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화를 찾아가는 인문학 여행 / 네덜란드 11
반 고흐, 그 이름만으로도 사람들 마음을 설레게 한다. 그를 보러 사람들은 암스테르담을 찾는다.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박물관(Van Gogh Museum Amsterdam)은 그래서 언제나 문전성시를 이룬다. 그런데 또 다른 곳에서 반 고흐를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다. 크뢸러 뮐러 박물관(Kroeller Mueller Museum), 이곳은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박물관 다음으로 고흐 작품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고흐의 초기 작품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감자 먹는 사람들’을 비롯해 ‘씨 뿌리는 사람들’과 ‘밤의 카페 테라스’ 등 고흐의 주옥같은 작품 271점이 바로 이곳에 있다, 암스테르담 고흐박물관의 고흐 작품이 모두 700여 점 정도인 걸 감안하면 이곳에 있는 작품의 숫자가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숫자가 아닌가? 그것도 한 사람이 수집한, 개인 소장품이라고 한다면 놀랍지 않은가 말이다.
크뢸러 뮐러 박물관은 네덜란드 동쪽 오테를로의 호헤 벨뤼베(Hoge Veluwe) 국립공원 안에 있다. 이 공원은 네덜란드에서 가장 큰 국립공원인데 이곳에 앙리 반 데 벨데(Henry van de Velde)가 설계한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네덜란드 사업가 안톤 크뢸러 뮐러와 독일 사업가의 딸 헬레네 크뢸러 뮐러의 개인 컬렉션을 모태로 1938년 7월 13일 개관을 한다.
이곳에는 현재 만4천여 점에 이르는 작품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19세기와 20세기에 걸쳐있는 인상파와 표현주의, 신조형주의 등의 작품과 근대 미술 작품들이 주를 이룬다. 그중에서 반 고흐의 작품이 271점이나 포함되어 있어 암스테르담의 반 고흐 박물관 다음으로 큰 규모이다.
그뿐 아니라 1917년에 시작한 네덜란드 예술 양식의 하나인 더 스테일(De Stijl)의 작가들 작품도 대부분 이곳에 있다. ‘더 스테일’에 참여한 예술가들은 작가이자 비평가인 테오 반 뒤스부르그(Theo van Doesburg), 피에트 몬드리안(Piet Mondrian), 건축가인 게리트 라이트벨트(Gerrit Reitveld) 등이 참여했다.
'더 스테일'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토피안적인 하모니와 질서를 표현할 수 있도록 단순함과 추상성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수직과 수평으로 시각적인 구성을 단순화하고, 검정과 흰색, 그리고 삼원색만을 사용했다. 순수한 기하학적인 요소들을 줄여나가고 기본 색상만 사용함으로써 하모니와 질서를 이루어 내려했던 것이다.
한편, 더 스테일은 테오 반 뒤스부르흐가 발행하는 잡지의 이름이기도 했는데, 이 잡지는 1931년까지 발행을 한다. 이 잡지 역시 그래픽 디자인의 가장 의미 있는 것들을 보여주었는데, 그래픽 디자인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형태와 색상을 축소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 이 잡지가 지향하는 최종 목표이기도 했다. 어쩌면 ‘미니멀리스트’ 운동이 이미 네덜란드인들의 기질 속에 배어있었기에 예술분야에서도 그대로 적용을 하게 된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외에도 네덜란드 플랑드르 시기의 화가로 잘 알려진 화가들(* 플랑드르 화가들 4 참조), 특히 호이엔을 비롯한 네덜란드의 근대 화가들의 작품들까지 볼 수가 있어 더욱 크뢸러 뮐러 박물관의 진가를 느낄 수 있다.
* 크뢸러 뮐러 박물관 홈페이지 주소 http://krollermuller.nl/bezoek
* '더 스테일'(De Stijl) 잡지 창간호 표지
2.
헬레네 뮐러(Helene Emma Laura Juliane Mueller: 1869∼1939)는 독일 루르지방의 에쎈에서 태어났다. 헬레네 뮐러의 아버지 빌헬름 하인리히 뮐러(Wilhelm Heinrich Mueller)는 광산과 철강회사, 그리고 선박회사까지 운영하던 독일의 재벌이었는데 네덜란드 로테르담에도 자회사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남편 안톤 크뢸러(Anton Kroeller)의 아버지도 선박업과 광산업을 운영하던 네덜란드 재벌이었는데 안톤 크뢸러의 아버지는 로테르담 회사 지분을 가지고 있었고, 로테르담 회사의 지사장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러던 1882년 어느 날 드디어 두 사람은 운명적으로 만나게 된다. 그때는 헬레네가 13살이었고 안톤은 19살이었다.
헬레네와 안톤이 운명적인 만남을 가진 후 그때부터 두 사람은 오누이처럼, 연인처럼 관계를 이어간다. 그 후 두 사람은 6년 후인 1888년 결혼을 하고 부부가 된다. 그리고 네덜란드 전통에 따라 남편과 부인의 성을 따른 성을 사용한다. 그래서 이들의 이름은 이때부터 크뢸러 뮐러(Helene Kröller-Müller)라는 성을 가지게 된다.
남편 안톤 크뢸러는 처음에 로테르담에 있는 그의 아버지 회사 ‘Mueller & Co.’의 직원이었다. 그러다가 안톤이 그녀와 결혼을 한 후 헬레네 아버지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회사를 물려받게 되고 그 회사 사장이 된다. 그의 뛰어난 경영 수완 덕분에 이 회사는 국제적인 다국적 회사로 성장을 하게 된다. 그 후 이 회사는 나날이 발전을 거듭하면서 세계적인 선박회사로 성장을 한다. 그리고 1900년 본사를 로테르담에서 헤이그로 옮긴다.
남편의 사업 성공으로 헬레네는 유럽 최고의 갑부가 되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이때 헬레네는 본격적으로 미술품 수집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그녀가 그녀의 미술 스승이었던 헹크 브레머(Henk Bremmer)를 만나면서부터 그야말로 헬레네의 인생이 바뀌게 된다. 그녀는 1906년부터 1907년까지 2년간 그에게서 본격적인 미술 관련 교육을 받는다.
그녀는 이제 미술품에 대한 안목과 수준이 가히 유럽에서 거의 최고의 여성 예술품 수집가(Art Collector)로서 자질을 갖추게 된 것이다. 드디어 그녀는 1907년부터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한다. 그 후 그녀의 미술품 구매는 어느 틈에 만여 점이 넘는 정도로 엄청난 수집 규모를 자랑하게 된다.
그런데 1911년 그녀는 두 가지 일로 인해 그녀의 인생일대의 전화기를 맞는다. 하나는, 칼 에른스트 오스트하우스(Karl Ernst Osthaus)를 방문했을 때 그의 현대미술품들을 보고 놀란 것이다. 그를 단지 자선사업가로만 알고 있었는데 그가 자신의 박물관을 가지고 그가 소유한 현대미술품들을 전시하여 주민들에게 공개함으로써 많은 지역문화발전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에 놀랐던 것이다. 이때부터 그녀도 박물관을 마련하고 자신의 미술품들을 일반에게 공개하고자 하는 마음을 다지게 된다.
두 번째는,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1911년 9월 그녀에게 악성종양이 발견되어 수술을 받아야 하는 일이 발생한다. 죽음에 직면한 그녀는 자신이 만일 다시 살아난다면 나머지 인생을 그녀의 문화예술발전에 전력할 것을 스스로 다짐한다. 수술은 다행히 성공적으로 끝나고 그녀는 활동을 재개하면서 그녀의 꿈을 위해 달려간다.
1912년 어느 봄날, 그녀는 여느 때와 똑같이 파리에서 15점의 유화작품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간다. 남들이 파리에서 명품을 사들이며 쇼핑을 즐길 때 그녀는 언제나 눈을 반짝이며 명화를 찾아 나선다. 이번에도 그녀는 별로 유명하지 않은 작가들을 포함해 올리브 그로브나 죠셉 미셀의 초상화 같은 것들을 찾아내고 모두 사들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그녀가 사들인 작품 중에 그녀를 흥분시키는 작품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반 고흐의 ‘씨 뿌리는 사람’과 4송이의 ‘해바라기’가 있었다. 하마터면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갈뻔한 고흐의 작품들을 그녀가 찾아내어 고이 모셔온 것이다. 이때부터 그녀는 고흐에 심취하게 된다. 아니 고흐를 사랑하게 된 것이다.
그녀의 진가는 사실 그녀가 반 고흐의 작품을 거두워 들이기 시작하면서 나타났다. 그녀는 반 고흐(1853-1890)가 죽은 뒤에 그의 미술적 가치를 제일 먼저 알아본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그만큼 그녀는 반 고흐를 아꼈고 누구보다 그를 사랑했다. 고흐의 그림이 경매시장에 나온다는 소문이 나돌기만 하면 어느새 그녀가 달려가 사들일 정도로 그녀는 마치 고흐의 후원자이자 보호자처럼 행동했다. 그 결과 고흐의 작품 유화 90점과 185점의 드로잉 작품을 소장하게 된다.
그녀는 미술이론에도 조예가 깊었는데, “근대 미술의 운동에는 두 가지 흐름 즉 'Realism'과 'Idealism'이 있다고 하면서 반 고흐는 그 두 흐름을 뛰어넘어선 위대한 인간성(great and new humanity)을 지닌 화가”라고 치켜세운다. 그녀가 고흐를 사랑한 이유가 바로 고흐가 지닌 인간적인 가치가 무엇보다 크기 때문이라는 말은 오히려 그녀의 매력을 은연중에 드러내는 말이기도 하다. 단순히 고가의 미술품을 수집하는 수집가가 아니라 인간적인 가치와 매력을 수집하는 사람이라는 말이 더 잘 어울리는 헬레네 크뢸러 뮐러. 그녀의 존재가 그저 아름다울 따름이다.
참고로, 크뢸러 뮐러 부부가 구입한 빈센트 반 고흐의 작품들은, 1908년부터 1929년까지 20여 년간 251점을 구입한다. 그리고 구입 작품을 위해 지불한 금액은 모두 584,781프랑(* 여기에 3만 마르크를 추가)이다. 251점의 작품에는 유화작품을 비롯해 뎃상과 스케취 작품 등이 모두 포함된 것인데, 크뢸러 뮐러 박물관 홈페이지에서 반 고흐 작품을 검색하면 대부분의 드로잉 작품들을 볼 수 있다.
드디어 1913년부터 그녀는 그동안 모아놓은 미술품들을 일반에게 공개를 하기 시작한다. 작품 전시는 다름 아닌 그녀의 남편 회사가 있는 헤이그 사무실 빌딩의 공간을 활용해 만든 갤러리였다. 그녀는 남편 사무실 빌딩의 일부를 박물관으로 꾸미고 본격적으로 공개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녀가 공개를 시작한 작품들은 처음에 그녀가 적극 후원했던 몬드리안(Mondriaan: 1872-1944)과 바르트 반 데어 렉크(Bart van der Leck: 1876-1958)를 포함해 피카소(Picasso)와 그리스(Gris), 그리고 시그낙(Signak) 등 현대작가들의 작품들이 주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그녀의 보석 같은 작품 즉, 반 고흐의 작품들도 함께 했다. 그녀의 작품들은 단지 현대작품에 국한한 것만이 아니었다. 그녀의 작품들은 사실 수세기에 걸쳐 탄생한 것들인데, 16세기부터 활약한 네덜란드 초기 화가들부터 20세기 화가들까지 다양한 세대를 아우르고 있다.
그녀가 이처럼 미술품 공개에 대한 집착을 가지게 된 것은, 사실 네 아이의 엄마로서 그리고 네덜란드 사업가인 남편의 아내로서 그녀가 무슨 일을 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라는 스스로의 정체성 확립과 관련된 문제의식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특히 그녀는 독일 출신이었기 때문에 지난 1차 대전 기간 동안 독일군이 네덜란드에 대해 한 일에 대해 스스로 부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던 터였다.
더구나 그녀는 1차 대전이 진행되는 동안 간호원으로 전장에 참여해 많은 병사들을 보호하고 간호를 했다. 그러다 보니 그녀는 자신이 독일인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무엇으로든지 네덜란드에 보상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았다. 더구나 네덜란드는 남편의 고향이자 조국이었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 크뢸러 뮐러 부부의 모습(왼쪽)과 헬레네를 기리기 위해 전시실 입구에 그녀의 사진과 이름을 적어 넣었다.(헬레네의 애장품이란 글귀가 눈에 띈다.)
그녀가 미술품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일에 나서게 된 것도 바로 그런 연유에서 비롯된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래서 네덜란드에 대한 나름의 속죄의 방법으로 그녀가 미술품 수집과 화가들 뒷바라지를 하려 한 것이다. 그녀가 뒷바라지를 한 대표적인 화가들은 몬드리안과 바르트 반 데어 렉크 같은 네덜란드의 근대 화가들이었다.
특히 바르트 반 데어 렉크 같은 경우에는 헬레네가 그를 후원하기 위해 그의 작품 대부분을 사들여 줌으로써 그가 미술작업을 하는데 금전적인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미술활동을 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반면에 그의 작품 400여 점을 그녀가 사버리는 바람에 오히려 대외적으로는 그의 작품이 알려지지 않아 반 데어 렉크의 대외적인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아무튼 그녀가 남편의 사무실 빌딩에 갤러리를 마련하고 작품 공개를 했지만 여전히 작품 전시를 위한 전용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따라서 그녀는 박물관을 세울 계획을 구체화하고 이를 실천하게 된다. 이미 1910년부터 시작한 그녀의 미술관 건축계획은 당시 벨기에의 유명 건축가 앙리 데 벨데에게 의뢰해 설계 디자인을 준비한다. 이를 바탕으로 1920년도부터 박물관 공사를 시작하는데, 곧바로 전 세계적으로 경제공황이 닥치게 되자 하는 수 없이 공사를 중단하게 된다. 더구나 이때 남편의 사업도 경제 공항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는다. 어쩔 수 없이 그녀의 미술관 건립은 포기를 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이들 부부는 1928년도에 크뢸러 뮐러 재단을 만들고 그동안 모아 온 미술품 12,000여 점을 1935년 네덜란드 정부에 기증한다. 그 대가로 네덜란드 정부는 1938년 그녀의 이름을 딴 공공 미술관을 짓고 그녀를 초대 박물관 관장으로 임명한다. 그녀가 그렇게 원하던 박물관이 드디어 개원을 하게 되고 그녀의 꿈이 이루어지는 순간이다. 그녀가 죽기 1년 전의 일이었다.
그러나 박물관 개원 1년 만에 헬레네는 안타깝게도 생을 마감한다. 그녀 남편도 2년 뒤 헬레네 곁으로 갔다. 두 사람이 처음에 ‘그레이트 뮤지엄’을 세우려던 곳은 지금의 박물관이 있는 곳에서 조금 더 숲 속으로 들어간 곳에 있는 ‘프렌치 힐’이라는 곳이었다. 바로 그곳에 두 사람이 함께 묻혀있다.
그 후 이 거대한 국립공원 부지는 계속 멋진 미술관으로 개조되고 보완되기에 이른다. 네덜란드 정부는 계속해서 여러 작가들을 박물관 확장 사업에 참여케 함으로써 오늘의 박물관 모습을 갖추게 된다. 박물관에는 단지 실내 전시공간만 있는 게 아니다. 옥외에도 멋진 조각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조각공원은 1961년도부터 꾸미기 시작했다.
예술을 사랑하고 지속적으로 예술에 헌신한 한 여성의 불굴의 헌신과 노력이 있었기에 이처럼 멋진 미술관과 국립공원이 탄생할 수 있었다는 것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만한 일일 것이다.
* 박물관에 전시중인 반 고흐를 비롯한 주요 작가들의 작품들은 별첨으로 소개하도록 한다.
* 이곳에 실린 사진들은 모두 필자가 허가를 받아 직접 촬영한 것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