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
학령기의 자녀를 둔 부모들은 매년 바뀌는 교육과정과 대입 제도에 따라가느라 급급하고, 공교육에서 지원받기 어려운 대입 스펙을 쌓기 위한 사교육을 하느라 허리를 졸라매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대입만이 목표인 줄 세우기 경쟁으로 영혼 빠진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의 관련 연구에서 한국 청소년이 세계에서 가장 공부는 오래하지만 정서적으로는 가장 불행하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 낙오되면 재기할 가능성이 전무한 사회에서 자녀의 성공 여부는 곧 그 집안의 흥망을 의미합니다. 명문대 인기학과에 합격하는 것은 더 높은 확률의 성공을 보장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좋지 않은 대학에 합격하거나 대학을 나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사회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는 두려움이 더욱 학벌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몇 대를 걸쳐 먹고 살 재산을 쌓아놓지 않은 이상,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목을 맬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자녀를 명문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재력과 어머니의 정보력, 아버지의 무관심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가정의 자본력과 정보력이 학생의 미래를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이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 가진 집안의 아이들이 더 다양한 사교육을 받으며 고급 정보를 모아 명문대에 가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면 19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성장과 발전만을 부르짖으며 달려온 탓에 가족 공동체가 분열되었습니다. 부모들은 먹고살기 바쁜 시대에 가정과 자녀들을 돌볼 여유가 없었고, 이것이 두 세대를 거쳐오면서 부모의 역할 모델까지 퇴색되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제적 문제에 몰두하고 있으며, 자녀의 양육과 교육에 바른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실천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삶에 중심을 잡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으며, 남들이 하는 대로 그저 공부하고, 1등 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만이 인생 목표로 생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위에 적은 문제들은 일반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볼 수 있는 모습이고, 점차 심화되어 가는 경제 양극화 현상과 그에 따르는 교육 격차 문제는 새롭게 떠오르는 사회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이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남들과 차별화된 교육을 받아 부의 대물림이 되는 현상은 차치하고서라도,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저학년에 이르는 시기에 저소득층 가정의 교육 빈곤화 현상이야 말로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저학년의 시기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모든 학습의 기본이 되는 한글 공부가 완성되어야 하는 시기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때 형성된 학습 효능감과 자아 정체성은 이후 12년의 학습 성과와 평생의 인격에 크게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최근 모 신문사의 기획 기사를 살펴보면 한부모 가정 등의 저소득층 자녀들은 한글 쓰기를 배우지 못하고 초등학교 입학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국어 외 다른 과목을 배울 때에도 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읽거나 쓸 수 없기 때문에 현저히 학습 효율이 떨어지게 됩니다. 아이는 제때 배워야 할 학습 내용을 습득하지 못한 까닭에 다음 학년에 진학해서도 다른 학생들의 학습 내용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뒤늦게 한글 공부를 익혔다 하더라도 이미 뒤쳐진 성적은 복구하기가 어렵게 되고 아이의 학습 효능감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학습 효능감을 쉽게 설명하면, 수학 곱셈을 새롭게 배우는 상황을 가정했을 때 ‘내가 수학 곱셈 공부를 했을 때 그 내용을 완전히 습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수준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경험을 비추어 봤을 때 새로운 내용을 잘 습득해 왔다면 학습 효능감은 점점 높아지며 그렇지 못했다면 낮아지게 되는데, 이는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가짐과 실제 성과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의 하나입니다.
다행히도 초등학교 1학년 커리큘럼 중 한글 학습 시간을 대폭 늘려, 초등학교에서도 한글 학습을 할 수 있게끔 제도가 정비되었습니다만 전반적 사회 의식 -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다 떼어야 한다. - 이 바뀌지 않고서는 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할 것입니다.
학교 생활 면에서는 선생님이 내어준 숙제나 가져와야 할 준비물을 받아 적지 못하게 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자기애가 형성되고, 매사에 소극적인 성격이 되거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거나, 등교를 기피하고 결석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12년의 학창 시절 전반에 트라우마로 작용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도 그 사람의 성격에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논리에 의해 국민들의 교육 주권은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특정 분야의 소질을 가진 인재가 조기에 낙오됨으로써 해당 분야의 발전이 더디게 되는 것이고, 가정과 개인에게는 불행한 삶의 비극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더 양극화된다면 저소득층 교육 빈곤의 문제는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혼란의 시대에 가장 큰 피해자
국가, 기업, 대학, 공교육, 가정이 빚어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청년·청소년들일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성적만이 지상 과제인 수험생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매해 바뀌는 입시 정책에 따라 이리저리 내몰리는 모르모트가 되어야 했습니다. 대학에서는 성과 중심 대학 경영의 희생자가 되었고, 기업에서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지 않는 인재로 찬밥 신세가 되거나 소모품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유치원에 입학하면서부터 회사에 취직하기까지 늘 일렬로 줄을 서서 경쟁하고 평가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마 정년 퇴임을 할 때까지, 무덤 속에 들어갈 때마저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1등을 하면 누군가는 나머지가 되고, 어느 누구는 꼴등을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1등을 한 사람도 무작정 1등 만을 바라보고 달리다가 잃어버린 삶의 여유에 공허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나 늘 뒤쳐져있다는 생각으로 부정적인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모두가 모두에 대해 경쟁하는 이 사회에선 누구나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경쟁 시스템이 나쁘니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쟁을 통해 의욕이 생기고 사람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낸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기도 합니다. 진짜 문제는 어느 한 분야(학교 성적, 대학 간판 등)만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해버리는, 다양성과 포용성이 없는 사회에서의 경쟁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느 한 분야의 경쟁에서 밀려 낙오했다 하더라도 다른 다양한 분야에서 다시 경쟁할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학교, 직장, 사회에서 획일화된 기준으로만 우리의 모든 것을 평가하고 값을 매깁니다. 몇몇의 상위 등수가 아닌 나머지 사람들은 늘 그 아래 언저리에 존재하고 항상 못났다는 평가를 받고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탈출구도 없고 평생을 그렇게 자신을 부정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며 회피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청년·청소년들은 획일화된 기준으로 평가받고 경쟁하는, 삭막하고 메마른 시대에 태어났고, 배웠고, 살아가고 있는 가장 큰 피해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청년·청소년들에게 혼란스러운 이중 가치를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회사에서는 상명하복의 문화를 강요받으면서, 왜 창의적이지 못한 인재냐고 탓을 합니다. 사회에서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이야기를 들으면서 열정 페이를 요구합니다. 돈이 최고라고 부르짖는 사회에서 돈을 추구하면 속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 사회가 염증이 나서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사회 부적응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국가와 사회는 청소년들을 그렇게 교육시키고서는 왜 그렇게 되었냐고 핀잔하였습니다. 일부 극소수 성공한 청년 사업가의 성공담을 내세우면서 너는 왜 그렇게 되지 못하였냐고 탓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청년·청소년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현 사회가 더 이상 나아질 도리가 없을 것이라는 절망입니다. 부자도 자식이 속을 썩이면 늘 전전긍긍하며 살고 가난뱅이라도 자식이 번듯하게 잘 크면 마음 든든한 것처럼, 사람은 미래의 희망과 기대가 있다면 현재의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청년·청소년들은 지금의 힘든 상황을 희망 없이 견디고만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상황이 나아질지도 모르고, 알고 있다 하더라도 힘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무엇을 바꾸어 볼 의지마저도 사라진 세대가 될지 모릅니다.
*성공한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후에 포장되어 평범한 사람을 망친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 단편 시집으로 유명한 하상욱 씨의 시 내용 중 하나입니다. 참으로 촌철살인 같은 문구인 것 같아서 가져와보았습니다.
사람들은 ‘OO처럼 투자해서 부자 되기’, ‘OO처럼 공부하면 서울대 간다.’, ‘성공한 벤처 사업가 OO 씨의 생활습관’ 같은 류의 책을 보며 자신도 생각을 고치고 생활 습관을 거쳐서 성공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성공한 누구처럼 하루에 몇 시간을 자고, 끊임없이 메모를 하며, 강박적으로 사람을 만나러 다닙니다. 그 결과는 점점 제 자리에 맴돌거나 자기가 바라는 성공에서 멀어져 가는 자신이 남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나타나는 행동의 이면에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만들겠다는 의식보다는 자신의 부정성을 고치려고 하는 심리가 자리 잡게 되어, 더욱 집착하고 방어적으로 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의 인생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친다는 담론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공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만의 장점과 단점을 적절히 조화시킨 방법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와 전혀 반대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성공한 사람의 방법을 따르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꼼꼼하게 사물을 인지하고 챙기는 능력과 큰 틀에서 넓게 보고 가능성을 두루 보는 능력은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기제입니다. 어느 하나가 뛰어나면 어느 하나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속성입니다. 그래서 다이어리를 분 단위로 나누어가며 쓰는 사람, 시간을 들여 자기 주변을 정리하는 습관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그들이 큰 틀에서 넓게 보는 능력이 출중하기에 반대급부로 부족한 꼼꼼하게 챙기는 기능을 보완하여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특성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그 방법만을 따라 합니다. 이미 잘 기능할 수 있는 능력임에도 시간과 노력을 더 투자하고, 반대로 부족한 영역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입니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미화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그때 그 사실을 정보 그대로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주관과 관점에 따라 재해석되어 저장되고 인출되기 때문입니다. 설사 자신은 그렇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미화하여 꾸며주는 집단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대상은 늘 무결하고 아름답고 완벽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사람의 과거 행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었다 생각하고 미화해줍니다.
이것은 현실의 사람이 실행 불가능한 무결하고 아름답고 완벽한 행동과 마음을 요구하게 됩니다. 사람이기에 가질 수 있는 고뇌나 단점은 사라지고 겉으로만 보이는 허상의 것들만 남습니다. 결국 성공한 사람의 추종자들은 실현 불가능한 미션을 받아 자신도 따라 하기 위해 애쓰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실패할 뿐입니다.
셋째, 성공만을 바라보고 주목하는 사회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에만 주목합니다. 경쟁이 기본 속성인 사회에서 성공과 실패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하는 법입니다. 성공한 청년 사업가 한 명을 배출하기 위해 수백의 청년 사업가들이 실패했지만, 누구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너도 열심히 한다면 성공할 수 있어.’라는 말로 1%의 성공 가능성만을 이야기할 뿐, 나머지 99%의 실패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이 평범한 사람이므로 나머지 99%의 실패 가능성에 더 가까울 뿐입니다. 각자가 분야를 달리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본 글은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를 집필하기 전,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사회적 제언을 써본 내용의 글입니다. 시기상으로 1년 전 즈음에 작성된 글이므로 감안하시고 보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매일 혹은 이틀에 한 편씩 기 작성된 글을 게시할 예정이며, 약 30여 편 분량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의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본 글보다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바로가기 링크)의 글도 구독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