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행복하지 못한 사회
언젠가 뉴스에서 배추가 풍년이라 유통을 시키면 오히려 손해니 그냥 밭을 갈아엎는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평소라면 지나쳐 넘어갔을 내용이었는데 그 날 따라 유독 먹먹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바로 얼마 전 식비를 마련하지 못해 끼니를 거른다는 아이들의 뉴스를 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세상 어디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데, 세상 어디에는 배추가 돈이 안되니 갈아엎는다고 하는 것일까?’
배가 고파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도, 배추가 풍년이라 갈아엎으면서 괴로워하는 농민도 한국 땅에서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이런 아이러니가 벌어지게 된 걸까요? 왜 갈아엎을 수밖에 없는 배추로 음식을 만들어, 배가 고픈 아이들에게 가져다줄 수는 없는 걸까요?
아마 그런 일을 했다가는 배추를 수확하고 실어 나르기까지 필요한 유통 비용을 농민이 부담했었어야 할 것입니다. 혹여 정부에서 그 비용을 부담했다 하더라도 아마 동종의 식료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잠재 수요가 사라짐으로 인해 손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 어떤 잘못을 탓할 수도 없고, 어느 누구가 나서서 무엇을 할 수도 없는 사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수의 경쟁이 벌어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복지의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재화를 주는 순간, 어느 누구에게는 고스란히 불공정의 피해를 입게 되어버리니까요.
정당한 노동과 노력의 대가로 더 많은 이윤을 가져가는 사회인 자본주의는 공급이 턱 없이 부족하던 시절 공정한 분배의 룰로써 적절하게 기능하였습니다. 인간의 이기적 속성을 극대화하여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였고, 지금의 고도 기술 산업 사회를 이룩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글을 통해 은연중 계속 비판하였지만, 자본주의는 분명 큰 틀에서 인류 전반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도 될만한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류의 기술은 인류 전체가 충분히 먹고, 자고, 입는데 필요한 생산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힘으로만 농사를 짓던 시대를 벗어나 기계를 이용하여한 명의 사람이 몇 만평의 땅에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공장은 기계화·자동화를 통해 적은 사람의 노동력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해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 보았던 미래 세계를 그린 만화에는 인간이 사용하는 재화의 생산은 모두 기계가 담당했고 사람들은 여유로운 삶을 즐기며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자본주의적 관념에 모두가 길들여져 있고,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이미 사회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정해 준 노동과 노력의 대가를 하루아침에 부정하는 것도 누구에게는 부당한 처사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의견을 한데 모아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에는 한국 사회가 너무나도 분열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나의 무기를 내려놓는 순간 그 즉시 다른 경쟁자들에게 물어 뜯겨 낙오자가 되어버리는 곳입니다. 이 싸움에서 밀리면 다시는 재기를 못할 정도로 낙오되어 버립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가족과 가문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고, 내 자녀의 실패 또한 나의 노후를 위태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경쟁적이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고, 나와 우리 가족이 아니면 믿고 기대할 곳이 그 어디에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가족마저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가려고 합니다.
과거 일제 식민지 시절의 역사는 민족 고유의 자긍심을 잃게 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천박한 물질적 가치에만 집착하도록 하였습니다. 6·25 전쟁 이후 먹고 살길이 막막한 상태에서 돈벌이에만 매달리게끔 하였습니다. 자신 내면에 있는 가치를 잃어버리고 자신을 드러낼 빛나는 무언가가 사라져 버린 까닭에, 사람들은 돈과 돈으로 치장하는 물건들과 돈으로 살 수 있는 명예에 탐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있어도 늘 돈에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남보다 더 잘나 보이기 위해서 끝도 없이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라는 스웨덴 사회학자가 쓴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보면 자본주의가 사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인도-중국 접경지대의 “라다크”라는 마을에서는 옆 집에 누가 사는지,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서로가 정말 잘 아는 공동체였다고 합니다. 나의 가치를 모두가 알아주고 인정받고 있기에 애써서 무엇을 뽐내고자 노력하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력이 이 작은 마을에 유입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청년들은 서구 할리우드 영화와 청바지 문화를 보고 동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외지로 떠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쪼개가며 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주민들이 일을 하느라 바빠지게 되고, 이웃 간을 만나고 소통할 시간이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옆 집에 누가 사는지, 그 사람이 무엇을 잘하는지 조차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돈과 물질에 집착하였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최신형 자동차 한 대를 모는 것이 나의 가치를 쉽게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더 멋진 옷과 더 멋진 집을 가져서 나의 가치를 드높이고자 더욱 경쟁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약 30년에 걸쳐 라다크의 변화를 관찰하고 책으로 남긴 작가의 글은 우리 사회의 변화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는 그 시절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변화의 강도는 더욱 심했을 것이었습니다.
결국 문제의 근본은 먹고사는 문제이고 돈벌이의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직업에 의해 벌이가 좌우되고, 대학에 의해 직업이 좌우되고, 성적에 의해 대학이 좌우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토록 성적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는 줄 세우기로 사람들을 평가했고 다른 줄에 서려는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더불어 성숙하지 못한 의식 수준은 그런 생각에 더욱 부채질하였습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것과 멋진 것을 먹고 입어야 행복하다고 느꼈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와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지나친 경쟁은 점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양극화시켰고, 가진 자들은 가지지 못한 자의 인간다운 삶까지도 희생시켜가면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를 부정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고, 개인이 사회를 바꾸기에도 힘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최소한의 휩쓸려 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본 글은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를 집필하기 전,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사회적 제언을 써본 내용의 글입니다. 시기상으로 1년 전 즈음에 작성된 글이므로 감안하시고 보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매일 혹은 이틀에 한 편씩 기 작성된 글을 게시할 예정이며, 약 30여 편 분량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의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본 글보다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바로가기 링크)의 글도 구독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