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화서고 대공자 - 김현영
사람의 마음에는 각각의 문장이 있다. 어떤 형태로든 문장이 마음에 새겨져 있다.
어떤 각오, 어떤 좌절. 마음의 다짐이 문장으로 남아 삶을 끌어간다.
문장은 자라온 환경 속에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그렇게 각자가 살아간다.
문장은 바뀌기도 하고, 추가되거나 삭제되기도 한다.
어느 날을 잊어버릴 때도 있다.
아무리 다짐했어도 제아무리 소중하게 여겼어도 잊고 지내기도 한다.
(김현영, 천화서고 대공자 204화 ‘하나’에서)
푼돈일 망정 1회 100원을 투자해도 아깝잖은 무협소설을 찾았다. <만선문의 후예>, <걸인각성>으로 코밀하면서도 단단한 문체를 구사했던 김현영 작가의 <천화서고 대공자>가 그것이다. 고금 제일인 '후공'은 알지 못할 힘에 휩싸여 천재 중의 천재라 불리는 천화서고 대공자 '범항'과 차혼(借魂)한다. 후공 시대의 강호는 평화로웠지만, 후공 사후 어둠의 세력들이 곳곳에서 출현하고, 천화서고 대공자로 빙의한 후공이 하나씩 분쇄해 가는 추리를 가미한 에피소드 방식의 무협소설이다.
맹주 시절 사용하던 세 개의 칼 ‘번·쾌·친’이 사라진다. 후공은 도둑 금취객의 행방을 쫓아 동정용왕 창천을 방문한다. 창천은 “어떤 일이 있어도 친구 금취객을 지켜주겠다”는 문장을 기억하고, 후공을 독살하려 했지만 실패한다. 후공은 모든 것을 처음으로 돌리라며 반나절의 시간을 준다. 전쟁을 생각하지만, 돌아올 결과는 아내와 아들의 죽음 그리고 부하들의 몰살이다. 창천은 잊어버렸던 또 하나의 문장을 기억해낸다. “가랑이를 기어 빌더라도 지켜주겠다는” 아내와의 약속을. 죽도록 두들겨 맞고, 용서 받고, 웃음을 가장하여 울뿐이다.
누구에게나 마음 한 귀퉁이 어떤 문장을 간직한다. 하나일 수도, 몇 개일 수도 있다. 좌우명 혹은 신념이라고 해도 괜찮다. 깨우침을 얻기 위한 상식에 어긋난 질문, 화두(話頭) 즉 말머리일 수도 있다. 그 문장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가족이었다가, 돈과 출세였다가도, 명예였다가, 안빈낙도가 되기도 한다. 그 문장을 통해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엿볼 수 있다. 당장 손쉬운 방법은 그 사람의 카톡 프로필이다.
사랑에 빠졌는지, 승진을 고민하는지, 가족의 건강을 염려하는지, 퇴직이 다가왔는지를 확 끌어 당긴다. 한때 솔로몬 왕이 했다는 “이 또한 지나가리니”라는 문장이 풍비하기도 했다. 고교 동창은 아들의 취직 사진과 함께 “어렵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 아니다. 감히 시도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려운 것이다”라는 로마 철학자 세네카의 문장을 올렸다. “인생은 길섶마다 행운을 숨겨둔다”는 문장에서 임원 승진을 앞둔 후배 부장의 복잡한 심사가 느껴진다. 홍콩 사는 후배는 “느린 걸 두려워하지 말고, 멈추는 것을 두려워하라”라고 적었다. 어느 공직자는 “커피는 예술이고, 시간이 진심이다”라는 이해하기 힘든 문장을 들이댄다.
그 문장들은 어김없이 많은 고민을 거듭한 끝에 찾았을 것이다. 혹은 우연히 발견했을지 모른다. "사람이 책을 찾은 것이 아니라 책이 사람을 찾는다"는 영화 <허리케인 카터> 대사와 같이, 평소 보이지 않던 문장들이 용케도 나를 찾아온다. 동아일보 칼럼 <내가 만난 명문장>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각자의 마음속 문장은 각각 다르다. 그 사람의 직업, 처한 환경에 따라 천변만변한다. 바로 마음에 천착되기도 하지만 저만치 다른 세계의 문장도 보인다. 며칠 전 올라온 문장은 정민 교수의 <아버지의 편지>가 출처인 “다 말하지 않는다”는 일곱 음절의 문장이다. 선친을 떠올리기도 했고, 외국에서 일하고 있는 아들을 그리워 했다.
어느 소설가는 표절의 유혹이 두려워 마음에 드는 문장을 필사하지 못한다고 했다. 지금 내 카톡에는 “Plain living and high thinking is no more” (소박한 생활과 고결한 사고는 사라졌네)가 깜빡인다. 산업혁명 시대의 런던을 보고 워즈워드가 한탄했던 문장이다. 퇴직 후 내 생활의 문장으로 진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리라. 막바지 가을, 제주 시인 이종형의 <가을 안부>를 두서없이 읊으며 마친다.
길게 자란 수염을 자르고 싶지만 조금 더 게을러져도 좋은 계절이다
하늘도 바람도 모두 투명해지는 시간
미안하다 그대를 잊어서
미안하다 그대를 잊지 못해서
애써 밑줄을 긋지 않아도 평생 기억하는 문장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