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력 평가의 편의성
기업의 기본 목적은 이윤의 추구이며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어보면 투자 대비 성과의 최대치를 거두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투자가 의미하는 것은 자본, 원료, 인적 자원 등의 투입 요소들을 뜻하며 그중 인적 자원은 사람(임직원)과 사람들을 활용하는 시간으로 표현됩니다. 직원이 같은 일을 보다 적은 시간을 들여 해냈을 때, 기업은 비용 절감을 이루고 이윤을 향상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기업이 채용 및 승진과정에서 학벌과 스펙을 보는 것은 언뜻 단 한 번의 선택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비인간적 처사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인적 자원의 투입 시간을 줄인다는 관점으로 보면 매우 친기업적인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업무 체계화에 의한 일반적 선택의 성공 확률 상승’과 나머지는 ‘불투명한 사회 구조에 기인한 인맥 비즈니스 문제’ 때문입니다.
우선 기업은 크고 오래될수록 업무 영역이 체계적으로 나누어지고 일의 프로세스는 매뉴얼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매뉴얼은 꼭 문서로서 정의되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상위 직책자가 하위 실무자의 업무 사항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수되는 업무 프로세스까지도 포함합니다.
짜임새 있게 구성된 조직에서 기업의 큰 방향을 결정하는 수준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고급 정보를 가진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연구, 개발, 영업, 마케팅, 회계, 법령, 교육 등의 전반적 사항을 파악하고 있으면서 어떤 부분에 집중하여야 할지 판단합니다. 반면 대부분의 실무자들은 특정 분야에 한정되어있고, 하달된 업무 지침에 따라 이미 매뉴얼화된 방법대로 일을 합니다. 또한 신입 사원들은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실무에 사용하지 못하고, 회사에서 새롭게 배우는 지식(매뉴얼화되어있는 업무 지침)들을 익히면서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어느 누구를 채용하더라도 업무 성과를 크게 좌우하지 않습니다. 거의 정해진 방법대로 일을 가르치고 수행하면 되므로 말을 빨리 알아듣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시킨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최고의 인재가 됩니다. 여기에 기업을 자기 목숨처럼 생각하고 개인의 시간을 희생해가며 헌신한다면 더욱 금상첨화입니다.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직원보다는 말을 잘 알아듣고 회사에 충성하며 지시를 잘 따르는 직원을 더 선호하는 기업 문화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결국 한국의 대학 줄 세우기 문화는 기업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12년의 중고등 교육과정을 거치는 동안 자연스럽게 상대적 경쟁 우위에 올라선 학생들을, 다른 사람보다 더 스마트하고, 더 치열하고, 더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가장 편리합니다. 굳이 오랜 시간을 들여 면접을 보기에는 시간이 많이 듭니다. 시간은 곧 비용이고 투입 자원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학력·스펙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매년 모 언론사에서 행하는 전국 대학 순위 평가는 은연중에 대학을 줄 세우기 하려는 시도이고, 그 영향은 대학을 너머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 대학에는 살아있는 지식이 없다, 그러나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이 흔히 대학 학과를 결정할 때,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취업 후에도 활용할 수 있는가를 고민합니다. 짧게는 2년, 길게는 6년 이상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회사에서도 잘 쓰일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매년 이공계 및 응용 기술 학문, 전문직군 학과의 입시 경쟁률이 높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특정한 과가 아니고서는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직업과 연결시켜 사회에 진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활용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사회과학 분야(경영, 마케팅, 심리 등)조차도 회사에서 거의 사용할 일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네 가지 정도로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현대 사회의 지식들이 고도화되면서 먼저 배워야 할 기본 소양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대부분 특정 미시 분야의 전문가인 까닭에 10~20년 전 검증된 일반 분야의 지식만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현대 사회의 지식 발전 및 사회 변화 속도가 워낙 빨라서 현장에서 사용되는 지식과 이론도 빠르게 변화한다는 점이고, 넷째는 기업은 직무 속성에 따라 분업화되어 각기 다른 영역들이 협업되어 일이 추진되기 때문에 특정 학과의 이론만이 오롯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학교에서 배운 여러 지식들은 회사에 입사해서는 실제 사용되는 경우가 드뭅니다. 신입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최근의 이론을 새롭게 배우고, 기업 환경과 업무 절차에 맞춘 변화된 지식을 습득하는 오리엔테이션과 업무 적응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대학을 가는 이유를 그저 취업에 필요한 졸업증명을 얻으려는 것으로만 만족하여야 할까요? 그게 아니라면 대학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저는 대학에서 배우는 공부는 생각하는 방식의 훈련과 습관을 들이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교육 과정 특성상 중·고등학교 시기에는 지식을 암기하는 수준의 공부를 하게 됩니다. 대학교에 와서야 비로소 과목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고, 분야를 넘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중 학과 공부는 평생을 살면서 자신이 갖게 될 사고방식을 훈련하는데 매우 적절한 재료입니다. 특정 과의 학문 체계를 바탕으로 하위 분야들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생각하는 방식이 훈련되고 습관으로 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접하더라도 경영학과, 어문학과, 사회학과, 복지학과, 마케팅학과, 심리학과의 학생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배운 학문적 관점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다음 사건을 예측하는 방법을 훈련하여 사람 대 사람, 사람 대 사건을 소통하는 기술을 고도화하고 나면, 그 외의 분야의 관점에서도 포용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하게 교양 수업을 들어보고, 다른 학과를 전공하는 친구를 만나보고, 학교를 너머 외부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시야를 두루 넓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은 대학에서 스펙만을 쌓기 위해 학기 내내 시험공부에 매달리고, 여유가 날만 하면 각종 공모전에 참가 경력을 마련하고, 방학 때는 어학 자격시험과 해외 어학연수에 시간을 투자하는 류의 활동과는 대치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니 무엇에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스펙 쌓기에 치중되어 있는 현실에서는 대학생들이 좀 더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해보는 경험과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맥 비즈니스의 효용성
또 다른 하나의 이유 ‘불투명한 사회 구조에 기인한 인맥 비즈니스’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명문대 출신으로 구성된 사회 권력집단의 수직·수평적인 인맥을 활용한 기업의 비즈니스 전략이라고 풀어쓸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아는 사람에게 정보를 주고 거래하는 방식의 일 처리는 크게 두 가지로 자원의 절약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해온 절차에 따라 일이 진행되기 때문에 사전 확인 및 검증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기업의 웹 서비스 운영 위탁 업체를 선정할 때 조금 더 돈을 주더라도 기존에 거래하던 업체를 선정하는 것이, 새로운 업체를 찾기 위한 탐색부터 검증에 이르는 업무보다는 훨씬 손이 덜 가기 때문입니다. (한편 심리적으로 기존 관행을 바꿈으로써 부가되는 책임소재를 미루기 위해 알던 업체를 계속 사용하는 적폐적 측면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업무 투명성을 높여 공정하고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들어가는 자원을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봐주기를 하며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전 검증을 위한 연구조사를 하고, 안전망을 설치하기 위한 도구를 추가하는 등의 비용을 관련 담당자의 비호 아래 하지 않는다면 그 비용은 고스란히 기업의 이익이 됩니다.
아마 그들은 ‘누구를 시키던지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인데 뭐 어때?’라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공공의 재원을 모아 추진하는 일 이라던지, 전체 공동체 차원으로 공정한 경쟁 체제를 유지하여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어가는 측면으로 본다면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 경주 리조트 붕괴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와 같은 안타까운 결과로 되돌려 받은 것입니다.
최근 기업 자구적인 노력으로 탈 학벌, 탈 스펙을 외치면서 다양한 면접 방법을 개발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된 면접 방법을 통해서 취업을 하는 대상은 여전히 명문대 출신의 졸업생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미지 쇄신을 위한 기업들의 보여주기 정책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초등학교 입학에서 대학교 졸업에 이르는 동안 학생들을 얼마나 획일화된 인재로 만들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본 글은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를 집필하기 전,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사회적 제언을 써본 내용의 글입니다. 시기상으로 1년 전 즈음에 작성된 글이므로 감안하시고 보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매일 혹은 이틀에 한 편씩 기 작성된 글을 게시할 예정이며, 약 30여 편 분량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의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본 글보다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바로가기 링크)의 글도 구독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