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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무엇이 문제인가?

by 정유표
모든 것이 문제다


국가에서부터 가정,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 주체가 겪는 혼란스러운 상황은 ‘모든 것이 문제다.’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저마다 각자의 이유로 본질적 교육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는 작금의 상황은 어느 누구에게 잘못이 있다고 특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지러이 얽혀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하나의 문제로 축약해보면 ‘모든 것이 물고 물려 그 누구도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사회는 지금까지 움직여 온대로 관성에 따라 흘러가고 있습니다. 오늘이 어제보다 조금 더 힘들긴 하지만 버틸 만하고, 내일이 오늘보다 힘들어 보이지만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상황에 잘 적응하고 인내합니다. 마치 냄비 속에 개구리를 넣어두고 아주 조금씩 온도를 높여주면 뜨거워 죽을 때까지도 냄비 밖으로 뛰쳐나오지 않고 참아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 사회가 냄비 속의 개구리보다 더 불행한 것은 이 문제가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좁게는 나의 가정, 친척, 친구부터 넓게는 경제생활, 미래에 이르기까지 문제를 자각하고 상황을 바꾸기에는 포기해야 할 것과 희생될 것이 너무 많기에 섣불리 뛰쳐나올 수가 없습니다. 특히 이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4, 50 대에게는 새롭게 시작할 시간과 힘이 얼마 없기 때문에 내일이 오늘과 비슷하기를 더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누군가는 문제를 직시하고 소리를 내어 사람들을 깨우고자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사회를 모른다고 손가락질합니다. 혼자 나서 봤자 바뀌는 것은 없었으며 그동안 역사 속에서 그러한 사람들이 몰락했던 것을 무수히 봐왔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사회는 정의와 법치를 말하지만, 정작 현실은 융통성의 이름으로 포장된 불의와 무법이었습니다.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사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조언해주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개인의 힘은 너무도 부족합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동의된 정당하지 않은 권리와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문제를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받는 권리와 이익을 포기하는 순간 나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힐난과 공격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나의 지위와 안녕을 포기해야 하는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에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권한과 책임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적 정통성 문제까지 연결되어 사회 문제 해결과 변화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먼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경계하여 몰락시키고, 대중들이 그런 불편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왜곡·세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 문제가 많으니 모두가 직시하자.’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흐름 전개상 불가피하게 교육 주체의 어두운 면만을 드러내었지만, 제가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어느 한 편에서만 일방적으로 보는 것은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담론을 두고 사람들이 논쟁할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의 역사, 관점, 가치에 대해 이해해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로 상대방 주장에 말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문제의 핵심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감정싸움으로 번져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더욱 많습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살아온 역사에 따라서 서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성별, 가정, 지역, 학력, 경제 수준에 따라서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집니다. 평생을 손가락 까딱 하지 않고 부자처럼 살아온 사람의 인생관과 어렸을 때부터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전전했던 사람의 인생관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사회 온 곳에서 받아온 여성들과 눈에 드러나는 의무를 강요당하는 남성들은 또 얼마나 생각의 차이가 있을까요? 거기에 사람들마다 다른 심리적 방어기제, 대화의 방식, 허용의 범주들을 생각한다면 그 차이는 더욱 크나클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각자가 서로 다름에 대해 이해하고 통찰하며, 상대방 의견 근저에 깔린 의도 혹은 욕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이 전혀 보지 못하는 관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도저히 논의가 불가할 정도로 막혀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예외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시점에 생각의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할 때가 옵니다. 상대방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겠지만, 나의 관점에서는 덜 중요하거나 왜곡되어있는 가치라고 판단이 되는 때에는 과감하게 자신의 생각을 견지야 합니다. 그리하여 상대방의 의견을 무조건적, 감정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과 타당성을 바탕으로 논파하고 더 큰 틀의 시야를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다음 챕터부터 기술할 내용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들, 어느 관점에서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부분에 대한 것을 쓰려고 합니다. 하지만 확실히 선을 그어두자면 이것 또한 사회의 어두운 부분이 현재 효율적이라 하여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상대의 것을 더 면밀히 파악해서 그들을 더 크게 포용할 수 있는 담론을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 합리성이라는 말의 함정

경험적으로 ‘합리적이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순간 논의가 늪으로 빠져버리는 것을 많이 겪었습니다. ‘합리적이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한, 또는 그런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설명하는 뜻은 ‘어떤 사건이나 문장들이 합당한가?’를 의미하지만 그 합당의 근거가 어떤 이론이나 이치에 의하는 가에 대해서는 정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론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어떤 이론을 대입하느냐에 따라 합리적이기도 하고 비합리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많이 의미로 사용되는 합리성은 경제적 의미의 단어로 사용됩니다. ‘주어진 제약 속에서 자신의 효용을 최대화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합리성은 어떤 면에선 효과성이나 효율성이라는 단어로도 치환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경제적 합리성은 인본적 합리성의 기준과 반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제성은 때론 인간 존엄성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의 대형마트 사업 추진으로 인한 골목시장 상권 침탈과 관련된 사회 문제 논의에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는 주장을 하였을 때, 경제적 합리성은 대형마트를 허가하는 것이 소비자의 편익을 증대시키는 행위가 되겠지만 인본적 합리성에서는 서민들의 생존기반을 무너뜨리는 비합리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의 다른 용법으로 인해 논쟁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채 논의가 이루어지다가 어느 순간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더욱 상대방을 의심하게 되고 대화가 단절되며 문제 해결은 더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공적인 협상 자리에서는 이를 악용하여, 힘 있는 사람들이 의도적 말장난을 통해 힘없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합니다.)



본 글은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를 집필하기 전,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사회적 제언을 써본 내용의 글입니다. 시기상으로 1년 전 즈음에 작성된 글이므로 감안하시고 보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매일 혹은 이틀에 한 편씩 기 작성된 글을 게시할 예정이며, 약 30여 편 분량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의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본 글보다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바로가기 링크)의 글도 구독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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