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 여름 동안 세상 제일 바쁜 사람처럼 허둥대다가, 더위가 꺾이자 나에게도 쉴 여유가 찾아왔다. 친구들과 소박하게 1박 2일의 시간을 보내면서 먹고 이야기하고 소소한 시간들을 보내고 헤어지고 나서, 텅 비듯 가슴이 아려온다. 그녀들을 보낸 아쉬움, 그 이상의 화끈한 쓰라림이었다.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잘 놀고 잘 쉬고 난 다음, 걷잡을 수 없이 폭풍이 몰아쳐 왔고 그 힘이 내 몸 구석구석 가득 메우고 텅 빈 마음은 부딪히면 산산이 깨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멍하니 가득 들어차 있는 서글픔, 아쉬움, 미안함 등이 뒤엉켜서 무엇이라 말할 수 없는 덩어리들이 뭉쳐져서 온몸을 돌아다녔다.
식사는 편하게 사 먹었고 1/n 했다. 모두 합한 금액이 크지 않아서 내가 낼까 고려했지만 왠지 공평함과 손해라는 저울추에서 억울함까지는 아닌 지질함이랄지 그런 마음이 있어 그냥 각자 부담으로 했다. 평소라면 당연하였을 그 모습이 왜인지 그냥 다가와 쿡 찌르고 간다. 그들에게 마음의 거리를 계산하고 있는 내가 인식되면서, 화산처럼 뿜어져 나오는 감정의 덩어리들이 폭풍이 되어 덮쳐 온 것 같다. 아주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행했던 기계적이고 반복적인 태도가 나를 메마르게 하고 오히려 내가 알지 못하는 사이 스스로 다치고 있었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전하게 보호받고 있었지만 도리어 성장하지 못하게 하면서 냉랭한 상처를 유발하는 방어기제라는 양날의 작동 한 가지를 본 것이다.
친절하고 부드럽고 선을 넘지 않는 태도는 내가 사람들을 배려하면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는 선한 마음이었다. 그것은 성숙한 사람으로서 가져야 하는 당연한 것이었고 내가 그들을 위해 일정 부분 애쓰는 것이다. 이렇게 학습된 무분별한 습관에는 인식하지 못하는 치밀한 계산이 깔려있다.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행위와 말과 표정에 은근슬쩍 계산을 끼워 넣고 당연하다는 듯이 그런 행동을 고수했을 것이다. 그런데 따뜻함으로 포장하여 모르는 사이 온도를 내리는 차가움과 유리한 입장에 서려는 의도하지 않는 의도가 갑자기 감지될 만큼, 알 수 없는 공허와 싸한 두려움이 엄습하는 습하고 축축한 이면의 공간이 열렸다. 귓속에서 크게 울리는 이명처럼 통제를 벗어나서 온몸과 마음을 휘저으며 소용돌이쳤다.
당연한 것은 치명적이다. 살면서 당연하게 하고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런 당연함 속에서 숨어있는 계산식을 발견한다는 것은 참 쓰라리다. 예의 바르게 합의된 행위에 깔린 머릿속 계산은 생과일을 둘러싸고 있어 한 입 물면 달콤하지만 파사삭~ 부서지는 불필요한 탕후루의 설탕막 같다. 투명하게 과일의 모습을 전혀 가리지 않고 반짝반짝 빛나는 윤기는 원래의 과일의 맛보다 더 풍성한 맛을 기대하게 하지만 한입 물면 전혀 다른 식감과 인공적인 단맛이 과일인지 설탕덩어리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꼭 순수한 듯 부드러운 듯 괜찮은 듯하는 내 매너에 덧씌워진 그 무언가를 보는 것 같달까?
탕후루는 10여 년 전쯤 차이나 타운에서 처음 먹어보았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탕후루가 흔하지 않았다. 그때 먹어보면서 들었던 생각은 참 쓸데없이 힘들게 과일을 먹는 방법이라는 것이었다. 싱싱하게 보이는 커다란 딸기 위의 단단한 설탕시럽은 딸기를 제대로 맛볼 수 없도록 덧입혀지고 거추장스러운 장애물과 함께 하는 것처럼 불편하게 한다. 그런데 달기는 참 오지게 달다. 탕후루가 열풍인 요즘과 달리 그 당시에는 차이나타운에서 그것도 늦가을에서 초봄 정도까지 실온에서 설탕이 녹지 않고 사탕으로 굳을 수 있는 정도의 정당히 차가운 날씨에만 판매를 했기 때문에 다시 먹을 기회도 별로 없기는 했다.
탕후루의 달콤한 설탕시럽은 투명하게 내용물을 반짝거리게 만들고 보기에 참 먹음직스럽고 더할 나위 없이 달콤하다. 부드러움, 배려, 친절 위에 덧씌워진 나조차도 알아내지 못하는 투명한 막, 내게는 일정정도의 거리를 유지하게 해 주고 상처받지 않게 하는 달달한 이익, 그렇게 덧대어져 무의식적으로 돌아가는 계산은 직접적으로 접촉하지 못하게 하고 의도치 않게 가상공간으로 만들어버린다. 나도 가짜임을 알지 못하고 상대도 금방은 알아차리지 못할 허구가 그 사이에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 이질성을 눈치채는데 참 많은 시간이 걸렸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일상의 허구는 너무 많은 시간과 범위를 차지하고 있어서 수습하기도 어렵다. 긴 시간 동안 습관화 되어온 몸과 사고방식들을 내 주변의 사람들과 어떻게 변화시켜 나갈 수 있을까? 매 순간 의도치 않는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보고 대화를 해보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관계의 길을 열어가야 하겠으니 시간이 걸릴 수 있을 것 같다. 운이 좋다면 아닐지도 모르고...
용건이 없으면 별로 전화를 안 하고 내가 먼저 다가가고 먼저 제안하고 먼저 도와달라고 하는 일도 없었다. 먼저 이유 없이 안부를 묻는 일도 거의 없는 메마른 사람이 오늘은 생각나는 대로 전화를 걸고 누군가와는 짧게 누군가와는 길게 통화하고 만나자고 제안하고 그 자리에 다른 사람도 부르는 일을 하고 누군가와는 식사약속도 잡고 그동안 전하지 못한 말을 전하리라 마음먹었다.
관계에서의 수동성, 그리고 계산은 지금까지는 상처받지 않게 보호하는 갑옷이었다. 탕후루의 설탕시럽처럼 달콤하고 꿀 떨어지게 나를 감싸는 방어막이자 투명하여 알아차리기 어려운 인공물 없이 순수함으로 헐벗기 위해 지금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이유 없이 그냥 먼저 안부를 물었다. 그냥 이유 없이 소식을 남기고 손해 보는 것을 계산하지 않고 그냥 이유 없이 던져 보았다, 그렇게 결과를 기대하지 않고 살아보는 것에 대한 일상의 소소한 경험들이 또 다른 나를 만들어줄 것이라는 생각도 내려놓는다. 그 이후는 그때 닥치면 되겠지! 계산 없이 베푸는 것을 또 생각하고 계산할지언정 그래도 기대하지 않고 그들을 향해 나아가보기로.
예전 금강경을 읽었을 때 오래 잊히지 않았던 '無主相布施 (무주상보시)'라는 말이 떠오른다. 다른 이들을 도우면서 나도 모르게 뒤따라 오는 누군가를 도왔다는 자부심 없이 베푸는 마음이다. 우리의 의식구조는 언제나 행위자가 있기 때문에 내가 존재하는 한 베풀었다는 생각을 떨치는 것은 불가능하다. '베풂 없이 베풂'이라는 것은 주체 없이 행위만 있는 존재로 머무를 때에야 가능해진다. 주객이 나뉘지 않고 일치된 상태, 너와 내가 하나인 순간까지 어쩌면 나는 끊임없이 너를 향해 나아가야 할지도 모른다. 이렇게 소소한 일상을 통해서 어느 순간 의식의 터널을 통과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