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클로이드 곡선과 우회축적 전략
식물판 노아의 방주를 아십니까? 노르웨이 스발바르 스피츠베르겐 섬 지하에 설치된 종자 저장고를 말합니다. 「스발바르 국제종자저장소(Svalbard Global Seed Vault)」라 부릅니다. 핵전쟁, 기상이변, 자연재해와 같은 지구 최후의 날(doomsday), 지구 상의 식물 자원이 멸종되거나 생태환경 변화도 사라지는 경우를 대비한 것이지요. 약 100만 종 5억 개의 샘플 씨앗이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도 세계 두 번째로 프로젝트에 착수했지요. 경상북도 봉화군 '국립 백두대간 수목원' 지하 약 200미터 공간에 설치된 「종자 금고(Seed Vault)」입니다. 만약 제주도가 원산지인 구상나무가 멸종된다면 여기에 보관된 씨앗을 이용해 되살릴 수 있습니다.
식물의 씨앗은 얼마나 오랫동안 보관이 가능할까요? 종자 금고에 보관하기 위해서 먼저 씨앗을 깨끗이 씻어 우량종자를 선별합니다. 그리고는 그 씨앗의 최적 발아 환경을 기록한 후 영하 20도, 습도 40%에서 비치합니다. 나중 발아시키려면 적합한 발아 환경을 제공해 주면 되겠지요. 2000천 년 동안 잠자다 깨어난 씨앗도 있습니다. 이스라엘 헤롯 왕의 요새에서 대추야자 씨앗 3개를 발견했고, 그중 하나를 싹 틔우는 데 성공한 것이지요. 이 대추야자의 애칭은 969살까지 살았다는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입니다. 중국에는 1,200년 된 연꽃 씨앗이 싹을 틔웠고, 2차 대전 당시 런던 자연사 박물관에 불을 끄기 위해 물을 뿌렸더니 500년 동안 잠자던 씨앗이 발아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는 2009년 경상남도 함안 성산산성 유적 지하에서 발견한 연꽃 씨앗을 발아시키는 데 성공했지요. 고려시대, 700살 나이의 연꽃입니다.
지난여름 참외, 수박, 키위, 사과, 감 등 늘 먹던 식물의 씨앗을 발라내 발아시켜 봤습니다. 매일 지켜보자니 생명의 경이로움을 어떻게 표현할 수가 없었습니다. 물 밖에 준 것 없는데 어느 순간 씨앗 껍질을 뚫고 뿌리를 내고, 싹이 틔우고 떡잎을 올립니다. 그런데 식물의 씨앗은 싹틀 때가 왔음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씨앗은 이미 배아(胚芽, embryo)입니다. 씨앗 자체가 살아있는 개체이며, 단단한 껍질의 보호를 받으며 잠을 자고 있을 뿐, 숨을 쉬면서 물질대사는 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자기의 부모가 자랐던 환경과 같은 온도와 물만 제공하면 언제라도 싹을 트일 수 있습니다.
봄이 오지 않으면 꽃은 피지 않는다.
아무리 서두른다고 해도 한겨울에 봄꽃이 피지 않는 것처럼
적정한 때가 오지 않으면 일을 이루어 낼 수가 없다.
대개 성공한 사람들은 반드시 ‘때’가 올 것이란 믿음으로 조용히 기다린다.
절대로 초조하게 허둥대지 않는다.
경영의 신이라 불리는 마쓰시다 고노스케가 쓴 <길을 열다>라는 책에 나오는 말입니다. 정확합니다. 식물의 씨앗은 적절한 때가 되어야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회사생활에서도 인생의 경로에서도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시기와 기회를 진득하게 기다릴 수 있는 인내가 필요한 것이지요. 조급하기만 하고, 뒤쳐질 것만 같고, 애도 타고, 억울한데 빨리만 달리려고 하니 어려운 것입니다. 달리기도 등산도 초기 페이스 조절에 실패하면 완주와 완등이 힘들다는 점은 누구나 경험했을 겁니다. 봄이 왔다고 바로 벚꽃을 볼 수 없고, 배롱나무도 뜨거운 여름을 견뎌야만 백일 동안 그 붉음을 유지하는 것이 순리입니다.
확실한 사실은 “기회란 친구는 준비된 사람에게나 기회이지,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는 기회인지 아니면 그냥 스쳐가는 일상인지 알 수가 없다”는 겁니다. 회사 생활은 늘 정신없고 바쁘게 돌아갑니다. 내가 처한 상황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내가 회사의 속도와 흐름에 맞춰가야 합니다. 노력하고 준비하는 사람은 기회나 행운이 찾아왔다는 흐름을 아무리 작아도 감지할 수 있습니다. 노력의 결과는 즉시 다가오진 않더라도 절대 배반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진리입니다. 투입된 노력이 결코 버려지지 않습니다. 씨앗과 같이 언젠가는 껍질을 뚫고 떡잎을 피웁니다. 경험과 역량으로 DNA에 나날이 조금씩 축적되고 있는 것이지요.
한국 경영학의 대가 윤석철 교수가 저서 <삶의 정도>에서 말했던 '사이클로이드 곡선을 활용한 우회축적(roundabout accumulation) 전략’이 그렇습니다. 매(鷹)는 들쥐를 사냥할 때 최단 거리인 직선이 아닌 곡선을 이용합니다. 에너지를 최대한 축적했다가 가장 빠른 속도에서 순간적에 낚아채는 것이지요. 미끄럼틀의 모양이 사이클로이드 곡선인 것도 그렇습니다. 최고의 속도(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반드시 우회축적의 과정이 필요합니다. 우회하면서 역량과 실력을 차근차근 축적하는 거지요. 히딩크 감독이 그렇게도 욕먹으면서도 "훈련 프로그램대로 착실히 진행되고 있다"는 말로 차분히 실력을 축적했습니다. 월드컵 4강 진출의 신화가 그 결과입니다.
'군자불기(君子不器)'는 말은 너무 클리셰 하죠? 사람의 그릇의 크기나 형태가 정해진 바 없습니다. 세숫대야만큼 클 수도 간장 종지만큼 작기도 합니다. 새겨야 할 것은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그릇의 모양을 만들어 나가는 과정이 중요합니다. 강태공이 낚싯대를 드리운 것도, 제갈공명이 유비의 삼고초려를 기다린 것도, 초나라 장왕이 날지도 울지도 않고 3년을 기다렸던 - 三年不飛又不鳴, 삼년불비우불명 - 것도 그렇습니다. <내 삶을 바꾸는 칭찬 한 마디>에서 꽃과 열매의 비유로 마칩니다.
일찍 피는 꽃이 사람의 눈길을 끌지.
그렇지만 선생님이 보니까 아주 일찍 피는 꽃들은 나중에 열매를 맺지 못하더라. 나는 네가 어른들 눈에 보기 좋게 일찍 피는 꽃이 아니라
큰 열매를 맺기 위해 조금 천천히 피는 꽃이라고 생각한다.
(소설가 이순원의 글 중 일부 조정)