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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종수 Jan 14. 2017

별이 빛나는 밤

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네덜란드  12


1.


빈센트 반 고흐(1853~1890), 그는 1853년 벨기에와 인접한 네덜란드 브라반트의 준데르트(Zundert)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다. 그의 유년시절은 가난했기에 15살 되던 해부터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미술품 가게 점원으로 일을 한다. 고흐가 20살이 되던 해 런던 지사로 파견되는데 이때 그곳에서 우어술라 로이어(Ursula Loyer)라는 하숙집 딸을 보고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고흐의 일방적인 짝사랑으로 끝나고 만다.


얼마 후 고흐는 쓰라린 마음을 달래며 고향으로 돌아온다. 고흐는 1877년 목사가 되기 위해 신학공부를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목사를 포기한다. 실의에 빠진 고흐는 문득 그림을 그리는 것이 구원의 길이라 생각하고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이런 그에게 미술 중개상을 하는 네 살 터울의 동생 테오는 친구이자 든든한 후원자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고흐는 테오에게 일기 쓰듯 편지를 보낸다. 그 편지는 1872년 8월부터 세상을 떠날 때까지 무려 668통이나 된다. 물론 이외에도 어머니와 여동생, 동료 화가인 고갱, 베르나르 등에게 띄운 편지들도 상당수 있다.(* 참고:  ‘반 고흐 영원의 편지’, 예담) 


* 네덜란드 남부 브라반트의 준데르트에 있는 반 고흐 생가, 1853년 3월30일 이 집에서 고흐가 태어났다는 표지판이 붙어 있는 이 집은 현재 고흐 기념관으로 사용중이다.

빈센트 반 고흐의 편지 모음집, 1911, 암스테르담 반고흐 박물관 소장

*뉘넨의 직조공장에서 스케취(왼쪽), 시엔의 앉아있는 모습 스케취(오른쪽), 1882, 크뢸러 뮐러 박물관 소장

고흐가 그린  밀레 만종  모사화 스케취, 1880, 크뢸러뮐러 박물관 소장 



1880년 10월, 고흐는 브뤼셀에 머무르며 데상 공부를 시작하는데, 이때 이미 밀레(Millet)의 모사화를 그리고 있었다. 고흐가 마음속 스승으로 삼아온 밀레와 렘브란트였기에 당시에 그들의 그림을 모사하고 감상하는 게 유일한 낙이었다. 브뤼셀에서 몇 달을 보낸 후 또다시 그는 부모님을 따라 에텐에 머무르게 된다. 고흐는 이곳에서 또다시 실의를 맛본다. 고흐는 남편을 잃은 사촌누이 키 보스 스트리커(Kee Vos Stricker)에게 연민을 느끼지만 그녀는 관심조차 표하지 않는다. 고흐는 이곳을 떠나 혼자 헤이그로 간다. 


1882년 1월 헤이그에 정착하자 클라시나 호르니크 시엔(1850-1904)이라는 여인을 만난다. 이 여인에 대해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지난겨울 임신한 여자를 알게 됐다. 겨울에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 임신한 여자,.. 그녀는 빵을 먹고 있었다. 하루치 모델료를 다 주지는 못했지만 집세를 내주고 내 빵을 나누어줌으로써 그녀와 그녀의 아이를 배고픔과 추위에서 구할 수 있었다.”라고 적었다.


몸을 팔던 그녀는 5살짜리 딸이 하나 있었고 임신 중이었지만 고흐는 그녀와 동거를 시작한다. 그녀를 모델로 고흐는 60여 점의 데생과 수채화를 그린다. 그중 가장 잘 알려진 것이 바로 ‘Sorrow’이다.  고흐는 이 그림 아래에 프랑스 역사학자 미슐레를 인용해 "어찌하여 이 땅 위에 여인이 홀로 버려진 채 있는가?"라는 글을 적어놓는다.(* 쥘 미슐레는, 여성에 대한 편견, 가혹한 시대 상황, 무엇보다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마녀'를 만들었다며 "새로운 것들은 모두가 사탄이었고, 진보는 모두 죄악시되었다 “고 지적했다. 여전히 사람들은 '마녀 사냥'이란 말을 사용한다.)


* 슬픔, 1882, 암스테르담 반 고흐 박물관 소장



그녀는 추하고 술주정뱅이인 데다 임신까지 하고 있었다. 고흐는 그녀를 자신의 숙소로 데려와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애정을 그녀에게 쏟는다. 심지어 그녀와 결혼까지 생각을 하는데 부모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치고 포기를 한다. 그녀와의 생활을 20개월이나 하면서 그동안 고흐는 마침내 한 개인에 대한 사랑이 신에 대한 사랑과 같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때부터 고흐의 상처 입은 자존심을 예술로 승화시키려 한다.(* 고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1904년 강물에 투신해 자살한다.)


1884년 고흐는 또다시 부모님이 교구 목사로 있는 뉘넨으로 돌아온다. 뉘넨에서의 생활이 어쩌면 고흐 작품의 성격을 규정짓는 중요한 시기였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고흐는 이곳에서 공장 노동자들과 농부들을 유심히 관찰하면서 그들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주변 환경과 자연환경 등에 대한 탐구 결과를 그림으로 표현해 낸다. 


그 결과 1885년 그의 첫 작품이라 할 수 있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완성한다. 어쩌면 이러한 고흐의 하층민들에 대한 연민과 애정은 이미 1882년 고흐가 헤이그에서 만난 여인 시엔을 모델로 한 누드화스케취 ‘Sorrow’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었던 게 아닌가 싶다. 그러나 ‘감자 먹는 사람들’을 미술시장에 내놓지만 끝내 팔리지 않는다.


* 아래는 네덜란드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흐 작품들 중에서 특히 고흐가 뉘넨에서 미술공부를 시작하며 그린 습작들을 중심으로 모아 놓은 것이다. 모두 1884~1885년 사이의 작품들이다.  

* 아버지가 뉘넨 교구 목사로 근무 시 살던 사택(왼쪽), 오래된 마을 교회(오른쪽)

*뉘넨에 있는 직조 공장의 노동자들과 작업 모습을 그린 것들(위, 아래) 

* 뉘넨의 자연 풍경들(위, 아래) 

* 왼쪽 뉘넨의 숲길을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을 모티브로 오른쪽처럼 자전거길을 만들었다. 어두워지면 별들이 빛나는 길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이 길을 달린다.



 한편, 고흐는 또다시 뉘넨에서 마르고 베게만(Margot Begemann)을 사랑하게 된다.(* 고흐는 자주 사랑병에 걸리지요.) 고흐가 만난 4번째 여인 베게만의 오빠는 뉘넨에서 직조 공장을 운영했다. 고흐는 공장 노동자들의 일상을 스케취하기 위해 이곳을 자주 방문하면서 그녀와 친밀한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마르고는 고흐보다 10살이나 많았기에, 결국 또다시 집안의 반대로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마르고는 음독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한다. 서글픈 사랑에 마음만 아픈 고흐는 어쩔 수 없이 뉘넨을 떠나고 만다.


1885년 11월 고흐는 또다시 안트베르펜으로 옮겨가 루벤스(Rubens)를 발견하고 문득 생의 환희를 깨닫는다. 고흐는 그동안의 고통을 잊고 루벤스의 그림 속 색 잔치에 빠져 미술에서 색의 의미를 깨닫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일본 직물을 알게 되면서 그에 대한 관심도 높아진다.


 특히 일본 직물의 색상과 무늬들은 그에게 커다란 호기심과 흥분을 야기하기에 이른다. 이때 그는 빛의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듯했다. 그뿐 아니라 고흐는 실제로 일본 판화에 심취하기도 한다. 그래서 히로시게의 작품인 ‘비 내리는 다리’와 ‘나무’를 모사하기도 한다. 이때부터 서서히 고흐 작품에서 색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 파리 몽마르트 언덕길을 오르기 시작하는 지점에 풍차 2대가 아직 남아 있다. 하나는 그림(1886)에 보이는 곳인데 레스토랑으로 사용 중이고, 다른 하나는 이곳에서 조금 떨어진 개인 저택 안에 자리하고 있다.(아래 오른쪽)

* 몽마르트 언덕, 1886, 크뢸러 뮐러 박물관 소장(왼쪽), 풍차(오른쪽), 1886, 암스테르담 반 고흐 박물관 소장 (몽마르트 언덕에는 20세기 초까지 많은 풍차가 돌고 있었다. 지금은 2대만 남아있다.)



그림에 대한 열정은 드디어 고흐를 파리로 인도한다. 1886년 고흐는 파리로 간다. 고흐가 파리로 이주한 후 에밀 베르나르, 카미유 피사로 등의 화가들과 만나 인상주의라는 화풍에 몰입하게 된다. 또한 폴 시냑, 조루주 쇠라 등의 화가들과 공동으로 전시회를 열면서 많은 교감을 나눈다. 그들에게서 고흐는 빛과 색채에 대한 느낌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게 되고 점묘 주의 요소를 받아들여 고흐의 특징적인 표현을 완성해 나간다.


1888년, 그는 쇠약해진 심신을 안정시키고 고갱과의 공동체 결성을 위해 프랑스 남부 아를로 떠난다. 아를의 넓은 평야와 작열하는 태양은 고흐를 매료시켰고 노란색과 보라색, 그리고 담자색 등의 강렬한 색채가 고흐의 화판을 물들인다. 고흐가 아를에 머무는 동안 그린 작품이 200점이 넘는다. 대부분의 유명 작품들이 이 시기에 제작된 것이라고 보면 크게 틀리지 않는다. 고흐는 아를의 ‘침실’에서 동료인 고갱을 기다리면서 고갱에게 줄 선물로 ‘해바라기’를 그린다.


그러나 아를에서 고흐와 함께 지내던 고갱과의 사이는 점차 악화되고 심지어 고흐의 귀가 잘려나가는 참사가 발생하면서 둘 사이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고갱은 성공을, 팔리는 작품을 그리는 일이라 생각했고 고흐는 순수 미술에 대한 의지를 강조해 둘은 갈등을 야기한다. 같은 대상을 놓고도 둘의 그림은 달랐다. 고흐의 그림 속 여인은 인간 내면을 보여주는 맑은 여인인데 반해 고갱의 그림은 정액 냄새 풍기는 그런 여인이었다.


* 해바라기, 1886, 암스테르담 고흐 박물관 소장(완쪽),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오른쪽)



결국 험악한 고갱의 부지깽이를 휘두르는 폭력에 고흐의 귀는 날아가는데 이걸 고흐 스스로 잘랐다고 고갱이 우기자 소심하고 착한 고흐는 고갱이 해를 입을 것 같아 스스로 귀를 자른 것처럼 행동한다.(* 이건 순전히 개인적 주장만은 아님) 고흐는 점점 더 정신병자 취급을 받게 되고 마을에서도 그를 쫓아내려 한다. 고갱은 결국 고흐의 곁을 떠나고 고흐도 얼마 후 상 레미 요양원으로 스스로 찾아가 1년 정도 그곳에서 머물며 치료를 받는다. 


그러나 고흐의 끊임없는 창작욕구는 상 레미 요양원에서 생활하면서도 최고의 걸작 중 하나인 ‘별이 빛나는 밤’을 탄생시킨다. 어쩌면 이 그림이 그의 인생과 그의 종교적 신념 등을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그림이 아닐까? 대상을 직접 바라보면서 그렸던 그의 다른 작품들과는 달리 이 작품은 평소 그가 꿈꾸었던 기억 속 세상을 끄집어내 그린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신비스러운 느낌이 짙게 배어있다. 


별이 빛나는 밤, 1889, 뉴욕 현대미술관 소장



그가 표현한 별들은 하늘의 별이 아니라 마치 지상의 별이 승천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고흐가 그린 별이 빛나는 밤, 이 그림에 대해 과학자들은 놀라운 증언을 한다. 그건 고흐가 결코 정신질환자가 아니기에 논리적이고 쳬계적인 접근 방식이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고흐의 그림에서 과학자들이 풀지 못하고 있는 난기류 현상에 대한 것을 고흐가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참조: 아래 링크된 글에 있는 비디오에 자세한 한글자막으로 설명이 되어 있다. https://www.brainpickings.org/2014/11/13/van-gogh-starry-night-fluid-dynamics-animation/ )


그가 보여주려 했던 소위 몽환적이라는 의미는 결국 무한한 우주의 어느 곳에서 소외받고 버림받는 인간의 고뇌와 비통함을 조금이나마 위로하려 했던 게 아닐까? 고흐의 위대함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싶단 말이다.


사실 그동안 고흐는 별에 대한 관심을 피력한 적이 있다. 그가 아를에 도착한 후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에 다름과 같이 적는다. “우리 모두 아를로 함께 왔으면 좋았을 텐데... ‘씨 뿌리는 사람’ 스케취를 보낸다.., 그리고 언제쯤이면 늘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별이 빛나는 하늘을 그릴 수 있을까? 멋진 친구 시프리앙이 말한 대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은 침대에 누워서 담배를 입에 물고 꿈꾸는 그런 그림일지 몰라. 하지만 그런 그림은 아직 한 번도 그려보지도 못한 그림인데 아무리 무력감을 느끼더라도 우선 시작은 해야겠다.”(1888년 6월 18일 고흐가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론강의 별이 빛나는 밤, 1888, 암스테르담 반 고흐 박물관 소장



“지상에 머무는 동안 지도 위에 검은 점으로 표시되어 있는 마을이나 도시에 직접 가볼 수 있는 것처럼 어쩌면 나비가 화가로 활동하고 있는 무수한 별이 있을지도, 그리고 죽은 후에는 우리도 그곳에 갈 수 있게 될지도 모르지 않겠나.”(1888년 6월 23일 베르나르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타리스콩이나 루앙에 기려면 기차를 타야 하는 것처럼 별까지 가기 위해서는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죽으면 기차를 탈 수 없듯, 살아 있는 동안에는 별에 갈 수 없다... 늙어서 평화롭게 죽는다는 건 별까지 걸어간다는 것이지.”(1888년 6월에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한편, 고흐는 상 레미 요양원에서 고흐가 일생을 통해 판매한 유일한 작품인 ‘붉은 포도밭’(The Red Vineyard, 1888)’을 그린다. 그러나 고흐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고흐는 “언젠가 내 그림이 물감 값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게 될 날이 올 것이다.”라고 스스로 다독인다. 


"나는 언제나 내가 그린 그림이 나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기를 바라고 있어. 나는 색채와 구성에 의한 예술적인 삶에 의한, 새로운 미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을 믿고 있지. 그렇게 믿고 그림을 그리면, 우리가 헛된 희망을 품은 게 아니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반드시 찾아올 거라고 생각해".(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1888년 3월) 사람들은 생전에 고흐를 외면했지만, 그는 그림을 그릴 때마다 그의 뜨거운 영혼을 작품 속에 불어넣고 있었던 것이다.  


붉은 포도밭, 1888



고흐는 테오에게 상 레미에서의 생활을 전하면서 “점점 광기가 사라지고 있다”라고 쓴다. “이제는 살아가는 데 대한 공포도 한결 덜해졌고 우울한 기분 역시 약해졌다”는 것이다.(1889년 5월 25일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런 고흐에게 또 다른 기쁜 소식을 듣고 명작 한편을 그리게 된다. 테오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린 조카를 위해 아몬드 나무에 꽃이 활짝 핀 그림을 그린단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이곳 의사들 덕분에 올 때보다 더욱 차분하고 건강해진 모습으로 떠날 수 있게 되었다고 쓴다.(1890년 2월 15일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제 고흐는 1890년 5월 정신병원을 떠나 파리 북쪽에 위치한 오베르 쉬르 우아즈(Auvers Sur Oise)로 옮긴다. 이곳에 온 지 두어 달 지난 시점에 고흐는 마지막 작품으로 알려진 2개의 작품을 그리고 있었다. 하나는 ‘까마귀가 있는 밀밭’, 그리고 ‘다비안의 정원’이라는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마지막으로 그리고 고흐는 안탑깝게도 숨을 거두고 만다.


1890년 7월 어느 날 벌판에서 그림을 그리던 고흐는 동네 양아치들이 쏜 총을 가슴을 맞고 숙소로 돌아와 동생 테오가 지켜보는 가운데 끝내 숨을 거두고 만 것이다. 이때가 그의 나이 37세였다.(* 흔히 자살로 고흐의 죽음을 묘사하지만 그가 자살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고흐는 1890년 7월 29일 생을 마감할 때까지 10여 년 동안 모두 879점의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그는 오직 하나의 작품만을 팔았다. 그런데도 그가 살았던 37년이란 생애 동안 예술에 대한 끝없는 집착은 그로 하여금 극적이고도 황홀한 작품을 그리게 했다. 가난으로 인한 고통은 그의 인생에 덤이었을 뿐이었다. 


다비안의 정원, 1890, 파리 오르세 박물관 소장

* 까마귀가 나는 밀밭(왼쪽)과 작품의 배경이 된 오르세의 밀밭(오른쪽, 이 밀밭에서 고흐가 총을 맞는다.)



사람들은 그가 자살이라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라는 믿음을 통해 그의 작품을 보려 한다. 사람들은 언제나 정신병과 자살이라는 두 단어를 강조하며 천재의 작품임을 칭송한다. 고흐가 지닌 가장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랑은 바로 자살이라는 단어에 가려져 있다. 그의 그림이 가치가 있다는 것은 바로 그가 누구보다 인간적이라는 의미를 그림으로 승화시켰기 때문이라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면 좋겠다. 별이 빛나는 밤에...




1889년 8월 말 고흐는 테오에게, “사랑하는 동생아, 이번 발작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 들판에서 그림 그리느라 바쁠 때 일어났단다. 그 그림을 네게 보내주마. 발작이 일어났지만 그림은 완성했거든...” 테오에게 발작이 일어나도 이제는 그걸 견딜 만큼 회복되어가고 있음을 자랑하고 싶어서 동생에게 그 증거로 완성시킨 그림을 보낸다고 했다. 스스로 발작을 이겨내고 있는 것을 대견해하고 있는데 자살을 생각한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 고흐는 피를 흘리며 이 계단을 올라 3층 다락방(오른쪽)으로 들어가 쓰러진다. 그리고 이 방에서 이틀 후 숨을 거둔다.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고흐가 묻혀 있는 공동묘지, 중앙 왼쪽이 고흐, 오른쪽이 동생 테오의 무덤 묘비이다. 묘지에 아이비가 너무 많이 자랐다.



더구나 오베르에 도착한 뒤 고흐는 건강을 회복하고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한다. 그는 편지에서 테오에게 “오베르가 조용히 그림을 그리기에 제격”이라고 하면서 매우 흡족해했다. 심지어 그는 갓난아기를 키우고 있는 테오에게 “아기와 엄마의 건강을 위해 이곳에 와 요양을 해보라”고 권유까지 했다. 고흐는 이곳에서 무서울 정도의 기세로 그림을 그렸다. 이곳에서 70여 일 동안 무려 80여 점을 그렸다. 과연 그런 그에게 자살을 생각할 시간조차 있었을까?


그것도 그가 그린 작품 중 가장 큰 작품 여러 점을 이곳에서 그렸다. 건강이 받쳐주지 않으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다. 당시 그의 건강은 최상의 상태였다. 그런 고흐가 갑자기 자살을 한다니 뭔가 이상하지 않은가?


이곳에서 고흐가 죽기 전 마지막으로 그린 그림들은 ‘까마귀가 나는 밀밭’과 ‘도비니 정원’이다. 그런데 과연 그의 작품에서 죽음의 냄새가 날 정도로 음산한가? 뿐만 아니라 정말 웃기는 일은, 자살한다면서 자신의 가슴에 총을 쏘고 죽지를 않았다면 그냥 피를 흘리며 집으로 돌아오는 게 아니라 다시 한번 머리에 대고라도 한방 더 갈겨야 했던 게 아니었을까? 그래야 죽을 테니 말이다. 더구나 고흐가 자살할 때 사용했다는 총은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집에서고 보리밭에서고 말이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알만한 거짓말들을 아무 생각 없이 따라 하고 퍼뜨리는 사람들이 공연히 우스워진다.


한 시대의 영웅은 언제나 의도적으로 은밀하게 조작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누군가 영웅으로 자리를 잡는다는 것은 시대가 그만큼 혼란스럽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영웅이 언제나 난세에 태어나는 게 아닌가? 비록 그 영웅이 전쟁터나 혁명 전선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라 모든 분야, 즉 음악과 미술 등에 까지도 해당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 아래는 파리 오르세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흐 작품들





* 아래는 네덜란드 오테를로 크뢸러 뮐러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고흐 작품들




* 아를에 도착 후 고흐가 머문 노랑 집(왼쪽)과 노랑 집 스케취(오른쪽), 1886, 파리 오르세 박물관 소장

* 고흐는 테오에게,  "잠시 나태했던 자신에 대한 질책으로 편히 쉬고 있던 자신의 방을 그리겠다"라고 하면서 3점의 그림을 그린다. 맨 왼쪽: 암스테르담 반 고흐 박물관 소장, 가운데: 파리 오르세 박물관 소장, 맨 오른쪽: The Art Institute of Chicago 소장, 모두 1889년도 작품. 

* 1889년 고흐는 상 레미 요양원으로 스스로 찾아간다. 이곳에서 테오의 아이를 위해 '꽃피는 아몬드 나무'를 그린다. 
꽃 피는 아몬드 나무, 1889,  암스테르담 반 고흐 박물관 소장
구름낀 하늘아래의 밀밭, 1890, 7. 암스테르담 반 고흐 박물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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