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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의 청소년 교육 비전 [통합]

by 정유표


1. 프롤로그


글을 시작하기 전에 제 소개를 드리는 것이
글의 내용과 의도를 파악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아
간단히 적어보고자 합니다.


저는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한 뒤 청소년 교육 관련 회사에서 6년간 일을 하였습니다. 담당했던 일은 학업 스트레스로 인한 학습 동기 저하 및 성적 부진 치유를 위한 상담 프로그램과 심리 검사개발이었습니다. 2014년 케이블 방송 채널 tvN에서 방영된 ‘이것이 진짜 공부다.’에 소개된 7316 테스트의 원천 개발자이기도 합니다. 제가 회사에 근무하며 목표했던 것은 아이들이 낮은 성적으로 인해 자존감이 떨어지고 자기 비하를 하며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불행한 삶의 악순환을 끊어주자는 것이었습니다.


경력이 어느 정도 쌓이고 나자 새로운 관점의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생의 문제는 학생에 한정해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학생 문제의 상당 부분은 부모가 원인이었고, 부모가 가진 문제는 교육 제도와 사회 문화의 문제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중·고등학생들의 목표점인 대학은 사회 구조의 문제, 특히 자본 중심 기업 문화에 기인한 것이었고, 한국 기업 문화는 국내외 정치·경제·역사적 문제들과 얽히고설킨 복잡 다단한 총체였습니다. 사람들의 필요로 사회 시스템이 만들어졌으나 지금의 그것은 거대한 괴물이 되어 사람들을 괴롭히고 있었습니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 나온 ‘인간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운영되는 기계 세상’과도 같아 보였습니다.


저는 학생들 모두가 삶의 중심을 잡고 행복을 찾길 바랐지만, 사회 구조가 변화하지 않으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학생 한 두 명은 운 좋게도 자신의 길을 찾고 성장하여 행복을 찾을 수 있지만, 누군가의 실패가 있어야만 성공할 수 있는 이 시스템 안에서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현실과 타협하거나 좌절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약 7년 간의 회사 근무를 마치고 잠시 쉬는 시간을 가지면서 무엇인가를 알리고 싶었습니다. 나 하나의 힘은 작고 보잘것없지만 그것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이었고, 그나마 가장 자신 있게 생각하는 글 쓰기를 결심하였습니다. 지금까지 보고 배운 지식과 경험을 사람들에게 공유하여, 다양한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유익한 정보를 주고 싶었습니다. 나아가 사람들이 새로운 자극을 받아 진지한 삶의 고민을 해보게끔 하고도 싶었습니다. 제가 이야기하는 것들이 절대적으로 옳은 답은 아닐 수 있지만, 너무나도 바빠서 생각의 여유조차 없는 이들에게 생각의 화두를 던지고 싶었습니다.


이 글은 교육과 제도, 경제와 사회, 역사와 문화, 인간의 심리와 성장까지 광범위한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깊진 않지만 두루 넓은 지식들을 모은 숲 전체를 보여드리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녀 양육과 교육을 고민하는 부모님들, 알지 못할 답답함에서 숨 쉴 곳을 찾고 있은 학생들, 그런 학생들의 성장을 바라는 선생님들, 자신의 진로를 찾지 못해 방황하는 청년들, 비상식적이고 야만적인 사회의 변화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이 글이 도움이 되길 희망합니다.




2. 교육의 정의와 실제


우리는 왜 아이들을 교육하는 걸까요? 왜 청년들을 훈련시키는 걸까요?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여서 이런 질문이 이상할 수도 있습니다만, 제가 앞으로 하려는 이야기의 가장 기본이 되는 내용이기에 짚고 넘어가 보려 합니다.


원시 인간들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음식을 먹고, 따뜻한 옷을 입으며, 맹수의 위협이 없는 안전한 곳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처지에 만족하지 않고 더 안전한 곳, 더 좋은 옷, 더 좋은 음식을 얻기 위해 노력한 결과, 공동체를 이루고 협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지식을 쌓고 기술을 연구하며 미래의 예기치 못한 사태를 대비할 수 있는 도구와 제도들도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도구와 제도들은 인류가 발전할수록 복잡해졌으며 덩달아 사람들의 삶도 복잡하게 변화하였습니다. 직관적으로 할 수 있었던 일들이 일정 수준의 교육과 훈련이 필요한 것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입니다.


집단생활에서는 구성원들이 효율적으로 움직이는데 필요한 사상과 문화들이 필요하였습니다. 이에 개인, 가정, 사회, 종교, 국가, 계급, 체제 등과 관련된 사상들이 나타났고, 개인 대 자연의 투쟁을 넘어 개인 대 개인, 사회 대 사회의 투쟁으로 경쟁 대상이 확장되었습니다. 하나의 국가 내에서도 집단 간 경쟁이 일어났고, 19세기 이후 산업화·국제화가 진행되면서 국가 간 경쟁도 심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교육의 역할은 사회적 규모로 “우리 집단”의 생존에 필요한 기술, 지식, 문화를 전수하는 도구가 되었고, 집단과 국가의 이해관계에 적합하고 상대 집단을 압도할 수 있는 교육 정책들이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나 교육의 본질적 목적은 다른 사상들이 유입되어 변질되기도 하였습니다. 우생학의 논리로 사회 소외자들의 교육 권리가 박탈당하기도 하였고, 자본주의 논리로 불평등한 교육 기회가 정당화되기도 하였습니다. 정치적 이해에 따라 교육 내용도 의도적으로 가공하여 진실을 숨기거나 왜곡시키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교육 문제도 이런 복잡한 상황에 연장선에 있습니다. 그러기에 어느 하나의 관점으로만 보아서는 원인을 파악하거나 해결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육 문제에 대해 논의를 위해서는 이런 복잡한 상황을 아는 것이 첫 번째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사회 구조를 바탕으로 교육 주체를 나눈 뒤, 각 주체 별로 처한 상황과 문제를 살펴보는 방법을 선택해 보았습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시점에 전체적인 시야가 보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교육 주체를 나누는 기준으로 경제학적 관점에서 사회 인력 생산과 소비 그리고 컨트롤러의 측면으로 분류하였습니다. 국가, 기업, 대학, 대학 이전의 교육기관들(중고등학교 등), 가정으로 나누었고 그들 각자의 고유한 목적과 상황을 정리해보았습니다. 이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것은 현시대 교육의 이율배반적 상황을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포인트가 될 것입니다.




3. 한국의 교육 주체들, 국가편


국가


국가는 외세 침략과 자연재해의 위협으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하여 국민들이 영속적 삶을 살 수 있도록 구성된 공동체입니다. 이를 위해 정치, 경제, 국방 등의 정책을 수행하여 국민의 안정된 삶을 보장합니다. 국민의 안정된 삶은 다시 국가의 존속 기반이 되는 상호보완적 관계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중 교육은 여러 정책을 수행하거나 사회 시스템이 움직이는데 필요한 인적 자원을 길러내는 도구입니다. 국가는 고급 인력 양성에 힘을 씀으로써 여하 분야들이 타 국가 대비 뒤처지지 않도록 노력합니다. 구체적으로 국제 정세나 산업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인재를 훈련시키기 위한 제도를 마련하고 지원합니다. 한편으로는 내부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부의 불평등이나 과도한 교육비 투입 현상 등의 사회 부작용을 방지합니다.


누군가가 뛰어난 능력이 있음에도 경제 형편이 어려워 적절한 교육을 받지 못하게 되는 국가적 인재 손실이나, 잘못된 사회 분위기로 인해 사용하지도 않을 지식과 기술을 너도나도 경쟁적으로 배우는 사회적 자원 손실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재정적, 제도적 지원을 통해 재능 있는 사람들이 적재적소에 자리하여 각자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낼 수 있도록 합니다. 경영적 관점으로 보면 국가의 인적 자원이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되도록 관리하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국가는 다양한 내부 집단으로 이루어지고, 다수의 외부 집단과 소통하는 복합 유기체입니다. 국가 내부에는 정당, 지역, 세대, 성별, 경제력 등 유형무형의 이익 집단으로 무수히 나누어지고, 각 집단들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한 목소리를 내며 정책 결정에 영향을 미칩니다. 외부적으로는 국제 사회의 일원이자 글로벌 경제 생태계의 일원으로서 역할을 수행합니다. 국제 정세와 경제 트렌드를 참고하여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여러 정책을 결정하고 수행합니다.


교육 정책도 이런 맥락 안에서 결정됩니다. 뒤에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자립형 사립고 설립을 통해 경제적으로 유복한 계층에게 대학 입학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거나, 무상급식 여부를 논의하는 것들은 내부 집단 간 이익을 대변하는 경쟁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부와 소통하는 유기체로서의 국가는 세계적으로 산업의 흐름이 문·이과 융합 기술을 통한 사업이 성공하자, 이를 반영키 위해 통합 교과형 교육 커리큘럼을 개발하는 정책을 내놓는 예를 들어볼 수 있습니다. 단순 암기식 학습에서 탈피하고 창의적으로 생각하며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을 평가하는 입학 사정관 제도나 논술 면접 등의 제도들을 강화한 것도 그 맥락에서 진행된 제도입니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이런 제도들이 국가적 시야에서 분석되고 현장의 필요에 맞추어 마련되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최근 십여 년이 넘는 동안 손바닥 뒤집듯이 교육 제도와 정책을 바꾸었고 청소년들이 실험실 모르모트처럼 희생되었습니다. 이 문제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 위해서는 거시적으로 방향을 제시하는 ‘정책 제시자’와 정책 컨셉을 바탕으로 현장 실무자들의 업무 지침을 설계하는 ‘제도 기획자’로 나누어 각자의 역할과 현 상태를 알아보아야 합니다.




정책 제시자의 문제


정책 제시자는 큰 틀에서 교육의 방향을 제시하는 사람입니다. 이는 대통령이 될 수도 있고 교육부 장관이 맡을 수도 있으나, 역할의 핵심은 교육의 국가·사회적 의미를 잘 이해하고 교육 본질에 대한 소신을 지켜 사회 공동체가 영속적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교육 정책 및 관련 분야 제도들의 우선순위를 명확히 제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현시대 상황 및 예상되는 미래를 통찰할 수 있는 시야도 필요합니다. 교육 정책의 효과는 10년, 20년 뒤에 나타나기 때문에 한 발 앞선 선택으로 미래에 필요한 인재를 성장시킬 수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두 가지 역량을 바탕으로 교육의 방향과 방법을 바르게 정의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정책 제시자의 중요한 덕목이지만, 안타까운 것은 최근 내놓은 일련의 정책들은 정책 제시자의 덕목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사실입니다. 내어놓은 교육 정책마다 특정 계층의 이익만을 대변하여 사회 분란을 일으키고, 그나마 제시한 정책도 꾸준히 실행하지 못하고 손바닥 뒤집듯이 바꾸는 일이 빈번하였습니다. 그들이 내어 놓는 교육 정책들마다 목적의 진정성과 일관성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매년 치솟기만 하는 대학 등록금 문제, 일반 고등학교를 고사시킨 자립형 특수 고등학교의 확대 정책들은 세대 간, 자본 계층 간 사회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불씨가 되었습니다. 이제 사람들은 한국 교육에 기대와 신뢰를 접고 외국으로 이민 가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꼭 정책 제시자 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뒤에 설명할 제도 기획자의 문제와 복합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상황 파악에 큰 부분을 놓치게 되는데, 대개 문제가 벌어지면 힘없는 하위 공무원들이 책임의 표적이 되고 진짜 책임을 가진 정책 제시자는 뒤에 숨은 채로 드러나지 않은 채 온전히 책임을 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잘못된 제도를 손 본다고 매번 하위 공무원들을 문책하고 갈아치우지만, 정작 가장 근본 원인인 정책 제시자는 그대로이기에 늘 같은 상황이 재현됩니다. 교육 정책의 방향을 제시하고 제도 시행의 과정과 결과가 올바르게 진행되는지 최종 확인하고 교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사람은 정책 제시자뿐이므로 그에게 가장 큰 역할 책임을 물어야 근본적인 변화를 꾀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제도 기획자의 문제


제도 기획자는 정책 제시자가 목표한 정책이 현실화되도록 관련 분야의 법적, 행정적 제도를 기획하고 추진하는 사람입니다. 보통 교육 관련 정부 부처나 관련 법안을 발의하는 국회의원들이 그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들에게는 교육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제도를 수행할 주체들(기업, 대학, 가정)의 사회 문화적 상황을 바르게 인식하여 현실과 괴리되지 않는 제도를 마련하고 추진하는 역량이 필요합니다. 물론 정책 제시자에게 요구되는 교육의 국가·사회적 의미와 주관을 갖고 있는 것도 기본입니다.


그러나 최근 입학 사정관 제도의 진행 과정이나 체벌 금지 제도 시행에서 발생하고 있는 문제들을 대표적으로 살펴보면, 현실과 괴리되지 않는 제도를 만들어야 하는 점에 있어 매우 부족한 평가를 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입학 사정관 제도 자체는 평가 대상의 학생이 머리 속에 들어있는 지식을 실천으로 행동하고 결과를 만들어내는 인재인지를 파악하는 매우 효용적인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대학에 입학하기 전의 교외 활동들을 살펴보고, 어떤 의도와 목적으로 그런 활동을 해왔는지 면밀히 살펴봄으로써 학생의 진정성과 실천력을 평가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제도는 미국에서 시행하고 있는 것을 참고하여 정착시킨 것으로, 한국에 적용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상황을 충분히 고려하지 못했습니다. 한국 사회의 대학 내 연고주의 성향을 불신하는 사회 풍토, 공교육(중·고등학교) 기관의 관련 제도 개선, 가정의 경제적 격차로 발생하는 부차적인 문제들을 간과한 것입니다. 오로지 제도의 형식만을 그대로 들여와 시행하게 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교육 정책을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학부모들은 정부를 믿지 못하여 직접 입시 공부를 하게 되는 웃지 못할 현상을 만들어버렸습니다. (유사 사례로 공교육 교권 붕괴 현상의 시초가 된 체벌금지 제도 시행도 있으며 자세한 내용은 아래의 참고 자료를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 입학 사정관 제도의 허상

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사람 구실 하기 어렵다고 여기는 사회 분위기에서, 대학 합격에 큰 영향을 미치는 입학 사정관은 학생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입학 사정관의 역할이 큰 만큼 학생과 학부모들에게 투명하고 공정하게 평가할 것이라는 믿음을 심어주어야 하는데, 입학 사정관 채용에 불협화음이 보도되고 학생 사정 절차 과정도 투명하게 공개하지 않아 제도의 공평성을 의심케 하였습니다.

또한 학생들이 중·고등학교 공교육을 통해 입학 사정관 제도에 맞는 교육이 가능하도록 개편하는 부분도 미진하였습니다. 일선의 교사들에게는 기존 정시 입학 중심의 교육 과정을 그대로 준수토록 요구하면서, 학생 사정 절차에 필요한 자료를 준비하는 과정과 시스템에 대한 교육을 거의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교사들은 한정된 자원에 직면하였고 학생들에게 충분한 지원을 해줄 수 없었습니다.

학부모들은 답답한 상황을 해소하기 위하여 사교육으로 눈을 돌렸습니다. 민간 기업들이 국가 정책 변화에 따라 가장 민감하게 대응하기 때문입니다. 학부모들은 예전보다 더 많은 사교육비를 지출할 수밖에 없었고, 부유한 집안에서는 체계적인 조언을 통해 준비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형편이 어렵거나 자녀 교육 마인드가 부족한 학부모 가정에서는 적절한 준비를 할 수 없었고, 상대적으로 부유한 아이들과의 경쟁에서 밀리게 되었습니다.

입학 사정관 제도는 좋은 취지로 도입이 되었으나, 되려 대학 입시는 이전보다 더욱 복잡하게 꼬여버렸고 경제력에 의한 교육 기회 박탈을 초래하였습니다. 학부모들은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수십 가지가 넘는 대학별 입학 전형을 찾아보고, 매년 바뀌는 수험 기준들을 공부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 교권 붕괴 현상을 촉발시킨 체벌금지 제도

체벌금지 제도는 학생의 신체적 체벌을 금지하고, 벌점 제도 같은 대체 페널티를 통해 학생의 부적절한 행동을 통제하자는 목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이는 청소년 인권 신장의 일환으로 제안된 것이었으며 이상적으로는 바람직한 방향의 시도라는 것은 분명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역시 미국 외 유럽 선진국에서 시행되고 있는 제도를 참고하였으나 한국적 정서를 고려치 않은 졸속 시행으로 교권 붕괴 현상의 단초가 되어버렸습니다.

미국을 위시한 서양 사회의 정서는 개인의 행동에 대해 오롯이 개인에게 책임을 지도록 하는 개인주의 문화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도권 교육에서 추방당하더라도 대체 선택지가 다양한 사회 구조를 갖추고 있습니다. 학생의 문제 행동에 대해 교사의 책임보다는 문제 행동을 일으킨 학생의 책임을 더 강조하게 되며 학생에게도 또 다른 기회가 존재합니다. 따라서 교사는 학생이 바르지 않은 행동을 하였을 때 과감히 벌점을 주고 퇴학을 시키는 데 부담이 적으므로, 체벌이 아닌 벌점 시스템만으로도 학생들의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반면 한국은 개인이 잘못 했더라도 공동체가 책임을 지는 집단주의 문화입니다. 한국적 정서에서는 학생의 잘못을 학생 고유의 책임으로만 탓하지 않고 그를 가르친 교사나 가정에게도 책임을 묻습니다. 게다가 학생은 제도권 교육에서 퇴출되는 순간 재기하기 힘든 사회 구조에 놓여 있습니다. 학생에게 벌점을 누적시켜 퇴학이나 전학을 시키기도 부담스럽기 때문에, 잘못에 대해 과감하게 벌점을 줄 수가 없었습니다. 통제 수단으로써 벌점 시스템은 유명무실해졌고, 힘을 잃은 교사들에게 일부 학생들은 극단적인 일탈 행동을 저질렀습니다.

공교육의 현실 목표가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한 성적을 얻는 곳으로 전락해버리자, 학생들은 학원이나 과외에서 지식을 얻고자 하였습니다. 더 이상 교사의 말에 힘이 실리지 않았고 학생이나 학부모조차도 교사의 권위를 무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자연스럽게 교사들의 직업 소명이 훼손되고 교실이 무너지기에 이른 것입니다.




정책 불투명성과 사회 불신


정책 제시자와 제도 기획자가 빚어낸 실패는 앞선 예에서 살펴본 것처럼, 정책 제시자의 진정성의 문제와 제도 기획자의 시행 전 충분치 못한 실정 조사로, 제도를 수행할 주체들(기업, 대학, 공교육, 가정)에게 현실적이지 않은 역할을 요구한 결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역량의 부족으로 인한 실수가 아닌, 특정 세력의 이익만을 추구하려는 불순한 목적이 아니었는지도 의심케 합니다. 매 시행되는 정책마다 경제력과 정보력을 갖고 있는 계층만이 이득을 보는 결과를 가져왔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한 계층의 학생들은 점점 더 불리해진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위를 파악하여 증명하고 바로 잡아야 할 위치에 있는 다른 정부 기관조차도 다른 정치적 사안으로 불신의 대상이 되고 있기에 해소할 길을 기대할 수가 없는 상태입니다.


이것은 단지 교육 정책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문제로 확장해서 보아야 합니다. 한 번 무너진 신뢰를 다시 회복하는 것은 가장 어렵고도 많은 비용이 소모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정책이 나오더라도 그 진의를 의심하여 따르지 않을 것이므로, 설사 제대로 만들어진 정책일지라도 실패하거나 작동되기까지는 더 많은 시간을 소요케 할 것입니다.


일전에 외국어 고등학교 입학시험의 시험지를 유출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다 적발되어 처벌받은 학원이, 그 후 학부모들이 몰려 문전성시를 이루었다는 뉴스는 사회적 불신의 단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예입니다. 공정하고 투명해야 할 규칙이 실제로 작동되지 않고 오히려 부정과 편법을 저질러야 손해를 보지 않는다고 믿도록 만들어버렸습니다.


서로 믿지 못하니 편법 수단을 찾아내고, 다시 편법을 막기 위한 정책을 만드는 악순환은 동일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더 많은 자원이 필요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냅니다. 이는 하나의 유기체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하는 공동체의 기능이 마비된 심각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 몸을 지키는 백혈구가 내 몸의 세포를 적으로 간주하여 공격하는 백혈병에 걸린 것과 같은 상황으로 비유할 수 있을 것입니다.




4. 한국의 교육 주체들, 기업편


기업


앞서 살펴본 관점에 따라 개인은 생산·소비 등의 경제 활동, 즉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교육을 받는 것이므로, 교육 영역에서 기업 역할은 육성된 인재들을 고용(혹은 소비)하는 주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다른 회사보다 뛰어난 상품과 서비스를 만들어야 살아남을 수 있기에, 경쟁력 있는 양질의 인적 자원을 필요하게 됩니다. 특히 국경을 초월한 경쟁이 벌어지는 현대에서는 기업 간 매우 치열한 인재 확보 싸움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기업들은 머리가 좋고 경험이 풍부한 인재를 채용하기 위해 출신 대학을 살펴보고 지금까지 쌓아온 스펙과 경력을 참조합니다. 명문 대학을 나온 학생이 최우선 순위가 되고, 외국 유학 경험이 있다면 금상첨화입니다. 물론 이런 방법이 일을 잘하는 사람을 선별한다는 보장은 없지만, 적어도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는 나을 것이라는 믿음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같은 일을 맡길 요량이면 명문대를 졸업한 사람에게 주는 것이 좀 더 마음이 놓이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기업의 인재 전략은 우리나라의 교육 환경을 왜곡시키는 가장 큰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먹고사는 문제로부터 출발한 기업과 대학의 연결 고리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좋은 대학의 졸업장을 받기 위한 경쟁으로 내몰기 때문입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간 시장 불균형이 심화되는 한편, 사회적 대비책이 없는 상태에서 시작한 고용탄력성 확대 정책은 사회 전반적인 양질의 일자리 소멸 현상을 초래하였습니다. 먹고살기 위한 경쟁적 생태계는 기업뿐만 아니라 대학교, 고등학교, 중학교로 점점 내려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뒤에 더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기업과 국가의 공생 관계


기업은 영리 활동을 위한 인적 자원의 집합체이며,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금융 자본을 중심으로 기업의 소유권을 정하고 매출 이익을 소유권의 비율에 따라 나누는 조직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제 활동이 기업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기업 활동을 바탕으로 세금을 징수하여 여러 정책 수행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합니다. 따라서 매출 규모가 큰 기업일수록 국가 입장에서 더 중요한 고객이 되며, 정치인들의 정치 활동에도 기업 후원금이 매우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에 현대 사회에서 기업의 위상은 대단하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1990년대 후반부터 자본의 국제화가 이루어지면서 국가보다 더 강력한 힘을 가진 기업들이 생겨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다국적 기업은 자본의 국가 경계가 허물어지며 나타났는데, 여러 국가에 기업의 근거지를 둘 수 있게 되었습니다. 가장 적은 세금을 낼 수 있는 유리한 국가를 선택하여 사업체를 분산시켰고, 국가는 오히려 대형 기업을 국내로 유치하기 위해 눈치를 보게 되었습니다.


한편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면 기업의 일차 목표는 이윤의 추구이기 때문에 지나친 욕심이 공공의 선을 저해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국가는 이를 통제하여 공공의 이익이 침해되지 않도록 노력해왔습니다. 독과점 규제 법안을 만들거나, 환경 보전에 대한 세금을 신설하는 법을 통해 기업의 지나친 이윤 추구가 공공 이익과 사회 생태계의 균형을 해치지 않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것처럼 기업이 국가의 힘을 좌우하는 자본력을 갖게 되고 정치권력의 향방이 기업 후원에 의해 결정되기 시작하면서, 기업과 정치 권력자는 그들만을 위한 이익 공동체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습니다. 기업 이익에 부합하는 정치인이 주요한 정책을 결정하는 자리에 오를 수 있도록 지원하고, 정치인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기업의 요구에 따라 정책을 손 봐주는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비단 행정 분야뿐만 아니라 기업 활동의 부당함과 제도의 부적절성을 살펴야 할 입법, 사법 분야까지 영향을 받았습니다. 뉴스에 흔히 나오는 정경유착, 떡검, 관피아 같은 단어는 국가 권력이 기업 자본에 의해 좌우되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표현해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기업들은 이렇게 장악한 국가 권력을 이용하여 공정해야 할 기업 규칙과 경제 환경을 왜곡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업 내부적으로는 기업 활동에서 얻은 이윤을 특정 계정에게만 과실이 돌아가도록 만들었습니다. 기업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돈을 투자한 투자자들에게 이익을 분배하지 않고, 사내 유보금과 임원 활동비라는 이름으로 기업 총수 일가들의 영리에 사용되었습니다. 이를 공금 횡령이나 탈세의 죄목으로 잘못을 물어 처벌을 받았지만, 국가 경제를 위한다는 이름으로 아주 가벼운 형량만을 받고 풀려난 것이 대부분이었습니다. 수 백억 원을 착복하고 몇 억 원을 사회 환원이라며 생색내는 행태가 만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외부적으로는 대기업, 중소기업 간 공정 경쟁과 상생 논리를 훼손하였습니다. 조금이라도 돈이 될 것 같은 사업 아이템이 있으면 자본력으로 밀고 들어가 풀뿌리 기업들을 고사시켰습니다. 중소기업에서 획기적인 기술을 만들면 아무런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베껴내기를 하였습니다. 특허권을 침해당한 중소기업이 소송을 걸게 되면 오랜 시간 동안 소송을 질질 끌며 뒤로는 일감을 모두 빼앗기도록 하여 소송을 건 기업을 말라 죽이는 방법으로 시장을 장악하였습니다.




한국 기업의 성장 한계 1 – 시장 포화


한국 기업들이 국가 권력과 한편이 되어 자기들만의 이익에 몰두하는 사이, 세계 경제의 흐름은 큰 변화를 겪었습니다. 대중 사회로 대표되는 표준화된 대량생산 방식의 성장이 1980년대를 기점으로 한계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기업의 가치는 현재의 매출·순익과 더불어 미래의 성장 가능성으로 판단하는데, 주식 시장의 기업 가격은 앞으로 기업의 성장 가능성을 예측한 기대치가 반영된 가격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현재의 매출·순익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되면 기업 가치가 높아지는 것이고, 성장 가능성이 낮다고 판단되면 기업 가치가 낮아지게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기업이든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지 않으면 현재의 기업 가치가 마이너스 평가를 받게 되므로 치열하게 시장 확장을 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규모의 경제가 이루어지고 각 시장에서 스타플레이어라 불리는 거대기업이 등장하면서, 새로운 사업을 위해 다른 시장에 진출하더라도 기존 기업의 저항에 밀려 사업 성공을 보장받기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투입된 자본과 브랜드 이미지, 기술 특허를 이용한 방어 체계는 대부분의 시장을 선점 기업들의 독과점 체제로 변모시켰습니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기업 가치를 높이기 위해 제 3세계 시장으로 영역을 넓히려 시도하였고, 중국의 시장 개방으로 잠시나마 숨통이 트였지만 그 이후에는 더 이상 마땅한 시장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업들은 비교적 쉽게 사업을 성공시킬 수 있는 소상공 분야에 눈을 돌렸습니다. 동네 슈퍼, 마트, 빵집, 외식업 등 수 십 년을 오로지 장사만 해온 서민들의 경제 영역을 미국 유수의 명문 대학을 나온 경영학 박사를 앞세워 장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기획력과 자본력, 마케팅을 앞세워서 서민들의 시장을 자신들의 것으로 가져갔고, 동네 가게의 주인들은 대형 마트의 종업원이 되거나 프랜차이즈 식당의 점주가 되었습니다.


동시에 국내 시장을 폐쇄적으로 만들고 하청 업체의 이익을 빼앗아오는 방식으로 이익을 극대화하였습니다. 저질의 제품을 소비자의 눈을 가린 채 비싼 값으로 팔거나, 갑의 위치를 이용하여 하청 업체에 말도 안 되는 납품 단가 인하를 요구하였습니다. 안전하고 양질의 상품인지 알기 위해 필요한 제도나 공정 거래 법규들은 기업의 자본력으로 얻은 권력으로 무마시켰습니다. 최근 불기 시작한 해외 직구 열풍, 외제차, 아이폰, 이케아, 코스트코로 대표되는 해외 상품 선호 현상은 비뚤어진 경제 질서를 벗어나려는 움직임이며, 국내 기업의 매출에 큰 위협이 되기 시작하였습니다.


한 때 불었던 청년 창업의 열풍도 그 맥을 다하였습니다. 상품 가치가 있어 보이는 사업 아이템이 있으면 대규모의 자본으로 밀고 들어오는 대기업들의 행태, 사업을 하려면 일가친척의 밑천을 쏟아부어야만 하는 투자 시스템, 한 번 낙오된 사업가는 다시 재기하기 어렵게 되어 있는 사회 구조들로 인해 영특한 재능이 있는 청년들이 대기업 취직이나 공무원 합격에 목을 매도록 만들었습니다. 과도하고 효용적이지 않은 교육 투자는 창의적 사고와 발상으로 새로운 일에 도전해야 할 인재를 육성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한국 기업의 성장 한계 2 – 글로벌 시장 변화


정보통신의 발달 또한 기존 대량생산 방식에 익숙한 국내 기업들에게 치명타를 안겨주었습니다. 새로운 기술들이 개발되면서 기존에는 불가능했던 다품종 소량생산의 길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기존의 휴대폰은 정해진 화면과 기능을 가지고 제품이 출시되었고, 각기 다른 사람들의 취향을 맞추어 제품을 생산하기에는 투자 대비 수익을 맞출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요즘 출시되는 스마트폰은 소프트웨어 기술 발달에 힘입어 사용자의 입맛과 편의에 따라 각기 다른 앱을 설치하고 화면을 꾸미는 등의 자유로운 커스터마이징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인터넷은 사람들이 쉽게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게 하였고, 소비자 집단 지성이 빠르게 형성되고 발전하도록 해주었습니다. 소비자의 요구 사항은 점점 다양해지고 고급화되었으며 생산자보다 더 앞선 시야를 가진 소비자가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예전에는 별 것 아니라고 치부되었을 불만사항들이 모여 주류 의견이 되기도 하였고, 기업의 부적절한 처신은 때로 불매운동으로 벌어져 기업 활동을 위협하기도 하였습니다.


미국·유럽의 선진국에서는 이런 변화에 성공적으로 적응하였고, 그 결과 애플, 구글, 페이스북과 같은 기업들이 등장하였습니다. 시장이 새롭게 재편되었고, 전통의 제조 기업들도 변화에 적응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였습니다. 제조업에서부터 홍보 마케팅업에 이르기까지 정보통신 플랫폼을 이용한 훨씬 효율적이고 편리한 서비스가 등장하고 새로운 비즈니스가 탄생하였습니다. 기업들은 획기적인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창의적이고 문·이과 융합적인 인재들을 중용하기 시작하였고 그 노력은 주효하였습니다.


반면 국내 기업들은 이처럼 빠르게 변화되는 시대, 기술을 융합하여 새로운 시장을 창출해야 하는 시대를 따라가기에는 너무 거대했고, 고지식했습니다. 특히 한국의 산업화 시대를 이끌었던 중공업 중심 생산 기업들은 더욱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국의 기업들의 특성은 수 많은 인재들이 모여 조직적인 상하 관계를 이루고 리더가 정한 목표와 방법에 따라 불도저 같은 경영으로 대표할 수 있습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조직원의 희생이 발생하기도 하였지만 그러한 희생 아래 한강의 기적이라 불리는 눈부신 경제 성장을 이루어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빠르게 변화하는 사회에 필요한 다양한 목소리의 수렴과 빠른 의사결정, 급격한 방향 선회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기존 방식으로 성공을 구가한 기업 리더들은 자신의 성공 방식을 지나치게 고수하여 스스로 변화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이·삼 십대를 주축으로 한 실무자들은 회사 밖에서는 자유로운 인터넷 세대로 성장했지만, 회사 안에서는 구시대 조직 세대처럼 행동해야 하는 역할 부조화 상황과 자신들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하는 처지에 빠졌습니다.




5. 한국의 교육 주체들, 대학편


대학


대학은 본질적으로 심도 있는 학문의 탐구와 훈련을 통해 각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춘 인재를 양성하는 곳입니다. 경쟁 우위에 있는 기술을 개발하기 위하여 기업과 협력 관계를 맺기도 하며, 장기적으로 큰 이익이 될 수 있는 기초 산업분야 연구를 위한 국가 지원을 받기도 합니다. 또한 사회가 안정적으로 결속되기 위해 필요한 사회 문화적 요소들, 즉 인문과 예술 분야까지도 국가 지원을 통해 운영됩니다. 대학이 운영되는 기초 자금은 이러한 협력 투자 및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를 통해 양질의 인재를 선발하고 육성하여 기업과 사회에 필요한 인재를 공급하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대학이 매우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힐 수밖에 없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국가 투자나 기업 평가에 따라 대학의 존폐가 영향을 받게 되므로 국가의 교육 정책이 어떠한지, 기업들이 대학 졸업생들에게 요구하는 능력이 무엇인지에 따라 대학의 운영 방안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본 논리에 철저히 따르려는 국가 정책의 일환으로 대학 평가와 학과 평가를 취업률을 기준으로 점수를 매겨 지원금을 할당하였고, 학교는 학생 정원을 감소하고 학과를 조정하면서 기업 입맛에 맞는 취업에 유리한 일부 학과를 중심으로 구조 조정을 단행하였습니다.


학생 모집 단계에서는 국가가 추진하는 입시 제도 가이드에 따라 선발을 하면서도, 경쟁력 있는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편법적으로 역량 있는 학생들을 선별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였습니다. 입시 제도는 더욱 복잡해졌고, 치밀하게 분석하지 않고서는 입시의 유·불리를 파악하기 힘들게 되었습니다. 앞서 잠깐 논의한 것처럼 경제력과 정보력이 있는 학생들은 더 유리해졌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은 상대적으로 불리해지는 상황이 벌어지게 된 것입니다.


학사 운영의 질적 측면에서는 취업에 도움이 않는 인문·예술 분야는 고사시켰습니다. 학생들도 졸업해서 취직하기 어려운 과에는 지원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로 인해 사회를 안정시키고 문화를 발전시키는데 필요한 인문학적 소양을 가진 학생이 줄어들었고, 글로벌 시장에서 필요로 하는 융합적 인재를 키우는 데 반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선생님이나 교수님이 알려주는 지식을 컴퓨터처럼 그대로 머리 속에 집어넣는 암기형 인재, 리더의 지시에 따라 의심 없이 행동하는 인재를 양성하였습니다.




대학 운영의 투명성


대학 운영의 투명성도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입니다. 기업 자체가 대학의 주체가 되는 경우가 특히 그러합니다. (종교 단체나 개인 자본가가 주체가 되는 경우도 있지만, 자본력을 가진 집단이 대학을 운영한다는 점에서는 같은 맥락으로 볼 수 있습니다.) 기업은 일차 목표가 이윤 추구이기 때문에 대학 운영에 있어 교육적 의미가 훼손될 소지가 높은 것입니다. 따라서 국가는 관련 제도를 적절하게 정비하여 기업의 이윤 추구 속성을 조절해야 하지만, 이미 국가마저도 기업 자본력에 의해 좌우되는 상황에서 그런 역할을 기대하기 어려운 현실이 되었습니다.


기업이 재단을 설립하여 대학을 운영할 때 사용되는 자본금은 그것이 기업의 이윤에서 비롯된 것인지 학생의 등록금에서 충당된 것인지 알기가 힘듭니다. 기업의 재단 기부금이 학교 운영에 쓰여야 할 의무조차 모호하며, 어떻게 학교 운영 자금이 쓰이는지에 대한 감사도 형식상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설사 적발된다 하더라도 단순 회계 실수라고 하여 솜방망이 처벌을 주는 방식으로 국가가 나서서 대학의 회계 부정을 묵인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합니다. 그 예로 최근 모 대학에서 회계 부정이 적발되어 퇴출당한 재단 이사가 다시 학교의 경영 권한을 얻어 자신의 회계 부정을 고발한 교수를 직위해제 조치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는 대법원에서 ‘종전 이사’라는 새로운 이사 개념을 만들어서 비리를 저지른 사람도 학교 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판결을 내렸기 때문입니다.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한 움직임으로 2000년대 중반 사립학교법 개정 발안이 있었으나 여러 관련 단체의 극렬한 반대에 부딪혀 사장되었습니다. (정확하게는 제일 주요한 법안은 모두 삭제된 상태로 수정되어 통과되었습니다.) 그 결과 지금의 대학교들은 매년 살인적인 비율로 등록금을 인상하고 있으며, 그 돈이 정말 학교 운영에 옳게 쓰였는지 확인할 길이 없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오히려 대학 운영의 투명성을 주장하는 교직원들을 자본의 힘으로 축출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바른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분위기를 조성해 버렸습니다.


학생들은 무한 경쟁 시스템의 늪에 빠져 자기 앞가림만 하기에도 벅찬지라, 대학 운영의 투명성 같은 이야기는 사치스러운 주제가 되었습니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도록 학점을 따고, 토익 점수를 올리고, 해외 언어 연수를 가고, 공모전에 참여하며, 인턴십을 다니느라 바쁜 세대가 되었습니다. 그간 익숙해진 비판 없는 받아들임의 습관은 지금 현 상황을 관조하는 시도조차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누군가가 그런 이야기를 하면 귀찮은 주제라 치부하거나, 세상을 삐뚤게 보지 말라고 훈계하거나, 자신의 공부 환경을 방해한다고 불평하는 것이 현재 대학생들의 현실이 되어버렸습니다.




6. 한국의 교육 주체들, 공교육편


공교육


공교육은 국가와 기업, 대학이 이루는 혼란의 틈바구니에서 가장 큰 피해를 보았습니다. 중·고등교육의 목적이 오로지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는 중간 과정으로 인식되면서, 국가 정책은 대입 제도 개편에만 치중하고 중·고등학교 현장의 실정과 업무 체계를 고려치 않았습니다. 교사 권위를 실추시키는 반쪽 짜리 정책들이 시행되었고 그 결과 많은 교사들이 스승으로서 자부심을 잃고 월급 교사를 자처하는 사태를 벌어지게 하였습니다.


2000년 중반부터 이루어진 교육과정 개편도 공교육을 엉망으로 만들었습니다. 교육과정 개편은 한 번 할 때마다 최소 3년 정도가 지나야 모든 학년의 개편이 가능합니다. 그 이유는 국민공통과정은 초등학교 6년, 중학교 3년, 고등학교 1+2년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이를 한 번에 동시에 모두 바꿀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중학교 3년간의 교과 과정을 한 번에 바꾸어버리면 중3이 된 학생은 1, 2학년 때 배운기 존 과정과 새롭게 바뀐 3학년의 과정이 뒤섞이거나 빈틈이 생기므로, 교육 과정 개편은 보통 3년에 걸쳐 순차적으로 개편하는 것이 정석입니다.


그런데 10년도 안 되는 동안 교육 과정을 수 차례 개편해 버렸습니다. 그 이유는 지나친 대입 경쟁으로 인한 가계의 사교육 부담을 줄여준다는 명목이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과도한 교육 경쟁의 원인은 사회 전반 및 기업 시스템에 있음에도, 겉으로 드러난 공교육 제도만을 고치려 하였습니다. 사실상 정치인들이 선거에서 인기를 끌기 위한 보여주기 정책이었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은 제도 기획이 이루어졌습니다. 덕분에 일선의 교사와 학생, 학부모들은 매번 달라지는 입시 정책에 적응하지 못하고 사교육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학생들의 과·외고 선호 현상을 이용하여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제도를 편법적으로 운영되는 현상도 나타났습니다. 대입 제도의 복잡한 변화를 공교육에서 지원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자, 중산층 이상의 가정에서는 차라리 자기 돈을 들여 대입 특화된 교육을 받으려는 수요가 생겨난 것입니다.


자립형 사립고등학교 제도는 천편일률적인 교육제도를 탈피하여 다양한 특성의 학생들을 육성하자는 긍정적인 목적으로 도입되었습니다. 학교 수업 커리큘럼 계획 등의 운영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대신 국가의 재정 지원은 받지 않고 학생들의 등록금으로 운영하는 형태의 학교 제도를 허가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교육 정책에 대한 불신과 대기업 및 명문 대학만을 추종하는 사회 문화 풍토로 인하여 오로지 명문대 입학시험이 목적인 학교로 변질되어 버렸습니다.


이렇게 편법적으로 운영되는 자립형 사립고등학교는 가정 경제력에 따라 대입 맞춤형 교육을 받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들로 이분화시켰고 일반적인 공교육은 더욱 고사되었습니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은 모두 상위 학교로 진학하고, 그렇지 못한 학생들만 남은 학교에서는 전반적인 학업 성취도가 낮아졌기 때문입니다. 실례로 인기가 좋은 주요 상위권 대학 입학생들의 출신 고등학교를 통계 자료를 보면 점차 전통 명문 고등학교보다는 과고, 외고, 자립형 사립고가 다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학생들의 성적이 학교의 흥망을 절대적으로 좌우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험 성적과 대학 진학률로 학생과 학교를 평가하는 사회 통념 기준에 미치지 못하는 학교를 다닌다는 심리적 압박감은 학교 운영의 전반적 부분에서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것은 일종의 자아정체성을 소속 집단에 투사하여 나타나는 자부심과 같은 개념입니다. 학생도, 교사도 자신이 소속된 집단의 정체성의 긍정·부정성에 따라 행동의 질과 양에서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최근에는 자립형 사립고등학교와 유사한 목적과 방법으로 운영되는 중학교, 초등학교도 설립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국제중학교, 사립초등학교, 혁신초등학교와 같이 상급 학교에 진학에 유리한 학교에 들어가기 위해 학생들이 몰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 여파로 특정 학교 입학을 위한 전용 사교육이 생기고, 편법으로 특정 학생들을 입학시키는 비리가 일어나고, 입학에 유리한 지역의 집 값이 인근 대비 2배 이상 뛰는 현상들도 나타나고 있습니다.




7. 한국의 교육 주체들, 가정편


가정


학령기의 자녀를 둔 부모들은 매년 바뀌는 교육과정과 대입 제도에 따라가느라 급급하고, 공교육에서 지원받기 어려운 대입 스펙을 쌓기 위한 사교육을 하느라 허리를 졸라매고 있습니다. 학생들은 대입만이 목표인 줄 세우기 경쟁으로 영혼 빠진 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최근의 관련 연구에서 한국 청소년이 세계에서 가장 공부는 오래하지만 정서적으로는 가장 불행하다는 결과가 나오기도 하였습니다.


한 번 낙오되면 재기할 가능성이 전무한 사회에서 자녀의 성공 여부는 곧 그 집안의 흥망을 의미합니다. 명문대 인기학과에 합격하는 것은 더 높은 확률의 성공을 보장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좋지 않은 대학에 합격하거나 대학을 나오지 못하게 되었을 때 사회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희박해진다는 두려움이 더욱 학벌에 집착하게 만드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몇 대를 걸쳐 먹고 살 재산을 쌓아놓지 않은 이상, 부모들은 자녀 교육에 목을 맬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자녀를 명문 대학에 보내기 위해서는 ‘할아버지의 재력과 어머니의 정보력, 아버지의 무관심이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나돌 정도로, 가정의 자본력과 정보력이 학생의 미래를 좌우하게 되었습니다. ‘개천에서 용 난다’라는 속담이 이제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 사회, 가진 집안의 아이들이 더 다양한 사교육을 받으며 고급 정보를 모아 명문대에 가는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반면 1950년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 사회는 성장과 발전만을 부르짖으며 달려온 탓에 가족 공동체가 분열되었습니다. 부모들은 먹고살기 바쁜 시대에 가정과 자녀들을 돌볼 여유가 없었고, 이것이 두 세대를 거쳐오면서 부모의 역할 모델까지 퇴색되게 만들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경제적 문제에 몰두하고 있으며, 자녀의 양육과 교육에 바른 길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실천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청소년들은 삶에 중심을 잡지 못하여 방황하고 있으며, 남들이 하는 대로 그저 공부하고, 1등 하고, 좋은 대학에 입학하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만이 인생 목표로 생각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그나마 위에 적은 문제들은 일반적인 경제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는 가정하에 볼 수 있는 모습이고, 점차 심화되어 가는 경제 양극화 현상과 그에 따르는 교육 격차 문제는 새롭게 떠오르는 사회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부유한 가정의 자녀들이 중·고등학교 과정에서 남들과 차별화된 교육을 받아 부의 대물림이 되는 현상은 차치하고서라도,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저학년에 이르는 시기에 저소득층 가정의 교육 빈곤화 현상이야 말로 정말 심각한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저학년의 시기가 특히 중요한 이유는 두 가지 측면이 있는데, 하나는 모든 학습의 기본이 되는 한글 공부가 완성되어야 하는 시기라는 것이고, 나머지 하나는 이때 형성된 학습 효능감과 자아 정체성은 이후 12년의 학습 성과와 평생의 인격에 크게 영향을 준다는 것입니다.


최근 모 신문사의 기획 기사를 살펴보면 한부모 가정 등의 저소득층 자녀들은 한글 쓰기를 배우지 못하고 초등학교 입학을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이렇게 되면 아이들은 국어 외 다른 과목을 배울 때에도 교과서에 나온 내용을 읽거나 쓸 수 없기 때문에 현저히 학습 효율이 떨어지게 됩니다. 아이는 제때 배워야 할 학습 내용을 습득하지 못한 까닭에 다음 학년에 진학해서도 다른 학생들의 학습 내용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뒤늦게 한글 공부를 익혔다 하더라도 이미 뒤쳐진 성적은 복구하기가 어렵게 되고 아이의 학습 효능감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됩니다. 학습 효능감을 쉽게 설명하면, 수학 곱셈을 새롭게 배우는 상황을 가정했을 때 ‘내가 수학 곱셈 공부를 했을 때 그 내용을 완전히 습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수준을 말합니다. 지금까지 공부해 온 경험을 비추어 봤을 때 새로운 내용을 잘 습득해 왔다면 학습 효능감은 점점 높아지며 그렇지 못했다면 낮아지게 되는데, 이는 학생들이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마음가짐과 실제 성과를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의 하나입니다.


다행히도 초등학교 1학년 커리큘럼 중 한글 학습 시간을 대폭 늘려, 초등학교에서도 한글 학습을 할 수 있게끔 제도가 정비되었습니다만 전반적 사회 의식 - 초등학교 입학 전에 한글을 다 떼어야 한다. - 이 바뀌지 않고서는 이 문제의 해결은 요원할 것입니다.


학교 생활 면에서는 선생님이 내어준 숙제나 가져와야 할 준비물을 받아 적지 못하게 되어 어려움을 겪기도 합니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자기애가 형성되고, 매사에 소극적인 성격이 되거나,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하거나, 등교를 기피하고 결석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경험은 12년의 학창 시절 전반에 트라우마로 작용하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서도 그 사람의 성격에 상처를 남기게 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제적 논리에 의해 국민들의 교육 주권은 침해당하고 있습니다. 국가적으로는 특정 분야의 소질을 가진 인재가 조기에 낙오됨으로써 해당 분야의 발전이 더디게 되는 것이고, 가정과 개인에게는 불행한 삶의 비극이 벌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우리 사회가 더 양극화된다면 저소득층 교육 빈곤의 문제는 더욱 심화될 것입니다.




혼란의 시대에 가장 큰 피해자


국가, 기업, 대학, 공교육, 가정이 빚어낸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가장 큰 피해자는 청년·청소년들일 것입니다. 가정에서는 성적만이 지상 과제인 수험생이 되었고, 학교에서는 매해 바뀌는 입시 정책에 따라 이리저리 내몰리는 모르모트가 되어야 했습니다. 대학에서는 성과 중심 대학 경영의 희생자가 되었고, 기업에서는 변화하는 시대에 맞지 않는 인재로 찬밥 신세가 되거나 소모품 같은 대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유치원에 입학하면서부터 회사에 취직하기까지 늘 일렬로 줄을 서서 경쟁하고 평가받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마 정년 퇴임을 할 때까지, 무덤 속에 들어갈 때마저도 그럴지도 모릅니다. 누군가는 1등을 하면 누군가는 나머지가 되고, 어느 누구는 꼴등을 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에서 평생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1등을 한 사람도 무작정 1등 만을 바라보고 달리다가 잃어버린 삶의 여유에 공허할 것입니다. 그렇지 못한 사람들은 언제나 늘 뒤쳐져있다는 생각으로 부정적인 인생을 살아갈 것입니다. 모두가 모두에 대해 경쟁하는 이 사회에선 누구나 불행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경쟁 시스템이 나쁘니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경쟁을 통해 의욕이 생기고 사람이 가진 잠재력을 최대한 끌어낸다는 점에서 매우 유용하기도 합니다. 진짜 문제는 어느 한 분야(학교 성적, 대학 간판 등)만 가지고 모든 것을 평가해버리는, 다양성과 포용성이 없는 사회에서의 경쟁이기 때문에 나쁘다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는 어느 한 분야의 경쟁에서 밀려 낙오했다 하더라도 다른 다양한 분야에서 다시 경쟁할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이 없습니다.


우리들은 학교, 직장, 사회에서 획일화된 기준으로만 우리의 모든 것을 평가하고 값을 매깁니다. 몇몇의 상위 등수가 아닌 나머지 사람들은 늘 그 아래 언저리에 존재하고 항상 못났다는 평가를 받고 스스로를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다른 탈출구도 없고 평생을 그렇게 자신을 부정적인 관점으로 바라보며 회피하는 삶을 살게 됩니다. 청년·청소년들은 획일화된 기준으로 평가받고 경쟁하는, 삭막하고 메마른 시대에 태어났고, 배웠고, 살아가고 있는 가장 큰 피해자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사회는 청년·청소년들에게 혼란스러운 이중 가치를 강요하기까지 합니다. 회사에서는 상명하복의 문화를 강요받으면서, 왜 창의적이지 못한 인재냐고 탓을 합니다. 사회에서는 아프니까 청춘이라는이야기를 들으면서 열정 페이를 요구합니다. 돈이 최고라고 부르짖는 사회에서 돈을 추구하면 속물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그런 사회가 염증이 나서 방 안에 틀어박혀 있으면 사회 부적응자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 국가와 사회는 청소년들을 그렇게 교육시키고서는 왜 그렇게 되었냐고 핀잔하였습니다. 일부 극소수 성공한 청년 사업가의 성공담을 내세우면서 너는 왜 그렇게 되지 못하였냐고 탓하였습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청년·청소년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현 사회가 더 이상 나아질 도리가 없을 것이라는 절망입니다. 부자도 자식이 속을 썩이면 늘 전전긍긍하며 살고 가난뱅이라도 자식이 번듯하게 잘 크면 마음 든든한 것처럼, 사람은 미래의 희망과 기대가 있다면 현재의 고통도 참고 견딜 수 있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국의 청년·청소년들은 지금의 힘든 상황을 희망 없이 견디고만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상황이 나아질지도 모르고, 알고 있다 하더라도 힘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리고 조만간 무엇을 바꾸어 볼 의지마저도 사라진 세대가 될지 모릅니다.


*성공한 사람의 인생은 성공한 후에 포장되어 평범한 사람을 망친다.

최근 인터넷 상에서 단편 시집으로 유명한 하상욱 씨의 시 내용 중 하나입니다. 참으로 촌철살인 같은 문구인 것 같아서 가져와보았습니다.

사람들은 ‘OO처럼 투자해서 부자 되기’, ‘OO처럼 공부하면 서울대 간다.’, ‘성공한 벤처 사업가 OO 씨의 생활습관’ 같은 류의 책을 보며 자신도 생각을 고치고 생활 습관을 거쳐서 성공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성공한 누구처럼 하루에 몇 시간을 자고, 끊임없이 메모를 하며, 강박적으로 사람을 만나러 다닙니다. 그 결과는 점점 제 자리에 맴돌거나 자기가 바라는 성공에서 멀어져 가는 자신이 남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그다음에 나타나는 행동의 이면에는 자신을 긍정적으로 만들겠다는 의식보다는 자신의 부정성을 고치려고 하는 심리가 자리 잡게 되어, 더욱 집착하고 방어적으로 되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성공한 사람의 인생이 다른 사람의 인생을 망친다는 담론은 다음의 세 가지 측면에서 그 이유를 찾아볼 수 있습니다.

첫째, 성공한 사람의 인생은 그 사람만의 장점과 단점을 적절히 조화시킨 방법일 뿐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와 전혀 반대의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으며, 성공한 사람의 방법을 따르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꼼꼼하게 사물을 인지하고 챙기는 능력과 큰 틀에서 넓게 보고 가능성을 두루 보는 능력은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기제입니다. 어느 하나가 뛰어나면 어느 하나가 부족할 수밖에 없는 속성입니다. 그래서 다이어리를 분 단위로 나누어가며 쓰는 사람, 시간을 들여 자기 주변을 정리하는 습관으로 성공한 사람들은 그들이 큰 틀에서 넓게 보는 능력이 출중하기에 반대급부로 부족한 꼼꼼하게 챙기는 기능을 보완하여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특성은 생각하지도 못한 채 그 방법만을 따라 합니다. 이미 잘 기능할 수 있는 능력임에도 시간과 노력을 더 투자하고, 반대로 부족한 영역을 그대로 방치하는 것입니다.

둘째,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과거를 미화합니다. 사람의 기억은 그때 그 사실을 정보 그대로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주관과 관점에 따라 재해석되어 저장되고 인출되기 때문입니다. 설사 자신은 그렇지 않더라도 주변 사람들이 알아서 미화하여 꾸며주는 집단 현상이 나타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대상은 늘 무결하고 아름답고 완벽해야만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성공한 사람의 과거 행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었다 생각하고 미화해줍니다.

이것은 현실의 사람이 실행 불가능한 무결하고 아름답고 완벽한 행동과 마음을 요구하게 됩니다. 사람이기에 가질 수 있는 고뇌나 단점은 사라지고 겉으로만 보이는 허상의 것들만 남습니다. 결국 성공한 사람의 추종자들은 실현 불가능한 미션을 받아 자신도 따라 하기 위해 애쓰지만 아주 높은 확률로 실패할 뿐입니다.

셋째, 성공만을 바라보고 주목하는 사회에서는 성공한 사람들의 스포트라이트에만 주목합니다. 경쟁이 기본 속성인 사회에서 성공과 실패는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하는 법입니다. 성공한 청년 사업가 한 명을 배출하기 위해 수백의 청년 사업가들이 실패했지만, 누구도 그들을 주목하지 않습니다. ‘너도 열심히 한다면 성공할 수 있어.’라는 말로 1%의 성공 가능성만을 이야기할 뿐, 나머지 99%의 실패 가능성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이 평범한 사람이므로 나머지 99%의 실패 가능성에 더 가까울 뿐입니다. 각자가 분야를 달리한다면 모를까, 그렇지 않은 사회이기 때문입니다.




8. 무엇이 문제인가?


모든 것이 문제다


국가에서부터 가정, 청소년에 이르기까지 모든 교육 주체가 겪는 혼란스러운 상황은 ‘모든 것이 문제다.’라고 밖에 표현할 말이 없습니다. 저마다 각자의 이유로 본질적 교육 목적을 수행하지 못하는 작금의 상황은 어느 누구에게 잘못이 있다고 특정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어지러이 얽혀 있습니다. 억지로라도 하나의 문제로 축약해보면 ‘모든 것이 물고 물려 그 누구도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정도가 될 것입니다.


또한 여러분이 지금 이 글을 읽는 순간에도 사회는 지금까지 움직여 온대로 관성에 따라 흘러가고 있습니다. 오늘이 어제보다 조금 더 힘들긴 하지만 버틸 만하고, 내일이 오늘보다 힘들어 보이지만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훨씬 상황에 잘 적응하고 인내합니다. 마치 냄비 속에 개구리를 넣어두고 아주 조금씩 온도를 높여주면 뜨거워 죽을 때까지도 냄비 밖으로 뛰쳐나오지 않고 참아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인간 사회가 냄비 속의 개구리보다 더 불행한 것은 이 문제가 자기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좁게는 나의 가정, 친척, 친구부터 넓게는 경제생활, 미래에 이르기까지 문제를 자각하고 상황을 바꾸기에는 포기해야 할 것과 희생될 것이 너무 많기에 섣불리 뛰쳐나올 수가 없습니다. 특히 이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는 4, 50 대에게는 새롭게 시작할 시간과 힘이 얼마 없기 때문에 내일이 오늘과 비슷하기를 더 간절히 바랄 것입니다.


누군가는 문제를 직시하고 소리를 내어 사람들을 깨우고자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들에게 사회를 모른다고 손가락질합니다. 혼자 나서 봤자 바뀌는 것은 없었으며 그동안 역사 속에서 그러한 사람들이 몰락했던 것을 무수히 봐왔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사회는 정의와 법치를 말하지만, 정작 현실은 융통성의 이름으로 포장된 불의와 무법이었습니다.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사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라고 조언해주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다시 말하지만 개인의 힘은 너무도 부족합니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에서 암묵적으로 동의된 정당하지 않은 권리와 이익을 포기하면서까지 문제를 바꾸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가 받는 권리와 이익을 포기하는 순간 나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의 힐난과 공격을 받게 될 것이고, 그것은 나의 지위와 안녕을 포기해야 하는 위험한 행동이기 때문에 더욱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더욱이 우리 사회에서 가장 큰 권한과 책임을 가진 사람들은 그들의 역사적 정통성 문제까지 연결되어 사회 문제 해결과 변화를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먼저 나서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사람들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경계하여 몰락시키고, 대중들이 그런 불편한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교묘하게 왜곡·세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 문제가 많으니 모두가 직시하자.’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흐름 전개상 불가피하게 교육 주체의 어두운 면만을 드러내었지만, 제가 하고 싶은 진짜 이야기는 어느 한 편에서만 일방적으로 보는 것은 그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회적 담론을 두고 사람들이 논쟁할 때 흔히 저지르는 실수는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상대방의 역사, 관점, 가치에 대해 이해해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서로 상대방 주장에 말 꼬리를 물고 늘어지다가 문제의 핵심에도 다가가지 못하고 감정싸움으로 번져 문제를 더 심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더욱 많습니다.


사람들은 각자가 살아온 역사에 따라서 서로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가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성별, 가정, 지역, 학력, 경제 수준에 따라서 그 차이는 더욱 벌어집니다. 평생을 손가락 까딱 하지 않고 부자처럼 살아온 사람의 인생관과 어렸을 때부터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전전했던 사람의 인생관은 얼마나 큰 차이가 있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차별을 사회 온 곳에서 받아온 여성들과 눈에 드러나는 의무를 강요당하는 남성들은 또 얼마나 생각의 차이가 있을까요? 거기에 사람들마다 다른 심리적 방어기제, 대화의 방식, 허용의 범주들을 생각한다면 그 차이는 더욱 크나클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각자가 서로 다름에 대해 이해하고 통찰하며, 상대방 의견 근저에 깔린 의도 혹은 욕구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에 따라서는 상대방이 전혀 보지 못하는 관점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을 수 있음을 의식하고 있어야 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도저히 논의가 불가할 정도로 막혀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런 경우는 예외적으로 대응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어느 시점에 생각의 기준을 명확히 해야 할 때가 옵니다. 상대방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는 알겠지만, 나의 관점에서는 덜 중요하거나 왜곡되어있는 가치라고 판단이 되는 때에는 과감하게 자신의 생각을 견지야 합니다. 그리하여 상대방의 의견을 무조건적, 감정적으로 반박하는 것이 아니라 합리성과 타당성을 바탕으로 논파하고 더 큰 틀의 시야를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이다음 챕터부터 기술할 내용은 우리 사회의 어두운 면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부분들, 어느 관점에서는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부분에 대한 것을 쓰려고 합니다. 하지만 확실히 선을 그어두자면 이것 또한 사회의 어두운 부분이 현재 효율적이라 하여 수용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상대의 것을 더 면밀히 파악해서 그들을 더 크게 포용할 수 있는 담론을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 합리성이라는 말의 함정

경험적으로 ‘합리적이다.’라는 말을 사용하는 순간 논의가 늪으로 빠져버리는 것을 많이 겪었습니다. ‘합리적이다.’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를 살펴보면 ‘이론이나 이치에 합당한, 또는 그런 것’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에서 설명하는 뜻은 ‘어떤 사건이나 문장들이 합당한가?’를 의미하지만 그 합당의 근거가 어떤 이론이나 이치에 의하는 가에 대해서는 정의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론이라는 것은 서로 다른 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같은 내용이라 할지라도, 어떤 이론을 대입하느냐에 따라 합리적이기도 하고 비합리적일 수도 있는 것입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많이 의미로 사용되는 합리성은 경제적 의미의 단어로 사용됩니다. ‘주어진 제약 속에서 자신의 효용을 최대화한다.’는 의미로 쓰이는 합리성은 어떤 면에선 효과성이나 효율성이라는 단어로도 치환되어 사용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경제적 합리성은 인본적 합리성의 기준과 반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경제성은 때론 인간 존엄성의 희생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의 대형마트 사업 추진으로 인한 골목시장 상권 침탈과 관련된 사회 문제 논의에서 ‘가장 합리적인 방안을 모색하였다.’는 주장을 하였을 때, 경제적 합리성은 대형마트를 허가하는 것이 소비자의 편익을 증대시키는 행위가 되겠지만 인본적 합리성에서는 서민들의 생존기반을 무너뜨리는 비합리적인 행위가 되는 것입니다.

같은 단어의 다른 용법으로 인해 논쟁 당사자들은 상대방의 진의를 파악하지 못한 채 논의가 이루어지다가 어느 순간 배신당했다고 생각하는 결론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더욱 상대방을 의심하게 되고 대화가 단절되며 문제 해결은 더 어려운 상황으로 치닫게 되는 것입니다. (공적인 협상 자리에서는 이를 악용하여, 힘 있는 사람들이 의도적 말장난을 통해 힘없는 사람들을 기만하는 용도로 쓰이기도 합니다.)




9. 대학과 기업, 학벌과 스펙의 유용성


학력 평가의 편의성


기업의 기본 목적은 이윤의 추구이며 그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적어보면 투자 대비 성과의 최대치를 거두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투자가 의미하는 것은 자본, 원료, 인적 자원 등의 투입 요소들을 뜻하며 그중 인적 자원은 사람(임직원)과 사람들을 활용하는 시간으로 표현됩니다. 직원이 같은 일을 보다 적은 시간을 들여 해냈을 때, 기업은 비용 절감을 이루고 이윤을 향상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기업이 채용 및 승진과정에서 학벌과 스펙을 보는 것은 언뜻 단 한 번의 선택을 가지고 사람을 평가하는 비인간적 처사라고 볼 수도 있지만, 인적 자원의 투입 시간을 줄인다는 관점으로 보면 매우 친기업적인 방법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지는데 하나는 ‘업무 체계화에 의한 일반적 선택의 성공 확률 상승’나머지는 ‘불투명한 사회 구조에 기인한 인맥 비즈니스 문제’ 때문입니다.


우선 기업은 크고 오래될수록 업무 영역이 체계적으로 나누어지고 일의 프로세스는 매뉴얼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매뉴얼은 꼭 문서로서 정의되는 것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상위 직책자가 하위 실무자의 업무 사항을 점검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수되는 업무 프로세스까지도 포함합니다.


짜임새 있게 구성된 조직에서 기업의 큰 방향을 결정하는 수준의 판단을 할 수 있는 사람은 고급 정보를 가진 극소수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연구, 개발, 영업, 마케팅, 회계, 법령, 교육 등의 전반적 사항을 파악하고 있으면서 어떤 부분에 집중하여야 할지 판단합니다. 반면 대부분의 실무자들은 특정 분야에 한정되어있고, 하달된 업무 지침에 따라 이미 매뉴얼화된 방법대로 일을 합니다. 또한 신입 사원들은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실무에 사용하지 못하고, 회사에서 새롭게 배우는 지식(매뉴얼화되어있는 업무 지침)들을 익히면서 일을 하게 됩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어느 누구를 채용하더라도 업무 성과를 크게 좌우하지 않습니다. 거의 정해진 방법대로 일을 가르치고 수행하면 되므로 말을 빨리 알아듣고 이의를 제기하지 않으며 시킨 일을 잘 하는 사람이 최고의 인재가 됩니다. 여기에 기업을 자기 목숨처럼 생각하고 개인의 시간을 희생해가며 헌신한다면 더욱 금상첨화입니다. 창의적이고 진취적인 직원보다는 말을 잘 알아듣고 회사에 충성하며 지시를 잘 따르는 직원을 더 선호하는 기업 문화가 만들어지게 됩니다.


결국 한국의 대학 줄 세우기 문화는 기업 편의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기업 입장에서는 12년의 중고등 교육과정을 거치는 동안 자연스럽게 상대적 경쟁 우위에 올라선 학생들을, 다른 사람보다 더 스마트하고, 더 치열하고, 더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평가하는 것이 가장 편리합니다. 굳이 오랜 시간을 들여 면접을 보기에는 시간이 많이 듭니다. 시간은 곧 비용이고 투입 자원이기 때문에 간단하게 학력·스펙으로 대체하는 것입니다. 매년 모 언론사에서 행하는 전국 대학 순위 평가는 은연중에 대학을 줄 세우기 하려는 시도이고, 그 영향은 대학을 너머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에 이르기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 대학에는 살아있는 지식이 없다, 그러나 대학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입시를 앞둔 고등학생들이 흔히 대학 학과를 결정할 때,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취업 후에도 활용할 수 있는가를 고민합니다. 짧게는 2년, 길게는 6년 이상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자하는 만큼 회사에서도 잘 쓰일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매년 이공계 및 응용 기술 학문, 전문직군 학과의 입시 경쟁률이 높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특정한 과가 아니고서는 대학에서 배운 지식을 직업과 연결시켜 사회에 진출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나마 활용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사회과학 분야(경영, 마케팅, 심리 등)조차도 회사에서 거의 사용할 일이 없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네 가지 정도로 살펴볼 수 있는데, 하나는 현대 사회의 지식들이 고도화되면서 먼저 배워야 할 기본 소양이 너무 많아졌다는 것이고, 둘째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들은 대부분 특정 미시 분야의 전문가인 까닭에 10~20년 전 검증된 일반 분야의 지식만을 학생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현대 사회의 지식 발전 및 사회 변화 속도가 워낙 빨라서 현장에서 사용되는 지식과 이론도 빠르게 변화한다는 점이고, 넷째는 기업은 직무 속성에 따라 분업화되어 각기 다른 영역들이 협업되어 일이 추진되기 때문에 특정 학과의 이론만이 오롯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학교에서 배운 여러 지식들은 회사에 입사해서는 실제 사용되는 경우가 드뭅니다. 신입이 일을 하기 위해서는 가장 최근의 이론을 새롭게 배우고, 기업 환경과 업무 절차에 맞춘 변화된 지식을 습득하는 오리엔테이션과 업무 적응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대학을 가는 이유를 그저 취업에 필요한 졸업증명을 얻으려는 것으로만 만족하여야 할까요? 그게 아니라면 대학에서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요? 저는 대학에서 배우는 공부는 생각하는 방식의 훈련과 습관을 들이는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교육 과정 특성상 중·고등학교 시기에는 지식을 암기하는 수준의 공부를 하게 됩니다. 대학교에 와서야 비로소 과목 선택의 자유가 주어지고, 분야를 넘어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중 학과 공부는 평생을 살면서 자신이 갖게 될 사고방식을 훈련하는데 매우 적절한 재료입니다. 특정 과의 학문 체계를 바탕으로 하위 분야들을 공부하는 과정에서 생각하는 방식이 훈련되고 습관으로 배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사건을 접하더라도 경영학과, 어문학과, 사회학과, 복지학과, 마케팅학과, 심리학과의 학생들이 바라보는 시선은 매우 달라지는 것입니다.

자신이 배운 학문적 관점으로 사건을 분석하고, 이해하고, 다음 사건을 예측하는 방법을 훈련하여 사람 대 사람, 사람 대 사건을 소통하는 기술을 고도화하고 나면, 그 외의 분야의 관점에서도 포용하는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다양하게 교양 수업을 들어보고, 다른 학과를 전공하는 친구를 만나보고, 학교를 너머 외부 동호회 활동을 하면서 시야를 두루 넓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훈련은 대학에서 스펙만을 쌓기 위해 학기 내내 시험공부에 매달리고, 여유가 날만 하면 각종 공모전에 참가 경력을 마련하고, 방학 때는 어학 자격시험과 해외 어학연수에 시간을 투자하는 류의 활동과는 대치되는 일이기도 합니다. 어떤 것이 더 중요하니 무엇에 집중해야 한다고 판단할 수는 없지만, 지나치게 스펙 쌓기에 치중되어 있는 현실에서는 대학생들이 좀 더 자신이 진정 하고 싶은 일을 찾아 해보는 경험과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인맥 비즈니스의 효용성


또 다른 하나의 이유 ‘불투명한 사회 구조에 기인한 인맥 비즈니스’를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명문대 출신으로 구성된 사회 권력집단의 수직·수평적인 인맥을 활용한 기업의 비즈니스 전략이라고 풀어쓸 수 있습니다. 기왕이면 아는 사람에게 정보를 주고 거래하는 방식의 일 처리는 크게 두 가지로 자원의 절약이 이루어집니다.


하나는 지금까지 해온 절차에 따라 일이 진행되기 때문에 사전 확인 및 검증 절차를 간소화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기업의 웹 서비스 운영 위탁 업체를 선정할 때 조금 더 돈을 주더라도 기존에 거래하던 업체를 선정하는 것이, 새로운 업체를 찾기 위한 탐색부터 검증에 이르는 업무보다는 훨씬 손이 덜 가기 때문입니다. (한편 심리적으로 기존 관행을 바꿈으로써 부가되는 책임소재를 미루기 위해 알던 업체를 계속 사용하는 적폐적 측면도 있습니다.)


두 번째는 업무 투명성을 높여 공정하고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해 들어가는 자원을 융통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 봐주기를 하며 넘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사전 검증을 위한 연구조사를 하고, 안전망을 설치하기 위한 도구를 추가하는 등의 비용을 관련 담당자의 비호 아래 하지 않는다면 그 비용은 고스란히 기업의 이익이 됩니다.


아마 그들은 ‘누구를 시키던지 비슷한 결과가 나올 것인데 뭐 어때?’라고 생각할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공공의 재원을 모아 추진하는 일 이라던지, 전체 공동체 차원으로 공정한 경쟁 체제를 유지하여 사회를 건강하게 이끌어가는 측면으로 본다면 매우 위험한 행동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삼풍 백화점 붕괴사고, 경주 리조트 붕괴사고, 세월호 침몰 사고와 같은 안타까운 결과로 되돌려 받은 것입니다.


최근 기업 자구적인 노력으로 탈 학벌, 탈 스펙을 외치면서 다양한 면접 방법을 개발 적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된 면접 방법을 통해서 취업을 하는 대상은 여전히 명문대 출신의 졸업생인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합니다. 이는 이미지 쇄신을 위한 기업들의 보여주기 정책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초등학교 입학에서 대학교 졸업에 이르는 동안 학생들을 얼마나 획일화된 인재로 만들고 있는지 반성해야 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10. 기득권의 정통성 문제


감추고 싶은 한국 근대사


인류 역사 이래 모든 사회의 기득권들은 국가 정책, 법률, 제도, 여론 등을 이용하여 그들의 자본과 권력 우위를 지키고자 하였습니다. 이는 한국 사회도 마찬가지이며 인간 본성의 관점으로 보면 매우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특히 우리 사회는 그들이 가진 자본 권력의 정통성이 매우 빈약하다는 것을 이해해야 합니다. 그 이유는 앞서 살펴본 교육 주체들의 총체적 혼란을 관통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기 때문입니다.


조선 후기 서양 열강 및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을 맞는 사이, 조선의 권세 가문들은 외세의 침략을 맞서 싸우지 않고 자신의 이익만을 위해 싸우고 있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을 대표하는 세력과 명성황후 민씨를 대표하는 세력은 권력을 뺏고 빼앗기는 어지러운 상황이 계속되었습니다. 민씨 일가의 가족들은 나라의 주요 직책을 모두 차지하여 나라의 공금을 착복하였습니다. 국가의 기강은 극도로 문란해졌고 행정 관리들은 불법적인 세금을 걷어 착복했으며 자본력을 가진 사대부들은 새로운 서양 문물을 사들이며 자신을 치장하기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이 와중에 명성황후 민씨는 외세를 끌어들이면서까지 흥선대원군 일파나 백성들의 개혁 운동을 저지하여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 하였습니다. 중국, 러시아, 일본은 각자의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호시탐탐 조선을 침략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데, 결국 청일 전쟁, 러일 전쟁이 벌어지는 빌미를 제공하여 조선은 일본에 의해 강제 합병을 당하였습니다.


이즈음 조선 주류 층에서는 나라를 빼앗긴 이유에 대해, ‘조선의 문화와 과학이 너무나도 후진적이었기 때문이며, 우리도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같은 운동을 통해 선진국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퍼지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일본이 내세운 신민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창씨개명 등과 같은 정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일본 신민이 아닌 자신이 부끄럽기 때문에, 조선인은 일본인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내용의 시나 소설들도 나타났습니다.


소위 친일파라고 부르는 기득권들은 조선 총독부의 체계적 지원 아래 근대 정치, 사업, 경제, 군사 분야의 지식과 기술들을 배우고, 누구보다도 앞서 조선이 일본과 동화될 수 있는 정책들을 추진하였습니다. 이들의 입장에선 민족 해방을 외치는 독립 열사들이 눈에 가시 같은 존재였고, 일본에 대한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독립 열사들을 더 잔혹하고 가혹하게 괴롭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바람과 달리 미·일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고, 히로시마, 나가사키 핵폭탄 투하로 일본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여 일본 제국이 멸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자력이 아닌 타력으로 해방이 되어버렸고, 그로 인해 미국의 정치적 전략에 따라 조선 땅에 새로운 국가가 세워졌습니다. 이때 미국이 쉽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들을 대거 중용하였는데, 그 인물들은 바로 일제 치하 때 누구보다도 앞서 민족정신을 훼손시키려 노력했던 친일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일제 치하에서 했었던 일들은 묻어둔 채 미국에 충성하며 한국의 정치, 행정, 사법, 경제, 군사 등의 주요 직책들을 차지하였습니다. 또한 일본 재력가들이 한국을 도망가듯이 쫓겨나며 남겨둔 자본들을 정당한 절차 없이 손에 넣었습니다. 그 자본과 땅으로 공장을 짓고, 회사를 경영하고, 학교를 세우면서 기득권들의 자본과 힘은 나날이 커져갔고, 먹고 살길이 없었던 일반 국민들은 ‘모두가 힘드니 다 같이 희생하자’라는 구호 아래 허리를 졸라매고 국가 발전에 이바지하였습니다.


현재 대부분의 한국 기득권들은 위에 적은 것과 같이 떳떳하지 못한 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들이 가진 정치, 행정, 사법, 경제, 교육 모든 분야의 핵심 기반이 정당하지 못하게 얻은 것이기에 근대 이후 역사에 대한 왜곡과 날조에 극렬히 애를 쓰고 있습니다. 현재 국사에서는 한국 역사 중 근·현대사에 대한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이미 역사 교과서에 적힌 내용마저도 다른 관점으로 바꾸려는 시도도 하였습니다. ‘일본 식민지 시대는 국가 근대화에 이바지한 시기였다.’ 라던지, ‘과거사는 모두 잊고 미래를 이야기하자.’는 등의 말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감추려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그들은 일제 관료들이 썼던 방법을 사용하여 국민들을 지역, 이념, 세대로 분열시켰습니다. 자신이 가진 자본을 활용하여 일부러 특정 지역에만 노골적으로 자본을 투자하여 지역 간 다툼이 일어나게 하였습니다. 경제 성장의 혜택을 받은 지역은 그렇지 못한 지역의 사람들이 자신들을 시기하고 질투한다고 생각하게끔 만들었습니다. 반대로 혜택을 받지 못한 지역은 혜택을 받은 지역의 사람들을 미워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공정한 문제에 대해 의문을 제기해도 그것은 감정적 도발이라는 이름으로 무시하였고, 그런 문제를 드러내는 사람을 더욱 증오하게 하였습니다.


여기에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을 씌워 자신들의 정통성을 공격하는 자들을 빨갱이라는 이름으로 매도하였습니다. 6·25를 직접 경험하여 공포 트라우마가 있는 노년 세대를 이용하여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에게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빨갱이라는 딱지를 씌워 그들을 미워하도록 하였습니다.


새로운 교육 환경으로 의식이 깨어난 젊은 세대에게는 자신의 앞가림에만 전전하여 사회에 의문을 갖지 못하도록 옥죄었습니다. 그리고 노년에겐 복지를 청년에겐 희생을 선물하여 서로를 미워하게 하였습니다. 물론 노년에게 준다는 복지는 그럴싸한 거짓 공약이었고, 선거가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을 닦았습니다.


국민들이 모두 분열하여 서로 헐뜯고 싸우게 만들었고, 그 와중에 자신들의 편을 드는 다수의 선거 표를 모아 자신의 권력을 탄탄히 하였습니다. 국민들은 진정 이 상황을 만드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른 채 조종당하며 살아온 것이었습니다.


* 엎질러진 물을 주워 담는 방법

그들은 아마 어쩌면 자신들이 가진 권력과 자본은 정당하게 얻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단지 여기서 말하는 “정당함”의 정의가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를 뿐입니다. 혼란스러운 사회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기회를 잡고 힘을 얻는다는 약육강식의 관점으로 그들의 정당함이 정당화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만 자신이 빼앗긴 것을 되찾으려 할 때는 보통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정당성을 외치는 행태가 이율배반적일 뿐입니다.)

언어를 도단하여 상대방과 대중을 속이고, 자기와 선대의 역사를 합리화하며, 그것이 심지어 진실이었다고 주장하는 행태를 보면, ‘어떻게 저렇게 낯짝이 두꺼울까?’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제가 생각하는 관점에선 그들은 정말 자신이 정의롭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이는 심리학에서 말하는 몇 가지 기제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기억의 저장과 인출의 메커니즘의 측면입니다. 사람의 머리는 사진을 찍듯이 있는 그대로의 정보를 저장하지 않습니다. 정보를 여러 갈래로 나눈 뒤 이를 논리적 관계에 따라 분할하여 여러 저장소에 저장하게 되는데, 이때 단순한 정보뿐만 아니라 그때의 감정과 냄새, 주변의 온도 같은 정보가 같이 섞이게 됩니다.

이렇게 기억된 정보를 꺼낼 때에도 그때의 주변 정보들이 같이 떠올려지게 되는데, 이때 자신의 관점과 시각에 따라서 논리적 관계를 다시 조합하여 풀어내게 됩니다. 분명 눈으로 보았던 물건이었지만 보지 않았었다고 생각하고, 반대로 듣지 않았던 소리도 마치 들었던 것처럼 기억을 하는 것입니다. 이 경우 거짓말탐지기를 동원하더라도 기억이 사실이었는지 거짓이었는지 확인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의 뇌는 자기가 경험한 기억이 진실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머릿속에 저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이미 벌어진 사건에 대한 자기 합리화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신념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였을 때, 대개 두 가지 선택을 하게 됩니다. 하나는 자기의 잘못을 바로 잡는 행동을 다시 하거나, 나머지는 자신의 생각을 바꾸는 것입니다.

그런데 보통 이미 벌어진 일을 다시 수습하는 것은 매우 어렵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드러내야 하는 어려움도 있고, 시간이 지난 일이라면 아예 불가능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되면 사람은 심리적인 자신을 지키기 위해 생각을 바꾸게 됩니다. ‘그때의 일은 다른 사람의 탓이었어.’라며 자신이 아닌 외부의 원인으로 돌리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맞는 방식이야.’라고 굳게 믿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형성되기 시작한 관념은 이후 유사한 사건이 벌어졌을 때에도 더욱 자신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가치 체계가 형성되는 단초가 됩니다.

이는 허언증이라는 정신과적 질병과도 유사합니다. 자신이 말한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믿게 되는 습관입니다. 보통의 사람들은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겠느냐.’라고 생각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이 말한 거짓말을 진짜라고 믿으며, 생활 전반에 행동이 그 거짓말을 바탕으로 구성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사법 고시를 패스해서 이제 곧 사법 연수원에 들어가 판·검사가 될 거야.’라고 거짓말을 진짜로 믿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시를 합격한 양 행동하는 것입니다. 거짓말은 거짓말을 낳게 되는데 그 조차도 진실이라고 믿기 때문에 그 사람의 가치 체계가 그에 맞추어 형성되는 것입니다.




11. 언론·지식인의 자본화


기업, 언론, 학계의 카르텔


언론과 지식인은 이러한 사회 문제들을 고발하고 바로 잡아 공공의 이익을 추구하는 역할과 소명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사회에 구성원들이 상호 약속된 바에 따라 행동하지 않거나, 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비효율적인 행동을 할 때 그것을 교정하는 일을 하게 됩니다. 바람직하지 않은 부분을 바로 잡히도록 여론을 형성하여 이 사회가 영속적으로 성장하는데 필요한 감시자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언론 정신이란 거대한 자본 세력과 정치 세력의 압력에도 소신을 지키며 공공의 이익을 위해 행동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일제 식민지 해방 이래로 주류 언론과 지식인이 공공의 이익을 위해 움직였던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신문사, 방송사 할 것 없이 자본력을 가진 광고주의 의향과, 정치인의 강압과, 투표권자의 입맛에 맞는 기사를 쓰기에 바빴습니다. 언론사가 이익을 창출하는 수단은 광고, 협찬, 구독의 형태인데 더 많은 돈을 주는 기업주, 배후를 지원해주는 정치인, 많이 구독해주는 애독자에 뜻에 거스르는 기사를 쓰기에는 너무나 위험 부담이 많기 때문입니다. 대부분의 언론은 정통성이 부족한 기득권의 바람에 따라 진실을 은폐하고 왜곡하는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리고 언론이 기업 산하로 재편되고, 대학이 언론 산하로 재편되며, 기업·언론·학계의 카르텔이 생겨났습니다. 자본에 의한 예속 관계뿐만 아니라 2·3세 자녀들의 혼인을 통한 결합으로 그들만의 리그가 만들어진 것입니다. 언론 지식인이 기득권 자체가 되었으며, 나아가 공공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이 아니라 특정 기업의 이익, 특정 정치 세력의 이익, 그리고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언론이 되었습니다.


대중들이 자신들이 구축해 놓은 세계에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도록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프로그램들을 편성하고, 진실을 왜곡하는 지식인들을 고용하여 사람들을 속이면서 영구히 자신들만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연합이 이루어진 것입니다. 점점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책과 제도를 만들어가고, 그것이 마치 전체를 위한 길인 것처럼 포장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서민들의 법적·경제적 권리를 서서히 박탈해 가면서 자본 귀족 국가를 건설하기 시작하였습니다.


* 언론과 대중 의식 조종

대중 매체와 언론을 통해 사람들의 의식을 조종하는 정치 전략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독일 나치 선전장관인 요제프 괴벨스의 공작으로부터 체계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감정에의 호소, 정보의 비대칭성과 대중 여론, 포토 저널리즘, 이미지 메이킹의 방법들을 통해 나치당이 원하는 바대로 사람들이 생각하고 움직이도록 조종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독일 총선에서 나치당을 제1당으로 만들고 히틀러를 총리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습니다.

- 감정에의 호소 : 괴벨스는 연설을 할 때 사실 관계를 길고 자세하게 나열하지 않고, 자극적인 단어로 간결하게 문장을 구성하였습니다. 공포와 적의가 느껴지는 단어를 사용하여 가상의 적을 만들고, 나치의 사상과 행동이 독일을 지키는 것이라고 믿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은 이성적인 사실 관계보다는 감성적인 느낌에 따라 반응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괴벨스의 연설 전략은 많은 사람들에게 효과적으로 어필하였습니다.

- 정보 비대칭성과 의사 결정 시기성 : 일반적인 대중들은 정보가 부족한 것을 이용하여 그럴싸한 거짓을 사실인 것처럼 보도하였습니다. 거짓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며, 그것을 밝혀내는 과정도 오랜 시간이 필요하게 됩니다. 설사 오랜 노력 끝에 사실이 밝혀졌다 하더라도, 중요한 결정은 이미 거짓 정보를 바탕으로 이루어졌고 더 이상 그것의 사실 여부는 중요하지 않게 됩니다. 괴벨스는 이러한 정보의 비대칭성과 의사 결정의 시기성을 십분 활용하여 정책 결정에 유리한 위치를 점하였습니다.

- 포토 저널리즘 : ‘백 번 말하는 것보다 한 번 눈으로 보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 있듯이 신문 기사의 길고 긴 글 보다는 단 한 장의 사진이 사람들에게 더 큰 임팩트를 전해줍니다. 또 사진은 ‘프레임의 미학’이라고도 합니다. 같은 장면이라도 사진을 찍는 사람의 의도에 따라 자기가 원하는 장면만 찍어서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치 정권은 그 시기의 다른 정권과 비교했을 때 유독 더 많은 사진을 남겼으며, 그것은 독일 국민들을 쉽게 설득할 수 있는 이미지 메이킹 전략 수단이 되었습니다.

- 이미지 메이킹 : 괴벨스는 독일 전역의 가정에 라디오를 배포하여 매일 아침, 저녁으로 독일 나치당과 히틀러의 일거수일투족을 매일 청취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히틀러가 가족들과 함께하는 따뜻한 광경이나 독일 노동자들과 함께하는 모습의 사진들을 자주 신문에 노출하였습니다. 이는 대중들에게 자주 정보를 접하게 함으로써 일상 속에 있다는 느낌을 주고, 히틀러가 대중과 함께하는 가정적인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심어주는데 효과적이었습니다.

괴벨스의 선전 전략은 상품 마케팅부터 정치적 홍보 수단에 이르기까지 대중 매체가 삶의 양식이 된 현대 사회에서 매우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매 선거 때마다 후보자들이 시장에 방문하여 길거리 음식을 먹는다든지, 저소득 가정에 방문하여 봉사활동하는 사진을 앞 다투어 내보내는 것도 같은 맥락의 활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전략은 한국 사회에서 굉장히 효과적으로 작동하고 있으며, 실상은 더욱 악의적인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대중들은 정당의 이미지를 보고 투표하지만, 실상 정당이 행하는 정책은 되려 특정 계층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정책의 사실 관계를 밝히기에는 알아야 할 것이 너무 많고 사람들은 사실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습니다. 정책을 비판하는 사람에게 주홍글씨를 새겨 공포와 적개심을 심어주어 대중들이 비판자들을 외면케 하고 자신들의 지지 기반을 탄탄히 하였습니다.

하나 더 깨닫고 있어야 할 것은 정치와 언론이 한 팀을 이룬 사회에서는 민주주의의 기본 정신마저도 침해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선전 전략을 행하는 대중 매체와 왜곡을 감시해야 할 언론은 동일한 주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권력의 원친인 국민의 눈을 가리고 진실을 왜곡하여 자신만의 이익을 위한 취하는 도구로써 전락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12. 국가 환란과 민족정신의 쇠퇴


가치관 혼란의 시대


권력을 가진 자와 언론·지식인이 진실을 왜곡하고 감추고 있을 때, 한국 대중은 안타깝게도 그것을 간파할 수 있는 의식 수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은 일제 식민지 해방 후 6·25 전쟁을 거쳐 미·소 냉전시대가 종식되기까지 눈부신 경제 성장을 달성했지만, 그만큼의 사회적 부작용도 얻게 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일본에게 극심한 수탈을 당했고, 해방이 되자마자 6·25 전쟁이라는 최악의 비극을 맞이하였습니다. 산업 기반 시설은 다 파괴되고 농경지는 황폐화되었습니다. 보릿고개마다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들이 속출하였습니다. 근 반세기에 걸친 국가 환란은 먹고사는 것, 돈을 벌어 성공하는 것이 지상 과제가 되게 하였으며 사람들로 하여금 양적 성장만을 추구하도록 하였습니다. 성공을 하고 돈을 벌기 위해서는 편법과 위선을 써서라도 짓밟고 이기면 된다는 사상이 자리잡기 시작하였습니다.


돈이 있는 자는 무거운 죄를 지어도 용서를 하였고, 돈이 없는 사람은 조그만 잘못을 지어도 사회 정의 실현이라는 이름하에 가혹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사회적으로 성공했다고 알려진 사람들조차 편법과 위선으로 그 자리에 오르는 경우가 많았고, 사람들은 자연스레 법과 신의를 지키는 자가 바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타인의 부정을 고발하기보다는 자신의 영달을 꾀하는 것이 우선되었고, 어찌 되었든 결과적으로 돈과 권력을 손에 넣으면 부정한 과거가 용서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문화적으로는 급진적인 서양 문물과 제도 도입으로 혼란을 겪었습니다. 사회 제도가 효과적이기 위해서는 그 사회의 집단 문화와 관습을 바탕으로 마련되어야 합니다. 문화와 관습은 오랜 기간에 걸쳐 좋은 것은 발전되고 그릇된 것은 보완해가며 만들어지는 것이며, 어느 하루아침에 바꿀 수가 없는 것입니다. 관습에 맞지 않는 제도를 들인다는 것은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는 것과 같으며 사회 전반적으로 예상치 못한 문제들을 일으켰습니다.


한민족은 전통적으로 농업이 주요 산업이었습니다.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협업이 필수였고 사람 사이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문화가 형성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를 전후하여 도입된 서양식 제도와 문물은 농업 중심 집단주의 문화와는 전혀 다른 속성을 지닌 것이었습니다. 여기에 나라를 빼앗김에 대한 자문화 폄하 의식이 퍼지면서 우리의 고유 제도와 관습을 철저히 외면토록 하였습니다. 우리의 관습과 전혀 맞지 않는 제도들을 아무 비판 없이 도입하였고 그 폐해는 지금까지도 계속되었습니다.


서양 사람들은 유목 중심의 이동이나 약탈이 주요 생계 수단이었고, 그러기에 개인의 독립성을 강조하는 문화와 제도가 발달하였습니다. 중세의 영주와 농노라는 개념도 실은 동양의 양반과 노비와는 전혀 다른 개념의 계약 관계였습니다. 영주가 지나친 수탈을 하면 농노들이 봉기를 일으켜 영주를 살해하고, 옆 마을의 다른 영주를 앉혀서 새로운 계약을 맺는 일이 정당하게 벌어졌습니다. 리더가 권력을 얻은 만큼 책임을 지지 않으면 사회 공동체가 무너지고 자신의 목숨이 위태로워지는 경험을 반복하면서, 사회 지도층들에게 자기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한 수단으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정신이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서양식 계약 관계는 제도의 형식만 흉내 낸 것이었고, 제도 이면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정신문화는 들여오지 못하였습니다. 한국의 리더들은 자신의 성공이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만 얻은 것이라 생각하였고, 성공의 바탕이 되는 사회에 대한 책임 같은 것은 안중에 두지 않았습니다. 성공을 하고 재산을 모은 것으로 온갖 명품과 사치품으로 치장하였고 그것이 자신의 명예를 드높이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대중 매체는 자생적으로 자본의 노예가 되어 돈이 되는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방송들을 만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동경해 마지않는 재벌의 사치스러운 삶이 인생의 목표이자 행복인 것처럼 포장하였습니다. 온 국민들은 외모, 명품, 자동차, 아파트에 열광하였고 사치스러운 소비문화와 향락 문화를 이끌었습니다.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한국 기득권들은 자신들의 정당하지 않은 과거에 사람들이 집중하지 않도록 하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대중 매체와 언론은 사람들의 눈을 가리려 하였고, 사람들은 성공에 대한 욕망으로 진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선진국에서 시행하는 것이라고 하여 서양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는 세태는 여전하며, 사회 성장을 더디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앞서 언급하였던 입학 사정관 제도나 학생 체벌금지 제도의 도입 역시 외국의 교육 제도를 문화적, 사회적 이해 없이 그대로 따라 하려는 데에서 나타난 산물입니다. 공공의 이익을 배제하고 자기의 영달만을 추구하며 과거의 정통성을 감추기에만 급급한 정책 제시자, 한국인들의 정서와 사회 상황을 고려치 않고 서양의 제도를 흉내내기만 하는 제도 기획자들의 촌극이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 리더의 도덕성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

우리 사회는 어느 순간부터 리더의 도덕성에 대해서 관대한 사회가 되었습니다. 선거를 통하여 리더를 뽑거나, 장관 임명 예정자의 국회 청문회를 할 때에 위장 전입, 군역 비리, 탈세 등의 허물이 있더라도 그 사람이 능력이 있다는 이유로 뽑아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조금 흠이 있더라도 우리 지역구에 국가사업을 유치하고, 땅값·집값을 올려줄 것 같은 사람을 리더로 올려놓는 것이 나에게 이익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실제 한국의 정치·경제적 상황은 이런 선택이 비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공공의 이익을 따져 사업을 시행하기 보다는 관계 부처에 행사할 수 있는 실력이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정책이 결정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부정과 편법으로 권력과 자본을 끌어 모을 수 있었던 지난 세기를 생각해보면 대부분 그러한 사람이 선거에 출마하며, 선거권을 가진 국민들의 선택지는 그리 넓지 못한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리더가 지역구의 국회의원이 된다 해도 우리가 얻을 이익은 매우 표면적이고 지엽적입니다. 장기적으로, 국가적으로 보았을 때는 더 큰 것을 잃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부도덕한 리더가 리더가 되었을 때 잃게 되는 것은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리더 자체의 부도덕성에 기인한 문제입니다. 리더는 다른 사람과 다른 권한과 혜택이 주어지는데, 그것은 리더가 공공을 대표하고 집단의 주요한 정책 결정을 내릴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심성과 행동은 관성의 법칙과 같이 과거에 해온 바에 따라 현재와 미래를 살아갑니다. 과거의 행적에서 부정을 함께한 사람들과의 관계는 더욱 떨쳐내기 어렵거니와 자신의 인생관 또한 갑자기 바뀔 수도 없는 것입니다. 특히 권한과 혜택이 많은 큰 공동체의 리더일수록 그만큼 오랜 시간을 살아온 역사로 인해 관성의 힘은 더욱 크고 바꾸기 힘들게 됩니다.

결국 주요한 정책에서 자기의 이익이나 자신과 이익 관계에 있는 사람의 이익을 우선하는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눈에 드러나는 부분은 공공의 이익이라고 말하지만, 대중들이 알지 못하는 곳에서 부정을 저지르고 뒷주머니를 챙기는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부도덕한 리더는 그렇게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리더가 사회적 성공 모델이 됨으로써 사회 구성원들에게 끼치는 악영향입니다. 리더는 모든 사람들이 바라보는 자리로써 그 자체만으로 다른 사람의 삶에 지침이 되는 인물입니다. 그 사람이 살아온 인생관과 행동은 ‘성공하기에 따라야 할 가이드’이면서 ‘우리 사회의 질서와 법칙’이 되는 것입니다.

부도덕한 사람이 리더에 오르게 되었을 때 다수의 사람들은 그의 인생을 모델로 삼아 삶을 살아가려 합니다. 그것이 위대하고 멋있어서가 아니라 사회의 질서와 법칙을 받아들이고 적응하려 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소수의 사람들은 사회의 부도덕한 질서에 개탄하고 실의에 빠지게 됩니다. 특히 선거 상황이라면 리더에 대한 적개심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 대한 실망이 더욱 크기 때문입니다.

그 이후 나타나는 사회 전반적인 도덕 경시 현상은 이 사회 모두가 모두를 불신하고 긴장하도록 만듭니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전쟁터와 같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경쟁은 삶을 더 삭막하게 만들고 서로에게 더 큰 상처를 주게 됩니다. 경쟁은 더 치열해지고, 사회는 분열되며, 공동체의 힘은 분산되어 버립니다. 그 최후는 다른 경쟁 사회에게 정복당하거나 스스로 자멸하는 수순을 밟게 되는 것이 역사이래 많은 공동체의 운명이었습니다.




13. 정통성이 중요한 이유


과거를 잊고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아가자???


혹자는 과거는 모두 잊고 새로운 미래만을 생각하자고 이야기합니다. 지난 과오는 바꿀 수 없기에 그것을 청산하는 것은 매우 소모적이고 사회에 위기를 가져올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정말 그 말이 맞는 것일까요?


사람이든 공동체든 성장하는 과정에서 누구나 실수를 저지를 수 있습니다. 과거의 실패를 반성하여 앞으로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발전하느냐, 아니면 실수를 되풀이하여 성장하지 못하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국가 차원에서 보았을 때에는 과거사의 진실을 밝히고 책임을 지도록 하는 것이며, 이는 국가가 앞으로 발전하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를 결정하는 요인이 됩니다.


특히 국가 단위의 공동체는 언제나 외세의 위협에 놓여있으며, 이를 이겨내기 위해서는 구성원들의 힘을 하나로 모으는 결속력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중 국가의 힘이 집중되어 있는 리더의 역할과 책임이 가장 막중하며,그만큼 개인의 영달을 미끼로 한 유혹도 강하게 받게 됩니다. 만약 리더가 국가 공동체를 배신하고 변절하는 순간 아무리 강력한 국가라도 몰락하는 것은 시간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적인 영달의 유혹을 뿌리칠 수 있는 주관과 의식이 있는 사람만이 그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리더뿐만 아니라 국민 개개인에게도 일정 수준의 역할과 책임이 주어집니다. 그러나 개인의 주관과 의식 수준은 리더에게 요구되는 것만큼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사소한 부분에서 개인 영달의 추구는 큰 문제가 되지 않으며 리더의 책임감이란 때론 희생을 요구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어느 정도는 공동체를 배신하는 것은 필시 응징을 당한다는 역사적 교훈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응징이라는 단어가 너무 자극적이라면 책임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과거를 반성하고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잘못된 현실을 바로 잡으려는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현재의 한국은 리더들이 앞서서 과거의 책임을 지우려 하며, 지금도 개인 영달을 위해 공공의 이익을 해치고 있습니다.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면 집안이 망하고, 자신의 영달을 꾀해야만 대대손손 잘 먹고 잘 산다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사회에서는 오히려 법을 지키고 정의를 쫓는 일이 어리숙한 행동이며, 남을 속이고 편법을 사용하여 돈을 버는 것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재미있는 것은 힘이 있는 사람들은 오히려 과거에 흠이 많은 사람들을 더 좋아하고 중용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서로가 과거의 부끄러움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약점 삼아 부려먹기 쉽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논리로 주요 직책에 올라있는 기득권 무리들은 국가의 본래 목적에 따라 공공 이익에 부합되는 일 보다는,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 이익이 되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정의를 바로 세우고 투명한 사회를 만들려는 사람을 견제하고 배척합니다. 그들에게 힘을 조금이라도 넘겨주게 되면 자신들의 부끄러운 정통성에 도전이 될 것 임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보다 많은 사람들이 진실을 알게 되고, 정의로워지며, 정당한 권리를 주장하는 순간, 그들은 현재의 지위와 더불어 과거의 영광까지도 송두리째 내놓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우리 국민은 부정과 불법이 계속되던 정권 하에서도 4·19 혁명, 5·18 민주화 운동으로 대표되는 저항과 희생을 통해 조금씩이나마 사회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만들도록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1997년 IMF 이후 처음으로 전통 기득권이 아닌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왜곡된 현대사와 제도들을 바로잡기 위한 노력이 시도되기도 하였습니다. 비록 기존 기득권자들이 혼연일체가 되어 극심한 반발과 공작을 함으로써 무산되었지만, 한국 사회가 늘 그래 왔던 대로 흘러가지만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 의미 있는 사건이었습니다.




14. 변화의 길


변화의 길


지금까지 교육 주체를 중심으로 사회와 근·현대사 전반의 사항을 간단하게 살펴보았습니다. 교육을 주제로 한 글이지만 이렇게까지 광범위하게 훑어본 이유는 프롤로그에 기술한 바와 같이 교육 분야 하나만 살펴서는 지금의 문제들과 변화 방안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글을 접하게 될 독자들은 저와 같은 일반 소시민일 것이고, 사회를 바꾸기에는 모두가 힘이 없는 개인일 것입니다. ‘오늘부터 헛된 경쟁을 그만하고 각자의 소질에 맞춰 잘할 수 있는 일을 하자.’ 고 주장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미 사회 시스템에 속한 일원으로써 나 혼자만 고고할 수도 없거니와 그것이 해결 방안도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의 삶을 책임져 주지도 못할 것이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꾸려 하는 것은 매우 무책임한 일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을 고민한 끝에 제가 몸 담았던 교육 분야의 경험과 지식을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주자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사회를 변화시킬 수는 없지만 적어도 앞으로 자라날 청년·청소년들 중 한 명이라도 잘못된 교육 시스템의 덫을 벗어나 깨어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깨어있다는 것이 어찌하여 변화의 길이 될 수 있는지를 두 가지 측면에서 기대하였습니다. 하나는 이렇게 어지러운 사회에서 소모품으로 전락하지 않고 자신의 행복을 추구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었고, 나머지하나는 점차 깨어있는 사람이 늘어갈수록 정당하고 투명한 사회에 대한 담론이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런데 부모들조차도 강박적 사고와 한정된 정보로 바른 교육의 길을 찾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대입이 지상 최대의 과제이고 더 좋은 고등학교를 가기 위해, 더 유리한 중학교에 가기 위해 유치원에서부터 영어 몰입 교육이다, 영재 교육이다 하며 교육의 본질을 모른 채 유행에 휩쓸리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부모들에게 그 어디에서도 알려주지 않을 객관적이고 넓은 시야의 정보와 구체적인 교육 지침을 전해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더불어 현재의 삶을 고민하는 청년들에게도 삶의 지침을 세우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미래의 인재상


현시대에 필요한 인재상을 앞서 나온 내용을 바탕으로 “먹고사는 문제”에 대입하여 다시 정의해 보면, 문·이과 융합적이면서 스스로 창의성을 발휘하여 새로운 것을 만들어낼 수 있는 인재입니다. 이는 세계 산업 구조와 사회 변화의 흐름이 그것을 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애플, 구글, 페이스북 등 미국 실리콘밸리 기업의 성공 신화를 바탕으로, 기술과 인문이 융합된 통섭 학문에 뜨거운 관심이 모이고 있습니다. 경제 분야는 이미 오래전부터 인간의 비합리성을 파악하고 문화와 심리가 결합된 이코노미 2.0을 논의하고 있습니다. 기존 공산품들도 디자인의 심미성과 상징성이 브랜드 가치를 창출하며 시장성을 높이고 있으며, 무형의 서비스까지 사용자 경험을 중심으로 한 비즈니스 모델로 재편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국내 기업과 대학에서도 세계적 시류에 따라 문·이과 융합적이고 창의적 인재를 채용하고 육성하고자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미 알아본 바와 같이 국내 교육 환경의 후진성과 경직된 조직 문화로 인해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교육은 아직 1980년대 산업화 시대의 그것을 벗어나기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교육 시장에서 오히려 먼저 발 빠르게 대응하여 “자기주도학습” 이나 “창의력 수학” 과 같은 이름을 내걸고 있지만, 경제적 여건이 되지 않는 가정에서는 자본과 정보의 부족으로 접하기 어렵기도 합니다. 또 사교육 자체도 지나치게 상업화된 까닭에 옥석을 가리기도 버겁습니다. 자녀의 교육은 한 번 실패했다고 다시 무르기에는 시간이 기다려주지 않기 때문에 부모들은 더욱 보수적으로 기존 교육을 따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다음부터 기술할 내용들은 창의적 인재에 대한 아주 기본적인 가이드입니다. 창의적 생각이 형성되고 훈련되는 과정에 대해 심리, 인지, 발달, 학습, 양육의 측면에서 살펴볼 것입니다. 경쟁적인 삶에 치여 우리가 미쳐 생각하지 못했던 영역에 대한 이야기이며, 이것이 부모님과 청소년들의 삶의 방향을 세우는데 중요한 지침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더 나아가 글의 말미에는 개인과 가정의 노력뿐만 아니라 이상적인 사회상에 대한 저의 생각도 짤막하게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15. 자기주도적 삶


깨어있는 삶, 융통성 있는 삶


문·이과 융합적이고 창의적인 인재를 다시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자기주도적인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기주도라는 말이 너무 광범위하고 오해의 소지가 많은 까닭에, 사회적 관점에서 풀어 말한다면 “깨어있는 삶” 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습니다. 또 깨어있다는 것이 지나치게 외골수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면 “융통성 있는 삶” 이라고도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요지는 나의 주관을 가지고, 타인의 생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되, 다양한 관점에서 사건과 사물을 바라보며, 특정한 사상이나 대상에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육은 지금까지 공동체를 중심의 조직 질서를 강조하였고, 그 속에서 자연스럽게 상하 관계를 습득하였습니다. 가정이든 회사든 나보다 위인 사람과 아래인 사람으로 나누었고, 그 관계를 바탕으로 행동 역할이 정해졌습니다. 물론 조직은 여러 사람이 모여 협동하며 존속되므로 조직 내 위계 관계는 필수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는 한 번 정해진 상하 관계를 영속적이고 불변한 것으로 생각합니다. 회사에서 부하인 사람을 회사 밖에서도 부하인 것처럼 대하고 부려먹습니다. 업무적으로 아래인 사람을 인격조차 아래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손 아랫사람은 그런 문화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고 만약 그에 대항하여 목소리를 내면 회사 내 따돌림을 당하고 인사고과에 불이익을 받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군대는 이런 문화를 가장 잘 보여주는 곳입니다. 군대는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일을 하는 특수 조직이기 때문에 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일이라도 상급자의 명령에 의문을 품거나 항거하지 않고 수행해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은 6·25 이후 기업들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조직 문화의 상당 부분을 군대의 것을 차용하였습니다.


체계화된 기업 문화라는 것이 전무하던 시절, 일을 명령하고 처리하는 절차를 만들기 위해 일본이 남기고 간 군대의 조직 체계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군대 특유의 극단적인 상명하복 문화까지도 흘러 들어왔고, 한국 고유의 집단주의 성향과 어우러져 지금의 문화를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군 장교 출신의 취업자들은 장교 입사 전형을 따로 채용하는 이유 중 하나는 여전히 많은 기업들이 군대식 문화로 소통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상명하복 문화는 교육 시스템에도 고스란히 스며들었습니다. 선생과 제자가 학습 내용을 전달하고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선생이 알려주는 지식은 무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한다는 암묵적 동의가 깔려있는 것입니다. 물론 아직 사회화가 부족하여 법과 질서를 배워야 하는 시기의 학생들에게는 어느 정도 그러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생각이 깨어나서 사고해야 할 사춘기 이후에도 상명하복의 방식으로 학생을 가르친다는 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책을 보고 공부하는 과정에서도 교과서와 참고서에 나온 것을 그대로 외우는 암기식 학습도 그 맥을 같이합니다. ‘사과는 과일이다.’라는 교과서 지문을 읽을 때 마치 선생님이 알려준 것처럼 스스로의 판단 없이 머리 속에 집어넣는 것입니다. 이렇게 책에 있는 그대로를 외워서 학습하는 학생은 ‘사과’는 오로지 ‘과일’이라는 생각의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이를 응용하여 새로운 것으로 만들어내는 일을 하기 어렵게 됩니다.


그리고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교 저학년부터는 눈에 보이는 물리적 대상뿐만 아니라 권리, 의무, 정의, 사상 등과 같은 추상적 개념을 학습하게 되는데 그런 개념 조차도 무비판적 암기식 학습을 한다면 그 폐해는 심각해집니다. 이때 배우는 내용들은 나와 내가 속한 사회를 이해하고 적응하기 위한 기초 지식을 쌓는 단계입니다. 교과서에 나온 지식들은 사회라는 것을 인식하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대상으로 하며, 더 중요한 목표는 교과서의 지식을 활용하여 책 보다 훨씬 더 복잡한 진짜 현실을 이해할 수 있는 시야를 갖추어야 하는 것입니다.


중세 기독교에서 신봉했던 천동설이 갈릴레이의 지동설로 교체되었고, 만병통치약이라고 생각했던 방사능 원석들이 몸에 무척 해로운 물질이라고 밝혀졌듯 세상은 늘 변화하고 있으며, 현대 사회로 올수록 인류의 지식 발전과 변화 속도는 기하급수적으로 빨라지고 있습니다. 불과 30년 전이었다면 교과서에 쓰여 있는 정형화된 지식만 활용해도 일생을 유용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1년만 뒤쳐지더라도 더 이상 시대에 적응하기 어려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남들의 생각에 따라 휩쓸려 살아가거나 교묘하게 이용당하는 삶을 살게 될 지도 모르는 것입니다.


국내의 중·고등 교과 과정도 마냥 손을 놓고만 있지는 않았습니다. 세계적 흐름에 맞추어 융합적, 창의적 인재 양성 정책들을 추진하였고, 과목 통합적 문항으로 출제하는 수능 시험, 입학 사정관 제도, 융합형 인재 교육(STEAM) 제도, 집중이수제, 자유학기제 같은 제도들이 그 일환으로 제시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현장 실정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보여주기 식 정책 추진은 일선의 교사들과 학생 학부모만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여전히 학생들은 단순 외우기 식 공부로 학창 시절을 보내고 있으며, 대학에 가서도 교수가 알려주는 지식을 무비판적으로 외우며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회에 진출해서는 내가 생각하여 일을 하지 못하고 남이 시키는 대로만 일을 하는 인재가 되어버렸습니다.


정리해보면 주도적인 삶이란 지식을 습득하는 단계에서부터 ‘나의 주관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들이 알려주는 지식을 한 번 더 생각하고 해석하여 받아들이는 습관’을 바탕으로 훈련되는 것입니다. ‘사과는 과일이다.’라는 명제를 보았을 때, ‘사과는 과일의 용도만 있는 것인가? 향기롭고 보는 것으로도 아름답진 않은가?’와 같은 사유를 통해 ‘사과는 과일이지만 장식품일 수도 있다.’는 생각의 확장을 가져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존의 지식을 융합하여 새로운 것을 창출해내는 과정의 일례이며, 바로 현대 사회가 원하는 창의적 발상의 원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악의적 정보에 휘둘리지 않고 진실을 직시할 수 있는 힘이며, 복잡하고 급변하는 사회를 다면적으로 분석하여 외골수에 빠지지 않도록 하는 힘이기도 합니다. 나를 이용하여 이득을 보려는 자들의 사탕발림에 넘어가지 않게 할 것이며, 내가 당면한 문제에 귀를 닫고 회피하지 않도록 할 것이고, 숲과 나무를 조화롭게 살펴보며 적절한 해결 방향을 찾을 수 있는 힘이 될 것입니다.




16. 학습이란?


학습과 뇌의 작동 메커니즘


학습을 단순하게 이야기하면 새로운 지식을 기억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를 과학적으로 자세히 나누어보면 첫째 외부 세계의 자극을 오감으로 인식하는 과정, 둘째 인식된 자극을 뇌의 신경세포에서 어떤 정보인지 해석하는 과정, 셋째 입수된 정보의 의미를 파악하여 대응 전략을 수립하는 과정, 마지막으로 수립된 전략을 외부로 표출하는 과정의 총체입니다. 여기에서 동일한 자극을 자주 접하거나, 신체에 위급한 정보로써 정서적 반응을 동반하는 경우에는 4가지 과정이 빠르게 이루어지도록 뇌의 신경 세포가 조직되는데, 이를 “학습”이라고 일컫습니다.


태아는 첫 출생 시 약 1천억 개의 뇌신경세포를 가지고 태어나며, 기본적인 생체 활동의 제어나 외부 정보를 감지하고 분석하는 기능을 수행합니다. 그러면서 새롭게 접하는 외부 세계의 정보 중 자주 접하는 것이나 생존에 필수적인 것들에 대해 빠르게 반응하기 위해 학습이 이루어지기 시작합니다. 이때 뇌에서는 여러 신경세포가 연합 신경망을 이루게 되며, 어느 한 부분의 신경 세포에 자극이 주어졌을 때 다른 세포가 연쇄적으로 깨어나면서 복합적인 정보를 떠올릴 수 있게 됩니다.


* 도로를 질주하는 소방차를 보았을 때 뇌의 작동 메커니즘

소방차가 사이렌을 울리며 도로를 달리는 장면을 볼 때, 우리는 자연스럽게 ‘어딘가 불이 나서 소방차가 급하게 달려가는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실제 뇌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은 복잡하게 이루어집니다.

먼저 눈을 통해 ‘빨간색 소방차’라는 물체 정보가 뇌의 시각 영역으로 전달됩니다. 다시 정보는 빨간 색깔 정보와 직육면체의 형태 정보로 분리되어 각 부분을 해석하는 영역으로 전달됩니다. 동시에 언어 영역에 정보가 전달되면서 ‘빨간색 소방차’라는 개념을 인식하게 됩니다.

한편, 소방차가 움직이고 있다는 위치 정보와 그곳이 도로라는 정보, 달리는 방향에 대한 정보도 공간 영역으로 전달되면서 ‘빠르게 이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파악합니다. 청각을 통해서는 사이렌 소리가 감지되고 뇌의 청각 해석 영역이 기능합니다. 소리 정보는 연쇄적으로 뇌의 전두엽에 전해져서 지금까지 경험해 온 바에 따라 ‘비상 상황’이라는 인식을 하게 됩니다.

위에 나열된 정보들은 거의 찰나에 뇌의 각 영역들을 연쇄적으로 자극하며, 최종적으로 뇌의 전두엽에서 이것들을 종합하여 ‘어딘 가에 불이 났나 보다.’라는 추론을 하게 됩니다. 만약 소방차가 달려가는 방향이 우리 집이나 아는 사람의 집 근처라면, 또 다른 정보들이 같이 엮이면서 걱정과 두려움의 정서도 유발시키게 됩니다.


학생들이 공부를 할 때에도 동일한 방식으로 뇌가 작동합니다. 새로운 단원을 공부하기 위해 교과서나 참고서를 펴는 순간, 책에 있는 문자 정보들이 인식되고 언어 영역을 활성화시켜 단어의 의미를 떠오르게 됩니다. 이것들을 문장으로 연결하여 그 뜻과 의미를 파악하는 것은 뇌의 전두엽에서 담당합니다.


그다음은 새 단원의 처음 접하는 개념들을 머리 속에 넣을 차례입니다. 보통의 학습 과정은 예전에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좀 더 심화한 내용의 개념 정리가 나오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아마 공부를 잘하는 학생이라면 위에 기술한 뇌의 작동 과정이 기능하는 동안 예전에 배웠던 학습 지식이 같이 떠오를 것입니다. 여기에 새로운 지식을 덧입혀 생각하고 조립하는 과정을 통해 기존 지식이 발전되거나 수정되는 것이며, 학습이 잘된 지식은 다시 머리 속 어딘가에 잘 저장되어 시험 문제를 접했을 때 명쾌히 떠오르게 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는 학생들 중에서도 우리가 ‘창의적’이라고 하거나 ‘하나를 가르쳐주면 열을 안다.’ 고 평가하는 학생들은 이 과정이 매우 활발히 이루어지면서 공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반면 공부를 못하는 학생은 이 과정에서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의 학생들은 교과서나 참고서에 나온 내용을 노트에 그대로 받아쓰고 외우는 방법으로 공부합니다. 그리고 연습 문제를 많이 풀어가며 틀린 문제를 복기하면서 잘못 파악했던 개념들을 바로 잡으며 마무리를 짓습니다.


이 방법의 문제점은 예전에 배운 내용을 바탕으로 새로운 내용을 숙고하여 이해하지 않고, 새롭게 접한 내용인 것처럼 그저 외우며 머리 속에 저장한다는 것입니다. 뇌의 작동 과정 중 ‘예전에 배웠던 학습 지식’을 활용하지 않고 지식 조각들을 정리하지 않은 채로 여기저기 담아두기만 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도서관에 책을 정리할 때 도서 분류표에 따라 찾아 꺼내기 쉽게 넣는 것이 아니라, 막무가내로 손에 잡히는 대로 쌓아놓는 것과 같습니다. 막상 책을 찾으려고 하면 어디에 있는지 찾을 수도 없고, 전혀 관련 없는 책을 꺼내게 되는 것입니다. (한편 일반적으로 중학교 초반까지는 인지 수준이 덜 발달되어 있기 때문에 암기식 공부가 필요합니다. 이는 뒷부분에 자세히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정해진 답만을 도출하는 방식의 학습에서는, “A=B”라는 내용을 학습했을 때 오로지 “A=B” 만 기억하고 있으면 100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은 “A=B”, “B=C”, “A=C”라는 세 가지 개념을 배울 때, 각각이 새로운 지식인 것처럼 외우면서 공부합니다.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A=B”, “B=C”라는 정보만 주어져도 “A=C”라는 답을 도출할 수 있습니다. 굳이 외우지 않더라도 관계를 잘 이해하고 있다면 스스로 생각하여 답을 낼 수 있는 지식이라는 뜻입니다.


중학교까지는 이런 공부 방법을 연습하는 시기입니다. 암기를 위주로 공부하지만 개념들을 조합하여 새로운 개념을 생각해내는 훈련을 할 수 있도록 교육 과정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고등학교 때에는 학습해야 할 양이 워낙 방대한 까닭에 학교에서 “A=B”, “B=C”, “A=C”를 모두 알려주지 않습니다. 그리고 시험 문제에는 “A=C” 가 참인지를 물어보며 학생의 학습 수준을 평가합니다.


대개 중학교에서 고등학교로 넘어가는 시기에 성적이 수직 하락하는 학생들이 이 패턴에 적응하지 못하는 케이스입니다. 공부하는 방법을 변화시켜야 할 시기에 적절한 가이드를 받지 못하여 초등학교 때 했던 외우기 식 학습법을 고수하는 것입니다. 중학교 때는 밤늦게까지 라도 공부해서 시험 분량을 머리 속에 넣을 수 있었지만 고등학교 때에는 하루 24시간을 공부하더라도 외울 수 없는 양이 주어지게 되어,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해도 성적은 떨어지기만 하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 과학 : 여름철의 기후를 공부하는 메커니즘

과학 교과 중 여름철의 기후 대해서 공부한다고 했을 때, 먼저 물질의 비열과 공기의 대류현상에 대한 지식을 알고 있어야 합니다. 간략히 적어보면 바다는 육지에 비해 비열이 높은 물로 채워져 있으므로, 육지의 공기는 빠르게 데워져서 상승하게 되고, 바다의 공기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못하므로 하강하게 됩니다. 그러면 공기가 내려오는 압력으로 바다 쪽은 고기압이 형성되고, 육지는 저기압이 형성됩니다. 그다음은 육지 공기가 올라간 공간을 메우기 위해 바다의 공기가 불어오게 되고, 그로 인해 바다 쪽의 바람이 불어오는 기후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도출되는 지식은 매우 다양합니다. ‘공기는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흐른다.’, ‘여름은 바다에서 바람이 불어온다.’, ‘한국은 태평양이 남쪽에 위치하므로 여름철엔 따뜻하고 습한 바람이 불어온다..’, ‘태풍이 여름철에 불어오는 이유도 같은 맥락이다.’ 등의 것들입니다.

고등학교부터 실시하는 모의 수능 시험에서는 과정에서 도출되는 지식을 다른 교과와 연계하여 문제를 제시합니다. 기후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을 접목하여 진위를 물어본다 던지, 한국의 지형이 아닌 남반구의 여름철(1~2월)의 기후를 물어보는 것입니다. 그저 외우는 방법으로만 공부했던 학생들은 기후와 연관된 역사적 사건을 외워야 하고, 남반구의 여름철 기후를 또 외우느라 공부할 시간이 부족해지는 것입니다.


이런 공부 방법은 자기주도적 삶, 자기 주관을 가지고 다른 사람이 알려주는 지식을 한 번 더 생각하는 습관과 그 맥을 같이합니다. 교과서와 참고서에 나온 지식을 인간 복사기가 된 것처럼 필사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머리 속 구조에 적합하게 변형하고자 하는 그 순간이 바로 ‘한 번 더 생각하는 습관’이라는 것입니다. 또한 스스로 생각하는 과정에서 뇌는 한 번 더 정보를 처리하기 때문에 반복 노출에 의한 학습 효과도 거둘 수 있는 장점도 지니고 있습니다.




17. 무엇을 배우는가?


언어 학습의 중요성


지금까지 학습 과정을 중심으로 우리 뇌의 메커니즘을 살펴보았다면, 이번에는 학습을 통해 배우는 지식의 속성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주요 학습 과목을 크게 분류해보면 언어를 포함한 생각과 사상, 행동을 연구하는 인문사회학이 있습니다. 그리고 물질 세상에 대한 학문, 즉 천체물리학에서부터 양자역학에 이르기까지(인간의 몸을 포함한) 자연계에 나타나는 현상을 연구하는 자연과학이 있습니다. 인문사회학과 자연과학을 통합하여 인간의 사상과 행동을 자연과학적 방법으로 탐구하는 인문사회과학 분야가 있고, 비언어적인 표현으로 인간의 정서와 감수성을 연구하고 추구하는 예술·체육 관련 학문들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어릴 때에는 사회 구성원에게 공통적으로 요구하는 기초 지식과, 심도 있는 학문을 공부할 때 필요한 기반 지식을 배우기 위하여 “국민공통 기본교육과정” 의 공교육이 의무로 시행됩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학문은 국어(언어) 영역인데, 그 이유는 어떤 학문을 막론하고 지식 습득을 위해서 언어 커뮤니케이션이 기본이 되기 때문입니다.


언어 학습을 간단히 생각하면 한글을 배우고 문장을 이해하며 구사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은 가장 핵심적이고 인간의 삶 전반에 큰 영향을 끼치는 과정입니다. 사람은 어떤 수준의 언어를 구사하느냐에 따라 생각의 범위, 지식수준, 도덕 성향, 정서적 성향, 문화적 정체성이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생각의 범위는 그 사람이 소속된 국가와 문화권에서 공통적으로 공유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사회 문화는 국가 제도 수립과 시행에 중요한 요인이 되므로, 이 시기의 언어 학습은 그 사람의 사회 적응력까지도 결정할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 적응력이란 집단생활에서 적절한 역할 수행을 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는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이는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사람인지 평가하는 가장 큰 기준이며,그 사람의 행복 수준을 판단하는 핵심 지표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렸을 때 언어 학습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지속적으로 학습할 수 있는 능력, 타인과의 관계 설정 능력, 개인에 대한 긍정 해석 능력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며, 어렸을 때에 제대로 형성되지 않는다면 그다음의 기회는 거의 없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어 학습은 언어를 많이 구사하며 소통해 보는 것이 첫째 방법이며, 책을 읽고 부모님·선생님과 다양한 대화를 나누는 독서 활동을 통해서도 훈련할 수 있습니다. (언어 학습의 중요성은 이미 “한국의 교육 주체들 – 가정” 편에서 다루었습니다.)


* 언어는 생각의 프레임을 결정한다.

영어에 “나”를 표현하는 단어로 “I, my, me, myself” 의 4가지 형태를 사용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위의 단어들이 쓰인 영문을 한국어로 번역할 때 주격, 소유격, 목적격의 형태로 쓰인 “I, my, me” 는 크게 위화감이 없습니다. 그런데 “myself” 는 그 의미를 한국어에서 정확히 표현하기가 어렵습니다. 문법적 정의로 재귀대명사라는 명칭을 쓰지만 사실상 한국어에서는 사용되지 않는 용어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개인을 중심으로 독립적인 문화를 발달시킨 서양의 사고방식과, 공동체를 중심으로 집단적인 문화를 발달시킨 동양의 사고의 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myself”는 자신을 타인과 구분하고 나 자신을 탐구하기 위한 목적에서 생겨난 단어입니다. 반면 자신을 드러내는 것을 금기 시 했던 동양권에서는 필요가 없는 단어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단어를 알고 있느냐, 자주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평소 생각과 사상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소유의 개념을 알고 난 뒤에는 집안의 물건을 누구의 것으로 지칭하고 자기 것을 더 챙기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와 유사하게 다른 문화 상으로 인해 단어를 다르게 사용하는 예로써 “우리 집”이라는 표현을 영어로 바꿔 쓸 때에 단어 그대로 “Our house”라고 하지 않고 “My house”라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주어+목적어+동사”로 이어지는 한국어와 “주어+동사+목적어”로 이어지는 영어의 차이도 생각 방식을 크게 좌우합니다.

한국어는 “주어”와 “목적어”가 먼저 연결되면서 자신과 어떤 대상에 대한 관계가 먼저 표현되고 그다음 동사가 문장의 마무리를 짓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밥을 (먹는다.)”라는 표현을 할 때 “먹는다.”라는 표현을 하는 것 보다 “나” 와 “밥” 의 관계 설정을 더 우선한다는 것입니다.

반면 영어는 “주어”와 “동사”가 먼저 연결됩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다는 표현이 우선이며, 그러고 나서 어떤 대상에게 행한 것인지가 나타납니다. 위의 예시를 다시 써보면 “I eat (food.)”처럼 표현됩니다. “I”라는 주체가 “ate” 했다는 사실이 중요하게 표현하는 것입니다.

이를 정리해보면 한국어는 관계 중심의 정적인 언어라 할 수 있고, 영어는 주체 중심의 동적인 언어라 할 수 있으며, 이것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과 행동의 성향에 큰 영향을 주는 것입니다.


* 언어 훈련, 독서 활동과 도덕성의 발달

도덕성은 자기 충동을 억제하고 친 사회적 행동을 하여 타인의 조력을 얻을 수 있게 하는 능력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도덕성이 중요한 이유는 개인의 영속성과 공동체의 결집을 위해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도덕성의 발달을 제대로 하지 못한 사람은 개인과 사회에 피해를 주는 존재가 되고, 비도덕적인 개인이 많은 사회는 상호 불신으로 붕괴할 가능성이 높아집니다.

영·유아기부터 학령기 전반에 이루어지는 언어 훈련은 도덕성의 발달에도 밀접한 연관을 갖습니다. 부모와 자녀는 밀접한 관계 속에 상호 대화와 소통을 하며 정서적 경험과 언어를 공유합니다. 그리고 아이는 언어 이상의 행동을 주고받으면서 해야 할 것과 그렇지 않아야 할 것, 신체적 즐거움과 고통을 경험합니다. 이런 경험들은 나뿐만 아니라 부모도 같이 느끼는 것으로써 공감 능력이 발달하는 기초가 됩니다.

그런데 가장 원시적 형태의 도덕성은 나의 고통과 타인의 고통을 공감하는 데에서 출발합니다. 공감 능력을 통해 타인의 즐거움과 고통을 이해할 수 있으므로 내가 싫어하는 것을 타인에게 행동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곧 나의 행동을 제어하고 타인을 이롭게 하려는 행동이라 표현할 수 있으며 도덕성의 행동적 정의와 같은 의미입니다.

그중 독서 활동은 언어 훈련과 동시에 도덕성을 발달시키는데 굉장히 효과적인 방법입니다. 부모와 자녀가 상호 소통을 통해 경험을 공유한다고는 하지만, 개인이 경험할 수 있는 사건은 매우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경험 공유에서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다양한 감정을 느끼는 것인데, 일상적인 생활만으로는 다양한 정서적 체험을 하기엔 한계가 있습니다.

독서 활동은 책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나 필자의 생각과 행동을 통해 그들의 정서를 간접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그리고 그 이야기의 범위는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일상생활이 부족한 다양성의 부분을 보완할 수 있습니다. 책을 읽고 책 속 주인공들이 어떤 감정을 느끼고,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등의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감정을 공유하는 것으로,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그릇을 넓힐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언어를 중심으로 하여 인문사회 분야의 지식을 학습합니다. 국어, 사회, 역사, 도덕과 같은 과목들이 대표적이며 좀 더 언어를 잘 구사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 개인 내면에 대한 이해, 사회의 법과 질서, 공동체의 정체성 등을 익히면서 정서적 건실함과 사회적 자아를 형성하게 됩니다.


한편 자연과학 분야에서는 자연 세계를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기초 지식을 습득합니다. 자연현상을 바르게 분석할 수 있는 힘과, 재현 가능성의 탐색, 최종적으로 이를 응용하여 미래를 예측하여 인간에게 편리한 도구를 만들 수 있는 지식입니다.


그 과정에서 사용되는 과학적 연구 방법론은 나의 지식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검증하는 도구입니다. 개인이 혼자 연구하던 영역을 집단이 함께 연구가 가능토록 하였으며 이전보다 훨씬 빠르고 다양한 분야 발전에 기여하였습니다. 서양에서는 중세 이후 자연 과학 분야가 눈부시게 발전하였고, 그 결과 현대 인류의 고도 기술산업 사회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주체 중심의 동적인 언어관을 가진 서양 사람들이 자연 세계 탐구에 더 적합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인문사회학과 자연과학은 다시 인문사회과학으로 통합됩니다. 사람과 사회의 행동을 과학적 연구 방법론으로 분석하여 미래를 예측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런 시도는 이전에도 계속 이루어져 왔으나 1980년대 이후 생리학, 의학, 통계학, 정보통신 기술의 고도화에 힘입어 정치, 사회, 경제, 경영, 심리 등의 학문들이 사회과학의 범주에서 재탄생되고 있습니다. 그 영향으로 기존 인문사회학과 자연과학도 서로 융합하며 새로운 학문으로 재편되고 있으며, 현대 사회의 기업들이 바로 이 경계에서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무엇을 배우는 가에 대한 질문도 문·이과 융합적이고 창의적인 인재가 지향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배우는 지식은 언어 학습으로 시작하여, 각 분야를 두루 접하면서 분야를 넓히게 되며, 다시 그것을 융합하여 통합하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분야의 특수성에 따라 누군가는 특정 전공을 심도 있게 연구해야 하지만, 결과적으로 그것들을 종합적으로 연결하여 공공의 이익을 창출하는 것이 최종 목표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 IQ 검사의 오해, 똑똑하다는 것

뉴스 기사를 접하다 보면 한국 사람들은 IQ 검사에 대한 절대적 신뢰를 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명문대 출신 연예인이 나올 때면 “멘사 출신의 천재 연기자”라는 수식을 자주 사용하고, 부모들도 학교에서 행하는 IQ 검사의 결과에 매우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우스갯소리로 IQ 검사가 100 이하가 나와서 공부를 포기했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 걸 보면 얼마나 한국 사회가 IQ 검사를 신뢰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IQ 검사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검사 결과값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저 130 이상이라면 똑똑한가 보다 하고, 150 이상이라면 정말 머리가 비상한가 보다 하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IQ 검사는 그렇게 단순하게 구성되지 않으며 여러 종류의 검사들 사이에서도 지능 검사의 실용에 대한 의견이 분분합니다.

IQ 검사를 처음 개발한 목적은 세계 대전 당시 징집 병사들의 지식수준을 쉽게 평가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전쟁 통에 아군과 적군을 구분하지 못하고 아군을 쏘아 살상하는 사례가 많아지자, 적어도 피아를 분별할 수 있는 수준의 사람인지 아닌지를 평가하려는 목적이었습니다. 그 후 다양한 분야에서 IQ 검사의 유용성을 파악하여 도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는데 IQ 검사가 내어주는 결과값이 다양한 분야에서 원하는 인재의 구분 기준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초창기 검사는 대개 언어를 중심으로 한 질의응답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단순히 학력이 높고 배운 것이 많으면 높은 IQ가 나오고, 배운 것이 미천하면 낮은 IQ가 나올 수밖에 없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런 IQ 검사를 가지고서 흑인과 백인의 지능지수를 비교했더니 백인이 더 높게 나왔다는 결과를 통해 인종차별이 정당함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인종차별이 있던 시절, 흑인들의 교육 환경이 열악하고 교육 수준이 낮았다는 점을 감안하지 않고 악의적으로 검사를 잘못 쓴 사례인 것입니다.

그 후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검사들을 개발하였지만, 기본적인 언어 형태의 검사를 완전 배제할 수는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시행하는 IQ 검사도 학생들의 현재 성적과 비례하는 결과가 나오는 경우가 많았고, 그렇다고 이것이 ‘머리가 좋기 때문에 공부를 잘한다.’라고 단정 짓기는 어려웠습니다. 이해력이 높고 언어 구사력이 뛰어난 학생이 오히려 그렇지 못한 학생보다 IQ 검사 결과가 낮게 나온다 던지, 다소 둔하지만 열심히 공부를 하여 성적이 높은 학생이 IQ 검사 결과가 높게 나오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최근 일각에선 IQ 검사의 목적을 두고 새로운 관점으로 해석하여 EQ(감성지수), SQ(사회지수), MI(다중지능지수)와 같은 검사를 제안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IQ=똑똑함”이라고 생각하는 관념이 매우 구태의연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합니다. 머리가 좋고 똑똑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고 성공할 수 있음을 예측하는 다양한 지표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던 것입니다.

한편 우리가 이야기하는 “똑똑함” 도 단순히 IQ 검사 결과값 하나로 볼 수 있는 게 아니라 다양한 층위로 볼 수 있음이 새로운 연구들을 통해 드러나고 있습니다. 아직 구체적으로 이 분야를 특정한 연구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제가 개인적으로 여러 최신 연구 도서를 보며 생각한 똑똑함의 범주를 잠깐 소개해보고자 합니다.

1. 정보 처리가 빠른 것의 똑똑함 : 신경계의 전달 속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특정 신경 세포가 자극을 받았을 때 얼마나 빨리 다른 신경 세포에 정보를 정확히 보낼 수 있는가에 대한 부분입니다. 어떤 정보를 받았을 때 그에 대한 판단을 빠르게 내리는 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2. 자극받은 정보와 관련된 정보를 다양하게 떠올리는 것의 똑똑함 : 특정 신경 세포의 자극이 다른 신경 세포로 확산되는 범위와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어떤 정보를 바탕으로 다양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고 여러 관점으로 파악할 수 있는 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3.(경험과 직관에 따라) 다양한 정보 중 문제에 적합한 부분을 추출해내는 똑똑함 : 경험에 의해 학습되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다양하게 떠오른 아이디어의 바다에서 주어진 자극에 가장 적합한 정보만을 추려내 선택하는 능력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4. 자극받은 정보와 다른 정보를 빠르게 전환하는 똑똑함 : 얼마나 집중력을 잘 유지할 수 있으며, 반대로 한 곳에 집중하다가 다른 곳으로 빠르게 집중 전환할 수 있는지의 부분입니다. 우리 뇌의 편도체에서 관장하는 작업 기억 영역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주제의 사건을 짧은 시간 내에 동시에 처리해야 하는 변호사, 변리사들에게 매우 중요합니다.

5. 나의 사고 과정을 타인에게 논리적으로 잘 풀어내는 똑똑함 : 위에 나열된 지적 능력이 언어로 전환되는 과정을 의미합니다. 내가 생각한 것과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은 별개의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단어를 알고 있는지, 문장 구사력은 어떠한지 등과 관련이 깊으며, 이 또한 훈련으로 향상이 가능합니다. 더 나아간다면 타인의 관점과 수준에 맞추어 적절한 문장을 구사하는 능력까지도 포함할 수 있을 것입니다.




18. 영·유아기 발달과 자녀 양육


부모와의 신뢰 관계에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된다


영·유아에서 청소년까지 이르는 시기는 몸이 급격하게 성장하는 것처럼 뇌도 빠르게 발달합니다. 아기가 갓 태어나자마자 걷고 뛸 수 없듯이, 뇌 정보 처리 속도와 수준도 원시적인 능력만을 갖습니다. 출산 초기에 성인의 수준으로 기능하는 감각은 후각뿐이며, 미각과 촉각은 그다음으로 발달하고, 시각과 청각은 6개월이 되어서야기본적인 기능을 갖추기 시작하여 성인의 수준에 이르기까지는 12개월 정도가 필요합니다. 이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오감을 모두 사용하여 외부의 정보를 모아 통합하는 능력이 생기는 것입니다.


영·유아기 때는 대부분의 시간을 부모와 함께하며 사회성을 발달시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성은 가장 기초적인 단계로써 ‘자신과 외부 대상’ 간의 관계 패턴을 설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때 가장 중요한 핵심 과제는 인과적인 신뢰 관계를 바탕으로 정서적 안정성을 획득하고, 초기 수준의 만족 지연 능력을 습득하는 것입니다.


아기가 어머니의 따뜻한 뱃속 세계에 있다가 갑자기 차가운 바깥세상으로 나오게 되면, 세상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은 무의식의 상태에서 자신과 세상이 분리되어 있음을 경험하게 됩니다. 늘 들리던 어머니의 심장 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만 호흡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 어머니의 품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하는데, 젖을 먹이고 안아 재우는 활동을 하면서 접촉과 분리의 경험을 반복합니다. 아기는 자신의 의사소통 도구로 울음을 사용하고, 어머니는 부름에 부응하여 적절한 반응을 해주는 것입니다. 이 관계는 아기의 특정 행동이 기대하는 결과를 받게 되는 심리학의 행동주의적 관점의 강화로 설명됩니다. 어머니와 떨어져 있더라도 내가 기대한 바에 따라 상황을 제어할 수 있다는 신념으로 정서적인 불안함을 인내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한편 언어 구사 능력이 어느 정도 생기고 부모와 소통이 가능하게 되면, 적절한 행동 통제나 즉시적인 욕구를 참음으로써 더 좋은 보상을 얻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쉽게 설명하면, 지금 바로 사탕을 먹고 싶어 투정을 부리는 아이에게 ‘조금만 있다가 더 맛있는 케익을 사주겠으니 참으라.’ 고 약속하는 것입니다. 아이는 더 큰 보상인 케익을 얻기 위해 투정을 부리지 않고 참게 되는데, 그 결과로 부모로부터 케익을 얻고 칭찬을 듣게 되면 이다음에도 자신의 즉시적 욕구를 제어(=만족 지연 능력)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칫 부모가 약속한 것을 잊어버리거나 별 것 아니라는 식으로 치부하여 약속을 지키지 않게 되면 아이와 부모 간 신뢰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이렇게 부모로부터 시작된 신뢰 관계는 나와 친구, 나와 과제, 나와 사회로까지 연장됩니다. 놀고 싶은 것을 참고 공부를 했을 때 그만큼 성적을 거둘 것이라는 기대감, 잠깐의 편리함을 참고 교통 법규를 지켰을 때 그만큼 안전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도록 하는 원천인 것입니다. 내가 어떤 행동을 했을 때 결과를 얻을 것이라는 기대감은 실제 행동을 옮기게 하는 매우 중요한 동기 요소의 하나이며, 이것이 좌절된 상황에서는 아무리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해도 성공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하기에 행동에 옮기지 않게 됩니다. 로또 복권을 사서 1등이 되면 경제적으로 부유해질 것임을 알지만, 매주 로또 복권을 사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학습적인 면으로는 초등학교 입학 전의 언어 학습이 제일 중요한 과제입니다. 모든 학습의 기초가 되며, 긍정적인 정체성 발달, 도덕성 및 사회성 발달 등 개인의 전반적인 성장 과업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언어 학습과 관련된 자세한 내용은 “한국의 교육 주체들 – 가정편”, “무엇을 배우는가?” 편에서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19. 학령기 발달과 자녀 교육 : 초등학교


시간 관리를 바탕으로 한 역할 훈련


초등학교 시기는 가정을 벗어나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특히 또래 집단 내의 권력관계와 그에 따른 사건들을 경험하는 시기입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고 스스로 행동하여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받습니다. 학습적인 면에서는 정해진 시간에 맞추어 수업을 하고 쉬는 시간을 갖는 생활을 하면서, 앞으로 12년을 함께 할 규칙적 학교 생활을 처음 경험하게 됩니다.


초등학교의 공부는 영·유아기 때부터 계속해온 언어 학습은 꾸준히 하면서, 수학·사회·과학에서 다루는 기초적인 지식들을 암기하는 방식의 학습이 이루어집니다. 이 시기의 아이들은 아직 성인 수준의 추상적 사고 능력이 부족하며, 새로운 개념들을 만들어낼 만큼의 기초 재료 지식을 갖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런 까닭에개념을 이해하고 응용하는 형태의 공부를 하기 보다는, 기초적인 정보를 외우고 풀이하는 형태의 공부를 많이 접하게 됩니다. 이는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 스스로 생각하며 공부하는 훈련을 하기 위해 필요한 재료들을 쌓는 과정인 것입니다.


한편 초등학생은 자기 행동의 제어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 관리를 바탕으로 한 역할 훈련을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학교 가야 할 시간과 집에 올 시간, 수업 시간과 쉬는 시간, 집에서도 숙제를 할 시간과 휴식을 취할 시간을 정하고 각 시간에 해야 할 역할을 정확히 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시간마다 해야 할 역할을 분명히 정하고 그 약속을 지키려 노력하는 것입니다. 물론 시간을 완벽히 지키기는 어려운 일이므로 그러지 못할 경우에는 충분히 그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반면 주의해야 할 것은 흔히 집에서 하루에 1시간씩 공부하기로 약속해 놓고, 부모의 욕심으로 ‘오늘은 30분만 더 공부하자.’며 회유한다 던지, 놀기로 한 시간임에도 부모가 기분이 언짢아서 ‘방에 들어가서 공부나 하라.’ 고 다그치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하면 자녀가 공부를 30분 더 하는 모습은 볼 수 있겠지만, 각 시간마다 해야 할 바른 역할의 약속이 무너지는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다. 이것을 반대로 학생 입장에서 보면 수업시간에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 추상적 사고 능력

추상적 사고 능력은 학령기 전반에 걸친 발달 및 공부 방법의 차이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포인트입니다. 추상적 사고란 현실에 관찰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닌 정의적 개념을 이해하고, 개념들 간의 공통점·차이점을 바탕으로 범주화를 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권리와 의무라는 개념은 주체와 대상 간 주고받아야 할 눈에 보이지 않는 관계를 의미하는데, 이것이 대인적 차원, 사회적 차원, 자연적 차원으로 확장되면서 권리와 의무라는 개념을 각 관점에 따라 이해하고 적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발달 심리학자인 피아제가 제시한 인지발달이론에 따르면 “형식적 조작기”에 해당하는 단계이며 경험하지 않은 일에 대한 가설을 설정하고 일상 경험의 한계를 넘어 추리하고 검증을 할 수 있는 시기라고 하였습니다. 형식적 조작기가 속하는 나이는 대략 12세 이후라고 파악하고 있으며, 이를 학령기에 대비해보면 발달의 차이를 고려하였을 때 대개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저학년에 이르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상적 사고 능력이 갖추어졌을 때와 그렇지 못하였을 때를 기점으로, 학습 부분에서는 어떻게 공부하는 것이 효과적인가가 달라지게 됩니다. 이 능력이 덜 발달된 초등학교 시기에는 생각을 확장할 수 있는 재료를 암기하는 학습 과업이 주로 이루어지고, 중학교 시기에는 모아진 재료를 바탕으로 추상적 사고를 하는 훈련이 더 적합한 것입니다. 고등학교에 가면 비로소 추상적 사고 능력을 사용한 학습이 주로 이루어지는데, 수능 문제나 논술형 시험 등을 통해 추상적 사고 능력을 통한 학습 성과를 평가하는 것입니다.

심리적 관점에서는 추상적 사고 능력이 갖추어짐을 기준으로, 자아 정체성을 탐구하고 자신이 소명을 찾아가는 것이 가능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기에는 나의 의지와 부모의 의지를 분리시키지 못하고, 부모가 가진 생각의 방향성을 그대로 수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부모의 의지에 따라 학생회장 선거에 출마하거나 보이·걸 스카우트에 참여하는 행동, 장래 희망도 부모가 바라는 직업을 선택하는 양상으로 나타납니다.

중학교 시기가 되면 나의 의지와 부모의 의지를 분리할 수 있게 되고, 나의 행동을 내가 관찰하며 스스로를 평가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면서 지금까지 알고 살아왔던 세상에 조금씩 의문이 생기고, 부모의 말을 그대로 듣고 살아온 것의 회의감을 갖게 되는데 이것을 “사춘기”라고 명명하기도 합니다. 아직 이 시기에는 복잡한 인간관계와 사회 구조를 잘 모르기 때문에 불만이 많으며, 자신의 생각을 논리 정연하고 안정된 감정으로 표현하는 것이 서툴기 때문에 주변 사람들과 다툼이나 불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됩니다.




20. 학령기 발달과 자녀 교육 : 중학교


사춘기와 자아의 완성


중학교 시기의 가장 큰 특징은 사춘기와 2차 성징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사춘기는 추상적 사고 능력이 성인과 비슷한 수준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그로 인하여 학생에게 주어지는 학습 과업과 학생의 정서적 태도가 크게 변화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고등학생이 되기 전 과도기적 단계로써 공부 방법 변화를 조언해 주어야 하며, 정서적 불안함을 포용해줄 수 있는 멘토의 존재가 절실한 시기입니다.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 구조에서는 이 두 가지를 적절히 수행해주는 역할이 전무합니다. 부모들은 그저 학생이 책상에 앉아서 책을 보며, 학교에서 좋은 성적을 거둬오면 공부를 잘하고 있다 생각합니다. 추락한 공교육의 탓에 교사는 지식을 알려주고 평가하는 사람으로 전락해버렸습니다. 학생들의 의문과 불안함은 또래 친구들과의 관계에서만 해소되고, 아직 생각이 덜 여문 아이들끼리 주고받는 대화는 정서적으로 만족될지언정 현실적으로는 빈곤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더욱이 성적에 따라서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으로 평가받는 상황에서는 아이들이 더 큰 상처를 입기 십상입니다.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게 되는 시기에 “성적이 안 좋은 학생 = 나쁜 사람 = 부족한 사람 = … “ 로 이어지는자기 부정의 덫에 갇혀, 평생을 부정적인 가치관을 갖고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교육 구조 아래에서 낙오된 아이들 중 일부는 자기 존재의 가치를 확인하기 위해 대안 행동을 시도합니다.부정적으로 평가받는 자신의 가치를 찾기 위해 또래 집단에서 우월해 보일만한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다른 아이들보다 강해 보이고 싶다.’, 예뻐 보이고 싶다.’라는 생각에 어른들이 하는 술, 담배, 연애, 폭력 등을 따라 하게 되는데, 어른들은 이를 일탈 행동으로 치부하고 더욱 아이들을 곤궁에 처하게 만드는 악순환에 빠지게 됩니다. 참고로 일탈 행동이 가장 극렬하게 나타나는 것도 이 시기인데, 사회 법규와 처벌, 도덕적 잣대가 덜 성장한 채로 자신 조차 제어되지 않은 행동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현 사회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부모가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방법은 학생들이 숨 쉴 곳을 만들어주는 일입니다. 다시 말하면 바른 멘토가 되어주거나 찾아주는 것, 학생들과 충분한 대화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들의 생각을 재단하지 않고, 넓은 마음으로 수용하며 사람 대 사람으로 대화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부모들도 그들의 부모로부터 배운 바가 부족한 것이 현실입니다. 아직 사회 담론은 여기까지 성장하지도 못하였기에 주변의 몇몇 사람들에게만 관심 있는 주제일 뿐입니다. 게다가 점점 더 먹고살기 바쁜 시대가 되면서 바른 부모 역할을 배울 수 있는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21. 학령기 발달과 자녀 교육 : 고등학교


현실을 인식하고 자기 자리를 찾아가는 나이


고등학교 시기의 특징은 질풍노도의 중학교 시기가 안정되어 어느 정도 현실을 수용하고 자신의 역할을 찾아가려 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한국 상황에서는 대학 입시라는 일생 최초이자 최대의 거대 사건이 앞두고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합니다.


학습적으로는 중학교 때 훈련된 추상적 사고를 통한 학습하기 방법에 따라 대부분의 교과를 공부하고 평가받습니다. 그런 까닭에 중학교 때 변화된 공부 방법을 적절히 훈련하지 못한 학생의 경우, 공부 시간은 많이 투자하지만 성적이 곤두박질치는 비극을 경험하기도 합니다.


심리적으로는 자아 정체성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게 되며, 그것을 바탕으로 앞으로 사회 역할을 진지하게 탐색하게 됩니다. 사회적으로도 진로 진학을 탐색하는 과정으로 과업이 주어지며, 대학의 학과를 정하는 것은 가장 현실적으로 와 닿는 주제가 됩니다. 학생들은 ‘어떤 직업이 어울리고, 어느 학교의 어떤 전공을 해야 그 직업을 얻을 수 있을까?’를 탐색하며, 그 목표를 바탕으로 내신과 수능 시험을 준비합니다.


문제는 사회와 기업의 구조가 왜곡되어 있는 상황에서는 이런 기능이 전혀 작동되지 못 한다는 것입니다. 명문 대학 입학이라는 현실적인 목표와 외우기 식 공부 방법의 강요 아래 학생들이 정체성을 찾기 위한 제대로 된 기회도 제공되지 않습니다. 진로와 진학 역시 좋은 학교를 가는 것이 최우선이며, 막연히 돈을 잘 버는 직업을 기준으로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가기가 일쑤입니다.


올바른 진로와 진학 목표의 설정은 자기 정체성을 정확히 찾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싫어하는지?’, ‘나는 무엇을 잘하고 못하는지?’의 생각들을 곰곰이 탐색하는 과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속 이야기되고 있는 바와 같이 모든 명제는 “돈을 잘 버는 직업”이라는 주제 하에 무시됩니다. 하고 싶은 것을 찾았다 하더라도 사회적으로 명예롭지 못하고 벌이가 신통치 않은 직업이라면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람들은 잘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의 구분을 하지 못하는 실수를 자주 범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가 있다 했을 때, 대개는 축구 선수가 되거나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가 되라는 식의 조언을 합니다. 그러나 먼저 파악해야 할 것은 ‘축구를 하면서 어떤 감정이 너를 충족케 하느냐?’를 살펴봐야 합니다. 어떤 아이는 ‘신나게 땀 흘리고 뛰어노는 게 좋아서’이고, 어떤 아이는 ‘다른 친구들과 호흡을 맞추어 팀워크를 이루는 것이 좋아서’라고 할 것입니다. 또 어떤 아이는 ‘축구를 하면 아이들이 나를 우등생 대하듯이 치켜세워주는 것이 좋아서’라고도 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세 아이에게 모두 축구 선수가 되거나 스포츠 중계 아나운서가 되라고 조언할 수는 없습니다.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축구가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마음에서 우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 마음이 더 충족될 수 있는 다른 분야의 진로나 직업을 추천해 주는 것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아이들은 아직 어리고 경험도 부족하기에 자신의 행동과 생각을 정확히 파악하고 표현하는 것이 서툽니다. 올바른 멘토는 아이들이 자기도 표현하지 못하는 생각과 감정을 깨닫게 해 주고, 더 다양한 정보를 제공하여 시야를 넓혀주는 역할을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22. 청년기 발달과 과업


이상과 현실의 괴리


한국의 청년기는 이상과 현실의 괴리가 너무 커서 어느 하나의 과업을 특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 청년이 해야 할 일을 정의하고 있지만, 각자의 가치관에 따라 내용이 천양지차이기에 무엇이 옳다고 동의하기도 어렵습니다. 그런 정의들은 어떤 것은 지나치게 이상적이고 어떤 것은 지나치게 현실적이어서 어느 하나의 생각을 갖고 살기에는 포기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고 소설 모모에 등장하는 회색인간처럼 사는 것이 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현실적으로 청년들에게 주어진 과업은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 스펙을 쌓아 벌이가 좋고 안정적인 직장을 얻는 것, 그리고 결격 없는 이성과 교제하고 결혼하여 가정을 꾸리는 것 정도일 것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가고 싶어 하는 좋은 대학에 합격하고 직장을 얻기 위해 경쟁적으로 공부하고 취업을 준비합니다. 그러면서 남는 시간에 의무적으로 연애하고 결혼 상대를 찾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것이 보통의 삶이라 이야기하고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며 목표하지만, 그 목표를 달성하는 사람들은 사실 소수에 불과합니다. 한국 청년 전체 중 80%는 대학 입학에서 낙오합니다. 나머지 20% 중 80%는 다시 직장을 얻는 상황에서 좌절합니다. 다시 그 나머지인 4% 중 절반 정도의 청년들이 연애와 결혼에 성공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100 명의 청년이 있다면 2명 만이 보통의 삶을 누리고 살며, 나머지 98명은 보통만도 못한 삶을 산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보통의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영원하지는 않습니다. 이 중 절반은 여자라는 이유로 어느 시점에 사회적 위치를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앞만 보며 달려온 탓에 돌아보지 못한 자아 정체성에 혼란스러워하고 놓쳐버린 꿈을 후회합니다.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세상의 모습과 현실의 괴리를 경험하고 좌절하며 지쳐갑니다. 30대 후반이 되는 어느 날 내가 그렇게 경멸하던 직장 상사의 모습이 나와 같음을 발견하지만, 책임져야 할 가족과 삶의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기에 다람쥐 쳇바퀴를 돌 듯 체념합니다.


이상적인 조언으로 ‘꿈을 갖고 도전하라.’는 메시지는 공허한 메아리로 느껴집니다. 젊음과 열정을 빌미로 노동력을 부당하게 착취당하기도 하고, 꿈을 찾아 자신의 길을 개척했던 청년들은 이미 꽉 짜인 사회의 벽에 부딪혀 좌절을 경험합니다. 자본력과 정보력을 가진 기득권의 힘에 밀려 초라한 결과로 도전을 끝맺습니다. 꿈과 도전을 외치고 힐링을 제안하고 내려놓음을 권유하지만 그 또한 누군가의 돈벌이 수단일 뿐 진정으로 청년들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토록 대부분의 사람들이 현실 과업에 실패하고, 성공한다 하더라도 마음이 공허하며, 이상은 이상일뿐인 청년의 삶은 정상이라 할 수 있을 까요? 혹자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고 말하지만, 그것도 고생 후 달콤한 열매가 기약될 때에나 의미 있는 것입니다.




23. 깨어있는 삶, 융통성 있는 삶


청년들과 부모님들에게 드리는 제언


제가 청년들에게(자녀를 키우는 부모들에게도) 제안하는 삶의 태도는 이 사회를 직접 부딪히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깨어 있음과 융통성의 힘을 기르라는 것입니다. 현실과 이상의 중간에서 현실의 이면을 간파하고, 이상의 필요와 허구를 꿰뚫어볼 수 있는 시야를 갖는 것이 이 시대에 가장 절실하게 필요한 과업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사회 변혁을 기치로 들고 일어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회피하지 말고 직면하고 경험하면서 스스로의 주관을 세우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들을 많이 접할 것이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한 번 더 생각하며, 그 말이 옳다면 온전히 나의 것으로 소화하고 옳지 않다면 자신의 다른 생각을 펼치고 정립하는 것입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내가 보고 싶고 듣고 싶은 것만 찾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불편함을 이겨내면서 세상의 비합리적이고, 비인간적이고, 수준 낮고, 더럽고, 불결한 것을 고민하고 사유해보아야 합니다.


다양한 분야와 성격의 사람을 만나는 것도 좋은 방법 중의 하나입니다. 세상은 넓지만 내가 접할 수 있는 사람의 부류는 한정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대학을 다니다가 군대에 입대했을 때 가장 놀라웠던 경험은 세상에 이렇게 대학을 나오지 못한 사람이 많다는 것이었습니다. 무탈한 가정에서, 평범한 중·고등학교를 나오고, 일반적인 대학교를 입학하여 다녔다고 생각하였지만, 내가 몸 담았던 세계는 지극히 일부의 공간이었습니다. 제가 디디지 못한 곳이 더 넓은 세상이었고, 다양한 사람들의 만남은 저의 관점과 시야를 넓게 열어 주었습니다.


대학 시절 지방에서 두 달간 아르바이트 합숙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같이 일하시던 분들이 제 나이 또래가 아닌 30대, 40대 사람들이었는데, 거기에서도 새로운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항상 보고 자랐던 부모님과 일가친척들의 범주에서 벗어난, 1960 ~ 70년대를 가쁘게 살아온 어른들과의 만남이었습니다. 그분들의 생각, 가치관, 행동, 생활은 제가 알고 있던 세계보다 훨씬 넓고 다양했으며, 두 달 간의 아르바이트 생활은 일에서 배우는 경험 이상의 살아있는 지식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이런 경험을 통해서 배움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을 보고 나의 주관에 따라 한 번 더 생각하려 했던 깨어있는 태도였습니다. 그리고 선입견을 버리고 최대한 상대의 이야기를 많이 듣고 그 사람의 입장에서 이해해보고자 노력했던 융통성 있는 태도 역시 도움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말을 곧이곧대로 듣거나, 반대로 전혀 듣지 않고 자기의 주장만을 내세웁니다. 내가 스스로 생각하여 판단하는 노력을 하지 않고 쉽고 편하게 다른 사람의 생각을 나의 생각인 것처럼 덮어 씌웁니다. 혹은 자신의 신념과 맞지 않는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은 나의 마음이 불편하고 못마땅하여 원천적으로 배재하거나 그 사람의 이야기를 흘려듣고 넘깁니다. 심지어 자기 수준과 맞지 않다고 생각하여 깔보고 무시하기까지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은 항상 내가 속한 곳 보다 바깥의 곳이 더 크고 다양하며, 세상은 그들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내가 익숙한 주변의 사람들은 나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진 사람들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소통을 통해서 나를 변화시킬 수 있으며, 그 변화는 내가 속한 곳보다 더 넓은 세계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나의 성장과 발전을 의미합니다. 나를 둘러싼 벽을 내가 스스로 깨고 나오지 않는다면, 우물 안의 개구리처럼 좁은 하늘만을 바라보며 맴돌며 살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삶의 방식은 어느 특별한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타고 태어난 본성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사람은 외부 세계가 나의 생각과 일치하지 않을 때, 그것을 일치시키고자 하는 본성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갓 태어났을 때 나와 엄마의 존재를 분리하고, 총 천연색의 무지개를 보면서 세상의 다양한 색깔을 인식하는 것입니다. 의자에서 떨어지면 아프다는 것을 알고, 물이 끓는 주전자에 손을 대면 뜨겁다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그런 배움이 확장되어 사과가 땅으로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물리 법칙을 생각해냈고, 수평선이 평평하지 않은 것을 보고 지구가 둥글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가 그런 본성이 퇴화되었던 이유는 그동안 너무 얽매인 교육과 문화 속에서 내 생각을 그에 맞추는 것에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너무 그것에 길들여져서 다르게 생각해보고 받아들임을 선택하는 것이 귀찮거나 두려운 것입니다.


사람은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를 일치시키는 방법을 크게 세 가지 전략으로 대처합니다. 하나는 나의 생각을 변화시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외부 세계를 부정하고 나의 세계를 합리화하는 것이며, 나머지는 외부 세계에 눈을 감고 보려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세 가지는 사람이기에 누구나 갖는 특성이며 어떤 선택을 하는지는 그 사람의 성향과 삶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의 세계를 합리화하거나 눈을 감습니다. 나의 생각을 변화시킨다는 것은 지금까지 쌓인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고 스스로에게 사과해야 하는 어려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항상 잘 하기만을 요구받았고 실패를 견딜 수 없는 삶을 살았기에 나에게 미안하다고 할 수 있는 용기가 부족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그리 큰 일도 아닙니다. 생각을 바꾸고 수용하는 것이 나를 우물 안에서 나오게 하는 길이고 성장시키는 방법입니다. 되려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자신에게 더 미안한 일이라는 것을 안다면 나에게 사과할 용기가 생길 수 있지 않을까요?


새로운 정보를 받아들이고, 한 번 더 생각하고, 내가 지금까지 생각해 온 세계를 스스로 변화시킬 수 있는 용기를 갖는다면, 융통성 있는 삶, 깨어 있는 삶, 자기주도적인 삶이 주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사회가 너무 거대하고 단단해서 변화의 기약이 없다 하여도, 자신의 삶을 지금보다 더 긍정적이고 풍족하게 만들어 줄 것입니다.




24. 나의 생각 : 모두가 행복하지 못한 사회


모두가 행복하지 못한 사회


언젠가 뉴스에서 배추가 풍년이라 유통을 시키면 오히려 손해니 그냥 밭을 갈아엎는다는 보도를 보았습니다. 평소라면 지나쳐 넘어갔을 내용이었는데 그 날 따라 유독 먹먹한 마음을 떨쳐낼 수가 없었습니다. 아마 바로 얼마 전 식비를 마련하지 못해 끼니를 거른다는 아이들의 뉴스를 접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왜 세상 어디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데, 세상 어디에는 배추가 돈이 안되니 갈아엎는다고 하는 것일까?’


배가 고파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도, 배추가 풍년이라 갈아엎으면서 괴로워하는 농민도 한국 땅에서 같은 시대를 사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기에 이런 아이러니가 벌어지게 된 걸까요? 왜 갈아엎을 수밖에 없는 배추로 음식을 만들어, 배가 고픈 아이들에게 가져다줄 수는 없는 걸까요?


아마 그런 일을 했다가는 배추를 수확하고 실어 나르기까지 필요한 유통 비용을 농민이 부담했었어야 할 것입니다. 혹여 정부에서 그 비용을 부담했다 하더라도 아마 동종의 식료품을 생산하는 사람들이 잠재 수요가 사라짐으로 인해 손해를 입었을 것입니다.


어느 누구에게 어떤 잘못을 탓할 수도 없고, 어느 누구가 나서서 무엇을 할 수도 없는 사회라고 생각했습니다. 다수의 경쟁이 벌어지는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복지의 이름으로 누군가에게 재화를 주는 순간, 어느 누구에게는 고스란히 불공정의 피해를 입게 되어버리니까요.


정당한 노동과 노력의 대가로 더 많은 이윤을 가져가는 사회인 자본주의는 공급이 턱 없이 부족하던 시절 공정한 분배의 룰로써 적절하게 기능하였습니다. 인간의 이기적 속성을 극대화하여 기술의 발전을 촉진하였고, 지금의 고도 기술 산업 사회를 이룩하는 바탕이 되었습니다. 글을 통해 은연중 계속 비판하였지만, 자본주의는 분명 큰 틀에서 인류 전반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 공헌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도 될만한 시점이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인류의 기술은 인류 전체가 충분히 먹고, 자고, 입는데 필요한 생산력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사람과 짐승의 힘으로만 농사를 짓던 시대를 벗어나 기계를 이용하여한 명의 사람이 몇 만평의 땅에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고, 공장은 기계화·자동화를 통해 적은 사람의 노동력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생필품을 공급해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렸을 적 보았던 미래 세계를 그린 만화에는 인간이 사용하는 재화의 생산은 모두 기계가 담당했고 사람들은 여유로운 삶을 즐기며 아름다운 모습을 그리고 있었는데, 이제 그것이 가능한 시대가 도래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이유는 자본주의적 관념에 모두가 길들여져 있고, 자본주의 시스템으로 이미 사회가 움직이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까지 인정해 준 노동과 노력의 대가를 하루아침에 부정하는 것도 누구에게는 부당한 처사가 될 것입니다. 그렇다고 사람들의 의견을 한데 모아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 내기에는 한국 사회가 너무나도 분열되어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나의 무기를 내려놓는 순간 그 즉시 다른 경쟁자들에게 물어 뜯겨 낙오자가 되어버리는 곳입니다. 이 싸움에서 밀리면 다시는 재기를 못할 정도로 낙오되어 버립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우리 가족과 가문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일이고, 내 자녀의 실패 또한 나의 노후를 위태롭게 하는 일입니다. 그래서 더욱 경쟁적이고 이기적일 수밖에 없고, 나와 우리 가족이 아니면 믿고 기대할 곳이 그 어디에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젠 가족마저도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어가려고 합니다.


과거 일제 식민지 시절의 역사는 민족 고유의 자긍심을 잃게 되고, 사람들로 하여금 천박한 물질적 가치에만 집착하도록 하였습니다. 6·25 전쟁 이후 먹고 살길이 막막한 상태에서 돈벌이에만 매달리게끔 하였습니다. 자신 내면에 있는 가치를 잃어버리고 자신을 드러낼 빛나는 무언가가 사라져 버린 까닭에, 사람들은 돈과 돈으로 치장하는 물건들과 돈으로 살 수 있는 명예에 탐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충분히 먹고살 수 있을 만큼의 돈이 있어도 늘 돈에 굶주리게 되었습니다. 남보다 더 잘나 보이기 위해서 끝도 없이 많은 돈이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미래


헬레나 노르베르 호지라는 스웨덴 사회학자가 쓴 “오래된 미래”라는 책을 보면 자본주의가 사회 공동체를 무너뜨리는 과정이 적나라하게 잘 나타나 있습니다. 시간적 여유가 있는 인도-중국 접경지대의 “라다크”라는 마을에서는 옆 집에 누가 사는지, 그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고 잘하는지 서로가 정말 잘 아는 공동체였다고 합니다. 나의 가치를 모두가 알아주고 인정받고 있기에 애써서 무엇을 뽐내고자 노력하지 않으며 자연스러운 삶을 살 수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력이 이 작은 마을에 유입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청년들은 서구 할리우드 영화와 청바지 문화를 보고 동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외지로 떠나고, 더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시간을 쪼개가며 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자 모든 주민들이 일을 하느라 바빠지게 되고, 이웃 간을 만나고 소통할 시간이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옆 집에 누가 사는지, 그 사람이 무엇을 잘하는지 조차 모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더욱 돈과 물질에 집착하였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최신형 자동차 한 대를 모는 것이 나의 가치를 쉽게 다른 사람에게 보여줄 수 있었습니다. 더 멋진 옷과 더 멋진 집을 가져서 나의 가치를 드높이고자 더욱 경쟁적으로 일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약 30년에 걸쳐 라다크의 변화를 관찰하고 책으로 남긴 작가의 글은 우리 사회의 변화상을 함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아마 우리는 그 시절 다른 선택지가 없었기에 변화의 강도는 더욱 심했을 것이었습니다.


결국 문제의 근본은 먹고사는 문제이고 돈벌이의 문제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직업에 의해 벌이가 좌우되고, 대학에 의해 직업이 좌우되고, 성적에 의해 대학이 좌우되는 사회이기 때문에 그토록 성적에 매달리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사회는 줄 세우기로 사람들을 평가했고 다른 줄에 서려는 사람들을 포용하지 못하였습니다.


더불어 성숙하지 못한 의식 수준은 그런 생각에 더욱 부채질하였습니다. 남들보다 더 좋은 것과 멋진 것을 먹고 입어야 행복하다고 느꼈고, 그렇지 못하면 실패와 좌절감에 빠졌습니다. 지나친 경쟁은 점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로 양극화시켰고, 가진 자들은 가지지 못한 자의 인간다운 삶까지도 희생시켜가면서 더 많은 돈을 벌기 원했습니다.


그렇지만 자본주의 사회를 부정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고, 개인이 사회를 바꾸기에도 힘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최소한의 휩쓸려 가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이 최선의 길이라고 생각하였기에 글을 쓰겠다는 결심을 하였습니다.




25. 내가 바라는 세상


지속가능한 공동체의 길


사회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유지되기 위해서는 다음 세대를 이룰 아이들을 어떻게 키우는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육과 양육의 영역에는 어떤 기득의 논리가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본주의 논리에 따라 가진 것이 많다고 더 많은 기회를 주는 것, 평등주의 논리에 따라 소질이 다른 아이들에게 똑같은 교육을 시키는 것, 이 모두 우리 아이들을 바르게 성장시키지 못하는 장애물입니다.


아이의 부모가 돈이 많고 적음에 상관없이 모두에게 동등한 교육의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만약 먹고 살길 조차 막막한 사람들이라면 아이의 양육 까지도 책임지고 맡아주는 시스템도 필요할 것입니다. 하고 싶은 혹은 할 수 있는 직업으로 인해 경제적으로 궁핍하여 인생을 망치지 않도록 최소한의 생계 지원 대책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각 아이들이 무엇을 공부하고 전공하는지는, 오로지 그 아이들이 가진 관심사와 재능으로만 결정할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부모들의 배경과 욕심으로 아이의 진로가 결정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 제도뿐만 아니라, 사회 전체의 경제 제도 변화와 사람들의 의식 확장도 필요합니다. 나의 자녀가 성공해야만 나의 노후가 안정되는 것이 아니라, 옆 집의 자녀가 성공해도 나의 노후가 안정되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아이가 미술에 소질이 있고, 옆집의 아이가 의술에 소질이 있다 했을 때, 마음 놓고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각자 몰입할 수 있도록 격려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그렇게 되었을 때 아이들이 각자가 좋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여 사회의 크고 작은 모든 곳이 고르게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요?


그 시작은 제도가 갖추어지는 것이고, 사람들이 제도를 신뢰할 수 있는 정부가 만들어지고, 제도가 사회 문화에 뿌리내릴 수 있도록 의식을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사실 북유럽 삼국의 사회민주주의 사상과 제도는 이런 공동체 의식을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공산주의라 하면 단순하게 빨갱이라고 취급하는 수준의 인식이 아니라 더 깊고 넓은 사회적 합의를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말하는 사회는 허황된 꿈이 아니라 지구 상에 어딘가에는 실존하고 있는 세상입니다.


우리 전체의 경제력도 그것이 가능한 수준으로 발전되어 있습니다. 마치 그렇지 않게 보이려는 기득세력과 언론의 왜곡에 휘둘리고 있을 뿐입니다. 북유럽식 복지를 하면 당장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말하는 그들의 뉴스 기사는 전형적인 침소봉대와 통계 속이기의 전략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아이들의 무상 급식을 하려면 지방 재정이 위태하고 파탄 날 것이라고 말하면서, 주먹구구식 해외 자원투자 사업으로 수십 조원을 허공에 날렸습니다. 아무도 그것에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언론들도 그것을 감추기에만 급급합니다. 무상 급식 몇 백억은 나라를 망하게 한다면서, 자원 외교 수십 조는 괜찮아서 그러는 걸까요?


만약 제가 바라는 사회가 이루어진다면, 우리들은 지금까지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삶을 살게 될 거라 생각합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으로 인한 두려움도 사라질 것이며, 각자가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며 자신을 성장시키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성장의 단물은 우리 모두가 공유하게 될 것입니다. 억지로 공부할 필요도 없고, 억지로 상사의 비위를 맞추어가면서 살지 않는 사회, 우리 마음속에 생겨날 여유는 한민족 특유의 공동체 의식을 발판 삼아 찬란한 문화를 이룩하게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김구 선생님께서 생전에 그토록 원하신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 김구, 문화강국론 (백범일지 중)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에 가슴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은 원치 아니한다.

우리의 부는 우리 생활을 풍족히 할 만하고,
우리의 힘은 남의 침략을 막을 만하면 족하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 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목표가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26. 에필로그


어느 정도 사회의 구조를 볼 수 있게 되었을 때,
역시 세상은 그러한 것이라는 생각을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동물들의 세계가 약육강식의 법칙에 의해 움직이는 것처럼 인간의 세계도 약육강식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사회의 비효율을 없애는 것이고 자연도태의 법칙에 부합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 있었습니다.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며 협동할수록 더 크고 어려운 일을 해낼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이었습니다. 제 아무리 잘 나봐야 혼자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으며, 더 큰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의 협력이 필수적이었습니다. 협력의 과정 속에서 누군가는 대통령을 하고 누군가는 청소부를 해야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위치나 인격을 결정하는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어디엔가 꼭 필요로 하는 일이고 그것을 가장 잘 수행할 수 있는 사람이 그것을 맡을 뿐입니다.


똑똑한 사람은 똑똑한 만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빚이 있고, 잘생긴 사람은 잘생긴 만큼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빚이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똑똑하고 잘생겼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이 있기에 그렇게 받아들여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이돌 여가수가 예쁘다 해도 여배우 틈바구니에선 미모의 빛이 바래 지듯이, 우리가 사회로부터 받는 수많은 평가는 결국 다른 사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자본의 이름으로 어쩔 수 없이 누군가에게 더 집중되고 분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 모두가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런데 개인의 능력이 아니라 기득 자본의 힘이 들어가는 순간 모든 것이 헝클어져 버렸습니다. 능력이 없는데도 자리에 오른 사람이 생겼고, 능력이 있는데도 자리에 못 오른 사람이 생겼습니다. 전자는 전자대로 분수에 맞지 않는 자리로 인한 스트레스와 두려움을 느꼈고, 후자는 후자대로 사회에 대한 분노와 자신에 대한 좌절을 느꼈습니다.




이 거대하고 오래된 사회 구조가
어느 하루아침에 변화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길어봤자 100년을 채 살지 못하는 인간의 관점에서는 영원해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달이 차면 기우는 자연의 이치와 같이 언젠가 이 사회도 변화할 것임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인간 사회는 변화의 에너지가 서서히 채워지다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시점에 일순간 뒤집어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히 이렇게 변화가 빠른 시대에는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미 그런 변혁의 징조가 보이고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구체적으로 말 하기엔 지면도 부족하고 주제도 적절치 않아 쓸 순 없지만, 분명 경제 상황, 정치 문제, 대중 집단 심리는 그 징후를 예견해주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현시대의 청소년들에게 바라는 바는 변화하는 지금을 주인 된 입장에서 살펴보고 행동할 수 있는 인재로 성장하는 것이었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이 사회가 변할 것인지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지만, 변화가 일어났을 때 빠르게 캐치하고 그 상황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자기가 가진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기를 바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좀 더 바른 의식을 가지고 있다면 변화된 사회는 제가 지향하는 바람직한 세상이 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면 변화의 흐름은 일직선으로 향해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바다의 파도가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듯이 반복적인 움직임을 보일 것입니다. 그것은 더욱 빨라질 것이지만 분명한 것은 어느 지향점을 향해 점차 변화할 것입니다. 여기에서 작은 변화 하나하나에 일희일비하지 말고 그 안에서 자기중심을 갖고 상황을 대비할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 함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이것 또한 자기주도적 삶, 깨어있는 삶, 융통성 있는 삶을 통해 가능한 것입니다.




사실 이 글을 쓰려고 했던 가장 큰 이유는
청년과 청소년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습니다.


지난 우리의 역사와 사회 구조로 인해 그들이 역사에서 잃어버린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자기중심 없이 그저 어른들이 시키는 대로 경쟁적으로만 살아온 세대, 사회에 나가서는 소모품처럼 쓰이다 버림받는 세대, 그리고 그런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힘 조차도 없는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청년들이 빛도 들지 않는 고시원에 틀어박혀 경쟁률 1000:1의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뉴스를 볼 때마다 너무 미안하였습니다. 그나마 조금 일찍 태어났다는 것 하나만으로 그들보다 덜 노력하고 덜 경쟁했으면서 그들이 원하는 것보다 더 많이 가질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부디 저의 경험과 지식으로 쓰인 이 글이 많은 청년들에게 힘과 희망이 되길 기대합니다. 제 글이 정말 좋다고 생각하신다면 많은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전달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메일이든 P2P 이든 상관없습니다. 어떤 방법이든 저의 글을 많은 이들이 보는 것이 제가 가장 바라는 바입니다.


또 제가 쓴 글에 느낀 바나 하시고 싶은 말, 궁금하신 것이 있으시면 개의치 말고 말씀을 주시면 더욱 좋겠습니다. 이 글 하나로 끝을 맺는 것이 아니라 꾸준히 소통하며 살아있는 글이 되길 바랍니다.




본 글은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를 집필하기 전, 교육 분야를 중심으로 사회적 제언을 써본 내용의 글입니다. 시기상으로 1년 전 즈음에 작성된 글이므로 감안하시고 보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매일 혹은 이틀에 한 편씩 기 작성된 글을 게시할 예정이며, 약 30여 편 분량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저의 글을 처음 접하시는 분들은, 본 글보다 더 포괄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지속가능한 삶을 향해서』(바로가기 링크)의 글도 구독해 보시기를 추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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