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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나로 Nov 14. 2023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우울과 환상의 경계에서 빠져나오기

'이웃집 토토로'를 일본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눈도 떼지 못하고 처음 보았던 것이 벌써 30년 전이고, 이후 극장에서 가끔씩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개봉할 때마다 향했던 발걸음은 삶의 무게에 대한 해방이 담겨있었다. 왜냐하면 일본 문화가 금지되던 시절 몰래 보았던 토토로는 귀엽고 푹신한 재미와 함께 일탈의 즐거움이 가득했다. 이후 매번 극장에서 보았지만 왠지 지브리를 보러 가는 것은 일탈의 자유가 담기는 나만의 의례 같은 것이 되었다.  답답한 시대가 나에게 준 것은 배반의 즐거움이었고 매번의 지브리는 또 다른 토토로였다. 


"라떼는 말이야~"의 감성과 추억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전쟁 중, 마히토는 화재사고로 어머니를 잃고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을 떠안은 소년이다. 살던 곳을 떠나 어머니의 고향으로 가게 되고, 거기에는 엄마와 꼭 닮은 이모이자 낯선 새엄마가 있다. 아버지는 이모와 재혼을 하고 이미 어린 동생이 그녀의 뱃속에서 자라고 있다. 아버지는 군수공장을 운영하면서 돈을 잘 벌고 지극히 남자다운 현실적이고 전형적인 가부장적 존재이다.


엄마를 그리워하는 소년은 새엄마에 대한 미움을 담고 엄마를 찾으러 환상의 세계로 들어간다. 왜가리의 안내 혹은 홀림으로 탑으로 들어가는데, 그 탑은 메이지 유신 시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고 엄마의 큰 할아버지는 그곳에 은거하다가 읽던 책을 펼쳐 놓은 채 어느 날 사라진다. 그 탑이 현살과 환상 또는 삶과 죽음의 매개 공간이다.


그곳에서 마히토는 어린 모습의 엄마를 만나지만 그녀는 마히토의 엄마는 아니다. 그녀를 만나고 이제까지 인정하지 못했던 나츠코를 그의 엄마 자리로 받아들인다. 그 세계를 구축하고 만들어낸 큰 할아버지로부터 자신의 뒤를 이어 악의가 없는 완벽한 세계를 이어가라는 제안을 받지만 거절한다. 그에게는 이미 미움으로 인해 스스로 다치게 한 지워지지 않는 상처자국이 있고, 그건 악의의 증거이기 때문에 자신은 할 수 없다고 말하는 솔직함이 빛을 발한다. 자신의 악도 선도 받아들이고 현실은 그런 것이니 충분하다고...


그 세계에서 빠져나올 때 마히또와 나츠코는 같은 문을 열고 나오고, 그의 엄마 히미는 다른 문을 통해 나간다. 그들의 세상은 다르고 다른 시간대에 존재한다. 재미있는 것은 오직 아빠만이 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주변만을 배회한다. 어쩌면 그는 가족들 사이에서 유일한 이방인이지 싶다. 


다들 감성의 영역에서 그들 나름대로 치열한데 그 혼자서 낙관적이다. 

부인을 사고로 잃고 1년도 되지 않아서 그녀의 동생과 결혼을 하는 것이 그리 상식적이지는 않으나 모계 중심의 측면이라고 이해해 볼 수 있다. 그는 가족의 현실 공간인 집을 공유하지만 심정적으로 내적 공간을 공유하지는 못한다. 그렇다는 것을 본인은 모른다.


피를 이은 자가 아니면 탑으로 들어가지 못한다. 여기서의 피라는 것은 혈통이기도 하고 유전되어 내재된 유사한 무의식 영역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로부터 아버지는 이방인일 수 있으나 현실로 돌아올 수 있도록 이름을  불러주고 그 영역을 유지하고 지킨다.


일곱 명의 할머니는 유바바 일곱 명을 보는 것 같았다. 얼마나 귀여우신지...

그들은 이 세계와 그 세계에 공존하면서 가족들을 지켜주고 균형을 잡을 수 있도록 돕는 수호신들이다.






혼란으로부터의 탈출, 성장

마히토는 엄마를 잃은 슬픔과 죄책감으로 우울한 속에서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게 되고 그곳에 머물고 경험하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의 상황을 이해하고 다시 현실에 발을 딛게 된다. 엄마에 대한 태도의 모호성, 나츠코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미움과 친엄마를 잃은 슬픔은, 서로 다른 문을 통해 통과해야 한다는 것으로서 안타깝지만 이해를 하게 된다.


그래서 한 소년의 성장기이기도 하고, 우울한 상태의 혼돈 속에서 모호한 감정들을 스스로 정리해 내고 다시 삶을 시작하는 전환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마히토는 어머니를 잃은 슬픔, 또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으로 힘들어하면서 양가적인 감정과 분노를 환상 속에 머물며 자연스럽게 놓아버린다.  엄마의 죽음은 그녀의 운명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의 현재의 엄마는 나츠코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자책을 거두어들이고 갈등 속에서 빠져나온다.


병원이 불타서 후에 죽게 되는 히미, 그녀는 저 세계에서 불을 다루는 존재로 불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불에 타서 죽게 된 엄마를 비극적으로 놓지 못하는 것은 마히토이다. 정작 히미는 죽을 운명을 알고 있음에도 앞으로 나아가고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그녀의 문을 열고 나가는 것을 보며 마히토는 엄마와 자신의 비극적 운명을 삶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속으로 받아들이지 못해 혼돈과 혼란의 상태에 머물며 자신과 나츠코를 괴롭히던 암묵적인 미움과 자책을 거두어들이고 그의 앞에 펼쳐진 삶을 인정하고 성장하는 이야기로 나는 읽혔다.





우리는 영화 속의 영웅이 아니다.

우리 모두가 마히토는 아니다. 삶을 이해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는지... 

완벽하지 못한 자신, 더 잘하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는 실패감과 열등감은 우리를 종종 우울하게 한다. 완벽할 수 없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현실을 살 수 있는데 자신도 모르게 다그치게 되고, 상황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자책까지 떠안고 저조한 상태로 빠져들어 간다.


그저 살아가면서 길게 겪기도 하고 짧게 겪기도 하면서 누구나 나름대로의 이야기가 있고 진정성이 있다. 실제로 이런 상황에서 누군가는 책임에 대해 아버지와 나츠코의 몫으로 돌리며 자신은 퇴행해 버릴 가능성도 있다. 그런들 약하다거나 이해심이 부족하다거나 모자란 것으로 비난할 수 없다.  그것이 바람직하든 그렇지 못하든 겪어야 하고 그러고 나서야 스스로 무엇이 옳고 그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래서 흔히들 생의 사건에 대해  "엄마 때문이야" "그놈 때문이야" 등등 누구 때문에 "내가 이래"의 동어반복을 하게 되는 경우들을 많이 본다. 그 사람의 삶에는 남만 있고 자기는 없는 상황이 지속적으로 되감기고 그렇게 힘들어하다가 그 상황을 자연스럽게 빠져나올 수도 있다. 언제 그렇게 될지 누가 알 수 있을까 그것은 삶이 말해줄 뿐이다. 단지 그냥 열린 마음으로 애쓰면서 기다린다.



맡기고 흘러가기

성장한다는 것은 모든 기쁨과 불행을 나의 것으로 지고 가는 것이고 그리고 흘러가는 삶에 맡기는 것이다.

내가 불행을 겪었지만 그것 또한 나의 삶이라는 것,

타인에게 책임과 이유가 돌려진다면 그곳에 나의 자리는 없어진다.


어쩌면 우울과 불안마저 내 삶의 일부로 받아들여야 할지도 모른다.

여기에서 빠져나가고자 애쓸수록 나는 나 자신으로 존재할 수 없을 것이다.

가혹하게도 받아들임만이 놓여있다.

나만이 사는 삶이고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나 대신 누군가 죽어줄 수 없듯이...


받아들임은 참는 것이 아니다.

마히토가 슬픔을 참는 것으로 안으로 밀어 넣었다면 아마도 그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않고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피해 버리고 그리고 은밀하게 아버지와 새엄마를 미워하며 끊임없이 주변과 자신을 괴롭히며 살았을지도 모른다.



참는 것과 이해하는 것

경험하지 않으면 구분하기 어렵다.


나는 나의 삶을 살고 너는 너의 삶을 사는 것, 이것이 그렇게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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