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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A Nov 22. 2021

형제자매 관계가 어떻게 돼요?

여동생 하나 있어요. 엄청 친해요



@모든 사진들은 넷플릭스에서 '이웃집 토토로'를 보면서 핸드폰으로 찍었습니다.






 여동생과는 4살 터울이 있다. 아버지께서 하나만 키우고 싶다는 의견이 완강하셔서 어머니는 나를 낳고 난 뒤 2-3번의 낙태를 하셔야 했다고 들었다. 동생이 들어섰을 때 어머니께서 이번에는 낳겠다고 고집을 부리시며 아들인 거 같다는 이야기를 덧붙이셨다. 발차기도 힘차고, 나 때와는 달리 입덧도 없는 게 꼭 순둥 한 아들 같다고. 동생이 태어나던 날 아버지는 나가서 술을 드셨다. 아이러니하게도 동생과 아버지의 관계는 가족 중 가장 애틋했다.








 표준 몸무게로 태어난 나와 달리 동생은 4.2kg가 넘는 우량아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에는 통통하고 무게가 있어서 팔을 휘두르기만 해도 꽤 아팠는데 에너지는 또 어찌나 넘치던지. 농담 반 진담 반이지만 나는 어렸을 때 동생에게 맞으면서 컸다. 어머니가 가게일을 보시는 사이 동생을 보는 일은 주로 내 몫이었는데,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자 동생은 나와 떨어져야 있어야 하는 걸 이해하지 못했던 것 같다. 당시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가 집에서 직진으로 300미터가 안 되는 거리에 있었는데, 동생은 종종 등굣길을 따라오곤 했었다. 어머니께서 가게 일을 하시다 동생이 없어져서 여기저기 찾아다니면 우리 반 교실에서 내 의자를 나눠 앉고 있는 동생을 발견하셨다. 자라면서 둘이서 나눠가진 추억이 참 많다. 몰래 가게 금고에서 500원을 꺼내서 오감자 과자를 사 먹었다가 어머니한테 호되게 혼나기도 하고, 학교 앞에서 사 온 병아리를 가게 앞에 박스를 두고 닭이 될 때까지 같이 보살피면서 키우기도 하고, 그 닭을 할머니가 우리한테 말도 없이 할아버지 제사상에 올리셔서 밤새 같이 울기도 했다.







 어머니가 가게를 정리하고 직장을 나가시기 시작하시면서 동생이랑 둘이서만 집에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학교 끝나고 집에 오면 밥을 차려서 동생이랑 둘이 먹었다. 지금도 내 오른손에는 그 시절 동생에게 냉동 돈가스를 튀겨주려다가 기름이 손에 튀어서 생긴 화상 자국이 있다. 챙겨줄 때는 꽤 챙겨줬던 거 같은데 못되게 굴 때는 또 꽤나 못되게 굴었던 것도 같다. 동생을 상대로 내 물건으로 달란트 시장을 열어서 그녀의 용돈을 가로채려고 했던 사건이 어렴풋이 생각나고, 친구들과만 놀고 싶어서 언니를 졸졸 따라다니는 동생을 따돌리려고도 했다. 그냥 친구들한테 내 동생도 같이 놀자라고 말하면 됐었을 텐데 그 당시에는 철이 없었다. 동생도 머리가 자라면서 초중고 시절 우리는 치고받고 엄청나게 싸웠다. 동생의 키는 내가 고등학교, 동생이 중학생일 때부터 나보다 커서 둘이 싸우면 부모님은 더 많이 맞는 나를 불쌍해하셨다. 대학교 때까지도 서로 옷장의 옷을 몰래 입는 것 때문에 싸우기도 했었던 거 같은데, 점점 그 횟수가 줄어서 친한 친구사이게 되어버렸다. 학창 시절 엄마랑 싸워서 집을 나가면 동생한테만 연락을 했고, 서로 밖에 있다가 만나서 집에 같이 들어가거나, 고3 시절 혼자 독서실에서 밥을 먹을 때면 동생을 불러서 같이 먹었다.   




 동생과 더 큰 유대관계가 생기게 된 계기는 동생이 내가 다니던 대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다. 동생이 수시를 지원할 때 두 번의 입시를 경험한 내가 학교와 전공, 수시 전형을 조언했다. 동생은 내신과 수능 점수 상관없이 오로지 논술 100%로 과에서 단 한 명만 뽑는 전형에 합격했다. 입시를 미리 경험한 언니의 영향으로 중고등학교 내내 논술 학원을 다닌 결과였다. 동생은 논술 시험날 엄마 손 대신 내 손을 잡고 우리 학교에 와서, 끝나고는 내가 자주 가던 후문 근처 백숙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전공은 달랐지만 같은 사회과학 단과대였기 때문에 우리는 건물에서도 자주 보고 학식도 같이 먹었다. 내 동기들도 동생을 알고, 동생의 동기들도 나를 알았다. 여름 레저 교양 과목을 같이 들었을 때 출석부를 부르시던 교수심이 연달아 있는 비슷한 이름에 의아해하시던 기억이 난다. 나이 차이 때문에 동시에 같은 학교를 다닌 것은 처음이었다.






 그러다 내가 홀로 캐나다로 이민을 오게 되면서 동생과 완전히 떨어져 살게 되었다. 동생이 한국에서 부모님 문제로 고생할 때 나는 해줄 수 있는 게 없었고, 내가 외국에서 외로움을 탈 때도 우리는 시차를 맞춰 통화 한번 하기 힘들었다. 슬픈 일이 있을 때 나를 가장 잘 위로해 줄 수 있는 것은 동생이고, 동생에게도 내가 그런 존재인데 서로 얼굴 보고 얘기하기 조차 쉽지 않아 진 것이다. 우리는 서로를 위로해 준 경력이 20년이 넘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 기분을 풀어줄 수 있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고, 남들에게는 말할 수 없는 집안 문제에 대해서 같이 의논하고 욕할 수 있기 때문에 친구 혹은 이성친구와는 다른 역할이 있다. 때로는 친구와 약속을 잡아 차려 입고 좋은 곳에 가서 맛있는 것을 사 먹는 것보다, 아침에 집에서 일어나서 동생이랑 같이 집밥을 차려먹고 운동복 입고 동네 만화 카페에 가서 시간을 보내고 집에 들어와 같이 티브이를 보는 게 더 재미있을 때가 있다.








 재작년에 이별을 크게 겪으면서 우울증이 왔었다. 모든 일이 재미가 없어지고, 삶의 의욕이 없어지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매일 밤 퇴근하고 집에 오면 혼자 침대에 누워 소리 없이 울었다. 좋지 않은 근황을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아 동생에게만 매일 카톡으로 감정을 쏟아냈다. 결국 동생이 나를 위해 2번째로 캐나다에 왔다. 겨울이라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았지만, 가져온 엄마 반찬으로 밥을 먹고 도시를 같이 걸었다. 당일로 버스를 타고 온천에 다녀오고, 오로라를 보러 영하 40도의 옐로나이프로 여행도 했다. 동생이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날부터 눈물이 줄줄 났다. 요 며칠 이별은 생각나지도 않고 정말 재미있었는데 다시 혼자가 되는 순간부터 매일매일 우울할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같이 있을 때는 이곳이 한국인지 캐나다인지 개의치 않고 서로 원래 나누던 대화를 나누면서 하루하루가 오래된 날들의 연속 같았는데, 홀로 남겨진 일상은 익숙한 듯 너무나 낯설었다.






 내가 한국을 방문하면 우리는 거의 매일을 붙어 있는다. 서로의 친구를 만날 때도 같이 나가고, 가고 싶었던 카페나 음식점은 둘이서 집에서 출발해서 같이 가고, 2:1 필라테스를 등록해서 같이 운동을 한다. 떨어져 있는 시간을 견디기 위해 최선을 다해 붙어 있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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