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들과 부모님들에게 드리는 제언
제가 청년들에게(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도) 제안하는 삶의 태도는 이 사회를 직접 부딪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어 있음과 융통성의 힘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중간에서 현실의 이면을 간파하고, 이상의 필요와 허구를 꿰뚫어볼 수 있는 시야를 갖는 것이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사회 변혁을 기치로 들고 일어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고 경험하면서 스스로의 주관을 세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많이 접할 것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하며, 그 말이 옳다면 온전히 나의 것으로 소화하고 옳지 않다면 자신의 다른 생각을 펼치고 정립하는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불편함을 이겨내면서 세상의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이고, 수준 낮고, 더럽고, 불결한 것을 고민하고 사유해보아야 합니다.
다양한 분야와 성격의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은 넓지만 내가 접할 수 있는 사람의 부류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에 입대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경험은 세상에 이렇게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무탈한 가정에서, 평범한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일반적인 대학교를 입학하여 다녔다고 생각하였지만, 내가 몸 담았던 세계는 지극히 일부의 공간이었습니다. 제가 디디지 못한 곳이 더 넓은 세상이었고, 다양한 사람들의 만남은 저의 관점과 시야를 넓게 열어 주었습니다.
대학 시절 지방에서 두 달간 아르바이트 합숙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같이 일하시던 분들이 제 나이 또래가 아닌 30대, 40대 사람들이었는데, 거기에서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보고 자랐던 부모님과 일가친척들의 범주에서 벗어난, 1960 ~ 70년대를 가쁘게 살아온 어른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생각, 가치관, 행동, 생활은 제가 알고 있던 세계보다 훨씬 넓고 다양했으며, 두 달 간의 아르바이트 생활은 일에서 배우는 경험 이상의 살아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경험을 통해서 배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보고 나의 주관에 따라 한 번 더 생각하려 했던 깨어있는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선입견을 버리고 최대한 상대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해보고자 노력했던 융통성 있는 태도 역시 도움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거나, 반대로 전혀 듣지 않고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웁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여 판단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 쉽고 편하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나의 생각인 것처럼 덮어 씌웁니다. 혹은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나의 마음이 불편하고 못마땅하여 원천적으로 배재하거나 그 사람의 이야기를 흘려듣고 넘깁니다. 심지어 자기 수준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깔보고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항상 내가 속한 곳 보다 바깥의 곳이 더 크고 다양하며, 세상은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내가 익숙한 주변의 사람들은 나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진 사람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통해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 변화는 내가 속한 곳보다 더 넓은 세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나의 성장과 발전을 의미합니다. 나를 둘러싼 벽을 내가 스스로 깨고 나오지 않는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좁은 하늘만을 바라보며 맴돌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은 어느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타고 태어난 본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은 외부 세계가 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것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갓 태어났을 때 나와 엄마의 존재를 분리하고, 총 천연색의 무지개를 보면서 세상의 다양한 색깔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의자에서 떨어지면 아프다는 것을 알고, 물이 끓는 주전자에 손을 대면 뜨겁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런 배움이 확장되어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물리 법칙을 생각해냈고, 수평선이 평평하지 않은 것을 보고 지구가 둥글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본성이 퇴화되었던 이유는 그동안 너무 얽매인 교육과 문화 속에서 내 생각을 그에 맞추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너무 그것에 길들여져서 다르게 생각해보고 받아들임을 선택하는 것이 귀찮거나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은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를 일치시키는 방법을 크게 세 가지 전략으로 대처합니다. 하나는 나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외부 세계를 부정하고 나의 세계를 합리화하는 것이며, 나머지는 외부 세계에 눈을 감고 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사람이기에 누구나 갖는 특성이며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그 사람의 성향과 삶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세계를 합리화하거나 눈을 감습니다. 나의 생각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지금까지 쌓인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스스로에게 사과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항상 잘 하기만을 요구받았고 실패를 견딜 수 없는 삶을 살았기에 나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큰 일도 아닙니다. 생각을 바꾸고 수용하는 것이 나를 우물 안에서 나오게 하는 길이고 성장시키는 방법입니다. 되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미안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면 나에게 사과할 용기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한 번 더 생각하고,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세계를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면, 융통성 있는 삶, 깨어 있는 삶, 자기주도적인 삶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사회가 너무 거대하고 단단해서 변화의 기약이 없다 하여도, 자신의 삶을 지금보다 더 긍정적이고 풍족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본 글은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를 집필하기 전,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사회적 제언을 써본 내용의 글입니다. 시기상으로 1년 전 즈음에 작성된 글이므로 감안하시고 보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매일 혹은 이틀에 한 편씩 기 작성된 글을 게시할 예정이며, 약 30여 편 분량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의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본 글보다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바로가기 링크)의 글도 구독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