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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 Oct 03. 2016

제소리만 내어도 충분한

   - 창녕 화왕산 억새밭에서



큰 맘을 먹었다. 줄줄이 딸린 인연들을 다 떼어놓고 홀로 떠나는 여행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아이 딸린 여자에겐 참 엉켜있는 것도 많다. 오늘 하루는 두 눈을 찔끔 감아 본다.  오늘의 행선지는 경남 창녕 화왕산 억새밭이다.


가벼운 가방 하나 달랑 메고 나무 지팡이 하나 주워 들었다. 멀리 올려다 뵈는 바위산이 나를 내려 본다. 자하골로 오르는 등산로 곁으로 나있는 새로운 길을 선택했다. 작은 암자에서 나오시던 아주머니 한 분이 암자를 끼고 끝없이 이어지는 좁은 솔밭 사잇길을 가르쳐 주셨다. 잘 다듬어 놓은 계단으로 오르는 것보다 시간은 더 걸려도 보고 느낄 것이 많으리라며.


그곳엔 이미 가을이 와 있었다. 도토리나무 잎새가 바스락거리고 있었다.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나이가 느껴졌다. 호흡은 가빠지고 자꾸만 펑퍼짐한 바위에만 눈이 갔다. 아예 누워버리고 싶어졌다.
길은 누가 일부러 만들어 놓은 것처럼 참 신기하게도 두 갈래도 갈라졌다가 다시 합쳐지고, 다시 갈라졌다가 합쳐졌다. 산을 오르던 사람들의 발길이 자연스럽게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이리라. 작은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나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왼쪽? 오른쪽? 돌계단? 흙비탈? 조금은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는 갈림길을 오르며 프로스트의 시(詩) '가지 않은 길'이 생각났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 갈라져 있었습니다.
안타깝게도 나는 두 길을 갈 수 없는 한 사람의 나그네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덤불 속으로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풀이 더 우거지고 사람이 걸을 자취가 적었습니다.
하지만 그 길을 걸음으로 하여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입니다만,  
그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 적어 아무에게도 더럽혀지지 않은 채 묻혀 있었습니다.
아, 나는 뒷날을 위해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다른 길에 이어져 끝이 없었으므로 내가 다시 여기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에선가 한숨을 쉬며 이 이야기를 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갈라져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고,
그것으로 해서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발길을 옮겨 놓았다. 그러면서 나는, 짧은 순간에 특별한 기준 없이 택한 길이지만 선택한 그 길이 순탄하게 이어지면 나의 선택에 만족해하기도 하고 우거진 수풀이라도 나타나 힘이 들 때는 그 선택에 작은 회의를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서는 호기심이 생기기도 하고 미련이 남기도 하였다. 때로는 '그래도 이 길에서 도토리를 주울 수 있어서 좋았다.' 스스로를 위로하기도 하며.  


산길에서 인생을 읽는다. 우리 사는 모습도 다 이러하지 않은가? 선택한 것에 만족하며 최선을 다하기도 하지만 가끔은 가지지 못한 하나에 끝없이 미련을 버리지 못하기도 하고……. 
나는 어느 쪽일까 생각해 본다. 부끄럽지만 나는 스스로의 결정에 늘 만족하며 최선을 다하는 쪽은 아닌 것 같다. 그렇다고 뒤늦은 후회를 하며 미련을 오래 품는 쪽도 아닌 것 같고.


내 모습은 이솝우화 '여우와 포도'에 나오는 여우와 많이 닮아 있는 것 같다. 배가 고파 먹을 것을 찾다가 포도나무를 발견한 여우는 그것을 따먹으려고 애를 쓰지만 힘에 부쳐 못 먹게 되면 금세 돌아서서 아무 미련도 없는 척 '그래, 저 포도는 시고 맛이 없을 거야.' 하고 말한다.
'그래, 저 길로 갔어도 별 수 있었겠어. 이만하길 다행이지, 뭐!'


어느 것이 옳은 생각인가. 가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을 가지며 오래 마음에 안고 있는 것, 혹은 일찍 단념하고 자신의 길에 최선을 다 하는 것……. 


정상에 올랐다. 바위산 꼭대기에 이런 광활한 풍경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짐작하지 못했다. 내 키보다 더 큰 억새들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을 보면 아름답다느니 그림 같다느니 하며 사진을 찍기에 마음들이 바쁘지만 나는 그곳에서 무려 다섯 시간을 앉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무념(無念)의 상태에 빠져 온 마음을 다 놓아 버렸다. 머리를 풀어헤친 억새들이 바람에 서걱거리며 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서걱서걱'  같은 소리만 내고 있었다. 충분했다.

서걱대는 그 한 가지 소리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울리며 어루만지기에 충분했다.


땀 흘린 후의 상쾌함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발끝으로 느껴지는 억새숲의 폭신폭신한 기분 좋은 감촉. 두 눈에 가득한 억새들의 흔들림. 귓전의 바람소리. 풀벌레 소리까지……. 나는 눈을 열고, 귀를 열고, 마음을 열어 가을을 느끼며 가슴 가득 가을을 담았다.


억새밭에서 인생의 지혜 하나를 또 얻었다. 물이 흐르는 대로, 바람이 부는 대로 순리를 따라 사는 것이 삶이다. 세월이 나를 지나가는 것을 안타까워하지도, 거역하려고 하지도 말자. 바람이 부는 대로 몸을 맡긴 억새의 아름다운 몸짓을 보라. 가식(假飾)도 군더더기도 필요 없다. '서걱서걱' 제 소리만 내어도 충분한 그 절제된 소리를 들어 보라. 바람이 이끄는 대로 몸을 흔들며 자신의 소리를 내며 사는 것이 아름다운 삶이 아닐까.

 
되짚어 오는 하산길. 마음도 몸도 상쾌하다. 바위 틈새로 흐르는 맑은 물에 두 손을 씻고 나는 일상 속으로 다시 씩씩한 두 발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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