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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 Oct 01. 2016

세월을 거스르지 않는  순응의 아름다움

                             - 경주 기림사에서

여행을 계획해놓고 며칠 전부터 마음을 설레며 기다리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예정에도 없이 일상을 벗어나 보는 것도 색다른 맛이 있다. 그것도 남들은 바쁜 일과에 쫓겨 정신없을 수요일 오후 세 시에 표표히 떠나는 여행의 매력이란…….

알게 모르게 나를 붙잡아매고 있던 것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가끔은 이렇게 일상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해 보는 것이, 더 힘차게 다시 '그 일상'으로 돌아올 힘이 되기도 하리라.


한가로운 고-속-도-로를 달려 이미 제 색을 바꾸기 시작한 4번 국도를 달렸다.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더 빨리 계절은 오고 있는 것 같다. 푸른 잎새 뒤에 숨은 사과 하나가 여름 햇살과 초가을 소나기, 바람에 여물어 빨갛게 색을 바꾸어 우리의 얕은 눈에도 띄일 때에야 비로소 알게 된다. 가을이 우리 가까이 이미 와있음을…….

눈을 들어 올려다본 하늘에는 눈부신 햇살과 뽀얀 뭉게구름이, 그리고 바람이 살고 있었다. 언제부터 저기에 있었던가, 그들은……. 나는 하늘을 날았다. 날았다…….


차가 멈춘 곳은 낯선 고찰(古刹) 기림사!

창건될 때는 통일 신라 최고의 사찰인 불국사를 말사(末寺)로 거느릴 정도의 거찰(巨刹)이었다는 설명이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작고 조용한 절이었다. 기림사는 말 그대로 '달을 머금고' 선 듯도 한 함월산(含月山) 자락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기원정사(祇園精舍)의 숲, 기림 - 그 이름의 유래를 좇아가지 않더라도 그냥 그저 편안한[祇] 숲으로 내게 다가왔다.


긴 세월이 지나도 바래지 않는 것이 세상에 과연 있을까? 영원하리라 믿었던 사람들의 '굳은 다짐'도, 변치 말자 약속한 '젊은 사랑'도, 곱게 단장한 새색시의 '수줍은 미소'도, 세월에게는 다 지고 말지 않는가.


굳은 약속은 이기적인 계산에 기억에서 지워지고, 운명이라 여기던 임과의 사랑도 생활에 찌들어서 쓴웃음에 섞어 나오는 유행가 가사에만 남아있고……. 품으로 파고 드는 땟국에 절은 아이들을 끌어안은 새색시의 웃음도 예전의 그 수줍던 빛깔은 아니다.

그런데 그곳에, 세월에 바래 더 아름다운 풍경이 그곳에 있었다. 뿌연 나무의 속살로 서있는 진남루가 그러하며, 약사여래를 모신 대적광전이 그러했다. 투박하지만 균형 잡아 짜맞춘 다포(多包)가 정감 있어 보이는 이유도 그 세월에 바랜 까닭일 게다. 대적광전 앞 너른 마당에는 세월의 흔적이 파랗게 낀 삼층석탑과 500년 수령의 보리수가 양 곁을 지켜주고 있었다.

화려하던 단청빛깔이 비바람에 퇴색되어 기둥의 뿌연 속살을 드러내고 있었지만 그 모습은 오히려 애써 주름살을 감추려 치장하지 않은, 원숙한 여인의 넉넉한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이끼로 옷을 해 입은 삼층석탑 역시 결코 가볍지 않은 연륜의 깊이가 느껴지며, 수백 년을 하루같이 그 모습 그대로 제 자리를 지키고 서있었을 그 당당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나는 또 하나 깨달음을 얻어 왔다. 아름다워 보이려고 안달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다운, 세월을 거스르지 않는 순응(順應)의 아름다움!

세월을 따라 자연스럽게 퇴색되어 가는 걸 안타까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기로 했다. 세월을 담아내는 나이테같이 나도 얼굴에 내가 살아온 세월의 자국을 그대로 담으며 그렇게 순응하며 살기로 했다. 가시막대를 들고, 오는 길 가로막고 서있어도 백발은 지름길로 찾아와 머리 위에 앉는다지 않던가. 언젠가는 모두 물같이 흐르는 이 세월을 따라 그렇게 퇴색되어 갈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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