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국가는 외세 침략과 자연재해의 위협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여 국민들이 영속적 삶을 살 수 있도록 구성된 공동체입니다. 이를 위해 정치, 경제, 국방 등의 정책을 수행하여 국민의 안정된 삶을 보장합니다. 국민의 안정된 삶은 다시 국가의 존속 기반이 되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중 교육은 여러 정책을 수행하거나 사회 시스템이 움직이는데 필요한 인적 자원을 길러내는 도구입니다. 국가는 고급 인력 양성에 힘을 씀으로써 여하 분야들이 타 국가 대비 뒤처지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구체적으로 국제 정세나 산업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인재를 훈련시키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고 지원합니다. 한편으로는 내부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부의 불평등이나 과도한 교육비 투입 현상 등의 사회 부작용을 방지합니다.
누군가가 뛰어난 능력이 있음에도 경제 형편이 어려워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는 국가적 인재 손실이나, 잘못된 사회 분위기로 인해 사용하지도 않을 지식과 기술을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배우는 사회적 자원 손실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정적, 제도적 지원을 통해 재능 있는 사람들이 적재적소에 자리하여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합니다. 경영적 관점으로 보면 국가의 인적 자원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되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는 다양한 내부 집단으로 이루어지고, 다수의 외부 집단과 소통하는 복합 유기체입니다. 국가 내부에는 정당, 지역, 세대, 성별, 경제력 등 유형무형의 이익 집단으로 무수히 나누어지고, 각 집단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목소리를 내며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외부적으로는 국제 사회의 일원이자 글로벌 경제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합니다. 국제 정세와 경제 트렌드를 참고하여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여러 정책을 결정하고 수행합니다.
교육 정책도 이런 맥락 안에서 결정됩니다.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자립형 사립고 설립을 통해 경제적으로 유복한 계층에게 대학 입학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거나, 무상급식 여부를 논의하는 것들은 내부 집단 간 이익을 대변하는 경쟁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부와 소통하는 유기체로서의 국가는 세계적으로 산업의 흐름이 문·이과 융합 기술을 통한 사업이 성공하자, 이를 반영키 위해 통합 교과형 교육 커리큘럼을 개발하는 정책을 내놓는 예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단순 암기식 학습에서 탈피하고 창의적으로 생각하며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 입학 사정관 제도나 논술 면접 등의 제도들을 강화한 것도 그 맥락에서 진행된 제도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런 제도들이 국가적 시야에서 분석되고 현장의 필요에 맞추어 마련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최근 십여 년이 넘는 동안 손바닥 뒤집듯이 교육 제도와 정책을 바꾸었고 청소년들이 실험실 모르모트처럼 희생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거시적으로 방향을 제시하는 ‘정책 제시자’와 정책 컨셉을 바탕으로 현장 실무자들의 업무 지침을 설계하는 ‘제도 기획자’로 나누어 각자의 역할과 현 상태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정책 제시자의 문제
정책 제시자는 큰 틀에서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교육부 장관이 맡을 수도 있으나, 역할의 핵심은 교육의 국가·사회적 의미를 잘 이해하고 교육 본질에 대한 소신을 지켜 사회 공동체가 영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 정책 및 관련 분야 제도들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현시대 상황 및 예상되는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시야도 필요합니다. 교육 정책의 효과는 10년, 20년 뒤에 나타나기 때문에 한 발 앞선 선택으로 미래에 필요한 인재를 성장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역량을 바탕으로 교육의 방향과 방법을 바르게 정의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정책 제시자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최근 내놓은 일련의 정책들은 정책 제시자의 덕목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내어놓은 교육 정책마다 특정 계층의 이익만을 대변하여 사회 분란을 일으키고, 그나마 제시한 정책도 꾸준히 실행하지 못하고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그들이 내어 놓는 교육 정책들마다 목적의 진정성과 일관성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매년 치솟기만 하는 대학 등록금 문제, 일반 고등학교를 고사시킨 자립형 특수 고등학교의 확대 정책들은 세대 간, 자본 계층 간 사회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한국 교육에 기대와 신뢰를 접고 외국으로 이민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꼭 정책 제시자 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뒤에 설명할 제도 기획자의 문제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상황 파악에 큰 부분을 놓치게 되는데, 대개 문제가 벌어지면 힘없는 하위 공무원들이 책임의 표적이 되고 진짜 책임을 가진 정책 제시자는 뒤에 숨은 채로 드러나지 않은 채 온전히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제도를 손 본다고 매번 하위 공무원들을 문책하고 갈아치우지만, 정작 가장 근본 원인인 정책 제시자는 그대로이기에 늘 같은 상황이 재현됩니다. 교육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제도 시행의 과정과 결과가 올바르게 진행되는지 최종 확인하고 교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정책 제시자뿐이므로 그에게 가장 큰 역할 책임을 물어야 근본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도 기획자의 문제
제도 기획자는 정책 제시자가 목표한 정책이 현실화되도록 관련 분야의 법적, 행정적 제도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사람입니다. 보통 교육 관련 정부 부처나 관련 법안을 발의하는 국회의원들이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들에게는 교육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제도를 수행할 주체들(기업, 대학, 가정)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여 현실과 괴리되지 않는 제도를 마련하고 추진하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물론 정책 제시자에게 요구되는 교육의 국가·사회적 의미와 주관을 갖고 있는 것도 기본입니다.
그러나 최근 입학 사정관 제도의 진행 과정이나 체벌 금지 제도 시행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을 대표적으로 살펴보면, 현실과 괴리되지 않는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 점에 있어 매우 부족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입학 사정관 제도 자체는 평가 대상의 학생이 머리 속에 들어있는 지식을 실천으로 행동하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인재인지를 파악하는 매우 효용적인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의 교외 활동들을 살펴보고,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그런 활동을 해왔는지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학생의 진정성과 실천력을 평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제도는 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을 참고하여 정착시킨 것으로, 한국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한국 사회의 대학 내 연고주의 성향을 불신하는 사회 풍토, 공교육(중·고등학교) 기관의 관련 제도 개선, 가정의 경제적 격차로 발생하는 부차적인 문제들을 간과한 것입니다. 오로지 제도의 형식만을 그대로 들여와 시행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교육 정책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학부모들은 정부를 믿지 못하여 직접 입시 공부를 하게 되는 웃지 못할 현상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유사 사례로 공교육 교권 붕괴 현상의 시초가 된 체벌금지 제도 시행도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참고 자료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입학 사정관 제도의 허상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사람 구실 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서, 대학 합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입학 사정관은 학생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입학 사정관의 역할이 큰 만큼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투명하고 공정하게 평가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하는데, 입학 사정관 채용에 불협화음이 보도되고 학생 사정 절차 과정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아 제도의 공평성을 의심케 하였습니다.
또한 학생들이 중·고등학교 공교육을 통해 입학 사정관 제도에 맞는 교육이 가능하도록 개편하는 부분도 미진하였습니다. 일선의 교사들에게는 기존 정시 입학 중심의 교육 과정을 그대로 준수토록 요구하면서, 학생 사정 절차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과 시스템에 대한 교육을 거의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교사들은 한정된 자원에 직면하였고 학생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줄 수 없었습니다.
학부모들은 답답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하여 사교육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민간 기업들이 국가 정책 변화에 따라 가장 민감하게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학부모들은 예전보다 더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할 수밖에 없었고, 부유한 집안에서는 체계적인 조언을 통해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형편이 어렵거나 자녀 교육 마인드가 부족한 학부모 가정에서는 적절한 준비를 할 수 없었고, 상대적으로 부유한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습니다.
입학 사정관 제도는 좋은 취지로 도입이 되었으나, 되려 대학 입시는 이전보다 더욱 복잡하게 꼬여버렸고 경제력에 의한 교육 기회 박탈을 초래하였습니다. 학부모들은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수십 가지가 넘는 대학별 입학 전형을 찾아보고, 매년 바뀌는 수험 기준들을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 교권 붕괴 현상을 촉발시킨 체벌금지 제도
체벌금지 제도는 학생의 신체적 체벌을 금지하고, 벌점 제도 같은 대체 페널티를 통해 학생의 부적절한 행동을 통제하자는 목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이는 청소년 인권 신장의 일환으로 제안된 것이었으며 이상적으로는 바람직한 방향의 시도라는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미국 외 유럽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를 참고하였으나 한국적 정서를 고려치 않은 졸속 시행으로 교권 붕괴 현상의 단초가 되어버렸습니다.
미국을 위시한 서양 사회의 정서는 개인의 행동에 대해 오롯이 개인에게 책임을 지도록 하는 개인주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도권 교육에서 추방당하더라도 대체 선택지가 다양한 사회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학생의 문제 행동에 대해 교사의 책임보다는 문제 행동을 일으킨 학생의 책임을 더 강조하게 되며 학생에게도 또 다른 기회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이 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였을 때 과감히 벌점을 주고 퇴학을 시키는 데 부담이 적으므로, 체벌이 아닌 벌점 시스템만으로도 학생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한국은 개인이 잘못 했더라도 공동체가 책임을 지는 집단주의 문화입니다. 한국적 정서에서는 학생의 잘못을 학생 고유의 책임으로만 탓하지 않고 그를 가르친 교사나 가정에게도 책임을 묻습니다. 게다가 학생은 제도권 교육에서 퇴출되는 순간 재기하기 힘든 사회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학생에게 벌점을 누적시켜 퇴학이나 전학을 시키기도 부담스럽기 때문에, 잘못에 대해 과감하게 벌점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통제 수단으로써 벌점 시스템은 유명무실해졌고, 힘을 잃은 교사들에게 일부 학생들은 극단적인 일탈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공교육의 현실 목표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성적을 얻는 곳으로 전락해버리자, 학생들은 학원이나 과외에서 지식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더 이상 교사의 말에 힘이 실리지 않았고 학생이나 학부모조차도 교사의 권위를 무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교사들의 직업 소명이 훼손되고 교실이 무너지기에 이른 것입니다.
정책 불투명성과 사회 불신
정책 제시자와 제도 기획자가 빚어낸 실패는 앞선 예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책 제시자의 진정성의 문제와 제도 기획자의 시행 전 충분치 못한 실정 조사로, 제도를 수행할 주체들(기업, 대학, 공교육, 가정)에게 현실적이지 않은 역할을 요구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역량의 부족으로 인한 실수가 아닌, 특정 세력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불순한 목적이 아니었는지도 의심케 합니다. 매 시행되는 정책마다 경제력과 정보력을 갖고 있는 계층만이 이득을 보는 결과를 가져왔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계층의 학생들은 점점 더 불리해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위를 파악하여 증명하고 바로 잡아야 할 위치에 있는 다른 정부 기관조차도 다른 정치적 사안으로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기에 해소할 길을 기대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지 교육 정책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문제로 확장해서 보아야 합니다. 한 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은 가장 어렵고도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정책이 나오더라도 그 진의를 의심하여 따르지 않을 것이므로, 설사 제대로 만들어진 정책일지라도 실패하거나 작동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소요케 할 것입니다.
일전에 외국어 고등학교 입학시험의 시험지를 유출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다 적발되어 처벌받은 학원이, 그 후 학부모들이 몰려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뉴스는 사회적 불신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입니다. 공정하고 투명해야 할 규칙이 실제로 작동되지 않고 오히려 부정과 편법을 저질러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믿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서로 믿지 못하니 편법 수단을 찾아내고, 다시 편법을 막기 위한 정책을 만드는 악순환은 동일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공동체의 기능이 마비된 심각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몸을 지키는 백혈구가 내 몸의 세포를 적으로 간주하여 공격하는 백혈병에 걸린 것과 같은 상황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본 글은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를 집필하기 전,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사회적 제언을 써본 내용의 글입니다. 시기상으로 1년 전 즈음에 작성된 글이므로 감안하시고 보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매일 혹은 이틀에 한 편씩 기 작성된 글을 게시할 예정이며, 약 30여 편 분량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의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본 글보다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바로가기 링크)의 글도 구독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