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포함하여 이 시기에 맞닿아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것이 나이 듦이다.
나는 아직 젊다는 착각 속에서 살게 되는데 알게 모르게 줄어드는 호르몬은 신체에 변화를 가져오고 알아차릴 수밖에 없는 증상들을 내뿜는다.
어느 순간 찾아오는 우울
이유 없는 불안
불면의 밤
피로감
오락가락하는 기억력
시야의 변화
여성들의 완경
기타 등등 많고도 많다.
몸도 늙어가고 있는데 우울까지 동반되면 억울하기까지 하다. 아직 할 일도 많은데 몸도 말을 안 듣고, 마음도 말을 안 듣고 더욱 우울해진다. 키우던 자식도 말을 안 듣는데 가지가지한다. 속으로 욕도 나오는데 욕할 정도의 정신이 있으면 경증이다.
중증으로 우울하면 아무것도 뵈는 게 없다. 숨쉬기도 어렵다. 숨만 쉬어도 다행이고 이대로 살아도 되는지 안되는지 가늠도 안되고 사방이 캄캄해진다. 나라는 존재자체가 쓸모없고 비루하기만 하고 무가치하다. 더 살 이유도 없는 것 같고 불안하고 두렵고 세상이 끝나버릴 것 같다.
이럴 때 반드시 정신 차리고 있어야 한다. 우울한 상태를 부정하거나 극복하려고 애쓰지 말고 우울한 상태를 알아차리고 그 절망스럽고 어두운 바다에 충분히 담그고 기꺼이 몸을 적시면서 경험해야 한다. 깨어있으면서 머물면 반드시 통과하게 된다.
우울감이 힘들어서 극복하려고 하거나 배제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통과하려고 마음먹으면 그 시간들이 길고 힘들게 느껴지더라도 머지않은 순간 빛으로 나오게 된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면 견디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 상태에 대해서 두려워하고 무언가를 하려고 할수록 미로를 헤맬 수 있고 시간이 길어질 수 있다.
얼마 전 내게도 우울이 왔다. 내게 찾아온 것은 그 범위를 몇 배나 뛰어넘는다. 온통 시커맸다. 천지사방 빛은 보이지 않았고 어둠이 나를 질식시키며 하찮고 혐오스러운 나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떠오른다. 가슴이 답답함으로 미어지고 죽음의 그림자 속에 갇힌 것 같았다.
문득 이렇게 죽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살아온 행적들, 그 어떤 것들도 내게 위로가 되어주지 못했다. 그저 하찮고 아무 의미도 없으며 심지어 비루하기까지 했다. 육체는 점점 무너져가고 의식은 어둠에 마모되어 흡사 지옥문 앞에서 헐떡이고 있는 것 같았다.
여태까지 가벼운 우울감은 많이 느껴왔고 그것들은 알아차리고 보내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래서 중년의 우울은 이렇게 지나가는 줄 가벼웠던 것도 같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을 정도의 내공정도는 있다고 자부하기도 하고...
흔히들 우울은 약해서 오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그런 것에 나도 어는 정도는 나도 모르게 동의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건너서 듣게 되는 우울에 대한 고백, 그리고 활자로 쓰인 증상들을 나는 하나도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다 쓰나미처럼 밀려온 우울에 대한 깊은 경험은 내가 얼마나 무모하고 무식했는지 알게 해주는 계기였다.
온몸으로 겪으면서 알아진 것은 깨어있음, 알아차림, 스스로 어느 상태에 있더라도 놓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우울이 찾아오면 그상태를 알아차리고 있어야 한다. 보통은 "내가 왜 이러지?" 의문을 갖게 되고 그 현상에 저항하면서 극복하려고 애쓸지도 모른다. 주위를 다른 곳으로 돌린다거나 다른 상황을 만들어서 마음을 환기해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냥 피하지 않고 대면하는 것이 상수라 여겨진다. 방법 같은 것을 모색하지 말고 그냥 깊게 빠져서 경험하고 통과하면 반드시 저절로 빠져나오게 된다. 억지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무언가를 하지 말고 힘들면 힘든 대로, 죽을 것 같으면 죽을 것 같은 대로 그 자리에 머물면서 버티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오는 문이 열린다.
지금 내가 경험하고 있는 상황에 진심으로 겪어내야 한다.
그래서 두 눈 똑바로 뜨고 그것이 무엇이든 바로 본다는 마음으로 있으면 감정, 신체, 의식들이 어떻게 느껴지고 변화하는지 알게 된다.
긍정적인지 부정적인지 판단하지 말고 그냥 경험해 보는 것은 미지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고 새롭게 나를 알아가는 방법이기도 하다.
미칠 것처럼 두려운 우울의 상황이 나를 가두고 꼼짝도 못 하게 했지만 그것은 낯설지 않다. 살아오면서 잠깐씩 경험되기도 했었고 언제나 내 의식 밑바닥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던 늪과 같아서 빠지지 않기 위해 나도 모르게 무던히 노력하고 피해왔던 그것이었다.
계속 바쁘게 살려고 하고 새로운 것을 찾아다니고 경력을 위해 무던히 배우고... 늘 무언가를 하면서 피해왔던 나의 깊은 곳의 어둠이었다. 평소에는 드러내지 않으면서 은연중에 나를 끌어내리고 두려움으로 다른 선택을 하지 못하게 작용했던 힘이었고 자칫하면 발을 빠지게 하는 웅덩이였다. 그래서 본능적으로 피하기 위해 무던히도 애써왔던 전형적인 어둠이다.
본능적으로 피해왔던 그것을 전면적으로 대면할 수밖에 없는 것이 중년의 시간인가?
다시 더 깊이 겪으면 처절해지겠지만, 일단 경험하고 빠져나온 지금은 무엇이든 통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도 생긴다.
그래서 멈춤을 배울 수 있었다. 그 깊은 어둠의 시간 동안 모든 것이 멈출 수밖에 없었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의도적으로 멈춰야 한다고 세웠던 계획들은 무용지물이다. 그냥 흘러가야 한다. 그것들을 하기 위해 또 다른 희생을 하면 안 된다.
그동안 바쁘다고 소홀했던 부모님과 시간을 더 보내야 하고 아이들과도 더 소통을 해야 하고... 지금 삶이 부르는 일에 몸을 맡겨 충실해야 한다.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일들이 있다는 것을 이제야 자각했다.
그 어둠이 나에게 말해준 것은 이것이었다. 주변을 더 챙기고 살피고 몸도 챙기라고... 바쁘다고 소홀했던 것들을 더 다독이고 돌봐야 더 충만하고 풍요로워진다는 것이다.
갱년기에 오는 우울은 그동안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애도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다시 고쳐서 흐르게 하는 것. 갱(更)은 고치다. 새롭게 하다는 의미다. 지금까지 흘러 왔던 시간들과 다르게 살기 즉 바꿔서 사는 시기가 '갱년기'의 의미이니 인생 2회 차와 부합되어 딱 떨어지는 말이다. 거기에 '기회'라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어떻게 다르게 살 것인가? 각자의 몫이다.
나의 경우 항상 미루어 왔던 일들, 단순히 지금 생각나는 것들, 아쉬운 것들,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찾아서 지금 하는 것이다. 바로 지금, 지금이 아니면 안 되는 것들이 있다는 것에 대한 알림, 그중 나에게 중요하고 크게 다가온 것은 엄마에 대한 돌봄이다. 바쁘다는 핑계로 부담스러움으로 미루기만 했던 엄마와의 소통을 더 이상 미루면 안 될 것 같다.
우울은 삶의 전환점이 될 수도 있고 멈춤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한다.
그러나 오랜 시간 지속되고 스스로 헤어 나올 수 없다고 생각이 되면 도움을 청하는 것에 주저함이 없어야 한다. 우울은 약한 것도 아니고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