 스페인간의 전투장면과 스페인군이 플랑드르 해안가에 위치한 오스텐이라는 도시를 포위공격하고 있는 장면의 작품들(델프트 프리젠박물관 소장)
그로 인해 스페인이 그동안 지녀온 지중해의 영광은 서서히 사라지고 대영제국의 시대가 도래한다. 영국의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신화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영국은 이때부터 바다와 해외 식민지의 중요성을 깨닫고 본격적으로 제국주의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다.
결국 1571년부터 1582년까지 10여 년 사이에 치러진 칼레 전투가 스페인과 영국의 운명을 뒤바꾸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세계 패권의 역사는 새로운 신화를 쓰기 시작한다. 이런 결과는 어쩌면 스페인이 스스로 자초한 결과이기도 하다.
스페인은 그동안 가톨릭의 구태의연한 세계관이 개신교라는 새로운 세계관으로의 이행이라는 시대적 변화를 용인하지 못하고 무시하고 묵과하기에 급급했던 것이다. 인간의 집착은 모든 개혁을 거부한다. 결국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가지고 있던 가톨릭이라는 종교를 기존 질서체계의 핵심으로 여길 뿐 다른 변화, 즉 개신교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새로운 혁신의 기회를 놓친 것이다.
스페인의 몰락을 보면서 언제나 혁신의 속도는 예상보다 빠르게 진행된다는 평범한 진리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특히 한 사람의 혁신에 대한 몰이해가 어떤 결과를 가져다주는지 스페인의 펠리페 2세가 웅변으로 말해주는 듯하다.
*빌렘 오라네 공을 도자기로 제작한 작품과 오라네 공의 지도력을 나타낸 그림, 그리고 오라네공 4형제를 그린 작품, 오라네공 4형제는 모두 스페인과의 독립전쟁에서 장렬하게 전사를 한다.(델프트 프리젠박물관 소장)
* 왼쪽: 스페인과의 전쟁 초기 지휘본부를 설치한 브레다
오른쪽: 아머르스포르트 운하,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스페인과의 전쟁은 아머르스포르트까지 확대된다.
*왼쪽: 델프트에 있는 군사박물관, 오른쪽: 스페인군을 물리친 레이덴의 운하
그동안 네덜란드에서 단지 가톨릭과 개신교 간의 문제만 발생한 게 아니었다. 점차 합스부르크 왕가의 펠리페 2세와 네덜란드 개신교도 간의 갈등이 네덜란드 독립을 위한 전쟁으로 발전해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네덜란드 저항군 지도자로 선택된 ‘침묵 공’ 빌렘 오라네(윌리엄 오렌지)는 처음부터 칼뱅 주의자가 아니라 가톨릭 신자였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그는 스페인의 통치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스스로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을 한다. 이와 함께 네덜란드 남부(플랑드르) 역시 (지금도 그렇지만) 가톨릭교도가 가장 많은 곳이라는 사실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스페인과의 종교 갈등으로 시작된 마찰은 단순한 종교적 마찰만이 아니라는 점 역시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다.
종교보다 역시 독립이 우선이라는, 그래서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는 자신의 종교도 버릴 수 있다는 신념은 네덜란드인의 실리주의적 태도를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될 수 있겠다. 바로 이러한 태도에서 네덜란드가 ‘종교적 광신주의’에서 벗어나 ‘종교적 관용’을 베풀 수 있게 되는 것이다.
1566년 “프로테스탄트들의 광란극”은 플랑드르 지역에서 마치 IS가 메소포타미아의 문화재를 무차별 파괴하듯 역사적 가치가 있는 종교예술품과 조각상에 대해 무지막지한 파괴를 자행한다. 이 일은 펠리페 2세에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상황을 만들어 안트베르펜으로 무적함대를 보내 무자비한 진압을 하도록 했던 것이다.
*1584년 빌렘 오라네 공이 암살되는 장면과 네덜란드 건국 시조 오라네(윌리엄 오렌지) 가문을 나타내는 오렌지색의 물건들(델프트 프리젠박물관 소장), 그리고 빌렘 오라네 공이 거주하던 델프트의 프리젠하우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중)
* 완쪽: 빌렘 오라네 공이 묻힌 델프트 신교회, 오른쪽: 오라네 일가는 죽은 후 델프트 신교회에 묻힌다.
네덜란드의 방대한 토지를 소유한 낫소(nassau: 현 룩셈부르크 중북부 지역에 위치, 룩셈부르크와 네덜란드 왕가는 원래 한 집안이다.) 출신의 귀족 ‘침묵 공’ 빌렘 오라네 백작은 실제로는 매우 말이 많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는 필요에 따라 자신의 진정한 종교적 믿음이나 정치적 생각을 감출 줄 알았기 때문에 이러한 별명을 얻은 것이다.
아직 명목상 가톨릭교도였던 빌렘 오라네 공은 이 당시 다른 지방 귀족들과 마찬가지로 공식적으로 개신교로 개종하지 않았다. 당시 칼뱅 주의자들은 종교적 관용을 허용해 달라고 펠리페 2세에게 탄원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펠리페 2세가 잠시 머뭇거리는 동안 급진적인 프로테스탄트 폭도들이 어느새 가톨릭 교회를 파괴하고 가톨릭의 신성을 모독하는 일을 자행하면서 마리아 상을 부수고, 스테인드 글라스로 장식한 유리창까지 박살내고 있었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펠리페 2세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홀란드와 플랑드르 지역의 개신교도들을 말살하기 위해 냉혹하기로 유명한 스페인의 알바(Alva) 공작이 이끄는 군대를 급파한 것이다. 네덜란드에 도착한 알바 공작은 우선적으로 “피의 법정”을 설치하고 1만 2천 여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이단이나 선동 혐의로 조사한다. 그 가운데 1천 명을 즉결처분으로 사형을 시켜버린다. 이때 빌렘 오라네 공은 국외로 도망을 한다. 따라서 자유 네덜란드를 향한 희망은 모두 물거품이 되는 듯했다.
* 레이덴 역 앞 광장에 놓인 스페인을 물리친 10월3일을 기리는 의자와 10월3일을 축하하는 축제 행렬
* 축제에는 레이덴 시민 누구나 자유로이 주제를 정해 참여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침묵 공 빌렘 오라네 공이 펠리페 2세에게 보란 듯이 개신교로 개종을 하고 프랑스와 독일, 그리고 영국 개신교도들의 원조를 끌어들인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또한 네덜란드를 무력으로 진압하려는 스페인 선단의 항해를 방해하기 위해 네덜란드 해안에서 해적 선단을 조직해 본격적인 저항을 시작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드디어 최후의 결전이 다가오고 있었다. 펠리페 2세의 주력군과 네덜란드의 빌렘 오라네 공이 네덜란드의 레이덴(Leiden)에서 최후의 결전을 벌인다. 스페인에서 한 달 여에 걸쳐 함선을 타고 달려온 스페인군은 네덜란드의 운하에 익숙하지 않아 네덜란드 시민 군이 포진한 레이덴 전투에서 패하고 만다.
드디어 네덜란드가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이루기 위한 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것이다. 그 날은 1566년 10월 3일이었다. 드디어 네덜란드의 신화가 시작된 것이다. 그때부터 레이덴 시는 10월 3일 스페인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날을 기념일로 정하고 축제를 벌인다. 관용의 나라 네덜란드, 작은 제국의 역사가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 독일 통일을 이룬 1990년 10월 3일, 그리고 네덜란드가 레이덴 전투에서 승리한 날 10월 3일, 그리고 우리의 개천절 10월 3일, 모두 같은 날에 새로운 신화가 시작했으니 이 날은 우주의 기가 모이는 날인가 보네.
* 축제를 즐기는 사람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