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Legacy), 우리가 후세에 남겨줄 수 있는 가장 영속적인 가치
보다 영속적인 가치 4
세월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
불교에서는 세상의 모든 것이 거품이고 허상이니 집착할 것 하나 없다고 가르치지만, 조그만 일에도 일희일비하며 사는 우리 중생들은 온전히 그 가르침을 따르기가 힘들 것입니다.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영원토록 지속되기를 원하고, 좀 더 오래 그것을 소유하기를 희망하는 것이지요.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사람들은 돈, 권력, 명예, 외모처럼 일순간에 스러져버리기 쉬운 가치, 필연적으로 상실될 수밖에 없는 가치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우연이라 하기에는 너무나도 잘 짜인 역사적, 사상적, 문화적 흐름에 따라 물질문명의 극한을 연출하고 경험하고 있는 것이지요.
그중 운이 좋은 누군가는 평생을 큰 기복 없이 살다 가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생의 오르막과 내리막을 경험하며 기쁨과 슬픔 속에 살아갑니다. 사실 평생을 풍족하게 부족함 없이 산 사람도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부족하고 두려운 것 투성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가진 것이 많은 만큼 잃을 것도 많고, 더 많이 가질 수 있는 한계도 더 빨리 찾아왔을 테니까요. 결국 어느 누구도 욕망과 투쟁의 아비규환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고통과 불행, 두려움을 겪으며 살았을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동양의 고전 사상인 도가나 불가에서 말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이나 "공(空)", "무소유(無所有)" 같은 가치가 지금 시대의 혼란을 치유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 모든 것은 각 개인들의 물질에 대한 무한한 욕심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요지경 같은 세상이기 때문이지요. 하지만 "서로 사랑하라"라는 가치로 천년 넘게 인간 세상의 실천 윤리를 전파한 서양 종교조차 지금의 미움과 증오, 갈등을 막아내지 못한 것을 보면, 이러한 극상의 실천 윤리는 아직까지 사람들에게 어떤 울림이나 변화를 주기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좀 더 현실적인 가치로서 사람들의 생각을 전환할 수 있는 중간 단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몇 해 전, "가치 카드"라는 코칭 기법의 워크숍을 참가한 적이 있었습니다. 약 80여 가지의 가치 단어 중 자신에게 가장 와 닿는 카드를 고르며 최후의 한 두 가지를 남겨 자신이 가장 추구하는 가치를 살펴보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저는 가장 마지막에 남길 카드로 "Legacy(유산)"를 꼽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권력, 주도성, 성취감, 평화 등 여러 좋은 단어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서 가장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에게 좋은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가치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많은 시민들이 목숨을 버려가며 프랑스 대혁명을 통해 후세에게 전해준 "자유와 평등"의 가치, 60~70년대 독재 정권에 맞서 싸우며 얻어낸 "민주와 표현"의 가치들이 유산으로 남아있습니다. 앞으로도 이것들이 계승되고 발전하여 더 멋지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는데 밑바탕이 될 것이고요. 그런 점에서 "Legacy(유산)"은 여타 가치 중 가장 지속적이고 광범위한 영향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물론 그 시절에는 이런 숭고한 의미의 유산을 생각하진 않았지만, 내가 이룩해 낸 무엇인가가 더 길고 오래 남아,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줄 수 있는 것이야말로 가장 가치 있는 일이라는 생각에 "Legacy(유산)"의 카드를 골랐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시대의 사람들은 죽고 나면 사라져버릴 가치, 생애 중 1~2년도 지키지 못할 가치에 얽매여 살아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어차피 조금 지나면 색이 바랠 것들에 목을 매고, 소유하지 못함에 불행을 느끼고, 소유하고 있는 자는 그것을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하는 삶이 참 가볍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왜 사람들은 저렇게 살까?"에 대한 질문에 "그보다 영속적인 가치를 스스로 가져본 적이 없어서"라는 답을 내었습니다.
학창 시절을 거슬러 올라가, 사람들은 공부를 하며 지식과 지혜를 습득하는 과정에서 수준 높은 이성적 사고의 능력을 얻습니다. 여기에 삶의 경험들이 쌓여가면서 생각은 더욱 세련되어지고, 그것을 타인들과 함께하면서 멋진 인격이 완성되는 것인데, 보통의 사람들은 그럴만한 기회를 거의 갖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의미를 좀 더 정확히 짚어보면, 단순히 공부를 더 하고 잘 하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공부를 잘하고 지혜를 습득했다는 자기 판단의 이면에는, 다른 사람이 그 사람에게 주는 인정(認定, approval)이 함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혼자 독방에 갇혀 제 아무리 공부를 많이 한다한들, 그것을 알아봐주는 이가 없다면 소용없는 일인 것이지요. 세상과의 상호 소통 속에 자신이 추구한 가치가 의미 있음을 인정받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존재 가치를 확인받는 과정을 경험함으로써, 좀 더 영속적인 지식과 지혜의 가치에 눈을 돌릴 기회를 얻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는 소수의 몇몇 사람들만 제외하고서는 학창 시절의 자기 가치를 인정받는 경험을 얻지 못하였습니다. 성적으로 평가받는 세상 - 혹은 학벌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존재 가치의 가벼움을 경험하였을 것입니다. 아울러 이웃이 해체되고 내 스스로 모든 삶의 책임을 져야 하는 세상에서는 그저 돈과 권력, 겉치장을 위한 물건들로써 자신을 드러낼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래서 금방 사라져버릴 가치들에 목숨을 걸고 한 평생을 바치는, 부질없는 삶을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이렇게 지나치게 소모적인 가치를 인생의 목표로 두는 삶은 얼마나 불행한가요? 게다가 돈과 물질은 상대적인 수준으로 가치가 비교되는 까닭에 가장 최상의 만족이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저 최선을 다해 그것에 얽매이는 것만이 지속적인 만족을 얻는 유일한 방법인 것이지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아지는 것으로 잠깐 행복을 느끼지만, 그조차도 최상의 수준에 이를 수는 없기에 늘 불행하고 허망한 삶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기에 늙고, 병들고, 피부가 늘어지고, 직업을 잃고, 돈이 없어지더라도 내가 계속 가질 수 있는 가치, 이것이야말로 "보다 영속적인 가치"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그것을 "지식"과 "지혜"라고 보았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노후 준비를 위해 노령연금을 들고, 적금을 준비하였지만 저는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일이 곧 노후 준비라는 생각에 그리하지 않았습니다. 교육업의 일을 계속할수록 경험과 지혜가 쌓이고, 이것이 더 가치 있게 빛나면서 사람들이 저를 찾고 도움을 청할 것이라 생각하였습니다. 늙어 죽을 때까지 사람들과 만나 이야기하고 지식을 전해주는 것은, 내 노후를 준비할 수 있으면서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멋지고 가치 있는 삶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영원하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명예나 권력, 외모 같은 것들보다는 영속적이겠지만, 늙어 정신이 흐려져 소위 꼰대 같은 늙은이가 되거나, 불행한 사고나 질병에 걸려 치매가 오게 되면 그것 또한 사라져버릴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그럼 그 이상의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지금은 조금 다른 관점에서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람다움과 인격적 완성, 그래서 누군가가 나를 아름다운 사람으로 기억해주기를 바라는 것이 "보다 영속적인 가치"라는 것입니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듯이, 사람이 죽고 나서 누군가가 그를 기억해주고 감사를 전한다면 그보다 더 가치 있는 일이 어디 있을까요? 이 세상의 모든 이들에게 이름을 남기지 못하더라도 자녀, 친척, 친구들, 후배들 몇 명만이라도 그를 생각할 때 마음이 따뜻해지고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 그것이 진짜 사람다운 가치가 아닐까요?
이것은 우리의 다음 세대가 더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해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합니다. 나와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을 계속 연결해주는 끈이며, 내가 훗날의 세대들에게도 기억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봄날의 눈처럼 스러져버릴 몇 천, 몇 억의 물질적 재산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더 오래도록 사람들이 나를 생각하고 감사해할 수 있는 가치, 더 나은 미래를 향한 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가치를 남기는 것이 더 소중하고 멋진 일이라는 인식이 함께한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많은 불합리와 야만적 행위들은 자연스럽게 해소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현재의 많은 사람들은 이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을 정도로 생존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욱 눈에 독기가 가득하고, 안하무인의 태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이해가 되면서도 한편으로는 굉장히 밉기도 합니다.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들이 모여 지금의 비상식적인 사회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니까요. (그래도 사람들에 대한 가장 근본적인 감정은 안타까움입니다.)
따라서 이것은 개인의 정신적인 승리로 해낼 수 있는 일이 아니기도 합니다. 사회 전반적으로 이 사회의 비정상인 구조에 의문을 갖고, 새로운 질서에 대해 생각해보려는 집단적 의식의 전환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다수의 사람들이 삶의 여유를 찾는 시점에 이루어질 것이며, 극도의 풍요 혹은 극도의 빈곤, 어떤 방법이든 같은 결과로써 전환의 기회가 마련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본 글은 연재 형식으로 2015년 10월부터 2016년 1월까지 작성되었습니다. 여기 있는 내용들을 더 다듬고 짜임새있게 구성하여, 2017년 5월『이기심의 종말』로 출간되었습니다. 내용을 보시고 흥미가 동하신 분들은 아래 소개를 참조하시여 책을 구매해 보시면 더욱 알차고 최신화된 글을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
신자유주의적 시장자본시스템에 의해 파편화-양극화된 사회,
한계비용 제로사회와 4차 산업혁명이 가져다줄 희망과 위기,
힘없는 개인은 혼돈의 미래를 헤쳐나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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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 목차 정보 >
1장. 우리 앞의 현실
1. 자본주의와 개인소유 사상
자본주의 / 블라인드 스팟 / 개인소유 사상
2. 개인소유 사상의 사회문화
생존과 투쟁, 공동체의 역사 / 한국의 공동체 해체 / 혼자가 될 때까지 / 경영과 노동 / 기업 조직 문화 / 교육 / 자녀 양육 / 국가 정치/ 경제 제도 / 학문과 문화 / 성 역할 갈등 / 이성 교제 / 행복
3. 지속가능한 삶의 위기 - 개인편
경제 능력의 상실 / 직업의 귀천 / 실직과 사회 안전망 / 결혼, 출산, 경력단절 / 산업 구조의 변화 / 주거 불안정 / 자녀교육 / 질병, 사고, 장애 / 다시 일어설 기회가 없는 사회
4. 지속가능한 삶의 위기 - 사회편
빈부 격차, 소득 격차 / 청년 빈곤 / 저출산, 노령화 / 산업 성장의 정체 / 미래 인재의 부재 - 교육과 기업문화 / 필연적 불황과 전쟁
2장. 선택의 시간
5. 순환, 지속가능한 삶의 가능성
개인의 위기, 사회의 위기 / 순환의 부재 / 기업 내 개인의 순환 / 기업 스스로의 순환 / 기업 밖에서의 개인의 순환 / 자본의 순환 / 직업 분배의 모순 / 직업의 가치, 개인의 가치, 사회적 효용 / 순환이 있는 사회
6. 공유경제와 한계비용 제로사회
공유경제의 역사 / 공유지의 희극, 인터넷 / 인터넷 + 자본주의 = 한계비용 제로사회 / 에너지 인터넷, 운송 인터넷 / 공유경제의 현재와 미래
7. 제4차 산업혁명과 위기의 미래
제4차 산업혁명 / 이제 기업과 노동자는 어떻게 돈을 벌지? / 현대판 러다이트 운동 / 창의적 직업으로의 전환, 가능할까?
3장. 미래를 여는 열쇠
8. 공유경제 시대의 사상들
협력적 공유주의자의 시대 / 망중립성, 오픈소스 운동가들 / 공유가 소유를 앞서 나가는 시대 / 공유가 가진 힘의 원천 / 공유경제 시대의 동반자들
9. 지속가능한 삶을 향한 의식적 연대
대안적 삶을 추구하는 이들의 연대 협력의 필요성 / 기술의 진보, 연대의 가능성 / 중앙 집중화된 권력에서 분산된 권력으로 / 연대 협력의 장애물들
10. 개인소유 사상의 그림자
미래를 결정하는 것 / 자기포장, 위선, 성장 절대주의 / 배려와 공감이 없는 자기중심 사고 / 불신 / 물질만능주의와 소유욕
11. 개인에서 공동체로
내려놓기 / 보다 영속적인 가치 / 관심, 인정, 배려 / 공동체 의식의 확장
4장. 우리가 꿈꾸는 세상
14. 우리가 꿈꾸는 세상
소유자, 생산자, 소비자가 하나 된 공유기업 / 생의 지속가능성이 보장되는 사회 안전망 / 최소 지원(복지)의 기준 : 주거, 교육, 질병 / 개인의 성장과 사회적 기여에 특화된 직업 / 변화된 교육이 바꾸어갈 세상 / 제약적 가족 관계에서의 해방 / 여성에 대한 관념의 변화 / 여성, 남성이 아니라 개인으로 대접받는 사회 / 지속가능한 삶이 있는 사회
15. 우리를 넘어 세계를 향해
페이비언 사회주의, 칼 폴라니, 제3의 길 / 서양과 동양의 문화적 차이 / 언어의 힘, 한민족의 정신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