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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연 Jun 2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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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행 환승 열차에 탑승하셨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대학을 선택하는 데 있어서 나만의 중요 포인트는 단순했다. 대학을 핑계로 제주도를 벗어나는 것이었고 그곳은 서울과 조금이라도 가까운 곳이어야 했다. 서울이 아닌 서울과 가까운 곳을 생각하게 된 이유는 내 성적이 서울까지 데려다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과 선택은 몇 군데를 두고 고민했지만 웬만한 대학에는 다 있는 평범한 과였기 때문에 선택 범위가 넓었다. 현실적으로 내가 갈 수 있는 대학을 찾아보기로 했다. 전국 지도를 보면서 서울에서부터 차근차근 내려오기 시작했다. 서울 제외 경기, 인천, 충북, 대전, 충남, 딱 거기까지였다. 더 이상 멀어지면 안 될 것 같았다. 내 기준에 부합하는 '서울과 가까운'은 여기까지였다. 나는 그때 처음 제대로 전국 팔도가 어디에 있는지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나는 내 성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걸 뒤엎을 비장의 무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안 되는 건 깔끔하게 포기했다. 그렇다고 현실에 안주하는 건 싫었다. 그래서 타지행을 결정하게 된 것이다. 19살에 나는 긍정의 힘이 넘쳐났다. 힘을 주는 노래 가사나 자기 계발서에 쓰여 있는 모든 말들을 흡수하기 딱 좋은 상태였다. 지금은 위로가 되지 않는 '너라면 충분히 할 수 있어!', '너에겐 기회가 많아.', '자신감을 가져!' 등의 문장들은 내 몸 구석구석 박혀 있었다. 그리하여 흔히 말하는 좋은 대학에 가야 하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져야 잘 살 거라는 건 세상의 편견일 뿐 나와는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보다 좋아하는 게 우선이었고 그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 좋아하는 걸 위해서 서울에 가고 싶었고 대학이 그 도구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군데 대학을 추렸고 그중에서 입시원서를 넣었다. 대학의 면모를 샅샅이 훑어본 건 아니었고 그저 내가 정한 범위 내에서 갈 수 있느냐, 없느냐가 중요했다. 어차피 나에게 초면인 대학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원서를 넣을 때 조금 더 살펴봤던 부분은 수능 비중이 적고 수시 비율이 높은 대학을 찾는 것이었다. 공부를 나름 열심히 하긴 했지만 잘하지 않았기 때문에 수능을 잘 볼 자신은 없었다. 즉, 내신 공부는 어느 정도 노력은 했으나 수능은 그만큼 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는 공부하는 법을 잘 몰라서 거기에 머물렀던 것 같다. 하지만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변하는 건 없을 것이다.


수시 원서를 넣을 때 가장 솔깃했던 입시 전형이 있었다. 지금의 내 모교가 된 이곳은 내신 100% 전형이었다. 면접도, 최저등급도 필요 없었고 오로지 내신 성적만 보고 입학 여부를 결정해 주는 곳이었다. 이곳에 합격 전화를 받았을 때 타 대학 면접이 잡혀 있었는데 나는 쿨하게 포기했다. 포기한 이유는 그 대학이  부산에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이곳은 내가 생각한 '서울과 가까운' 곳임에 틀림없었다. 나는 입학 확정이 된 순간 기분이 좋았다. 어쩌면 대학에 가는 것보다 그 지역에 가는 걸 더 좋아했을지도 모른다.


잠깐 벗어난 얘기를 하자면, 내 주변 친구들 중에는 나와는 다르게 멋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공부를 잘하고 성실하며 모든 선생님의 신뢰를 받는 친구, 공부와 별개로 똑똑한 친구, 공부에 진심으로 노력하는 친구 등 멋있는 친구들이 많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친구들과 같이 있다고 해서 내가 전혀 작아 보이지 않았다. 그 친구들 틈에서 주눅 들지 않았다. 친구들과 다를 뿐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좋아하는 일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고 나름의 꿈이 있었다. 10년 뒤 남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도 멋지게 변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이 나를 바다 건너 어딘가로 가게 했다.




그리고 스무 살이 되던 해, 나는 청주대학교 인문학부 학생이 되었다. 처음 청주로 가던 날이 떠오른다. 막상 혼자서 타지에 간다고 생각하니 걱정되는 마음도 있었고 19년 동안 이 작은 동네 조차 벗어나 본 적이 없는 내가 섬을 뒤로한 채 비행기에 탄 것이다. 그때만 해도 나는 낯가림이 정말 심했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는 법을 몰랐다.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도 컸다. 하지만 아닌 척 가면을 쓰고 청주에 도착했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 입학 전 동기들과 교류하는 수단은 네이트온이었다. 덕분에 신입생 OT 때도 혼자는 아니었다. 그렇게 알게 된 친구 중 한 명이 나와 같은 기숙사에 머물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친구A였다. 우리 학교 기숙사가 2인실이지만 아파트식 구조여서 집에 들어가면 방이 3개가 있고 그 방을 2명씩 쓰는 구조였다. 그 6명이서 화장실과 거실을 나눠 썼다. A는 나와 같은 방을 쓰는 건 아니었고 옆방이었다. 그래도 한 집에 사는 거니 같은 방이나 마찬가지였다. A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네이트온에 있는 몇몇 아이들과 별다를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저 09학번 학부생 중 한 명일 거라고 생각했다.


처음 기숙사에 들어가던 날, 미리 부친 짐을 혼자서 옮기고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족이 함께 와서 짐 정리도 도와주고 했지만 나는 그럴 형편이 되지 않아 혼자서 하고 있었다. 박스를 엘리베이터에 태우고 문 앞까지 왔는데 번호키가 익숙하지 않았던 나는 문 앞에서 몇 분을 헤매고 있었다. 그때 옆집 문 앞에 서 있던 분이 도와줘서 짐 나르기가 수월해졌다. 그분이 바로 친구B다. B는 내 옆방에 짐을 푼 한 학년 선배 언니였다.


방 구성원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세 개의 방 a, b, c가 있는데 a방에는 우리 과와 거리가 먼 2학년 선배의 방이었고 나머지 b, c방에는 나와 같은 학부에 속한 아이들이 같이 쓰게 되었다. 1학년 때는 3개의 전공 중 원하는 과목을 골라서 수강하고 2학년 때부터 진짜 전공이 생기는 학부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b, c방에 속한 우리는 같은 과인 듯 아닌 듯한 그런 관계의 아이들이었다.


기숙사 마지막 입소날 드디어 404호에 6명이 전부 모였다. 정확히 기억은 나지 않지만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A와 더 빨리 가까워졌다. 뭐를 우리가 그렇게 가깝도록 만든지는 모를 일이다. 방학 때 제주 집에 내려가서 친구들을 만나면 으레 자기 대학생활 얘기들을 쏟아냈다. 내 얘기를 들은 친구들은 하나같이 놀랐다. 네가 그렇게 적응을 빨리, 잘할 줄 몰랐다는 반응이었다. 나도 그랬다. 그도 그럴 것이 내 성격으론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나는 학기 초부터 A를 비롯해서 친구들이 많았는데 (단 1학년 한정이었고 2학년 때부터는 자연스레 뿔뿔이 흩어졌다) 친구를 많이 사귄 것뿐만 아니라 빠른 시간 내에 가까워졌고 그렇게 그들과 대학생활을 즐겼다. 첫 방학을 하고 집에 머물러 있을 땐 방학이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만큼 청주에서의 생활이 재밌었다. 1학년 때 친구가 급속도로 불어난 이유는 거미줄식 친구 사귀기였다. 1학년 때는 학부제라 공통되게 수업을 들었지만 입학 때부터 본인이 원하는 과는 정해져 있어서 과 활동을 각자 달리 했다. A와 나는 다른 전공을 보고 이 대학에 왔기 때문에 따로 또 같이 대학생활을 한 셈이다. 덕분에 A의 친구인 친구C를 만나게 되었다. C는 기숙사 생활을 하진 않았지만 기숙사에 있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같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이렇게 나는 단숨에 많은 친구들을 사귈 수 있게 되었다. 모든 아이들이 그리 오래 가진 못했지만 그때를 떠올리면 누가 뭐라고 해도 내가 제일 재밌는 대학생활을 한 것만 같았다.


A는 나와 정반대의 사람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과도 잘 어울렸고 대내외적으로도 활달한 친구였다. 나는 그런 친구를 부러워하면서도 가까운 친구가 된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기도 했다. 각자 전공 외에 같이 들을 있는 수업은 최대한 같이 들었다. 시간이 맞으면 점심도 같이 먹었고 커피도 마시러 다녔다. 그리고 무엇보다 재밌었던 건 내가 그 친구랑 있으면 엄청난 자신감이 생긴다는 것이었다. 학교 내에서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까불면서 다녔다. 내가 까불 수 있는 최대한도로 까불고 다녔던 시기였다. 우스운 표정으로 사진을 찍고 큰소리로 웃고 떠들었다. 기숙사에는 배달 음식이 금지였지만 몰래 자주 시켜먹었고 그 스릴을 즐기기도 했다. 기숙사 문이 닫히기 전까지 같이 술을 마시기도 했고 기숙사 점호가 없는 날에는 노래방에 가서 놀 때까지 놀다 날이 밝아서야 기숙사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여기에는 대부분 C도 함께 했다. 우리 셋은 죽이 잘 맞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이 친구에게 의지를 많이 한다는 것을 알았다. 자연스레 내 힘듦을 털어놨고 A는 잘 들어줬다. A 또한 나에게  많은 이야기를 털어놨다. 대학생활 내내 많이 울고 웃기도 하면서 시험과 과제의 고통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그것을 또 이겨내는 것 또한 A와 같이 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는 내 집안 사정까지 털어놓을 정도가 되었다. '나 얘기해도 돼?' 하고 허락받은 게 아니라 그냥 자연스럽게 그런 이야기가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A는 내가 어떤 이야기를 해도 잘 들어줬다.


A를 알게 되면서 가장 많이 변한 것이 있다면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줄 알게 되었다. 이 친구를 만나기 전 19년 동안 자존감이 거의 없는 상태였다. 나도 어느 정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걸 알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도 어쩌면 괜찮은 사람일지도 몰라'부터 시작해서 '나 정도면 앞으로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어'라는 생각까지 하게 해 준 친구였다. 서로 오글거리는 말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다. 진지한 얘기보다는 장난스러운 대화가 거의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그냥 이 친구와 있으면 나도 뭔가 할 줄 아는 사람처럼 보였고 그렇게 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겼다.

언제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네가 뭐 어때서~'라는 말을 이 친구에게서 들은 적이 있다. 아마 그게 시작이었던 것 같다. 어쩌면 그 얘기를 듣기 전부터일지도 모르겠다. 뭐가 됐든 A는 나를 180도 바뀌게 해 준 친구임에 틀림없다.




B는 진짜 착한 사람이다. 내가 본 B는 대체적으로 모난 곳이 없는 사람이며, 쓸데없는 곳에 화를 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처음 내가 기숙사에 들어갔을 때 집 문을 열어준 것뿐만 아니라 말을 걸어준 사람이기도 하다. 그냥 하는 인사 같은 거였겠지만 그래도 친절했다. 기숙사를 4년 내내 같이 쓰는 게 아니기 때문에 어쩌면 우리는 자연스레 멀어질 수 있었다. 학년도 달랐고 과도 겹칠 일이 없었다. 아마 우리가 이렇게 오랜 시간 같이 나이를 먹어갈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B가 나를 귀찮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좋고 싫음이 분명해서 싫은 건 딱 잘라냈고 좋은 건 좋은 만큼 티를 많이 냈던 것 같다. 그때에 나는 B에게  엄청 치댔다. 근데 B는 단 한 번도 귀찮은 티를 내지 않았다. B 앞에서 서슴없이 많이 까불기도 했다. 기숙사가 아닌 밖에서 만날 땐 한껏 반가움을 티 냈다.


내가 조금 빨리 태어나서 B를 만났다면 B에게서 A만큼의 진득한 감정을 느꼈을 것이다. 그리고 B 덕에 친구D를 만날 수 있었다. D는 B와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문제 될 건 없었다. 다르면 다른 대로 우리 관계 안에 빈 곳을 찾아 끼워 맞추고 있었다. 나이 경계를 허물고 우리는 진짜 친구처럼 가까워질 수 있었다. 친구의 친구, 그리고 또 만난 친구들과 함께 시끌벅적한 404호가 탄생했다.  




기숙사 내에 있으면 항상 재밌는 일들만 있었다. 어이없는 사고도 많이 쳤다. 어렸을 때 생각한 대학생의 모습과는 정반대로 흘러갔지만 대학생이 된 나는 그저 법적으로 할 수 있는 게 조금 더 많아진 '학생'일뿐이었다. 이처럼 유쾌한 사람들을 만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란 건 금방 알 수 있었다. 기숙사 배정이 매 학기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단 한 학기만 404호라는 테두리 안에 있었고 다음 학기부터는 자연스레 흩어졌다. 그 이후에 있었던 기숙사 생활은 그저 그랬다. 단순히 내가 잠을 자고 쉴 수 있는 곳을 제공해주는 곳 그것뿐이었다. 그 이후에는 내가 몇 호에 살았는지 누구와 함께 방을 썼는지 자세히 기억 나지 않는다. 그 후 기숙사 생활은 그렇게 즐겁지도 않았고 불편하지도 않은 채 지나갔다.


내가 404호를 기억하는 이유는 4명의 친구들에게 있었다. 대학생활에서 약 4개월의 시간은 길다면 길 수도 있지만 짧기도 하다. 그 4개월이 있어서 4년을 잘 버틸 수 있었다. 내가 만약 인문학부에 입학하지 않았다면, 2인실 기숙사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지금 나는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까.


지금 이 글을 보면 엄청 특별한 대학생활을 했다고 착각할 수도 있겠지만 그건 아니었다. 별 건 없었다. 그냥 수업 듣고 나면 만날 친구가 있었고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실 친구가 있었다. 시험기간이 되면 도서관에서 기숙사에서 밤새 불 켜고 같이 공부할 친구가 있었다. 필요하거나 도움이 필요한 일에 손을 뻗을 사람이 있었던 것뿐이다. 4년 동안 들은 수업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는데 4년 동안 다닌 밥집, 카페, 기숙사 풍경 이런 것들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이 난다.


네 명의 친구 외에도 대학생활 동안 거쳐간 많은 사람들이 있다. 서로 미움을 산 끝에 멀어진 경우도 있었고 자연스럽게 멀어진 경우도 있다. 아마 지금 다시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다 해도 그냥 지나쳐 버릴 것 같다. 그렇지만 그 사람들은 나에게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을 사람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셀 수 없이 무수히 많은 공기를 곁에 두고 사는 것처럼, 그 공기가 어디로 오고 갔는지도 모르게 되는 것처럼 4년 동안 만난 사람들이 나에게 그러했다. 그때는 꼭 필요한 존재들이었고 누구 하나 없었더라면 1g 정도는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만약 나에게 다시 한번 대학을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온다면, 내 성적과 무관하게 아무 대학에 갈 수 있게 해 준다고 해도 나는 다시 이곳을 선택할 거라 확신할 수 있다.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다. 남들 다 가고 싶어 하는 서울대, 뭐 의대 같이 내가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곳에 가게 해준다면 그렇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아마 내 인생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이 되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의 시간보다 더 나은 날들을 보냈을 거라는 확신은 들지 않는다.


청주에서 단 4년, 그 이상 지내본 적은 없다. 졸업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지만 4년이란 시간은 내가 용기 낼 수 있는 힘을 길러주었다. 스무 살에 서울로 가는 직통열차에 오르진 못했지만 이렇게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인생에 내 편이 있다는 것, 그리고 오랜 시간 연을 이어간다는 건 나 혼자만 잘해서 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최선을 다해서 상대에게 좋은 마음을 표현하고 마음을 주더라도 상대가 받아들일 공간이 부족하면 튕겨져 나올 수밖에 없다. 굳이 서로의 잘못으로 인해 멀어지지 않더라도, 시간이 지나고 또 다른 환경 속에서 무수히 많은 사람들과 부딪쳐 살다 보면 내가 이전에 만났던 사람들 없이도 잘 살아가고 있는 모습이 자연스러워지기도 한다. 그럼에도 나는 404호에서 만난 사람들을 단 한 순간도 잊어본 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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