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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향 Oct 03. 2016

'책갈피 속에서 말라버린 작은 꽃잎', 덕혜

- 일본 대마도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배가 대마도 히타카츠항을 출발하기 전부터 승무원들은 오늘 파도가 심하다는 경고를 여러 차례 했다. 멀미약을 무료로 나눠 주며 먹도록 권했고 만약을 대비한 멀미 봉투까지 일일이 나누어 주었다. 겁먹은 아주머니 몇 분은 야외용 돗자리를 깔고 일찌감치 바닥에 드러누웠다.

바람과 함께 이틀째 내리고 있는 비에 선창은 방울방울 젖어 있었다. 심하게 요동치는 배 안에서 나는 여행 첫날 찾았던 덕혜옹주의 유적과 여행 중 다시 읽은 소설 <덕혜옹주>의 깊은 여운이 되살아나 가슴이 더 울렁거렸다. 환절기마다 겪는 가슴앓이처럼, 여행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는 과정에서 겪는 후유증까지 동반하여….


딸과 떠난 이번 여행의 테마는 산책 

이번 여행은 작은딸 아이와 동행했다. 두 해 전에 사흘 동안 ‘앙코르 와트’만 보고 오자고 캄보디아로 둘이 떠났던 여행의 기억이 좋았던 모양이다. 세뱃돈 받은 것에 용돈까지 모은 것을 보태 제 뱃삯으로 내어놓았다.

이번 여행의 테마는 ‘산책’이다. 제주도의 5분의 2 정도밖에 되지 않는 대마도를 천천히 걸어보기로 했다. 소인국에 와있는 느낌이라는 아이의 말처럼 나지막한 집들과 조용한 거리, 소박하게 꾸며진 골목길, 마을 가운데를 흐르는 물길과 그 속을 유유히 노니는 물고기들. 대마도는 생각보다 훨씬 더 소박하고 아름다운 섬이었다.

첫날 간단하게 점심을 먹고 숙소에서 10여 분 거리에 있는 덕혜옹주 결혼 봉축 기념비를 찾아갔다. 덕혜옹주에 관한 최초의 소설 <덕혜옹주>를 쓴 작가는 대마도 여행 중 이곳을 와보고 덕혜옹주에 대한 소설을 쓰고 싶어졌다고 한다. 참 신기하게도 그런 마력이 있는 곳이다. 덩그러니 기념비 하나가 서있을 뿐인데 왠지 덕혜옹주에 대해 더 알고 싶어지는 묘한 이끌림이 생겼다. 소설 <덕혜옹주>와 함께 한 이번 여행은 내내 그녀의 비극적인 삶이 우리와 동행하는 듯 조금은 차분하고 우울했다. 부슬부슬 뿌리는 비도 한몫을 했겠지만.


강제출국, 정략결혼, 딸의 자살, 이혼 그리고 정신병원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는 고종이 나이 예순에 얻은 외동딸이다. 기구하게도 조선이 멸망한 1912년에 태어났지만 그녀의 출생은 나라 잃은 백성과 고종에게는 큰 기쁨이었다 한다. 덕수궁 안에 그녀를 위해 유치원을 만들어줄 정도로 애틋한 늦둥이 딸이었지만 고종은 그녀 나이 8살에 죽고 만다. 더 이상 그녀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왕실을 말살시키려는 계략으로 일본에 인질로 가있던 오빠의 뒤를 따라 그녀도 14살에 일본으로 끌려간다. 조선왕실의 상징적인 희망이었던 그녀에게 기모노를 입혀 일본으로 강제 출국시킨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사람 하나 없는 적국에서 홀로 겪었을 공포, 그녀는 처절하게 외로웠을 것이다. 곧 이은 어머니의 죽음과 일본인과의 강제결혼까지 그녀에게 운명은 가혹했다.


덕혜옹주는 20살에 대마도 도주의 후손인 소 다케유키 백작과 결혼을 했다. 물론 일본에 의한 강제결혼이다. 당시 조선 백성들 사이에 백작이 애꾸눈 꼽추에 난폭한 사람이라는 말까지 퍼졌었다고 하지만 소문과는 달리 그는 도쿄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24살의 미남자였다.

결혼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딸 정혜(마사에)를 낳았지만 덕혜옹주가 어머니의 죽음 이후 앓았던 정신병이 재발했다. 결국 남편에 의해 정신병원에 감금된 채 버려졌다. 그런 중에 하나뿐인 딸 정혜마저 스물네 살의 예쁜 나이에 자살하겠다는 유서를 남긴 채 행방불명이 되고 말았다.


덕혜옹주는 이혼 후 남편에게뿐 아니라 철저하게 조국에게도 잊힌 채 오랜 세월 정신병원에 감금된 채 살았다. 그 후 한 신문사 기자에 의해 그녀의 소식이 알려지고 박정희 대통령의 요청으로 38년 만에 조국으로 돌아와 창덕궁 낙선재에서 여생을 보냈지만 실어증과 지병으로 이미 맑은 정신은 아니었다. 남편이었던 다케유키 백작이 그녀를 만나러 찾아왔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결국 만나지 못하고 돌아갔다 한다. 그렇게 그녀는 1989년, 한 많은 77세의 생을 마쳤다.   


그는 덕혜를 사랑했을까? 

지금 대마도에 남아있는 결혼 봉축 기념비는 도쿄에서 결혼생활을 하던 다케유키 백작이 덕혜와 함께 고향인 대마도에 들렀을 때 그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비석 옆에 키 작은 동백나무 한 그루가 빨간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그 고운 빛깔이 괜히 슬프다.

다케유키 백작의 흔적은 시와 그림에 재능이 있었다 한다. 대마고등학교의 교가 가사도 그가 지었다 하고 그가 쓴 시가 적힌 시비(詩碑)도 있을 정도로.


이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덕혜와 다케유키 백작이 식민지의 옹주와 침략자의 후손이 아닌, 아름답고 총명한 처녀와 시와 그림을 좋아하는 멋진 문학청년으로 만났다면 어찌 되었을까? 단짝 친구뿐 아니라 평생 그 누구에게도 덕혜와의 결혼 생활에 대해 한 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는 그는, 정말 덕혜를 사랑했을까?


소설 속 이야기이긴 하지만 다케유키 백작은 그녀를 가엾게 여기고 사랑하려 노력했던 것 같다. 그녀가 귀국한 후 1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그녀가 보고 싶다며 어려운 길을 찾아온 걸 보면 그는 그녀를 어쩌면 많이 사랑했는지도 모른다. 그녀 역시 그렇다. 망한 나라의 마지막 황녀로서 적국의 남자와 결혼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치욕스러움을 느꼈을 것이고 진심이 어떠했건 간에 그를 마음껏 사랑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한 남자를 사랑하며 소박하게 살기에는 그녀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 컸다. 그들의 딸도, 다케유키 백작도 그리고 덕혜옹주도 모두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 소설의 주인공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 제목은  소설 <덕혜옹주>에서 따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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