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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Dec 20. 2016

모든 국민은 평등하다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네덜란드  5


1. 1492년에 머문 스페인


1492년, 스페인의 운명을 가르는 날이 밝았다. 스페인을 지배하는 막강한 두 세력 아라곤의 페르난도 2세와 레온-카스티야 왕국의 이사벨라 여왕이 결혼을 하고 통일 왕국을 이룬다. 또한 1492년에 스페인 그라나다 지역을 지배하던 이슬람 왕국이 항복을 한다. 이제 스페인은 780년간의 이슬람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대를 맞이한다. 그리고 또한 1492년에 콜럼버스가 이사벨라 여왕의 도움으로 아메리카로 떠난다. 1492년, 스페인의 새로운 시대는 이렇게 시작을 했다.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진출하면서 얻어들인 부는 16, 17세기에 스페인이 세계를 제패하는 원동력이 된다. 한편 스페인 왕국은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통일 작업을 마무리 하자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을 거부한 모슬렘과 유대인을 탄압하기 시작한다. 모슬렘과 유대인을 제거하는 일은 그간의 뿌리 박힌 이슬람 세력의 유산과 풍습을 없애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제처럼 보였다.


스페인의 옛수도 톨레도(Toledo)

* 왼쪽: 이사벨 여왕의 혼례식 장면(몬세라트 대성당 소장),         오른쪽: 이사벨여왕의 동상(마드리드 공원)



1492년 3월 31일 스페인 왕국은 유대인들이 스페인에서 7월 31일까지 떠날 것을 명하는 알함브라 칙령을 선포한다. 그런데 알함브라 칙령에는 유대인의 모든 재산권을 인정하고 보호한다고 해놓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재산의 반출을 금지시켰다. 강제로 스페인을 떠나야 했던 유대인들은 포르투갈로 이주하거나 남동부 유럽, 또는 북부 유럽으로 향한다.


그 후 1556년 카를 5세의 뒤를 이어 펠리페 2세가 등극한다. 이때까지 스페인은 유럽의 강자로 군림하며 “해가지지 않는 나라”라는 명예를 누리고 있었다. 그런데 펠리페 2세의 등극은 스페인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된다.


콜럼부스 동상(바로셀로나 ),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에 그가 발견한 아메리카가 있다.

* 컬럼부스가 타고 항해를 했던 산타마리아호(바로셀로나 항구에 전시중)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전 야경



2. 자유를 찾는 사람들


펠리페 2세는 전제군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기 위해 우선적으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지배하던 네덜란드를 가톨릭 국가로 통합하려 한다. 그러나 이미 종교개혁의 기운이 네덜란드까지 퍼지고 있었기에 펠리페 2세의 의도는 쉽게 이루어지지 않는다.


네덜란드 북부지방(지금의 네덜란드)의 중심지 암스테르담에는 점차 칼뱅파를 위시한 개신교도들과 유대인들이 몰려들면서 북부 유럽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따라서 펠리페 2세와 네덜란드는 점차 갈등을 빚으며 독립전쟁 양상을 띠게 된다. 결국 펠리페 2세의 강압적 종교 통일 전쟁은 80년 전쟁이라 부르는 네덜란드 독립전쟁으로 발전한다.


1574년 10월 3일, 네덜란드는 레이덴에서 스페인군에게 승리를 한다. 그러나 레이덴 전투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스페인의 네덜란드에 대한 야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후 1579년 네덜란드 북부지방의 7개 주(지금의 네덜란드) 대표가 위트레흐트에 모여 끝까지 스페인에 항전할 것을 결의한다. 위트레흐트 조약(Treaties of Utrecht)은 이후 네덜란드 독립의 모태가 된다.


위트레흐트 조약의 가장 중요한 골자는 “단일 종교를 강요하지 않고, 종교적 관용과 종교 다원주의를 허용한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바로 7개 주의 주민들이 가톨릭과 개신교, 그리고 이슬람 등 여러 종교를 각기 숭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위트레흐트 조약은 전 유럽에 종교적 박해를 받던 사람들이 네덜란드로 이주하는 신호탄이 된다.


네덜란드 북부 7개주가 위트레흐트에서 조약을 맺고 스페인에 끝까지 항전할 것을 결의한다

* 위트레흐트 대성당 입구에 설치한 횃불을 든 여인상과 위트레흐트 운하



네덜란드가 종교적 관용을 독립의 명분으로 삼자 유럽 전역에서 박해받던 사람들이 네덜란드로 몰려든다. 특히 유대인들이 대거 북부 네덜란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1560년대부터 20여 년간 스페인이 장악하던 네덜란드 남부 지역(플랑드르/ 지금의 벨기에 지역) 인구는 급격히 감소한다. 당시 북부 유럽에서 가장 번성했던 안트베르펜의 경우 8만 5천 명에서 4만 2천 명으로 줄어들었다. 다른 도시들도 마찬가지로 대부분 반으로 줄어들었다.


그와 반대로 네덜란드 북부에 있는 암스테르담과 레이덴, 그리고 하를렘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종교적 자유가 이민자들을 네덜란드 북부로 이끈 것이다. 17세기에 이르자 암스테르담의 인구는 3만 명에서 20만 명으로 늘어난다. 레이덴 인구 역시 1만 5천 명에서 7만 2천 명으로 증가한다. 종교적 자유가 만든 현상이었다. 이들 중에는 수많은 금융업자와 전문기술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17세기를 전후한 시기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든 이들은 이제 네덜란드의 새로운 황금시기를 이끄는 주역으로서 선봉장 노릇을 하게 된다. 이들이 바로 네덜란드 발전의 숨은 공로자들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네덜란드가 전 세계 무역을 주도하며 강력한 제국으로 자리하는데 이들의 도움이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는 말이다.


결국 스페인의 종교적 광신주의는 역설적으로 네덜란드가 독립하는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사상적 관용을 갈구하는 사상가들마저 암스테르담으로 모이게 만드는 원인 제공을 한 것이다. 반면 네덜란드는 종교적 관용을 베풀게 됨으로써 종교뿐 아니라 모든 형태의 자유가 허용되는 자유의 땅으로 거듭나게 된다.


위트레흐트 시청사 벽면에 설치한 걸개그림



네덜란드에 모인 사람들은 이제 그들의 기술과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세운 가장 큰 공은 세계 무역을 선도할 수 있는 여러 기술적 능력을 발휘한 것이다. 그 결과 1594년 유대인 기술자들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배를 개발해 해상무역을 장악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 결과 17세기 중반에 이미 네덜란드가 세계 무역의 75%를 담당하는 성과를 올린다.


중동과 아프리카에서 설탕과 향신료를 포함해 각종 천연자원과 물품을 들여와 가공을 한 후 비싼 값에 되팔아 커다란 이윤을 남기기도 하는데, 특히 18세기부터 암스테르담에 거주하는 유대인 기술자들이 식민지에서 가져온 다이아몬드를 세공함으로써 암스테르담은 이제 세계 보석산업의 중심지로 자리하게 된다.


한편, 1602년에는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본격적인 제국주의 대열에 뛰어든다. 당시 세계 무역을 주도하던 네덜란드의 81명 선주들이 오늘날의 ‘주식회사’ 형태로 회사를 만든 것이다. 이들 주주들 81명 역시 예전 스페인에서 추방당한 유대인들이다. 그뿐 아니라 1609년에는 증권거래소까지 설립하고 운영자금 등 자금 대출로 이자 수익을 올리는 은행업무까지 시작한다. 그런데 네덜란드 증권거래소 덕분에 이들을 내쫓은 스페인 펠리페 2세의 경제체제는 역설적으로 부도가 나게 된다.


스페인 펠리페 2세는 당시 주변국들에게 40%대의 높은 이자로 다른 나라들에게 대출을 해주었는데 네덜란드 증권거래소에서는 3%의 낮은 이자율로 대출을 해주었다. 그 바람에 스페인에게 돈을 빌린 나라들이 대출금을 모두 갚아버리게 되자 스페인 경제가 부도가 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점차 전 유럽의 자금까지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들기 시작한다.


스페인에서 포르투갈로 쫓겨난 유대인들, 그러나 포르투갈에서 또다시 암스테르담으로 가야만 했던 유대인들, 그들 덕분에 지금의 네덜란드가 발전하게 된 건 결코 우연이 아닐 것이다.


* 네덜란드 사람들의 생활상, 전통 의상과 나막신, 그리고 수상가옥에서 생활하는 사람들



3. 종교적 관용


네덜란드는 인구밀도는 높지만 지리적으로 작은 나라이다. 이런 작은 나라가 어떻게 강력한 나라로 자리 잡을 수 있었을까? 그건 바로 종교적 관용 때문이다. 유럽에서 종교적 박해를 받은 사람들 대부분이 네덜란드로 이주를 했다. 그 결과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경제적 기량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 네덜란드가 경제적 강국이 되는 기틀을 마련한 것이다.(* 2010년 현재 네덜란드의 종교 구성은; 무종교 49.2%, 로마 가톨릭 24.4%, 개신교 15.8%, 이슬람교 4.9%, 그 외 종교 4.5%, 힌두교, 불교 1.1%, 유대교 0.1%이다. 출처: 네덜란드 통계청)


네덜란드의 종교적 관용은 영국의 사상가 존 로크에게도 영양을 미친다. 당시 영국 내 이민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면서 그는 이민자들이 모든 문화와 기술을 가지고 오기 때문이라며 종교와 상관없이 영국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처럼 경제적 강대국의 지위에 오른 네덜란드는 단지 세계 강국으로서 경제적 이익만을 추구한 게 아니라 암스테르담을 중심으로 문화 예술의 황금시기를 주도하는 유럽의 중심지로 자리를 잡는다. 데카르트를 비롯한 수많은 사상가와 문화 예술가들이 암스테르담으로 몰려든 것도 그런 연유에서 이다. 단지 경제적 기회를 잡기 위한 것이 아니라 네덜란드의 종교적 관용을 찾아 사상적 관용을 추구하려 한 때문이었다.


이제 네덜란드는 마치 계급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의 나라가 된 듯했다. 그것을 증명하듯, 데카르트가 자신의 사상을 의심해 출판마저 허용하지 않은 파리를 버리고 ‘자유의 도시’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으로 옮겨와 20년 넘게 교수로서 연구생활을 하며 지낸 것은 유명한 일화이다.


당시 그는 프랑스에서 칼뱅 주의자로 낙인찍혀 가톨릭 세력은 그를 불온한 사람처럼 취급을 한다. 그러나 칼뱅 주의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그를 무신론자로 보고 비난한다. 이런 상황에서 데카르트가 갈 수 있는 곳이 오직 네덜란드 뿐이었다는 것은 특기할 만한 일이다.


Frans Hals, 데카르트 초상화, 1648



4. 자유로운 영혼, 에라스무스


종교적 관용의 모태는 어쩌면 네덜란드에 이미 자라고 있었는지 모르겠다. 에라스무스가 치즈로 유명한 도시 하우다(Gouda)에서 루터가 종교개혁을 외치기 전인 1469년 하우다 교회 신부인 아버지와 가정부인 어머니 사이에서 사생아로 태어난다. 그런 배경을 가지고 태어나서인지 그의 최대 관심사는 어떻게 해야 네덜란드가 평등사회가 될 수 있을까라는 것이었다.


에라스무스는 26살에 가톨릭 사제가 된다. 그 후 에라스무스는 유럽의 여러 곳을 여행한다. 그러던 중 1509년 런던으로 여행을 가면서 수도원 생활을 풍자한 작품을 구상한다. 그리고 런던에 있는 토머스 모어 집에 도착해 ‘우신예찬’(Encomium Moriae)을 완성하고 1511년 출간한다. 우신예찬은 네덜란드 뿐 아니라 로마 가톨릭 교회의 권위적이고 교조적인 기독교 정체성을 드러내 보여줌으로써 종교개혁의 시발점이 되는 작용을 하게 된다.


‘우신예찬’은 ‘어리석은 신에 대한 예찬’이란 뜻으로, 가톨릭 교회에 대한 인문주의적 풍자이다. 에라스무스는 어리석은 신들을 통해 당시 학자들의 어리석음과 권위주의, 그리고 형식주의로 점철된 기독교에 대해 풍자 섞인 비난을 한다. 종교적 맹신주의를 강력히 경고할 뿐 아니라 다른 한편으로는 종교적 관용을 부추기는 비판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하우다(Gouda)에 있는 얀스교회 정원에 설치한 에라스무스 동상

* Ubi bene, ibi patria(정들면 고향이라는...), 하우다(Gouda)는 에라스무스의 고향이다.

* "에라스무스는 하우다의 아들"이라는 안내판과 그의 아버지가 성직자로 일하던 얀스성당(지금은 교회)

 


종교에 대한 편협함과 무조건적인 믿음을 경계한 에라스무스의 의지는 국가를 초월해 16세기 유럽 문화와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친다. 네덜란드 태생이지만 평생 동안 유럽 각지를 돌아다니며 ‘유럽인’으로 활동한 에라스무스, 국경을 넘나들며 유럽을 무대로 여러 나라에서 종교적 관용의 가치를 주장하며 강의를 한다. 그래서인지 에라스무스의 정신을 한 마디로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유럽에서는 쉽게 에라스무스라는 이름을 만날 수 있다. 비엔나와 헝가리, 그리고 폴란드를, 또다시 비엔나에서 독일과 프랑스를 오가는 고속열차 편 이름이 바로 ‘에라스무스 열차’이다. 그의 자유로운 영혼을 기리는 것으로 이 보다 적절한 것이 또 있을까 싶다.


아무튼 1648년 드디어 신성로마제국이 벌인 30년 전쟁과 스페인과 네덜란드 간의 80년 전쟁이 막을 내리고 평화를 위해 ‘베스트팔렌 조약’을 체결한다. 유럽의 평화가 찾아오는 순간이다. 네덜란드가 정식으로 독립국가로 출발을 하는 날이기도 하다. 지루하고 소모적인 전쟁으로 황폐해진 유럽은 이제 에라스무스가 주장하는 “종교적 관용”의 정신을 받아들여 조약을 체결하기에 이른 것이다.


* 로테르담에 설치한 에라스무스 동상(왼쪽)과 벨기에 루뱅대학 인근에 설치한 에라스무스 동상(오른쪽)



5. 스피노자의 자유


암스테르담은 위대한 철학자 스피노자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유대인이었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전형적인 유대인 집안 출신이었는데 처음에는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살았다. 그러나 펠리페 2세의 박해로 또다시 네덜란드로 이주를 해야 했다. 그 후 암스테르담으로 옮겨와 스피노자를 낳는다.


생의 옳고 그름을 떠나 모든 인간이 원하는 대로 생각하고, 생각한 것을 표현할 자유가 조건 없이 주어져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스피노자 주장의 핵심이다. 과연 이런 생각을 받아들여줄 나라가 어디에 있을까? 스피노자에게 이단적이고 급진적인 사상을 키워준 장본인은 어쩌면 암스테르담 그 자체였는지도 모른다.


스피노자, 그는 “내일 지구가 멸망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의 사과나무를 심겠다”는 말로 유명하다. 부유한 유대인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상속을 거부한 스피노자, 랍비가 되려 했지만 유대교 교리를 비판했다는 이유로 쫓겨나 호구지책으로 안경알 만드는 일을 한다. 그러나 렌즈를 만들며 유리가루를 너무 마신 탓인지 나이 45살에 안탑깝게도 숨을 거두고 만다.


스피노자는 사람들이 지금 절대적이라고 믿는 신도 내일이면 얼마든지 바뀔 수도 있다고 했다. 그 이유는 바로 ‘자연’이 '신‘이기 때문이란다. 엄격한 유대교 집안에서 범신론을 주장한 그는 결국 파문을 당한다. 그런데도 스피노자는 계속해서 자유를 주창한다. 개인의 자유는 결국 국가가 보장해 주지 않으면 안 되는 것, 개인의 자유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일 수밖에 없기에 국가가 보장해 주지 않으면 언제든 구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는 그 자체가 자유라는 말로 환원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 암스테르담에 위치한 스피노자 동상과 "The state is freedom"



스피노자가 집필한 '신학정치론'은 당시 그의 사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성경이 신의 말씀이 아닌 인간이 만들어낸 문학작품이고, 참된 신앙은 제도화된 종교와 상관이 없고, 종교가 근대국가의 통치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는 이 책은 그의 조국 네덜란드에서 조차 받아들이기 어려울 정도로 급진적이다.


그는 자신에게 쏟아질 비난과 저주를 예상하고 '헨리쿠스 퀸라트'라는 익명을 사용해 암스테르담이 아닌 독일 함부르크에서 책을 출간한다. 예상대로 책은 1670년 1월 출간되자마자 전 유럽에서 불온하고 신성모독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스피노자가 '지옥에서 꾸며진 책'이라는 제목을 붙인 것도 그런 상황을 전제로 했기 때문이다.

스피노자의 말대로, 국가가 개인의 사상적 자유까지 보장해 줄 때 참다운 민주주의 체제를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당연한 말이 오늘날 우리의 귓가에 맴도는 것은 여전히 우리 사회가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게 아닐까? 오래전 철학자의 단순한 외침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 모두에게 가장 절실한 말이기에 더욱 그렇다는 말이다.


스피노자가 사랑한 암스테르담, 그곳에서 그는 “이 번영의 나라에는 귀족이 없으며 어떤 계급과 종교를 가지고 있더라도 함께 공존하며 살아간다”라고 네덜란드를 찬양한다.


스피노자 동상( 암스테르담 오페라하우스 부근 광장에 설치되어 있다.)



“네덜란드의 모든 국민은 평등한 환경에서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 종교, 신념, 정치적 의견, 인종 또는 성별 등의 어떠한 배경에 바탕을 둔 차별도 금지한다.”


네덜란드라는 작은 나라가 만들어낸 그들만의 헌법 제1조, “모든 국민은 동일한 법 아래 평등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는 이 말은 결국 네덜란드는 어떤 불필요한 간섭이나 불평등이라도 지양하며 네덜란드 법이 정한 바에 따라 모든 행위는 자유롭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누군가는 이런 네덜란드를 두고서 “관용이 만든 제국”이라는 말을 한다. 앞에서 네덜란드를 이해하는 지름길이 “Gedogen”(헤도흔: 관용)이란 단어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던 것도 바로 네덜란드 헌법 1조가 관용의 정신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또한 지금의 네덜란드가 지켜온 종교적 관용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단어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말: 프랑스라는 나라는 똘레랑스(Tolérance)를 외치는 사람들을 죽였고, 네덜란드라는 나라는 헤도흔(Gedogen)을 외치는 사람들을 보호했다. 프랑스의 똘레랑스는 시민들이 지켰고, 네덜란드의 헤도흔은 국가가 지켰단 말이다.


* 알크마르(Alkmar) 거리를 가득 메운 사람들(왼쪽)과 주말마다 열리는 치즈경매시장 모습(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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