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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Dec 31. 2016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네덜란드  9


1. 영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델프트(Delft), 이 도시는 페르메이르(Vermeer)가 그린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의 고향이다. 2003년 영국의 영화감독 피터 웨버는 슈발리에가 쓴 같은 이름의 소설을 갖고 영화를 만든다. 배경은 1,665년 네덜란드 델프트. 16세 소녀 그리트가 어려운 집안 사정으로 화가 페르메이르 집 하녀로 들어간다. 어린 소녀와 작가가 만나 아름다운 그림이 완성된다. 누군가는 ‘너무 아름다워서 슬픈, 미완의 사랑’ 같은 영화라고도 했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장면은, 바로 델프트 한복판에 있는 신교회 꼭대기에서 시청사가 보이는 시내 전경을 카메라가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여인들의 의상이며 집안 구석구석 인테리어와 가구들까지. 뿐만 아니라 거리의 지나는 사람들 모습과 장날 시장 풍경도 예전 중세시대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영화는 30분 정도 지나서야 남자 주인공 페르메이르가 등장한다. 프롤로그가 다소 긴 느낌이 든다. 이때야 비로소 감독이 왜 지루하게 끌고 왔을까라고 생각했던 의문들이 조금씩 벗겨지기 시작한다. 오래전 도시와 그 안의 사람들 모습이 바로 그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는 것을 은연중에 강조하고 싶었던 게다. 잠시 후부터 본격적으로 페르메이르와 소녀와의 이야기가 전개된다.


신교회 꼭대기에서 내려다본 시청사 주변 , 영화가 시작하면 첫장면으로 등장한다
신교회 전망대에서 바라본 델프트 시내 전경



어쩌면 영화는 잘츠부르크를 배경으로 한 ‘사운드오브 뮤직'처럼 이 영화에서도 델프트라는 도시를 관객들이 꼭 기억해주기를 바랐던 건지 모르겠다. 그래서 관객들은 영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오늘도 델프트를 찾아가면 이 영화 속 장면과 똑같은 장면들을 볼 수 있을지 않을까라는 막연한 기대감을 가지게 된다. 감독의 배려가 서서히 고맙게 느껴진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면서 문득 ‘은교’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박범신 작가의 작품으로 만든 영화 은교, 우리 영화는 여전히 실험적이라고 해야 할까?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와 은교, 어쩜 그리 기본 플롯이 같은지... 그런데 은교는 영화를 보는 내내 옆사람의 시선이 그처럼 거북살스러운 적이 없었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이 영화는 가슴으로 느끼도록 언어적 함축성을 강조한다. 도무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하인 소녀의 귀에 걸려 있는 ‘진주 귀걸이'. 그걸 걸어주는 화가의 손길, 화가의 속내를 느끼고 이해하며 진심으로 작품세계에 몰입해가는 하인 소녀 그리트. 영화는 관객들에게 상상력을 발휘할 것을 요구한다.


단지 페르메이르의 작품과 동일한 그림을 보여주는 것만이 아닌듯하다. 소녀에게 입을 약간 벌려보라며 원래 그림과 같은 포즈를 취하도록 요구하고, 델프트의 상징색(Delft blue)인 푸른색의 천으로 소녀의 머리를 감싸도록 하는 등, 모델로서의 자태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페르메이르는 소녀와 깊은 교감을 나눈다. 그 과정이 정말 저리 간단했을까라는 궁금증과 호기심은 끝내 관객의 상상력에 맡길 수밖에 없다. 그래서 만들어진 그림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


* 델프트역에서 '페르메이르'와 '진주귀걸이를 한 소녀'분장을 한 사람들이 사진모델을 해준다.




반면 은교는 관객의 상상력을 말살해 버리고 만다. 원하면 가져라. 사랑은 그런 것이란 듯 그야말로 직설적이다. 내면의 욕망이 그대로 드러난다. 한 가지 결과를 향해 너무 긴 이야기가 장식처럼 치장된다. 그러니 계속 화장실 가고 싶은 욕구만 생겨난다.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가 그리운 이유가 분명해졌다. 구속하지 않고 여행자를 스스로 즐기고 선택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도시 델프트. 그래서인지 오늘도 델프트는 스스로 치유하고 즐기기 위해 사람들이 찾아간다.


델프트 구시가지 중심에 위치한 신교회 내부에는 네덜란드의 국부 오렌지공이 묻혀있다. 그의 행적도 고귀하다. 나라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면 종교를 버리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당시 중세사회에서 종교를 바꾼다는 것은 거의 목숨과 맞바꾸어야 할 정도의 일인데 그는 감히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을 한다. 그리고 네덜란드를 지배하던 스페인과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국민들에게 새로운 국가에 대한 희망을 안겨준다.


네덜란드 국부 가문의 쉼터인 델프트 신교회가 있는 한 이 도시는 영원히 네덜란드 사람들에게 희망과 안식을 줄 것이라 믿는다. 그 곁에서 그들의 따스한 마음을 느끼게 되는 관광객들도 그런 이유로 델프트를 찾고 있는 게 아닐까?


신교회

* 신교회 내부와 오렌지 공이 묻힌 신교회 내의 무덤(오렌지 공의 가족들이 죽으면 모두 이곳에 묻힌다.)

* 델프트 광장의 스카이라인



2. 요하네스 페르메이르(Johannes Vermeer: 1632-1675)


페르메이르 아버지는 암스테르담에서 그림 그리는 도제로서 일을 하면서 지냈다. 그러다 결혼을 하고 델프트로 내려와 자리를 잡는다. 그 후 1632년 페르메이르가 태어나고, 그의 아버지는 델프트에서 건물을 임대해 여관업과 그림을 취급하는 미술 중개상 일을 시작한다. 그러나 너무 큰 건물을 임대하는 바람에 적지 않은 빚을 지게 된다. 그러다 페르메이르가 20살이던 1652년 그의 아버지는 숨을 거두게 되고 페르메이르는 아버지 빚까지 유산으로 물려받게 된다.


페르메이르는 21살이 되는 1653년 4월 5일 결혼을 한다. 페르메이르는 개신교 세례를 받았지만 가톨릭 신자인 아내를 맞는다. 그러나 페르메이르는 결혼 전에 결국 아내의 권유로 가톨릭으로 개종을 한다. 그 덕분인지 페르메이르는 처가 덕을 보게 된다. 장모 마리아 씬즈(Maria Thins)가 페르메이르가 빚으로 고생하던 것을 많이 해결해 주고 그가 그림 작업에 몰두할 수 있게 여러모로 도움을 준다. 문득 그 덕분에 소녀에게 부인의 진주 귀걸이를 귀에 걸고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결혼 후 페르메이르는 장모를 포함한 가족들과 함께 신교회 바로 근처에 있는 넓은 집으로 이사를 한다. 페르메이르는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지냈는데 주로 2층에 있는 아뜰리에에서 그림을 그렸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모두 15 명의 자녀를 낳았는데 안탑깝게도 그중 4 명은 세례를 받기도 전에 숨을 거두고 만다. 그러나 페르메이르는 죽은 아이들을 "요한 페르메이르의 자녀"로 등록을 한다.


페르메이르는 그가 결혼을 하던 해인 1653년 12월 29일에 델프트 화가 조합인 세인트 루크에 입회를 하는데 입회비를 마련할 돈이 없어 입회비 조차 내지 못한다. 당시의 경제상황은 모두가 어렵게 지내야만 했다. 그건 모두가 지속되는 전쟁 때문이었다. 영국과의 전쟁이 끝나자 이어지는 루이 14세의 네덜란드 침공, 그리고 또다시 스페인과의 전쟁으로 이어지는 바람에 국가 경제가 말이 아니었다. 거기에다가 엎친데 덮친 격으로 1654년에 델프트에서 폭발사고가 발생하는 바람에 주민들도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다. 이 사건으로 도시 전체가 피해를 입는다.


델프트 시청사와 광장

* 델프트 운하, 네덜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운하도시이다.



그 후 페르메이르는 30대가 되자 델프트 조합장으로 선출되는데, 1663년과 1670년, 그리고 1671년에 재선 된다. 이때 페르메이르는 상당히 성서적인 해석을 부여한 그림들을 그린다. 이 그림들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들을 위한 그림으로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무튼 이때부터 그의 인지도는 점차 동료들 사이에서 장인으로 인정받기 시작한다.


페르메이르는 그림을 그릴 때 전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작업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대충 일 년에 서너 작품 정도 그림을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페르메이르의 후원자이자 작품 판매상인 발타사르 드 몽코니(Balthasar de Monconys)가 그의 작품을 보기 위해 1663년 그를 방문하지만 그에게 보여줄 그림이 없어 되돌아간 일은 유명한 일화이다.


한편, 경제사정이 점차 어려워지자 1675년 여름 페르메이르는 암스테르담 실크 상인 쟈콥 롬보츠(Jacob Romboutsz)에게서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장모의 보증으로 1,000 길드를 빌린다. 그런데 그해 겨울 1675년 12월에 페르메이르는 잠시 병치레를 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갑자기 숨을 거두고 만다. 그는 1675년 12월 15일 델프트에 있는 구교회에 묻힌다.


페르메이르가 죽자 그의 부인 카테리나는 그의 죽음을 재정압박으로 인한 스트레스 때문이었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프랑스와의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그림들을 팔 수 없게 되자 결국은 어려운 경제적 상황을 견디기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상황이 결국은 페르메이르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게 아닐까라는 것이다.


* 페르메이르 가족이 살던 집(왼쪽)과 페르메이르가 일하던 성 루카스 길드 건물(우측: 현재는 페르메이르 박물관으로 사용 중, 박물관에는 페르메이르 작품 37점 모두 복사본으로 만들어 전시하고, 작품해설과 관련 자료 등도 전시하고 있다.)



아무튼 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압박은 미술 시장의 붕괴를 가져오고 많은 화가들을 굶주림으로 몰아넣어 예술가로서의 페르메이르 역시 그림 그리기뿐 아니라 미술품 판매사업이 힘들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녀는 11 명의 자녀를 양육해야 했기에 고등 법원에서 페르메이르의 채권자에게 채무 면제를 간청할 수밖에 없었다.


사실 페르메이르의 집은 제법 큰 규모였다. 집은 모두 8개의 방이 있었는데 그림과 옷, 의자, 침대 등의 가구가 있었고, 그의 아뜰리에에는 의자 2개와 이젤 2개, 그리고 팔레트 3개와 캔버스 10개, 참나무로 된 책상, 그리고 서랍이 달린 작은 나무 찬장과 쓸모없는 잡동사니들을 잔쯕 가지고 있었다.


페르메이르는 그의 유산으로 그림 19점을 남겼는데 카타리나와 장모는 이중 2개의 작품을 헨드릭 판 부이텐(Hendrick van Buyten)에게 팔아서 부채를 갚는다. 한편, 페르메이르는 델프트에서 존경받는 예술가였지만 그의 고향 밖에서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평소에 피테르 판 뤼벵 (Pieter van Ruijven)이라는 페르메이르의 후원자가 그의 작품을 대부분 구매했기 때문에 오히려 델프트 이외의 도시로 그의 명성이 퍼져나갈 기회를 잃은 것이다. 그래서 페르메이르에게는 전혀 학생이 없었고 페르메이르가 가르칠 학교도 없었다.


뿐만 아니라 페르메이르는 아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의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한 사업을 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했기에 다른 도시 사람들과 어울릴 기회 조차 거의 없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델프트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기에 그의 명성은 언제나 델프트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아울러 화가로서 길드의 우두머리로 지내야만 했던 시간들 역시 그가 작품 활동을 하는데 엄청난 시간적인 제약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페르메이르가 사용한 유화물감들
페르메이르의 작품속 빛의 흐름...



3. 페르메이르의 작품들


페르메이르 미술의 가장 큰 특징은 빛과 구성, 그리고 색의 삼요소인데 여기에 독특한 이야기 방식이 포함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을 보면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7세기 예술은 특히 선과 악, 특별한 것과 평범함, 사랑과 은밀한 에로티시즘 등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작가가 그림이라는 이미지를 통해 보여줄 것인가 하는 것이 관건이다. 그래서 페르메이르의 그림 속 이야기를 해석하는 일도 재미가 있을 것이다.


페르메이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빛이다. 따라서 페르메이르가 어떻게 빛을 다루고 표현하는가에 대해 유심히 관찰할 필요가 있다. 그의 작품은 언제나 빛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한편, 17세기 네덜란드는 전쟁의 회오리에 빠져 경제사정 역시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에 네덜란드의 많은 화가들이 상대적으로 값싼 갈색 안료를 사용하여 그림을 그렸다.(* 플랑드르의 화가들(4) 참조) 그러나 페르메이르는 상대적으로 비싼 안료인 청금석이나 천연 청초제 만을 골라 사용했다. 이런 선택이 결국 그의 그림을 가치 있는 작품으로 만드는 원동력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페르메이르는 가능한 자연에 가까운 느낌을 가질 수 있도록 안료를 골라 사용했다. 그가 그리는 그림들은 그렇기 때문에 과장되거나 모자라지 않고 보이는 그대로 표현하는 사실성에 충실했다고 하겠다. 이런 식으로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를 창조해 나갔다. 이런 작업 방법은 페르메이르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든 물체의 표면이 보여주는 색상을 가능한 그대로 재현했던 것을 따라한 것처럼 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의 그림은 사실상 페르메이르의 방식과는 많은 차이를 보여준다.


* 페르메이르의 전체 작품 37점



자연히 페르메이르의 작품 속에서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색상의 느낌은 그림의 작품성을 더욱 높여주는 역할을 할 수밖에 없다. 페르메이르가 1672년 재난의 해로 불릴 정도로 어려운 시기에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마치 왕자님처럼 비싼 물감을 계속해서 사용을 한 것은 페르메이르가 그의 후원자였던 페테르 판 뤼벵(Pieter van Ruijven)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결국 그의 세심한 페인팅 기술의 한 측면은 안료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예를 들어 ‘우유 따르는 여인’이나 ‘편지 쓰는 여인’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노란색과 담청색은 그가 전매특허처럼 사용한 색깔인데 특히 이 두 가지 물감들은 가장 비싼 것이기도 했다. 이로써 페르메이르는 자신의 아이콘처럼 노란색과 담청색의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고 하겠다.


또한 ‘와인잔을 들고 있는 소녀’(1659)를 보면 다른 작품들에서 볼 수 없는 붉은 색조를 사용했는데, 심지어 그림자의 색상까지도 그는 특별한 물감을 사용했다. 이처럼 그의 작품들은 다른 작품들에서 볼 수 없는 오묘한 색감을 보여주는데 이것은 그가 사용한 물감이 그만큼 특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 델프트 풍경과 페르메이르 자화상(이 작품은 다른 그림에서 그의 얼굴로 추정되는 그림만 자른 것이다.)

페르메이르의 작품들은 현재 37개의 작품(위에 모두 소개한)만이 알려져 있으나 10~20여 개의 작품이 더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4. 델프트 블루(Delft Blue)


네덜란드에는 공예품으로 델프트(Delft Blue) 도자기와 붉은색의 마쿰(Makkum) 도자기가 유명하다. 이 도자기들은 16세기부터 중국 등의 영향을 받아 만들기 시작했는데 18세기에 전성기를 맞는다. 마쿰도자기는 암스테르담 북쪽에 위치한 해안가 마을 마쿰에서 만드는데 1960년도에 왕립(Koninklijk: Royal)이라는 호칭을 부여받아 ‘왕립마쿰도자기’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다.


한편, 델프트 도자기는 네덜란드에서 가장 오래되었는데 이곳에서 생산되는 도자기를 흔히 ‘델프트 블루’(Delft Blue)라고 부른다. 17세기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델프트 도자기가 유럽 전역에 퍼지며 전성기를 맞는다. 델프트 도자기는 원래 동인도회사가 중국과 일본에서 도자기를 들여왔지만 비싼 도자기이기에 서민들도 사용할 수 있도록 델프트에서 직접 도자기를 만들어 보급하기 시작하자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1919년에는 네덜란드 여왕으로부터 “Royal”이란 칭호를 하사 받고 “Royal Delft Blue”란 이름을 사용하게 된다. 그런데 델프트 도자기가 보급되면서 점차 프랑스와 영국에서도 좋은 도자기가 생산되자 네덜란드의 도자기 회사들이 점차 문을 닫게 된다. 이 회사는 1653년에 설립된 32개 도자기 공장 중 유일하게 살아남은 도자기 공장이다.


*초창기 델프트 도자기(델프트 프리젠 박물관 소장)

델프트 기차역(2015년 완공)

* 선반 위에 놓인 델프트 블루와 운하에 비친 그림 같은 신교회 반영, 아래는 페르메이르가 묻힌 구교회가 보이는 운하 풍경. 그런데 구교회는 1654년 델프트 화약고 폭발로 피사의 사탑처럼 교회건물이 기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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