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국 북부 빠이(Pai)
이번이 여섯 번째 여행이다. 일 년에 한 번 내지는 두 번, 내가 나에게 주는 포상휴가와도 같은 혼자만의 배낭여행.
밤비행기로 일상을 떠나 하늘로 가볍게 날아올랐다. 하지만 태국의 북부 도시 치앙마이까지 가는 길은 조금 고달팠다. 급하게 정한 여행일정이라 연결비행기를 타기 위해 방콕공항에서 새벽까지 차가운 에어컨 바람에 벌벌 떨며 6시간을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어쩌랴. 직항을 타고 편히 가기에는 주머니 사정이 빈약한 것을. 아니다! 그보다 내 나이가 아직은 고생도 사서 할 나이가 아닌가 ㅎ ㅎ 물론 나만의 생각이지만.
치앙마이에서 1박을 하며 여행책자를 뒤척이다, 원래 생각했던 치앙라이가 아닌 ‘빠이’로 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특별한 볼거리도 없고 마을의 규모도 작아 불과 한 시간이면 마을 전체를 둘러볼 수 있다는 곳이지만 왠지 마음이 끌렸다. 어차피 돌아가는 비행기는 8월 10일에 있으니 일주일간은 발길 닿는 대로 돌아다녀도 되지 않겠는가.
빠이는 치앙마이에서 110킬로미터 떨어진 작은 마을이다. 먼 길은 아니지만 구불구불한 산길을 돌아 돌아가야 하기에 로컬버스로 4시간, 미니버스로는 3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었다. 여행객의 눈길을 사로잡을 만한 빼어난 자연 경관도, 역사적인 문화유적도 없는 빠이는 그저 마음을 내려놓고 방갈로에 누워 떨어지는 빗소리에 맞춰 책장이나 넘기며 빈둥거리기에 좋은 곳이었다. 여행책자에도 ‘마음을 부드럽게 만드는 자연 경관 속에 독자적인 문화와 예술이 살아 숨쉬는 마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자유를 만끽하며 숨구멍 가득 살아 있는 공기를 채우는 즐거움이 있는 곳’이라고 빠이를 소개하고 있었다.
야자잎사귀로 엮어 만든 듯한 방갈로 한 채를 3일간 묵기로 하고 빌렸다. 배낭을 던져두고 나선 거리는 한 마디로 아름답고 신기했다. 나뭇잎으로 지붕을 얹은 집들, 갖가지 나무와 꽃으로 꾸며낸 아기자기한 집들, 여기저기 매달린 은은한 등불들은 영화 속에서 본 동막골에 와있는 듯한 착각을 하게 했다. 나는 ‘이 마을은 이름 없이 숨어 지내는 천재 예술가들이 모여 사는 동네’일 거라고 멋대로 생각하며, 아마 그 생각이 분명히 맞을 것이라고 확신 했다.
도로변에 늘어선 조그마한 가게들은 신기하게도 자기 나름의 고유한 브랜드를 걸고 상품을 만들어 팔고 있었다. 티셔츠 하나, 사진 한 장, 엽서 한 장도 같은 디자인이 없었다. 전국 어디를 가든지 똑같은 기념품을 파는 우리나라 관광지와는 너무도 달랐다. 오래된 목조건물을 개조한 커피샵 ‘올어바웃 커피’ 에서는 향 좋은 커피와 함께 열 살 남짓해 보이는 꼬마화가의 그림을 엽서나 액자로 만들어 팔고 있었다. 삐걱거리는 다락방에 앉아 꼬마화가의 그림을 감상하며 마시는 에스프레소 향기와 맛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58130’이라는 빠이의 우편번호와 빨간 우체통을 작품화한 갤러리도 있고, 빠이(PAI)라는 지명을 활용해 ‘UTOPAI'라는 단어를 만들어 유토피아를 연상하게 하는 가게도 있었다. 그중에도 가장 인상적인 것은 ‘762 curves’라는 글귀를 활용한 작품을 파는 가게였다. 스티커, 엽서, 열쇠고리 등으로 활용하여 만들어 파는 상품이지만 나는 그것을 ‘작품’이라 부르고 싶다.
‘762 curves’. 그것은, 치앙마이에서 빠이로 가기 위해 꼭 거쳐 가야하는 산길의 커브 숫자이다. 빠이에 오기 위해서는 762 커브길을 돌아와야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마을이 정말 골짜기 오지 마을임을 확인시켜 주는 그 숫자를 오히려 사랑하는 자신들의 마을을 상징하는 숫자로 당당하게 외치고 있는 것이다. 어느 마을에나 있는 우편번호 ‘58130’을 거리 곳곳에 멋지게 적어둔 것처럼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것을 그들은 그들이 얼마나 자신들의 마을을 사랑하는지, 우리 마을이 얼마나 멋스러운 곳이지를 보여 주는 듯했다.
자전거를 타고 빠이 곳곳을 돌아다니며 만나게 되는 커브길을 알리는 도로 표지판이 정겹게 느껴졌다. 저 길을 돌아가면 또 어떤 풍경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기대를 하게 되어 더 힘차게 페달을 밟게 된다.
762커브를 잘 참고 돌아 돌아가야 만날 수 있는 행복한 유토피아, 빠이! 그 커브길을 다시 돌아 나오며 나는, 내 인생에서 만나게 될 수많은 커브길들을 생각해 보았다. 한 평생 살며 우리가 만나게 되는 삶의 커브가 어찌 762뿐이겠는가. 분명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은, 더 힘겨운 삶의 커브를 만나게 되리라. 하지만 그 길도 조심조심 잘 지나가면 아름다운 들길이 이어지고, 그 길 끝에는 상상 그 이상의 달콤한 안식과 마음의 위안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