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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나로 Oct 31. 2023

지금 바닥을 기고 있는 느낌이라면

담쟁이는 바닥에 비비면서 온몸으로 가지를 뻗었다.

 여름이면 벽 전체를 뒤덮으며 왕성한 생명력을 자랑하는 담쟁이를 자주 본다. 어린 시절 우리 집에도 있었고 오래된 주택이 많은 동네는 어김없이 담쟁이가 뭉클뭉클 벽을 타고 기둥을 휘어감으며 빈틈없이 초록으로 휘감는다. 벽을 타고 오르는 담쟁이를 비롯해 쭉쭉 뻗어 자라는 나무는 의례 위로 위로, 하늘 어딘가, 꼭대기를 향해 가지를 뻗어나가고 끊임없이 더 높이 내밀어  오르는 것을 성장하는 것으로 당연하게 생각해 왔다.


 올여름 많이 걸어 다녔다.

출퇴근을 걸어서 한 날이 대부분이니 적어도 하루 만 이천보 이상을 걸었다 덕분에 걸으며 주변을 보고 다닐 여유가 생겼고 매일 같은 풍경이지만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는 것들도 보면서 이렇게 걷지 않았다면 볼 수 없었을 길가의 담쟁이도 보았다. 철망 위를 기어오르며 수직으로 자라는 가지들이 있었고 땅 위를 기면서 뻗치고 있는 담쟁이 손들보였다.


 태어나서 담쟁이가 땅으로 자라는 것이 눈에 처음 들어왔다. 그 흔한 담쟁이가 자라는 것을 처음 보지는 않았을 터이니 아마도 나는 아래를 살피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나 보다 짐작해 본다.

본다고 보는 것이 아니니 발을 이끌고 서둘러 목적지를 향해 갔을 뿐 정작 어떻게 발이 움직여서 걷고 있고 그 주변에 무엇이 있는지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예쁘게 핀 꽃이 아니면 잡초로 치부해 버렸을지도 모른다.

 

수북이 뻗어서 땅 위로 자라는 담쟁이들은 영리하게도 사람들의 발이 지나다니는 공간까지는 오지 않았다. 나름대로 선을 지키면서 올망졸망하게 열심히 바닥을 기면서 초록을 발산하고 있었다. 식물이 이렇게 똑똑하다니...


 

 이 무렵 반복되는 무더위와 일상의 단조로움에서 나도 모르게 지쳐가고 멈춰있는 것 같은 답답함을 가지고 있었다. 멈춰있는 것에 대한 불안, 아마 이것은 내 인생의 테마일지도 모르겠다. 그 저조함속에서 무심코 걸으면서 담쟁이들이 땅 위를 열심히 비비며 구르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오밀조밀한 가지들이 내게 위로의 손을 내민다. 위로 뻗는 아이들처럼 잎이 크지도 않고 사람이 다녀야 하는 공간으로 나가면 밟히기 때문에 꼭 덜 자란 어린아이들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담쟁이는 최선을 다해 성장을 하고 있었다. 멈춰있는 것 같지만 그 어느 순간도 성장하지 않은 적이 없다고 그러니 너도 멈춰있는 것이 아니라고...


 당연한 이야기지만 '매 순간 희망차고 기쁘게만 살 수 있냐고... 그러니 괜찮다고...' 필요하다면 누군가에게 기꺼이 이런 충고를 쉽게 건네기도 한다. 하지만 나에게는 얼마나 여지를 주었을까?  알고 있는 것과 타인이 아닌 나에게 여유를 주는 것은 억만광년 쯤 떨어진 것이 아닐까 그 거리감이 느껴진다. 타인에 대한 위로는 쉽게 하지만 내가 나를 진심으로 위로한 것은 지극히 드물 뿐만 아니라 거의 없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게 되다니...




  무더위가 내 속을 훅훅 치고 들어오던 그즈음 힘이 없었고 주변의 일들이 내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흘러가면서 내가 한 선택에 대해 책임을 떠안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낮은 땅 위를 기어서 자라고 있는 담쟁이들이 말을 걸어왔다. 그 담쟁이들도 수직과 수평의 방향사이에서 선택을 했을 것이고 일단 자신이 한 선택에 후회 없이 열심히 자랐을 것이다. 위로 뻗는 가지는 안전하게 담장 위를 타고 더 멀리 오를 수 있지만 바닥으로 기어서 자라는 가지들은 사람들의 발에 밟히지 않기 위해 일정거리 이상을 뻗지 못한다. 그래서 다닥다닥 작은 잎으로 수북한 가지들이 함께 붙어서도 답답해 보이지 않는다. 위로 가지 않은 것을 후회하지도 않을 것이다.


 바닥을 향해 손을 내민 것은 본능에 의한 유리한 선택이었고 나 역시 그렇겠지. 나도 모르게 낮게 조심스럽게 어쩌면 멈춰있는 듯이 답답했지만 손을 내밀어 천천히 조금씩 기어가고 있었고 원하는 대로 화려하지는 않지만 나의 생각처럼 함정도 아니고 퇴보도 아니었을 것이다.


 흔히 가치 있는 삶, 풍요로운 삶, 능력 있는 삶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그곳을 향하여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 그런데 밝게 상승하는 삶과 대비해서 낮은 곳으로 깊어지는 삶의 순간도 있다. 보통 이럴 때는 우울과 불안이 동반되기에 웬만하면 피하고 돌아가고 건너뛰려고 하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이었던가.


 바닥을 충분히 기어가는 생명력을 기억해 두고 싶다. 자체적으로 장착된 영리한 본능은 사람들에게 밟히지 않으면서 땅 위로 초록을 발산하게 하듯 나에게도 그런 본능 하나쯤 있으리라 믿는다.




 깊이 없는 성장은 힘이 없다. 모든 것이 음과 양이듯 한 곳으로의 방향성은 언제나 어둠과 그림자를 동반하고, 호불호가 명확할 때 언제나 싫고 원치 않는 것들이 따라붙는다. 우리의 의식은 자동으로 일방향성으로 흘러간다. 상승은 긍정적이지만 하락은 부정적이다. 그런데 의식은 상승보다는 하락의 시점에서 성장이 더 크게 일어난다. 우울과 불안을 경험하면서 그곳에 머무를 때 또 다른 빛을 발견하게 되고 의미가 깊어지면서 이전과는 다른 의식의 영역으로 확장된다.


 이렇게 알고 있지만 경험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내가 이것밖에 안되네" "이것이 나의 한계이지" 이런 말들이 되풀이되어 자동 반복 재생된다. 그러고 있다가 담쟁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바닥을 기면서 온몸으로 땅과 부딪히고 있지만 잘하고 있구나라고 나에게 진심으로 말해주었다. 내가 그렇게 잘하고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언제나 생각은 짧고 즉흥적이고 인내심도 없고 실수투성이고 실제로 제대로 하는 것은 없다고... 이렇게 나도 모르게 되뇌는 소리들을 잠시 멈출 수 있었다.


 어차피 삶은 펼쳐져 있고 거기에 맞고 틀림도 없고 의미를 따져 물을 수도 없다. 그냥 삶이 있는 것이고 내가 있는 것이다. 내가 맞고 틀리고 잘하고 못하고를 따지는 것이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알아도 자동으로 탑재된 시스템을 멈추는 것은 생각만으로는 꺼짐 버튼이 눌리지 않는다. 그렇다고 손 놓고 있으면 매번 돌고 있는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그러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 열심히 제자리를 돌기만 한다. 누군가에게는 안정이라는 이름이겠지만 또 다르게는 무명일 것이다.



 며칠 전 바닥으로 열심히 손짓하는 담쟁이들을 모두 치워지고 있었다. 가을이고 입이 떨어지면 미관상 좋지 않기 때문에 정리했을 것이다. 우리는 미관상이라는 이유로 불필요한 것들을 치우고 정리하고 깔끔하고 각진 외양을 유지하기 위해 거기에 합당하지 않은 것들은 자르고 없애버린다. 옳지 않은 것, 효율적이지 않는 것, 예쁘지 않은 것들은 머릿속 잣대에 의해 치우려 하지만 그 갈등양상으로 인해 우리는 신경증을 앓는다. 위로를 하자면 인간이니 그렇다. 특별히 정신증을 앓고 있는 사람을 제외하면 그 외 모든 사람들은 신경증자라고 라깡은 말한다. 그렇다면 그 신경증의 의미에 대해서 물어야 한다. 피하는 것이 신경증을 유발한다면 피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 것인지... 그래서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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